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화학식/성윤석-
1.
저녁이다. 그냥 저녁, 영원한 저녁이다. 해를 따라가서
같이 저물어 버리고 싶은 저녁이다.
굳이 쓰자면,
술은 C2H5OH
산소와 수소가 부둥켜안고 있는 집에 탄소가 와서 같이
엉겨 수소는 5개가 더 늘어나고 탄소는 도플갱어 하나가
더 분리된 이야기.
2.
취하는구나
술은 들어오고, 들어가서
물을 녹이고 기름을 녹이고
내 몸속을 돌아다니는 오토바이 한 대를
서서히 녹이는구나.
급발진하고 싶은 1단 기어
내 썩어 가는 오토바이를 나는
보고만 있구나.
백미러 한 개가 녹고
기름통 뚜껑이 녹고 있구나.
3.
저녁이다. 밤무대마저 거절당한 삼류 가수의
심정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 심경이 폐를 뒤적이며
다시 뒤적이는 저녁이다. 먼저 가서 먼저 울기 위해
새들은 바다로 날아가고,
우와아아 저녁이다. 그냥 저녁. 저녁으로 들어가
저녁에서만 살고 싶은 저녁이다.
4.
한번 들어가자. 애인아. 한번 들어가면
술잔이 계속 늘어나서, 술잔이 계속 늘어서서
되돌아 나올 수도 없고, 나가려 하지도 않는
그런 생의 술집이 있을까마는
술은 아직도 내 몸속에 서 있는
눈사람을 다 녹여 먹고
내가 아닌 술이 사람 되어
우는구나, 나가라, 하지도 않고
더 있을 수도 없는 생의 그런 술집이 있을까마는
내가 아는 먼 마을에 눈이 그치듯
술이 술을 더하고 불러내,
당신의 눈빛마저 다 녹여 먹기 전까지는
애인아. 한번 가자.
네가 다시 눈을 뜨듯 이 저녁 첫 등을 켠
저 술집.
-조껍데기술을 마시다/이상국-
드문드문 눈발이 날리는 저녁, 시인 몇사람이 이장네 식
당에 술 먹으러 갔는데 그 집 암탉 한마리가 연신 머리를
문에 부딪치며 안을 기웃거린다. 기르던 닭 아홉마리를 살
쾡이 족제비가 다 물어가고 저게 혼자 남아 해만 지면 겁이
나서 저런다며
주인여자가 문을 열어주자 얼른 들어와 신발장 위에 올
라가 잠자리를 튼다.
우리가 누구인가,
인간의 일은 물론 천지만물과 우주적 공사에까지 참여하
는 시인 아닌가. 그런 자들이 밤마다 공포에 떠는 저 말 못
하는 짐승의 고통을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공론 끝에 다음날 우리는 그를 푹 곤 백숙을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그이 고통과 슬픔을 나누어 가졌다.
-술 깨는 나날/정병근-
늑대는 어디 가고 개만 남았다
아무라도 붙잡고 싹싹 빌고 싶다
죄죄 벌벌,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기고 싶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었으니
나는 자책 전문가
잔고가 바닥난 말의 집에
불행한 예언들이 기웃거리고
시시한 잠언들이 벨을 누른다
믿지 않을 테니 그만 돌아가시오
정신의 테두리가 초끈처럼 진동한다
흉흉(凶凶)과 분분(紛紛)이 콩 튀듯이 튄다
누가 나를 다스려다오
쥐어박으며 다그쳐다오
조목조목 나를 짚어다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말의 빈집에 침묵이 찰 때까지
-사발술 반 잔/이재무-
아부지가 마시다 남긴 사발술 반 잔
윗목 한쪽에 쭈그려 앉아
목마른 것들 조용히 부르고 있다
맨 먼저, 왼종일 보리밥 빨다
입 안이 껄끄러운 듯 파리란 놈이
목을 축이고 촉수 낮은 형광등 냉큼 내려와
잠들기 전 한 잔 해야겠다고
천천히 깊게 갈증 달래고
앞산을 넘어왔더니 목이 탄다고
달빛까지 맨발로 걸어들어와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아무리 마셔도 줄지 않는 술이여
오늘따라 아부지의 곤한 숨소리
