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하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안내문
규장각
조선 정조 때 마련된 국립 도서관이자, 세종 때의 집현전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정책과 학술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었다.
검서청
규장각의 부속 건물로 규장각 검서관들의 사무실이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사관을 도와 책을 교정하거나 책 원본을 똑같이 베끼는 일을 하던 관리였다.
창덕궁의 봄꽂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2단의 월대 위에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소박한 모습이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인정전
인정문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인정전 내부
선정문
궁궐의 봄꽂
개나리
상량정
낙선재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서복헌
수강재
매화
홍매화
홍매화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창경궁 통명전
양화당
풍기대
성종대왕태실
춘당지
창경궁 봄꽂
옥천교
명정문
명전전
명전전 일월오봉도
문정전
선인문 회화나무
뒤주속에 갇힌 사도세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듯한 모습으로 있는 회화나무
매화와 명정문
홍화문
창경궁은 남향인 타 궁궐과 달리 동향으로 지어졌습니다.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기 전 홍화문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었고, 1795년(정조 19년)에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이곳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직접 쌀을 나눠주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궁궐은 나라를 다스리는 법전까지 문이 세 개이지만 창경궁은 궁궐이 들어선 자리가 좁은 지형이기 때문에 홍화문에서 법전까지 문이 두 개 밖에 없습니다.
광장시장
광장시장 구근
오늘은 창덕궁과 창경궁입니다. 각 1개 궁만 둘려 보아도 부족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2개궁을 제한된 시간내에 둘려보았습니다. 궁내 봄꽃이 만개는 안 되었지만 많은 상춘객과 어울려 보다 더 화사한 느낌. 창덕궁은 정조와 많은 인연이 있는 반면 창경궁은 성종과 인연이 많이 있었네요. 그리고 일제시대 때 5대 궁궐 중 가장 많이 파괴되었고, 80년대까지 창경궁을 창경원이라 하여 조선을 궁궐을 유원지로 전략시킨 뼈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역사공부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현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코스는 광장시장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마전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