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호 교수는 지방대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김 교수는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고등학교 친구들인데 모두 4명이다. 김 교수를 포함해 K씨, M씨, P씨가 그들이다. 그래서 이름도 4인회로 지었다. 김 교수는 지방대에서 헌법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K는 신문사 주필, M은 소설가, P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회장은 돌아가면서 하는데 현재는 김 교수가 맡고 있다. 이번 달 모임은 J시에서 있었다. J시는 해양 도시로 생선회가 유명하다. 장소를 그곳으로 정한 사람은 김 교수였는데 얼마 전에 이곳에서 동료 교수들과 먹었던 도다리 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횟집은 허름했고 슬레이트지붕이었다. 마치 찌그러진 성냥갑 같았다. 겉모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실내도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벽지가 여기저기 훼손되었고 방바닥이 울퉁불퉁했다. 거기에다 지붕까지 낮아서 K씨처럼 키가 큰 사람은 머리를 각별히 조심해야했다. 철길과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 기차라도 지나갈 때면 술잔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은 것은 순전히 맛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주방장의 회를 써는 솜씨가 아주 탁월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무채보다도 잘게 썰린 도다리 회가 입에 살살 녹았다. 김 교수는 이가 약했다. 웬만한 뼈는 씹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곳 횟집은 먹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아주 잘게 썰었다. 허름한 건물만 보고 실망했던 친구들도 맛을 보고나서는 매우 흡족해했다.
김 교수는 회를 먹을 때 초장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싱싱한 회를 더욱 맛있게 먹기 위해서였다. 김 교수의 초장 만드는 법은 이렇다. 먼저 작은 종지에다 된장을 담았다. 그곳에 참기름과 고추냉이(일본말로 와사비)와 땡초 다진 것을 넣었다. 그런 다음 일반 초장을 섞었다. 이렇게 만든 초장은 맛이 각별했다. 된장의 개운함과 참기름의 고소함과 고추냉이와 땡초의 톡톡 쏘는 것이 회 맛을 한층 더해줬다.
오늘도 김 교수는 그렇게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먹으니 술술 술이 잘 넘어갔다. 오이소주를 담은 주전자가 금방 동이 났다. 다시 주전자에 소주 2병을 더 부었다. 60을 눈앞에 둔 중늙은이들이 하는 얘기란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노후 걱정, 자녀 걱정, 건강 걱정 등이 주를 이루었다. 오늘이 여느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정치 얘기가 조금 길어졌다는 것이다. NLL대화록, 국정원댓글사건, 통합진보당해산사건… 정치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정치 얘기가 길어진 것이다. 정치전문기자로 잔뼈가 굵은 K씨가 야당의 무력감을 걱정했다. 야권이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전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K씨는 특히 안철수 신당에 주목했다. 신당이 생기면 야권표가 민주당과 신당으로 분산될 것이고 결국 야당은 참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수정권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 것이고 어느 순간 박정희 식 독재정치가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거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K씨는 지금이야말로 야권의 대동단결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안철수가 대통령을 하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든 민주당과 합쳐야 해. 신당 등 독자세력화를 꾀한다면 희망이 없어. 한번 갈라서면 합치기란 무척 어려운 거지."
K씨가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야당이 절반에 가까운 의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던 유신시대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여당의석이 압도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유신헌법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구였다.「조국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을 표방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후보자격에는 정당원은 참여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국민의 직접선출로 이루어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 야당이 간여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관권이 자의로 선거를 조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 선거와 정수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자로 선출했다. 여기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따로 유신동우회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이념을 수행하는 전위대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중요 통일정책의 심의와 국회가 발의한 개헌안의 의결 · 확정권을 가졌다. 72년 12월 15일 실시된 제1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통해 당선된 2,359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23일 첫 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 후보를 선출한 이래, 관제기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해 해체되었다. K씨는 그런 시대가 다시 도래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었고 마음만 먹으면 합법적으로 영구집권을 할 수가 있었던 거야. 그런데 말이지. 자칫 그런 시대가 다시 올 수도 있다는 거야. 다음 총선에서 여당이 의석의 2/3를 차지해서 헌법을 개정하면 되는 것이지. 문제는 말이야. 이렇게 야권이 분열하면 여당의 2/3 의석도 어렵지를 않다는 거지."