징소리 북소리로 들리는 것은
밥 사발에 가득 뜨는 아부지의 생애
내, 보는 듯
읽는 듯해서인가
-밥과 술/최영철-
허기져 허겁지겁 쑤셔넣는 밥 한 덩이
그리워 들이키는 술 한 자락
밥은 꼬박꼬박 들어오는 봉급 같아서
곳간에 차곡차곡 쟁여두는 것
술은 빈속에 찔러주는 용채 같아서
이게 웬 횡재인가 벌컥벌컥 한달음에 탕진하는 것
밥은 불끈 솟는 힘이요 술은 흐드러지는 흥이니
밥은 종종걸음이요 술은 지그재그 팔자걸음이라
밥을 뛰쳐나와 멀리서 손사래쳐야 술
나 몰라라 한동안 내버려둬야 술
밥이 안 되면 박박 바가지나 긁힐 일이지만
술이 안 되면 무흥무취의 청맹과니
밥은 십 리를 가게 하지만
술은 붕붕 날아 백 리 천 리도 가게 하는 것
밥이 보고프면 배 하나 고달프지만
술이 보고프면 천심만신이 고달픈 것
술을 기다리면 술술 흘러 들어오지만
밥은 부지런히 내달려 거머쥐는 것
그게 무어라고 구박만 심해진 술
그래도 마냥 좋아 노래만 흥얼흥얼
똑같은 쌀로 출발했으나
천지간에 다른 길을 가게 된
밥은 기다리면 술이 되지만
술은 영영 밥이 될 수 없어라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어 끄적거린
술 그림자 시
-술의 노래-七部의 사랑/김왕노-
지금은 압니다. 당신이 내게 다소곳이 술잔을 채울 때
당신이 따라주는 것이 당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가슴에 바다보다 더 넓고 깊은 사랑이 있으나
그 사랑 넘치지 않게 알맞게 채워준다는 것도 압니다.
한꺼번에 당신의 사랑을 내게 준다면 그 사랑 잔마다 넘쳐
세상에 큰물 지고 나마저 사랑에 휩쓸려가 버릴 것입니다.
사랑 한 방울만 더 따르면 넘치고 마는 넘칠 듯 말 듯한
그런 위태한 사랑이 아니라 칠 부 정도 채워주는 사랑
가득 채워주지 않으므로 마실수록 더 그리워지는 사랑
그런 사랑에 취한 우리 늦은 노래가 세월의 노래가 됩니다.
당신이 내 잔에 조심스레 따라주는 맑은 소주가
당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인 줄도 압니다.
당신의 끓어오른 영혼으로 방울방울 얻은 사랑
티 하나 없고 어둠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증류된 사랑
소중한 그 사랑을 내게 따라주는 당신의 눈부신 손
지나치게 채워질까 조용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당신의 사랑이 술로 올 때 함께 온다는 것도 압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칠 부로 채워지는 당신의 사랑
망설임 없이 단숨에 당신의 사랑을 마시라는 뜻
단숨이나 영원히 당신에 취하라는 당신의 뜻도 압니다.
당신이 빈 내 잔에 칠 부로 따르는 단숨의 사랑
단숨의 사랑에 취하여 당신을 끝없이 불러봅니다. 당신
-술의 미학/김밝은-
가끔 심장이 시큰둥해지는 날
곱게 부순 달빛가루에 달콤한 유혹의 혀를 잘 섞은
목신 판의 술잔을 받는다
찰나의 눈빛에 취해 비밀의 말들을 너무 많이 마셨나
날을 세운 은빛 시선이 애꿎은 꽃잎만 잘라내고 있다
물구나무서던 시간들이
절룩거리는 기억을 붙잡고 일어서고
살 속에 섞인 위험한 말들 잠들지 못해
서로 흔들리고, 깨어지기도 하면
옆구리를 내어주며 쨍쨍 부딪치던 건배의 얼굴이
늑골 어딘가에 콕콕 박혀 가쁜 숨을 몰아쉰다
끝내 토해내지 못해
상처 난 이름으로 가슴 울렁거리고
손가락만 흔들어도
열꽃처럼 번져가는 뜨거운 노래들로
바람 속 영혼들처럼 마음 흩날리는 날*
사랑이 사랑으로도 치유되지 않아
벌거벗은 혀들이
술잔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 인디언 달력에서 1월을 뜻하는 말 중 ‘바람 속 영혼들처럼 눈이 흩날리는 달’에서 따옴.
