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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경우 아마도 MD라고 하는 전 영역을 실무적으로 경험한 국내 유일한 인력이기도 하다. 사실 MD와 관련해서 지난 30년간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필자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비록 백화점이나 마트 등을 중심으로 하는 MD이기는 하지만 인터넷 기반이나 편의점 그리고 사입, 수입, 제조, 물류와 같은 기능까지 연계된 MD영역 모두를 경험하여 왔었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경험은 쪼금 과장한다면(하지만 과장은 아닌 것 같고...) 국내 MD의 역사라고도 자부 아닌 자부를 할 정도
필자는 85년도 신세계백화점 5층 매니저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필자는 억세게도 운좋게 삼성 역사 상 단 한차례 밖에 없었던 삼성그룹에 특채로 입사하였고, 그래서 입사 조건이 원하는 회사, 원하는 보직을 선택할 수 있는 특혜였다. 그래서 필자는 신입사원 때 희망하는 회사 정도를 지명하는게 아니라 특정 회사(신세계백화점), 특정 부서(본점), 특정 보직(가전매장 담당)까지 지정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처음 받아낸 보직이 신세계 본점 5층 가전매장 및 임대갑 코너의 영업을 관리하는 담당(floor manager)역할이었다. 필자가 가전매장 담당을 지원한 것은 1년 정도만 다니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에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이었고, 보직을 받으려면 피아노나 오디오코너가 있는 매장이 좋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로 나이트 클럽에서 올겐을 연주하기도 했었기 때문^^
그런데 필자가 원했던 그 보직은 사원 보직이 아닌 전사 매출의 10%를 차지하는 과장 보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쪽을 배치해 주지 않으면 회사 관두겠다고 협박하여 입사 6개월 후에는 과장보직을 맡게 된 것이기도 하다. 필자의 직장 생활 시작부터 말단 사원의 역할에 대한 경험은 없었는데....이런 것은 추후 필자의 직장 생활을 독특하게 이끄는 요인이 된 것이기도 하다.
필자가 신세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당시 백화점의 MD는 특정매입이라고 월말 안 팔리는 것은 모두 반품으로 처리해 상품물대를 안 주는 조건으로 매입하는 형식만 취하는 수수료 매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맡게된 가전매장은 백화점의 유일한 직매입 매장 즉, 회사에서 재고를 부담하며 장사하는 그런 매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MD나 영업은 백화점 일반 케이스와는 무척 달랐다. 당시 모든 백화점은 거의 90%가 수수료 매장이었다.
워낙 백화점에 들어오겠다는 브랜드 들이 많아 줄서고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형식적인 매입상품에 대하여 반품조건, 판촉사원 파견, 높은 판매수수료(의류는 30%이상)에 월 매출이 일정액 미달이면 그 만큼 입점업체에 매출을 찍어주는 그런 것이었고, 정식매장을 얻지 못하는 업체 들은 행사매장에 판매분이라는 조건으로 판매하였다.
판매분 내지 판매분 매입은 90년대 불공정거래 행위로 공정위로부터 금지된 그런 형태의 매입인데, 현재는 일부 마트에서 다른 명칭으로 쓰이는 기법이지만, 이 판매분은 매장에 들어온 것에 대해 검품도 안 받고 팔린 것만 월말에 정산해 주는, 그것도 당시 45일이나 90일 어음으로 결제해 주는 그런 것이었다. 불공정거래로 판정된 이유는 매입을 안 잡아 주니 손님이 훔쳐가거나, 심지어는 직원 들이 몰래 가지고 간 것에 대해서 백화점에서는 책임을 안 지는 그런 것이었는데, 많은 백화점 들이 이 기법을 악용하여 재고부족을 입점업체에 책임지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수료나 판매분 매장은 서울의 빅3 백화점(신세계, 롯데,현대)에 한정했고, 지방백화점 들은 여전히 임대방식이었다. 즉, 백화점에 보증금을 내고 임대매장을 구성하는 것으로 거의 모든 지방백화점 들은 임대매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분적으로 특정매입이라는 수수료 매장이 일부 가능했던 곳이 대백이나 동아백이었고, 부산 쪽은 좀 나중에 오픈된 부산백 정도, 그외 미화당이나 삼미유나 등은 대부분 임대매장이었다. 이는 광주의 화니나 가든, 대전의 대전백화점, 동양백화점도 그랬고, 청주도 그랬다. 즉, 이 시기 지방백화점은 현재 상가의 매장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직영매장과 관리인력을 기준으로 백화점개설허가를 받아 백화점 타이틀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지방백화점 들 역시 그 당시부터 경쟁력있는 브랜드 유치가 어려워서 별 실속도 없는 백화점 허가를 받았는데, 그런 점에서는 지금의 상가운영하는 쪽보다는 혁신적인 면도 있었다.