돌아올 때도 갈 때처럼 택시를 이용했다. J시에서 그들이 사는 곳까지는 1시간 남짓 걸렸다. 모두들 술기운에 젖어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나이가 제법 들어보였다. 김 교수보다 두어 살 가량 많아 보였다. 무료함 때문이었을까, 김 교수 일행이 택시기사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때마다 택시기사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J시가 말이지요. 인구가 늘지 않아요. 1983년하고 별 차이가 없어요.”
택시기사가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며 말했다. 한결 시원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뭐 다른 재미난 얘기가 없을까? 김 교수는 속으로 택시기사가 재미난 얘기를 해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아마도 그런 바람은 김 교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친구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침묵처럼 사람을 따분하게 하는 건 따로 없었다. 요즘처럼 정치가 어수선할 때는 더욱 그랬다. 택시기사는 김 교수 일행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손님들, 탑산 알지요?"
"J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지요. 제가 어릴 적에 탑산 바로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소설가인 M씨가 말했다. M씨는 중앙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다할 작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문인협회회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1979년 이곳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으로 군부대에 끌려가 심하게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택시기사가 말했다.
"선생님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군사정권시절에는 그곳에 보안대 요원이 사진 기사로 위장해서 시민들을 감시했어요.”
“그래요? 탑산은 공원이잖아요. J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서 그랬나?”
“그렇지요. 누가 군사시설을 촬영하지 않나 해서지요. 그런데 웃지 못 할 사건이 일어났어요.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젊은 사람이 우산을 쓰고 탑산에 올랐어요. 그런데 재수 없게도 우산에서 물방울이 튕겨 게시판에 붙어 있는 박정희 대통령 얼굴에 묻은 거예요. 그걸 보고 보안대 요원이 젊은이를 부대로 끌고 갔지요.”
“세상에, 물 한 방울 튕겼다고…”
“부대로 끌려간 젊은이는 엄청 얻어맞았어요. 불어라, 사상이 어느 쪽이냐? 남쪽이냐, 북쪽이냐? 매질은 계속 되었어요. 젊은이는 거의 초죽음이 되었고요.”
“저런, 저런. 선량한 시민을 빨갱이로 몰려는 것 아니요?”
“그런데 있지요. 젊은이는 이 말만 하는 거예요. ‘사상이 아니라 구포예요’라고 말입니다.”
“구포?”
“부산에 ‘사상’이란 곳이 있지요. 사상 바로 밑에 ‘구포’가 있습니다. 젊은이의 고향이 구포였답니다. 그래서 자꾸만 ‘구포’라는 말만 했던 겁니다. 아마도 정신이 혼미해서 그렇겠지요.”
택시기사는 이밖에도 여러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었다. 모두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김 교수와 그의 친구들도 박정희 시대에 소년기를 보냈다. 그래서인지 택시기사의 이야기가 실감 있게 들렸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전부 사실인지 어떤지는 김 교수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살았던 김 교수로서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M씨가 씁쓸하게 웃었다.
“탑산의 비화라? 그런 게 있었나요? 옛날 우리 집 마루에 앉으면 탑산이 정면으로 보였어요. 반대로 생각하면 그쪽에서도 우리 집을 감시했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어릴 적에 친구들끼리 한 얘기가 있어요. 탑산 맨 꼭대기는 아무나 못 간다면서 거기 뭐가 있다더라, 라는 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K씨도 한 마디 거들었다.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북한 여성 응원단이 김정일 현수막이 비를 맞는다며 울고불고 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예천-안동 간 34번 국도 진호국제양궁장 진입로였습니다. 북한 응원단이 탄 버스가 현수막이 걸려있는 곳에서 500m나 지나쳐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선 겁니다. 모두들 달리기 시합을 하듯 500미터를 뛰어가 현수막을 떼어 냈대요. 그걸 보고 남쪽 사람들이 뭐랬어요. 광신도니 미친년들이 난리를 쳤었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박정희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박정희나 정부를 욕했다가 끌려가서 고초를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이었지요.”