-흘린 술이 반이다/이혜선-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그날 술자리의 화두는
'흘린 술이 반이다'
연속극 보며 훌쩍이는 내 눈, 턱 밑에 와서
“우리 애기 또 우네” 일삼아 놀리던 그이
요즘 들어 누가 슬픈 얘기만 해도
그이가 먼저 눈물 그렁그렁
오늘도 퇴근길에 라디오 들으며 한참 울다가 서둘러 왔다는 그이
새끼제비 날아간 저녁밥상, 희끗한 머리칼
둘이 서로 측은히 건네다 본다
흘린 술이 반이기 때문일까
아직 함께 마셔야 할 술이
술병에 반쯤 남았다고 믿고 싶은 눈빛일까
안 보이는 술병 속에.
-닮은꼴이다 술과 목련은/김찬옥-
술이 만개한다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가 되어
준비운동도 없이 문 밖 세상으로
곧잘 넘나들이를 한다
내 키보다 높이 뛰어 오르다
낯선 바람 끝에 부딪혀
제 빛을 잃고 돌아선 목련 꽃잎이 된다
몸이 발그레 물오른다
규격이 꼭 맞는 마음도
삐걱대는 나사 같은 사랑도
수면 위에 기포를 만들며
동글동글 둥글둥글 원형이 된다
후미진 곳에 맺힌 망울들도
풀어진 빛에 껍질을 벗어내리고
하얀 목련송이로 툭툭 터지는
만개한 꽃이 된다
접었던 마음을 펼쳐보인 곳은
기워 넣은 흠집이 더욱 아름답다
끊어진 곳도 고리를 끼어
술_____술 새로운 길이 열린다
-화룡에서 흰술을/박태일-
화룡시장 식당가
낮은 탕집
두 집안 젊은이가 선을 본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사이 앉히고
어미 없이 큰 듯한 딸은 고개 숙여 탕을 뜬다
아버지는 사위가 될지 모를 그 아들
맥주 첫 잔이 즐겁다 어머니는
앞자리 딸이 며느리로 좋이 차는 듯
젓가락질 가볍다 두 집안은 몇 대째
화룡에서 연길에서 모른 듯 살아왔겠지만
앞으론 연길 한 공원묘지에서 만날 일을 꿈꾸는지 모른다
세 병째 맥주가 비고 웃음이 길어져
딸의 동생까지 와 늦은 인사를 올린다
선 자리가 혼삿날 같다 그 어머니는 양탕을 더 시키고
딸은 부끄러움을 젓가락처럼 쥐고 앉았다
딸 손등으로 아들 눈길이 자주 얹힌다
고추 장아찌에 절임김치 차림이지만
포기포기 달리아 꽃자리
화룡도 인천 허씨일 듯한 아들네와
은진 송씨일 듯한 딸네 혼삿날은
돌아오는 시월일까 이제 두 집안은
화룡 연길 한길처럼 죽 곧을 것인가
그 아들과 딸은 백두산 어느 들목
산양삼에 석이를 키우고 집안 처마 밑을
재갈재갈 삼꽃 아이들이 오갈 것인가
화룡시장 식당가
낮은 탕집
향초 그윽한 개탕을 비우며 나는
흰술 벌써 두 잔째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권순진-
세상에서 가장 맛 나는 술은
로얄살루트 50년산 위스키도
샤또 페트리우스 특등급 와인도
그렇다고 무조건 하산 길 막걸리 한 사발이나
갸우뚱하다보면 나오게 되어 있는 입술
배시시 웃음 짓는 유두주
치사한 공술 따위는 더더욱 아닌
좋은 술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
청탁 안주 장소 불문 진실로 맛 좋은 술
좋은 술친구란
이야기 안주의 경계와 문턱이 없는
마른명태처럼 쫙쫙 찢어지는
정치판 육담 넘나들다
가족사에 짐짓 진지한 척 귀기울이다말고
문학 동네와 예술판을 휘저어 다니다가
데카르트와 앨빈 토플러를 넘보아도
도무지 어색하지 않은
아무 말이나 섞어 지껄여도
격이 떨어지지 않는
이를테면 광화문 뒷골목 대폿집에서
양반 탈 웃음을 달고 다니는
허홍구 시인과 마시는 참이슬 같은 술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술에 대한 단상/김 완-
취함과 광기의 경계에서 문학은 태어난다고
술 깬 다음날 자위하고는 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다가 이마와 입술을 베였다
그게 다 사람 좋아하는 내 탓이었다
세상 모두 나를 좋아하면 잘못 산 것일 터
남은 생 좋은 이들과 함께할 시간도 부족하잖나
술이 한 겹 마취된 얇은 의식을 벗겨 내면
똬리를 틀고 있는 수많은 욕망과 허상들
항상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잖나
밖을 못 보는 우물 안 개구리 되지는 않기로 했다
잎이 무성한 나무가 마침내 하늘을 가리는 법
한 줌이라도 이 땅에 그늘을 만들기로 했다
이순을 한 해 앞둔 새해 첫 산행에서
술에도 ‘과유불급’이라는 말 귀중하다는 것 깨달았다
-귀밝이 술/신순임-
전화로 묵세배 드리는데 도통 못 알아봐