반면 서울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등극한 롯데는 90년대 중반까지도 백화점 타이틀을 걸지 못했다. 백화점 허가 조건인 직영비율이나 직영사원 채용 비율이 떨어져서 롯데백화점이 아닌 롯데쇼핑이었다. 즉, 롯데는 90년대까지도 덩치만 컸지 운영 측면에서 보면 현재 시행시장 보는 대형상가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백화점의 다점포화가 진행되면서 소위 MD차별화라는 것이 크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실제 수수료 매장에서 MD차별화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바로 직영매장이었다. 그 이전 시기 직영은 오로지 가전매장 뿐이었다. 가전은 당시 입점업체(삼성이나 금성 등)의 파워가 워낙 강하기도 하였고, 80년대 후반 서울올림픽 특수 등으로 상품공급이 딸렸기 때문에 백화점은 돈 주고 사와야 했었다.
필자 역시 가전담당으로서 삼성라이온스 우승기념 가전특판 등 행사물량을 확보하려고 가전3사 출고창고가 있는 구미까지 차를 용달해서 내려가 매입 예정 상품을 받아올 정도로 삼성이나 금성은 백화점보다 갑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쪽 매장은 백화점이 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화점 들은 직영 매장을 의류 쪽으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백화점 MD의 꽃은 의류였기 때문인데, 이 의류는 전통적으로 수수료 매장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매장을 직영으로 전환하려면 다른 백화점에 없는 브랜드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 소위 백화점 PB(Private Brand)라는 것이 등장하였다. 초기의 백화점 특히 1900년대 전후 미국이나 유럽의 백화점 들은 PB보다는 취급상품의 다각화와 연계되는 스크램블 머천다이징(scrabled merchandising)이 핵심이었다. 취급상품의 지속적인 확대를 통하여 백화를 구현하고, 이를 운영관리 차원에서 디파트먼트를 만들고 각 디파트먼트를 관리하도록 바이어를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그래서 일본 사람이 만든 백화점이란 용어는 거의 모든 상품의 백화를, 미국은 바이어의 부문관리(departmentalization) 중심에서 디파트먼트 스토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이다.
PB는 백화점 성숙기 이후에 등장한 개념이다. 그러나 PB라고 하는 것은 브랜드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브랜드라고 하면 전국적인 유통을 전제로 하는 NB(National Brand)가 대상인 반면, PB는 특정 백화점이나 유통업체에 한정하여 판매되는 것이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브랜드라고 하지 않고 PL(Private Label)이라고 부른다. 그냥 라벨이 공급업체 브랜드가 아닌 판매자 라벨이라고 해서 프라이빗 라벨이라고 한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배경 하에 등장하는 PB는 우리 나라 및 일본에서만 쓰이는 엉터리 유통영어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백화점의 PB가 등장하면서 백화점은 직접인 상품디자인 등의 상품개발 및 직매입 즉, 재고를 부담하며 장사하는 방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유통대기업의 MD혁신의 첫 시도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말까지 백화점의 의류PB 비중은 전체 매출의 3%도 안 되었다. 그 만큼 리스크가 컸기 때문인데, 2000년대 이후 마트 들이 자체 PB로 도배되는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PB가 주력적인 MD가 되는 것은 마트와 같은 비 선매품(shopping goods) 즉, 일용품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확산된 것이기도 하다. 마트의 성장은 바로 PB라는 직매입 및 재고부담 상품을 통하여 저코스트(Low Cost)를 구현하여 상시저가(EDLP : EveryDay Low Price)를 구현하면서 급격히 성장한 것이다. 새로운 업태의 등장은 바로 MD구조의 변화에서 등장하게 된다. 유통업체는 어려운 비즈니스 환경에 대응하여 MD의 혁신으로 대응하면서 사업을 확대하고 점포를 늘려가면서 현재에 이르른 것이다.