택시기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말입니다. 다시 그런 시대로 회귀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손○○ 같은 사람은 '아직도 5·16과 유신을 폄훼하는 소리에 각하의 심기가 조금은 불편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태산 같은 각하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말하지를 않나, 새누리당 심○○ 의원은 10월 26일 추도사에서 '아버지 대통령 각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4년이 됐다. 아버지의 딸이 이 나라 대통령이 됐다'라고 말하지를 않나, 김○○ 경북도지사는 '박 전 대통령이 구국의 결단을 할 때 나는 교사여서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 대단한 어른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하지를 않나….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숭배와 뭐가 달라요."
택시기사가 열변을 토했다.
"그거 참…."
이번에는 김 교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박정희 통치기간에 김 교수는 초중고와 대학을 다녔다.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다. 5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도 김 교수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술술 외우고 있다. 그걸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도 않았다. 독재정권을 정당화시킨다는 논란으로 1994년에 사실상 폐지될 때까지 국민교육헌장은 누구나 필수적으로 외워야했다. 1974년이었다. 육영수 여사가 저격을 당했을 때 온 국민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마치 김일성이 죽었을 때의 북한 주민들과 흡사했다. 김 교수가 기억하기로 당시 대한민국은 병영 국가였다. 어디 하나 군사문화가 침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길을 가다가도 국기 하강식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멈추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불러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혹을 치른 사람도 종종 있었다.
"김 교수, 박정희 시대 때의 긴급조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K씨가 김 교수에게 물었다.
"긴급조치? 기자인 자네가 오히려 나보다 잘 알 거 아닌가. 나야 책상물림 아닌가."
"그래도 자네는 헌법학자 아닌가. 그와 관련된 논문까지 썼고 말이야. 더군다나 자네는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일했으니 누구보다도 당시의 상황을 잘 알 것 아닌가."
"허허, 사람도 참…."
김 교수는 마지못해 긴급조치는 9호까지 나왔다며 조문 위주로 설명했다.
긴급조치(緊急措置)는 1972년 개헌된 대한민국의 유신 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를 말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이 조치를 발동함으로써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는 역대 대한민국 헌법 가운데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권한을 위임했던 긴급권으로, 박정희는 이를 총 9차례 공포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신군부의 주도로 1980년 10월 27일 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긴급조치 제1호
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②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③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④ 전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⑤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⑥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⑦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제2호
0. 긴급조치를 위반한 자를 처벌하는 비상군법회의 설치
0. 중앙정보부 부장이 사건의 정보, 조사, 보안업무를 조정, 감독
긴급조치 제3호〈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저소득층의 조세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근로소득세, 주민세 등의 면제 또는 대폭 경감, 국민복지 연금제도 실시의 보류, 통행세 감면, 미곡수매가 소급 인상, 영세민 취로사업지 확보, 중소상공업자에 대한 특별저리융자, 임금체불 등 부당노동행위 가중처벌, 재산세 면세점 인상 및 사치성 품목에 대한 조세중과, 공무원 임금인상의 조기실시, 쌀 연탄 가격의 안정, 비생산적 대출 억제 등
긴급조치 제4호
1974년 4월 3일 오후 10시 청와대에서 열림 임시국무회의에서 이봉성 법무부 장관의 제안으로 심의, 의결되었다. 같은 해, 8월 23일, 오전 10시를 기해 긴급조치 1,4호는 해제되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제한 임시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해제를 의결하였지만, 이 시기 재판에 계류 중이나, 처벌 받은 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고 밝혔다.
