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나면 어떤 인사를 했는지 아십니까? ‘마라나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하루 하루 살았습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성도들은 아침에 커튼을 열면서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오시겠습니까?
하루를 모두 마치고 커튼을 닫으면서 고대했습니다.
‘주님, 오늘 밤에 오시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집니까?
이 세상이 살기가 하도 힘들고 고달파서 빨리 주님이 오시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저 잘나가는 사람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빨리 주님이 오시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이 빨리 오시면 안된다고 펄쩍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생 고생해서 이만큼 이루고 누리고 있는데 주님께서 오시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인생이 아까워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억울해서 안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라나타’라고 인사하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날 위해 자기 몸을 버리고, 죽기까지 사랑해주신 그분을 보고 싶어서, 주님의 재림이 기다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의 얼굴을 대하면서 사는 것이 더 좋고 더 귀하게 여겨질 때에 우리는 ‘마라나타’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의 강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7절을 보면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라고 합니다.
8절에도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시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강림’ 이라는 말은 ‘은밀하게 살짝 몰래 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에서 ‘강림’ 이라는 말은 임금님이 자신의 통치하는 지방을 방문하게 될 때에 공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방문한다는 말입니다. 왕이 온다는 깃발을 들고 나팔소리와 함께 왕이 방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바로 그렇습니다. 천사장의 호령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천군 천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에게도 숨김없이 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것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에 주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우성 칠 것입니다.
‘산아, 나를 숨겨다오, 바위야, 나를 가려다오’
야고보서 기자는 예수 믿는 것 하나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고난과 핍박 그리고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인내하라’라고 합니다.
본문에는 ‘주님의 재림과 인내’를 나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8절 “너희도 길이 참고 ....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환란과 핍박 속에서 흩어져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삶이 힘들고 고달픈 나날이겠습니까? 이들에게 최고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
주님의 오심이 이 박해와 고난 속에서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오래 참음’와 ‘인내’라는 말이 번갈아 가면서 나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10-11)
여기 오래 참음과 인내는 유사한 단어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그 차이를 알면 말씀이 더욱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오래 참음은 본래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고난에 대하여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우리가 처한 환경 속에서 부딪히는 고난에서 참는 인내를 말합니다. 오래 참음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난을 참는 것입니다.
인내는 환경 가운데 오는 고난을 참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주로 인간관계와 상황 때문에 옵니다. 이것을 견디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상황 가운데 인내하는 것이란 마지못해 당하고 견디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허약한 것이 아니라 강합니다. 마치 불독이 무엇을 하나 물면 끝까지 놓치 않고 흔드는 것처럼 인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서양 격언에 인내하는 자만이 최후에 승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 얼마나 재주가 있는가, 얼마나 좋은 여건을 갖추었는가가 마지막 승리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인내할 줄 아는 가가 승리의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인내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네 번째 열매입니다. 인내는 내가 참는다고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의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인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십시오.
8절에 “너희가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굳게 하는 데서 옵니다. 마음을 굳게 하지 않으면 인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빠지게 되면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요동치게 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굳게’한다는 말은 ‘강하게’한다는 말입니다. 상황을 버티어내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 강하게 됩니까?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의 심지를 정할 때입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내는 주님을 향하여 요지부동의 마음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인내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은 인내하지 못하게 합니다.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 빠질 때에 제일 먼저 삐어져 나오는 것이 바로 원망입니다.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지 않고 흔들리기 때문에 원망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 하는 가운데 가장 잘 했던 것이 있다면 원망과 불평입니다. 12 정탐군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보고를 했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지 못한 자들의 보고를 들을 때에 백성들은 일제히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심판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빠졌을 때에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굳게 하지 않을 때이며 원망할 때입니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11절에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고 합니다. 복된 자가 바로 인내하는 자입니다. 본문에는 성도가 인내할 수 있는 세 가지 모델을 보여줍니다. 인내의 세 가지 모델은 무엇입니까?
1. 첫째는 농부의 인내입니다.