여기서 시사점은 바로 직매입 내지 재고를 부담하며 영업하는 소위 리스크 머천다이징(Risk Merchandising)이 실현되면서 다양한 MD접근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직매입보다 더 리스크가 큰 MD전개 방식이 바로 의류나 잡화를 중심으로 직수입이었다. 이러한 직수입은 2010년대 전후 영세업체 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명품이나 인터넷용 상품에 대한 병행수입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시기 직수입은 독점수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88년 신세계본점 5층 담당을 하다가 부서전배가 이루어졌는데 그 때 보직이 해외브랜드 라이센스 및 직수입 업무였다. 뭐 그리 잘 하는 영어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영어가 조금 되다 보니 해외브랜드 쪽 벤더와 업무연락(correspondence)을 담당하는 단순한 업무였다. 그러면서 부가적으로 도입된 라이센스 브랜드의 대리점 판매를 지원하는 광고판촉 담당을 겸하였다.
그 당시 신세계 백화점은 해외에서는 지명도가 떨어져서 라이센스 사업을 하는...다소 급이 떨어져 가는 브랜드 들에 대한 생산 및 판매 라이센스를 따서 위탁 생산 및 대리점 영업을 하였다. 필자가 인수받았던 업무가 신세계가 라이센스권을 갖었던 랑방(Lanvin)과 입셍로랑(Yves Saint Lurent)의 타이와 셔츠, 그리고 피에르가르뎅(Pierre Cardin) 핸드백 등 피혁제품이었다.
필자는 그 이전 가전 쪽 업무를 하다가 부서가 바뀌어 해외브랜드 라이센스와 광고판촉, 판매 대리점 관리업무가 맡게 되었는데...이 때의 회사 화두가 바로 MD차별화였다. 즉, 신세계의 해외브랜드 라이센스는 바로 백화점 MD차별화를 위한 것이었다. 위 3개 브랜드는 내 앞의 선임에 의해 라이센스를 받은 것이고, 당시 필자가 신규로 도입한 브랜드는 미국의 애로우(Arrow)라는 브랜드였다. 이 역시 와이셔츠(Dress Shirts)와 타이(Neck-tie)에 대한 생산 및 판매 라이센스 였다. 그리고 도입되어 생산된 것에 대하여 지방 백화점에 임대매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리점을 지원하기 위한 교육, 판촉지원, 광고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라이센스 생산을 통한 MD고도화는 신세계의 MD차별화 및 고도화의 큰 축이었다. 이는 단순한 임대업체 방식에서 재고부담을 넘어 브랜드 라이센싱, 생산, 신세계 소유 점포에서의 판매와 신세계와 제휴되어 있는 지방백화점에 대한 대리점 영업과 같은 그 이전에 관리하지 않은 영역으로 업무가 확장되면서 진행된 것이다. 즉, 새로운 MD는 회사의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이도 하였고, 그 세부 내용은 기존의 영업 내지 기존의 MD방식과는 본질적 차별화가 전제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러한 접근이 단순해 보이지만 그 시기에는 생산로트를 위하여 대리점 사업까지 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해외브랜드 라이센싱은 해외명품 직수입보다는 그래도 용이한 편이었다. 88 올림픽 바로 전 필자에게 부여된 새로운 업무가 바로 유명 해외브랜드 도입이었다. 문제는 그 당시 우리 나라는 해외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 국내에 알려진 해외브랜드는 해외에 나가 본 사람 들이나 알 수 있었지 대부분의 사람은 해외브랜드를 알지 못하는 시기였다. 신세계와 같은 도심백화점은 그나마 해외브랜드를 아는 사람이 있었지만 백화점 근무자들도 해외브랜드는 잘 몰랐다.