긴급조치 제5호
1. 긴급조치 제1호와 동 제4호를 해제한다.
2. 해제당시,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또는 동 제4호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그 사건이 재판 계속 중에 있거나 처벌을 받은 자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3. 이 조치는 1974년 8월 23일 10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제6호
1. 긴급조치 제3호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긴급조치」를 해제한다.
2. 해제당시 대통령긴급조치 제3호의 적용을 이미 받았거나 받을 사항에 대하여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며 그에 관한 사항의 처리는 종전의 예에 의한다.
3. 해제당시 대통령긴급조치 제3호에 의하여 부과하였거나 부과할, 또는 감면하였거나 감면할 제세에 관하여는 종전의 예에 의한다.
4. 해제당시 대통령긴급조치 제3호에 위반한 행위에 대한 벌칙의 적용과 그 재판관할에 있어서는 종전의 예에 의한다.
5. 이 조치는 1975년 1월 1일 0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제7호
1. 1975년 4월 8일 17시를 기하여 고려대학교에 대하여 휴교를 명한다.
2. 동교내에서 일체의 집회, 시위를 금한다.
3. 위 제1,2호를 위반한 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4. 국방부장관은 필요하다고 인정한 때에 병력을 사용하여 동교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일반법원에서 관할심판한다.
7. 이 조치는 1975년 4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제8호
대통령긴급조치 제7호를 해제한다.
긴급조치 제9호
①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예외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② 제1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③ 재산을 도피시킬 목적으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국외에 이동하거나 국내에 반입될 재산을 국외에 은닉 또는 처분하는 행위를 금한다.
④ 관계 서류의 허위 기재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 이주의 허가를 받거나 국외에 도피하는 행위를 금한다.
⑤ 주무부장관은 이 조치 위반자·범행 당시의 그 소속 학교·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명령이나 조치를 할 수 있다.
가. 대표자나 장에 대한, 소속 임직원·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명령
나. 대표자나 장·소속 임직원·교직원이나 학생의 해임 또는 제적의 조치
다. 방송·보도·제작·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 조치
라.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
마. 승인·등록·인가·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 조치
⑥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이 조치에 저촉되더라도 처벌되지 아니한다. 다만 그 발언을 방송·보도·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한 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
⑦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
⑧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
⑨ 이 조치 시행 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뇌물죄의 가중처벌)의 죄를 범한 공무원이나 정부관리·기업체의 간부직원 또는 동법 제5조(국고손실)의 죄를 범한 회계관계직원 등에 대하여는, 동법 각조에 정한 형에, 수뢰액 또는 국고손실액의 1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병과한다.
⑩ 이 조치 위반의 죄는 일반법원에서 심판한다.
⑪ 이 조치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주무부장관이 정한다.
⑫ 국방부 장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다.
⑬ 이 조치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⑭ 이 조치는 1975년 5월 13일 15시부터 시행한다.
김 교수의 설명을 듣고는 M씨가 분개했다.
"세상에 그렇게 악랄한 법이 어디 있어.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김 교수가 말했다.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이었어.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를 보면 말이지. 1140명이 연루된 긴급조치 위반 사건 가운데 일반 시민이나 교사, 학생, 종교인 등이 술집이나 거리, 학교, 교회 등에서 정권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다 처벌받은 경우가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282건(48%)이었어. 그만큼 남용되었다는 거지. 1974년 1월 이웃에게 '현 정부가 부정부패해서 공화당과 박 정권이 망한다'고 말한 무직자 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7년이 확정됐고, 같은 해 5월 이웃에게 '박정희가 여순반란 때 부두목으로 가담했는데 운이 좋아 대통령까지 됐다'고 말한 농민 박아무개씨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어."