엄마 바꿔달라니
“누군 동 엄마 찾네” 하시어
한 바탕 웃음으로 수다 이어가노라니
오도 가도 못한 묵세배
흉보는 말은 제꺽 알아들으신다며
귀청 가득 지청구 쏟아
나이 한 살 부조하는데
심정 상한 밭어버이
독한 소주로 속 풀어내신다니
평생 드신 이명주(耳明酒)
너무 과해 귀 멀었던가
귀 밝아라, 눈 밝아라
덕담 없이 홀로 드셔 그런가
초롱같은 정신 보면 영 효험 없는 것 아니라
돌아오는 대보름엔 따뜻한 청주 꼭 올려야겠네
-술에 취한 사람 부축하기/이병률-
술만 마시면 아는 것이 많아지는 사람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얼굴을 가까이 대야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
어쩌면 전생에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싶게
여러 겹이 느껴지는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힘겨운 사람
우리는 모르는 게 많으니
전생에 대해선 더더욱 알 수가 없다
전생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가 이토록 모르는 게 많은지도
술을 마시면 생의 끝물인 것처럼 피어나는 이 사람
하지만 자정 무렵이면 과감히 시들고 마는 사람
하지만 끝물이라는 말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러나 시든 사람은 또 얼마나 무거운가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를 모르는 한 사람과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한 사람은
서로의 끝을 위해서라도 뭉쳐 있어야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부축하면
두 사람은 인간이 된다는 걸 아직은 모른다
이른 아침 부축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여태껏 사용한 적 없어 열지 않았던 창문을 연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엔
그 창문 바깥으로 야자수를 몇 그루 거느린 파란 바다가
전용 풍경처럼 가까이 펼쳐져 있는 법
지난밤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침일수록
스스로를 포개고 겹쳐서라도 살아가는 법
-술을 뿌리다/전동균-
강풍 몰아치는 상왕봉
능선의 관목들
달아나듯 옆으로, 옆으로만 뻗은 가지마다
마른 이파리들 그대로 매달려 있음
잎맥이 선명한, 앞뒷면이 똑같은
얼음 코팅 이파리들
얼마나 아팠는지
아픈 내색 하나 없음
죽어서도 살아 있음
독한 것!
누군가 술을 뿌렸습니다
허리에 복대 차고 발 질질 끌며 올라온 초로의 산꾼이
허벅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액을 쫓듯
절을 올리듯
석잔이나
-술ᆞ2 /나병춘-
술은
물과 불의 비무장지대
서로 다투는 물과 불에게
중매쟁이 되어 달래는 건
술의 몫이다
물 불 가리지 않는
술의 괴력을 알고도 모르는 척
먹장 구름은 새털 양떼가 되어
개마고원 바이칼호수로
먼 태평양이나 시베리아로 사라지고
불은 불대로 태풍을 일으키며
들끓는 짐승을 잠재운다
저 백두 천지와 한라 백록은
언제쯤 하나가 되어
으스러지게 포옹할까
함께 만나
금강주 한라주로
밤새도록 한잔 꺾세나
세월 모르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비빔밥 맛나게 버무려지듯
술술술 저절로 풀려
천하통일도
언젠가는 풀리겠지
열려라 참깨!
-봉평 메밀꽃잎 술/이성자-
꽃신 신고 온 애(噯)
물에 잠긴 애(噯)
그 애(噯) 좀 주세요
슬픔이 차오른 눈가 짓눌러도
붉은 그대 기운 가시지 않아
그 아이 톡 쏘는 향기라도
맡고 싶은 달 뜬 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화수분처럼
왈칵 솟아나는 입추에
가산이 노래하던 봉평 메밀꽃잎
달빛에 소금같이 피어나면
그 꽃잎 따다가 담근
꽃술이 고픈 별 뜬 밤
한 빙에서 건져 올린
초유 같은 꽃잎 술
잘 익은 백김치 내어와
오장육부 붉은 기둥 따뜻이 데울
평상에서 별과 함께
호젓이 마실 술이에요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