직수입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던 필자도 불어를 몰라 루비똥(Louis Vuitton)을 루이스뷔튼으로 읽고, 기라로쉬(Guy Laroche)도 가이 라로취를 읽는 등 그런 수준이었다. 그 만큼 일반인에게 브랜드라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브랜드 벤더에 대한 정보 없었고, 겨우 겨우 확보한 업체 정보라고 하면 지금은 사라져 버린 텔렉스 주소였다. 일본 서적에서 구한 텔렉스 주소 수백 군데로 브랜드에 유치하고 싶다는 텔렉스를 날렸지만 대부분 반응이 없었다. 그 당시 신세계와 같은 유통업체는 텔렉스도 없었다. 그래서 텔렉스를 보내려면 관계사인 삼성물산이나 제일모직에 가서 텔렉스 빌려 수백개 브랜드에다 보냈다.
그렇게 회신이 없다가 겨우 얻은 반응은 1%가 안 되었다. 필자가 회신을 받은 브랜드는 앙드레꾸레주(Andre Courreges)와 쇼메(Chaumet) 였다. 나머지 브랜드는 아예 반응이 없었다.
신세계 제안에 관심을 갖고 처음 방한한 브랜드가 쇼메였는데 이 쪽은 엄청 고가 고급의 귀금속 브랜드였다. 넥클리스 하나가 20만불이 넘는 그런 고급 브랜드. 그 당시 회사에서는 가격이 너무 비싸 어렵다는 반응이 있었는데, 그 때 쇼메 쪽 방한인사가 제안한 것이 자기네 보다는 급이나 가격이 낮은 자매 브랜드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 브랜드가 바로 티파니(Tiffany) 였다.
이처럼 브랜드 직수입과 관련하여 아무 정보도 없이 맨 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하다보니 브랜드 도입은 실패하고, 일본에서 그 나마 인기가 있다고 하는 앙뜨레 꾸레쥬를 직수입도입 계약을 하고 처음으로 의류수입 매장을 신세계 본점 3층 여성복 매장에 부띡형태로 오픈하였다. 수입액은 한 시즌 분이 24만불. 그러나 로열 패밀리 영업으로 한 시즌은 겨우 겨우 운영했지만 일반인 들의 반응은 약했다. 그래서 다음 시즌 수입은 포기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도입을 담당하였던 필자나 필자의 상사는 패닉에 빠지었다. 그리고 앙드레꾸레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브랜드 유치를 시도하는데, 여전히 해외 브랜드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란세티나 기라로슈 등 급이 낮은 브랜드에서 간보는 정도의 반응이고, 이는 명품 대열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지 못하는 것이라 도입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 지사에서 당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새로이 주목 받고 있다뜨고 브랜드가 있다고 도입을 타진하여 왔다. 그래서 도입하게 된 것이 바로 첫 성공작인 에스까다(Escada)와 로렐(Laurel)이었다. 소위 스포츠 엘레강스라는 미씨 브랜드였는데...면세점을 중심으로 명품을 수입하여 일부를 내수시장에서 판매하는 브랜드 보다 실적이 좋았는데 오랜 기간 수입브랜드 매출 3위 안에 랭크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필자든 관련된 그 누구도 사전에 예측 내지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이었는데...어쨌든 처음으로 백화점 직수입 매장의 성공이 되었고, 그래서 힘받아 추가적으로 도입이 진행되었다.