그러면서 김 교수는 어느 일간지에 실린 피해자들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1. 정부 비판 몇 마디에 징역살이
그는 양토업자였다. 토끼 팔아 아들 둘과 아내를 건사했다. 1974년 6월7일 오후, 경기도 평택의 오종상(당시 33살)씨 집에 점퍼 입은 남자 2명이 들이닥쳤다. ‘본부’에서 나왔다는 그들은 경기도 수원으로 가자며 오씨를 차에 태웠다. 오씨는 겉옷도 못 걸친 러닝셔츠 바람이었다. 중앙정보부 수원지부를 거쳐 그날 저녁 오씨가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중앙정보부였다.
취조가 시작됐다. 수사관들은 다짜고짜 “지난 5월17일과 22일 정부 시책을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하지 않았느냐”며 오씨를 ‘빨갱이’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빨갱이라는 말에 숨통이 조여왔다. 기억을 더듬었다. 읍내 가던 버스에서 여고생들에게 건넨 얘기가 떠올랐다. 반공·근면·수출증대가 주제인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학생들에게 오씨가 한 말은 이랬다. “수출증대가 뭔지 아나. 선량한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일이다. 정부가 분식을 장려하는데 정부 고관과 부유층은 분식이랍시고 국수 약간에다 달걀과 고기를 듬뿍 넣어 먹는다. 민주주의 못하는 유신체제 아래서 가난하게 사느니, 이북하고 통일을 해서라도 잘사는 게 낫다.”
오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긴급조치 1호(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및 반공법 위반(북한 찬양)이었다. 밤낮없는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혐의를 인정해야 끝날 기세였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말을 학생들에게 했는지 집중적으로 물었다. 부인할 때마다 여지없이 각목이 날아들었다. 매질은 팔과 등, 머리를 가리지 않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기절을 했는데, 여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들어와 주사를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 혐의를 부인할 때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이틀 동안 몇 시간도 못 잤을 것이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오씨에겐 당시 상황을 복기하는 게 여전히 버거워 보였다. 일주일 뒤 오씨는 구치소로 이감됐다. 1974년 7월 기소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은 오씨는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197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형을 확정받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오씨의 절규에 어느 판사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사법부는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1977년 7월 오종상씨가 전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을 때, 단란했던 가정은 풍비박산 나 있었다. 경찰에 시달려온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도리 없이 도장을 찍었다. 아들 둘은 여동생이 거둬 길렀다. 이런 탓에 오씨는 지금도 아들들과 눈을 맞추지 못한다. 고문의 후유증도 오래갔다. 지금도 허리디스크와 위장병을 달고 산다. 오씨는 요즘 뉴스를 볼 때면 숨이 막힌다. “누구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이 신세가 됐는지를 생각하면, 그 딸이 대통령이 되면 울화병이 나서 죽을 것 같다. 젊거나 돈이라도 있다면 이민이라도 가지. 하지만 그게 내게 가당키나 한가.”
2. 딸이 간첩이라는 말 듣고 충격에 죽은 엄마
범부의 삶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유신체제가, 굴종을 거부하는 이들에겐 오죽 사나웠을까. 청계피복노조 부지부장으로 유신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던 신순애(59)씨에게도 그 시절은 모질도록 잔인한 세월이었다. 1977년 9월 신씨는 노조원들과 함께 당시 노동교실이 입주해 있던 서울 을지로의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된서리를 맞았다. 경찰의 압력을 받은 건물주가 노동교실의 퇴거를 요구하며 공권력을 요청하자 홧김에 실랑이를 벌이다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것이다.
서울 중부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데, 경찰이 들이민 혐의 내용이 기가 막혔다. “건물주가 요구한 퇴거 시한이 9월10일이라 하루 전에 시위를 한 것인데, 경찰은 북한의 건국일인 ‘9·9절’에 맞춘 것이라며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장씨 성을 가진 정보과 계장이 얼마나 거칠게 손찌검을 했는지, 지금도 그때 맞은 왼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신씨는 호소했다.