훌륭한 농부가 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인내심입니다. 속전속결을 원하는 사람은 농부가 될 수 없습니다. 열매는 하루 밤 사이에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땀을 흘리고 애를 쓰며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는 견디고 기다려야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모델로 농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7)
이스라엘에는 두 번 비가 옵니다. 10월에 한번 이른 비가 오고 4월에 늦은 비가 한 번 옵니다. 계절풍에 따라서 비가 정확하게 오므로 사람들은 이 비 오는 10월 직전에 씨를 뿌립니다. 그래야 이른 비에 땅이 촉촉하게 젖고 파종 된 씨앗은 싹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4월에 비가 와 주어야 곡식이 성큼 자라고 곡식이 익습니다.
이스라엘의 농사꾼들은 자기 성질대로, 자기 방식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왜 일 년 내내 비가 오지 않는 거야’ 하면서 하늘을 원망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농사꾼은 비를 기다리며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농사꾼은 왜 비를 기다리며 참고 견딥니까?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 그 귀한 열매 때문에 인내하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 기다립니까? 귀한 열매 때문입니다. 열매 때문에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농부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난 사건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 이후에 인간은 계속된 타락으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33년 세월 동안 참으시다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기까지 고통을 참으시며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땅에 떨어져 썩은 지 사흘 된 날 무덤 문을 박차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수천 년이 지난 이후에야 첫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이 첫 열매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놓는 고통과 인내로 지불하셔야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농부가 열매를 기다리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성령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우리로 하여금 주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다가 결코 낙심치 않고 때가 이르매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2. 두 번째 인내의 모델은 선지자의 인내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10)
선지자들이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섰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자들이 핍박하고 박해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 참았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소의 멍에를 목에 걸고서는 백성들에게 외친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의 멍에는 메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이 황폐가 되고 포로로 끌려간다”
또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닙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냐?”고 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나는 이 이스라엘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의인 한 사람만 찾으면 내가 이 땅에 임할 진노의 저주를 멈추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성 안에는 죄인들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정말 의롭고 거룩한 사람에게 “당신이 죄인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 자신을 반성합니다.
반면에 정말 죄 지은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이요”라고 하면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데 대낮에 등불을 들고서 ‘당신은 죄인이요’라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선지자가 밉살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잡아서 때리고 토굴에 가두기도 하고 감옥에 집어넣기도 하며 나중에는 우물 속에 집어넣어서 죽기 직전에 꺼내 주기도 하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어떻게 참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참을 수 있었습니다. 참기 힘들 때가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진리 앞에 서 보십시다. 참아집니다. 주의 진리 편에 서면 견딜 수 있게 됩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비가 오지 않는 가운데 방주를 짓고 있을 때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고 공격했겠습니까? 거기에 개이치 않고 부지런히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주변에 어떤 사람이 무엇이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에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순간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인내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세번째 인내의 모델은 욥의 인내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11).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욥은 동방의 최고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난이 왔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 잘못과 상관없이 고난 당할 수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동양문화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과응보 사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아주 힘들어 합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은 내 행위의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고난이 까닭없이 올 리가 없다. 당신이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지 않느냐?”는 시선을 가집니다. 욥의 세 친구들도 욥에게 그렇게 합니다. 심지어 욥의 아내까지도 욥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주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욥 2:9)라고 하는 것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그 많은 재산이 한순간에 날라가고, 10명의 자녀가 한 순간에 죽습니다. 그의 몸에는 악창이 나서 재속에 들어가 기와조각으로 긁어야 시원해지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친구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 막힌 고난의 현장 속에서 욥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워했겠습니까?
그 가운데서 욥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울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한순간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합니다”(욥 13:15)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끈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또 무엇이라 합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얼마나 놀라운 고백을 욥이 했습니까? 욥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역사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큰 돌덩어리를 정으로 아름다운 천사를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께서는 ‘나’라는 볼품없는 돌덩어리를 고통이란 정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걸작품을 만드시고 정금같이 만드실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연단의 과정을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주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농부와 선지자와 욥처럼 끝까지 인내하게 하여 영광된 자리에 서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성도의 견인과 궁극적인 승리).
왜 그렇습니까?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11)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이 고난 가운데 인내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13)라고 합니다.
내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에 나의 처지와 형편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십시다. 그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인내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죄 짐 맡은 우리 구주(369 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