그 때 위에서 제시된 것이 아르마니 도입이었다. 그러나 메인 라인 도입은 안 되었다. 그래서 세컨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죠르주 아르마니의 디퓨전 라인(Diffusion Line)으로 가격은 죠르쥬 아르마니의 70% 내외였는데, 이 역시 성공이었다. 물론 필자는 도입이고 상품 셀렉션 담당은 아니었다. 성공의 배경에는 실제 상품 발주를 잘한 당시 바이어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브랜드 도입 담당으로서 필자의 어려움은 브랜드에 대한 정보 부족이었다. 예를 들어 아르마니 만해도 당시 유명브랜드를 소개하는 브랜드 디렉토리(일본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신생 브랜드(new major)였다. 하지만 소위 로열패밀리는 이 브랜드를 알고 있었고, 이 브랜드 도입을 찍어서 내려왔기에 아무 고민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함께 한 수입바이어는 필자가 가전담당을 할 때 가용부에서 같이 근무하였던 필자의 2년 선배였는데, 이 때부터의 실적을 인정받아 신세계인터내셔날 대표를 거쳐 나중에는 신세계 부회장까지 올라갔던 분...어쨌든 이러한 수입 브랜드를 통해 MD차별화 내지 MD고도화의 기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역시 개인적으로 의류 쪽이 백화점의 꽃이 맞다는 생각으로 여성의류부를 전배를 뒤늦게 신청했지만, 대학에서의 전공이 의상이나 섬유공학 쪽이 아니고, 더욱이 영업 쪽 경험도 가전이나 해외브랜드 관리여서 전배신청이 받아들여졌지지 않았다.
그래서 의류관련 커리어를 갖추기 위하여 회사 퇴근 시 후 6개월간 종로에 있는 패션디자인 학원을 다니면서 스타일링을 중심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의 월급이 50만원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학원비가 월 18만원이었다. 즉, 월급의 반 이상을 패션 쪽을 공부하기 위해서 지출하면서 여성의류 바이어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과 해외브랜드 도입 등의 성공 실적을 바탕으로 신생된 신규사업부 의류MD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여성의류MD가 아닌 남성의류와 스포츠의류 MD가 되면서 후배가 맡고 있는 아동복MD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은 여성의류든 남성의류든 상관없이 다 하게 되었다. 덕분에 여성의류 담당이 아니면서, 그리고 담당하는 남성의류보다 더 많이 여성의류 업무를 맡으면서 경험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 당시 신세계 신규점포나 리뉴얼 점포의 오픈MD를 준비하면 브랜드 도입 업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규점이다 보니 인테리어도 알아야 해서 이 때 부터는 또 다른 영역인 건축인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자비로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그 후 의장기사 2급 필기를 따게 되었다. 유감스럽게 실기는 안 봐 의장기사 2급 자격은 못 갖추었지만... 어쨌든 이 시기 신규점포의 레이아웃 디자인과 MD구성이라는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 업무가 현재 시행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MD컨설팅이나 자문을 하고 있는 것의 배경이 된 것이기도 하다.