당시 신씨가 믿을 것이라곤 판사들뿐이었다. 그래도 법관들은 배우고 양심적인 사람이니 경찰과 달리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법대 위의 판사가 물었다. “왜 9월9일이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 아니오?” 맥이 풀렸다. 원통했다. 남은 힘을 모아 절규를 쏟아냈다. “우리가 가장 무서운 게 빨갱이요. 판사님까지 우릴 빨갱이로 모는 거요?”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집행유예 5년을 받고 11개월 만에 출소했다. 하지만 직장에는 돌아갈 그의 자리가 없었다. 다른 공장에도 블랙리스트가 돌아 취업 자체가 불가능했다.
노조에 나가면 중부서 형사들이, 이문동 집에 가면 동대문서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견딜 수 없어 이사를 가면 형사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오빠가 말했다. “동네 사람들 보기 그렇다. 노조일 접어라.”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 몸을 불사른 전태일도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결국 어머니만 모시고 집을 나왔다.
1978년 겨울, 하루는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경찰에게서 신씨가 간첩이란 얘기를 들은 집주인이 방을 빼라며 모진 말을 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통곡했다. “네가 왜 간첩이냐.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달을 겪은 뒤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이듬해 봄 세상을 떠났다.
1980년 청계피복노조가 강제 해산된 뒤 지인들의 도움으로 청소년 상담사 일을 시작했다. 생활도 차츰 안정이 됐다. 2006년엔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해 만학의 열정을 불태웠다. 지난 6월 성공회대에서 ‘13살 여공의 삶’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신씨는 “돌이켜보면 과도한 진학열과 학력주의, 노동 천시 풍조 같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이 박정희 시대의 속도전식 산업화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며 “이제는 너무 확고히 뿌리내려 어디서부터 손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같다”고 했다.
3. 통속소설 속 군 비판 내용으로 고초
유신시대에 고초를 겪은 모든 이가 박정희의 비판자가 된 것은 아니다. 출판인 송성헌(67·도서출판 청조사 대표)씨가 그런 경우다. 송씨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쇠창살 너머로 바라보았던 그날의 하늘빛을 잊지 못한다. 서울 을지로의 출판사로 찾아온 기관원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연행된 직후였다. “서울에 살면서 그렇게 푸르고 투명한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바깥 세계였으니, 그 느낌이 어땠겠나.”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고 5개월이 지난 1975년 10월의 일이었다. 편집자로 일하다 막 독립한 초보 출판인 송씨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 한시바삐 회사를 본궤도에 올려놓는 게 급선무였던 까닭이다. 지인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에야 필화에 연루돼 고초를 겪는 업계 사람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정도였다.
“불안했다. 연행되는 차 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될 책은 낸 게 없었으니까.” 궁금증은 조사실에 들어가서야 풀렸다. 그해 펴낸 소설책 한 대목에서 군에 간 주인공이 군대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게 기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이념소설도 아니고 연애담을 다룬 통속소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책은 내가 기획한 것도 아니고, 다른 데서 낸 것을 중개업자한테 인쇄 원판만 사들여 찍어낸 것이었다.”
사정을 잘 설명하면 곧 풀려날 것이라고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파출소 한번 가본 적 없는 그가 밀실 수사의 공포를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방에서 조사받던 중개업자는 겁에 질린 탓인지 평소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고,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거칠게 귓방망이를 올려붙였다. 옆방에선 수시로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송성헌’을 수십 번씩 되뇌며 정황을 조리 있게 설명하려 애썼다. ‘껀수’가 안 된다고 판단했을까. 조서를 꾸미던 수사관 얼굴에 ‘김샜다’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얼마 뒤 상급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조서를 훑더니 서류 뭉치를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임마, 앞으로 조심해.”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찾아왔다.
풀려나와 집에 가니 통금 직전이었다. 연행 13시간 만이었다. 끌려간 곳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란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트라우마는 오래갔다. “원고를 볼 때마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4년 뒤 박정희가 죽었다. 그사이 출판사는 자리를 잡았다. <뿌리> <오싱> 같은 번역소설이 히트를 쳐 1980년대 중반엔 번듯한 사옥도 지어올렸다. 박정희에 대한 증오도 누그러들었다.
“그 뒤로 정권 잡은 사람들을 보니, 그래도 박정희는 괜찮은 사람이었더라. 애국심 하나는 투철했고, 무엇보다 청렴하지 않았나.” 그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경제살리기가 우선이란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물론 실망이 크다. 그럼에도 송씨는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경제가 어렵잖나. 다시 도약해야지. 유신을 선포하고 민주인사를 탄압한 건 잘못했지만, 박정희 시대가 우리한테 심어준 게 ‘잘살아보자’ ‘하면 된다’는 마인드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게 그런 근면성과 자신감이다.”
4. ‘새마을회’란 이름 탓에 사찰받기도
실향민 출신의 새마을지도자 전영훈(78)씨도 ‘하면 된다’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동(당시 부천군 대부면 선감도)에 학교를 세우고 농토를 개간하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4년 7월 박정희로부터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받았다. “수출은 안 되는데, 공장엔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박정희가 강조한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뭉쳐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지도자들 책임이 막중하다.”
그가 마을에 학교를 연 것은 군에서 전역한 직후인 1958년이다. 마을 사람들이 해변에 떠밀려온 깡통 속 윤활유를 된장국에 풀어 먹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였다. 마을 고아원 한켠에 교실을 꾸민 뒤 글 모르는 주민을 모아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하기도 전인 1968년부터 수산·건설·문교·후생·총무 등 5개 반으로 편성된 ‘새마을회’를 조직해 선착장과 호안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등을 짓기도 했다.
새마을회란 이름 때문에 정보과 형사들의 미행을 받는 등 곡절도 겪었다. “당시는 강원도 속초의 실향민촌 아바이마을에서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새마을회란 이름의 지하조직을 만들었다가 적발된 직후였다. 그것도 모르고 ‘새마을’이란 이름을 가져다 썼으니 기관의 의심을 살 만도 했다.”
도시에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낙후된 농촌에선 여전히 많은 주민이 끼니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1973년 전씨는 우선 마을 소득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주민들을 설득해 ‘산돌 10만 덩이 줍기 운동’을 펼쳤다. 돌덩이를 갯벌에 투하해 굴 서식지를 만들 요량이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굴 양식으로 마을의 벌이가 훌쩍 뛰었다. 이 공로 덕에 전씨는 5번의 장관 표창과 4번의 총리 표창에 이어 대통령 훈장까지 받았다. 전씨 집 거실에는 아직도 훈장을 달고 박정희와 찍은 사진과 함께 ‘국토통일’이란 박정희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
그 시절의 기억을 필생의 자랑거리로 간직해온 전씨지만 유신에 대한 평가만은 비판적이었다. “박정희는 대단한 애국자였다. 하지만 애국도 과하면 해가 되는 법이다. 아무리 안보가 흔들리고 경제가 불안해도 그런 식의 극약 처방은 하는 게 아니었다. 유신은 박정희의 최대 약점이다.”
김 교수의 말이 끝나자 택시기사가 물었다.
"그때 판사는 뭐했대요?"
김 교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독재정권에서는 사법부나 판사나 들러리 역할밖에 못하지요. 판결이라는 미명하에 독재정권의 모든 악행을 정당화시켜주는 거지요.”
택시가 해병대 초소를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택시기사가 옆자리에 앉은 M씨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도 J시가 고향이라니 부마항쟁을 아시겠네요?"
"그때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죽다 살아온 사람이 이 사람 아니요?"
그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던 기업체 사장 P씨가 M씨를 가리켰다.
"그러셨군요. 저는 그때 해병대로 근무하면서 현장에 투입되었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부마항쟁은 10·26사태의 도화선이 되었지요. 온건론을 내세운 김재규와 강경론을 주장한 차지철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진 가운데 차지철을 두둔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김재규가 총으로 시해했기 때문이지요. 10월15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골자로 한 민주선언문이 부산대학교에 배포되고, 16일엔 이에 동조한 부산대생 5000여 명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교문을 뛰쳐나온다. 이후 동아대학생 1000여 명과 시민들까지 가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도심을 장악하고,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 3400여 명이 최루가스를 뿌리며 진압에 나섰지만 속수무책이었지요.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 마산에는 20일 정오를 기해 위수령을 선포했지요. 이후 시청과 역 등 주요시설을 장악한 1여단과 3여단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진압했지요. 특히 이들 공수부대 장병들은 이후에도 총기에 착검을 하고 트럭을 이용해 부산대와 동아대를 하루 종일 오가며 학생들과 시민들을 위협했지요. 그런데 해병대는 달랐어요."
"다르다니요?"
M씨가 물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지요.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총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멜빵끈을 최대한 늘려 옆 동료와 팔을 동여매고 무조건 전진만 했습니다. 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라고 지시했어요."
"저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P씨가 맞장구를 치고 택시기사가 말했다.
"시위학생들에게 우유며 음료수, 빵 등을 나누어주던 시민들이 해병대원들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더군요.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걷히며 민주주의 햇살이 부산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지요."
김 교수가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집권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반대세력은 물론 선량한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탄압을 했던 거지요. 박정희 체제를 경험했던 사람들도 느낌은 각자 다릅니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경험했는가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역사 속의 박정희와 기억 속의 박정희가 다르다는 거지요. 지금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군부독재가 부활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문제는 말이지요. 여전히 박정희라는 이름이 때로는 트라우마(치유되지 않은 외상)로, 때로는 엄청난 치유 능력을 가진 샤먼(종교적인 능력자)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K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P씨에게 말했다.
"자네도 한 마디 해라. 사업하는 사람은 박정희를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긴 하더만..."
P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모질다 싶은 얘기도 있지만 박정희가 없었으면 현재의 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얘기도 있어. 그 때의 박정희의 계급은 별 2개를 단 육군소장이었어. 1962년 어느 날 서울시민회관대강당에 전국 농, 어촌 젊은 지도층 청년 2천 여 명이 함께 모인자리였어.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 뭔가를 놓고 사자후 한 박정희장군의 호소에 격려 박수는 대강당이 터져 날 것 같은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로 장안을 메웠어. 그 때 2천 여 명의 청년지도자가 아무런 보수도 없이 농어촌순회강연을 통해 잘 살기운동을 호소하면서 부터 우리의 60년 대 우리의 경제사정이 조금씩 나아 졌던 사실도 있었어.”
그러자 K씨가 말했다.
"물론 시작이야 좋았지. 경제적인 면에서는 성과가 있었던 게 사실이고. 문제는 말이지. 박정희가 독재를 했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해볼까? 경제성장이 정상참작은 될 수 있겠지만 독재까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거지."
김 교수는 정치가 마음이 아니라 관용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 관용이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박정희 시절은 관용보다는 무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했던 마지막 시절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래서 박정희가 통치했던 60~70년대의 역사는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짐으로 남을 것 같았다. 김 교수 아버지는 실향민이다. 버스 안에서 친구와 북한말로 대화를 하다가 대공 분실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나, 불행한 만남이었다고 김 교수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면 박정희 시대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것이 이상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김 교수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인질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이다. 김 교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오늘 모든 언론은 일제히 정부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통합진보당 해산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는 뉴스를 내보냈다. 통합진보당의 강령이 대한민국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에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유신 망령이 부활하고 있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이번 조치는 유신독재 공식 선포이자 1979년 해제된 긴급조치들에 이은 ‘긴급조치 제10호다. 부정하게 정권을 차지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의 후계자가 모여 만든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이 유신의 망령을 부활시키고 있다.”
김 교수는 택시에서 내려 친구들과 헤어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늦게까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 교수는 슈퍼마켓에 들렀다. 아내를 위해 맥주를 두 병 샀다. 박정희 시대 때 수배생활을 하는 자신을 숨겨준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봉지를 들고 가는 김 교수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무거워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