MD업무의 확장은 영업에서 상품, 그리고 그 다음은 바로 건축인테리어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이다. 이는 필자가 의도해서가 아니라 유통에서의 MD업무는 그러한 특징을 갖는다. 즉, 임대 등 입점업체 중심에서 보는 MD와 달리 상품이나 건축까지 들어가면서 MD적 요소를 접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신세계에서 MD관련 업무를 하는 도중 갑작스레 관계사 전배가 이루어졌다. 퇴근 시간 인사팀에서 부르더니만 이미 퇴직처리 되었으니 내일 삼성물산으로 옮기라는....그래서 회사전배를 13시간 전에 통보받고 다음 날 삼성물산 개발부문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당시 삼성물산 개발부문은 수출 등 무역의 한계로 인하여 국판 사업을 위하여 백화점이나 새로운 유통시설 개발을 목표로 만들어졌었다. 문제는 이러한 인력이 삼성물산 기존 조직에는 없다 보니 관계사인 신세계에 차부장급 1명, 과차장 및 대립급 3명 이상을 보내라고 했는데, 그 당시 신세계 신규사업 쪽 인력을 다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겨우 생색 맞추어 한 명을 뽑아서 보낸다는게 당시 대리에 불과했던 필자였다. 필자는 그 시기 의류MD에서 신규점 개발 프로젝트 주무대리였었다. 신규사업팀이 2개 조직이 있었는데, 한 팀은 본점과 강남점 개발을 담당하는 인력 4명이 있었고, 필자가 속한 팀은 모든 쭉쩡이급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필자가 주무대리로 일하면서 대전민자역사 공모사업을 따고, 대구 반월당 덕산2지구 개발 프로젝트 등 여러 프로젝트 들을 가속화시켰다.
재미있게도 회사에서 크게 주목받아 온 본점재개발이나 강남점(고속터미널) 개발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지만, 기껏해야 2급 프로젝트 들이 가시화되면서 필자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필자가 졸지에 신세계에서 삼성물산 개발부문으로 관계사 전배가 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필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자는 삼성물산 전배 전후 싯점 주 업무가 신규점 개발 특히 건축을 중심으로 MD업무 였다. 당시 신세계 용어로는 점포기획(store planner)였다. 이 시기 상권분석 기법을 습득했고, 담당임원을 대신하여 대학교 학위논문을 봐주기도 했는데 필자 덕에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도 몇 몇 나오는 시기였다. 필자가 이 당시 학위논문을 지원하기 위하여 만든 상권개념의 상당 부분이 현재 업계나 부동산학과에 소개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많이 확산된게 바로 스프레드쉬트를 이용한 사업성 분석기법이었다. 지금 카페에 돌아다니는 형태의 사업수지표 보다 복잡한 추정기법을 만들어 관계사인 삼성건설 그리고 몇 몇 당시 유명건설회사에 제공된 것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필자는 이 시기 건축디자인에 있어 상당한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뭐 회사에서 해외에 가서 보고 오라고 많이 내보낸 준 덕에 뛰어난 상업시설에 대한 정보를 갖추게 된 것도 있지만...당시는 인터넷도 없고, 책자도 없었던 시기라 신규점포나 새로운 업태에 대한 정보는 필자 만이 가지고 있었던 독점적인 것이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공간에 대한 해석이나 기획에 있어 건축사 들보다 뛰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갑의 대리인이고 건축사는 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잘 알고 똑똑해서는 아니고, 선무당이 칼을 휘둘러 끌고 나가고 그래서 실현되면 그게 필자의 실적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90년대 필자가 가 본 해외 쪽 상업시설은 쇼핑센터만 700군데, 일반 상업시설은 2천군데를 넘게 가보게 되었고, 사진도 10만플레임 이상을 찍을 정도 였으니 해외시설 베끼는데 있어서는 필자는 국내 최고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미국 쇼핑센터는 미국에 사는 사람보다 더 많이 다녀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습득한 정보와 경험으로 건축 사양(Owner's Requirement)를 제시하였는데, 실제 필자와 건축사와 의견 충돌 시 필자를 이겼던 건축사는 없었을 정도. 물론 필자가 수퍼갑 회사의 담당이었던 점도 있었겠지만....내가 구상하고 제시하는 것은 그대로 건축설계에 반영되어 이루어져 왔었고, 이는 국내 설계사 뿐만 아니라 해외 유수의 설계선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MD관점에서 설계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는데, 설계가 바로 MD구현의 물리적 증거(PE : Physical Evidence)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MD를 상품의 가격이나 영업, 재고 수준에서 얘기하는 것은 그 상품을 취급하는 임차희망업체 보다는 수준이 높다. 하지만 좀더 높은 수준의 MD는 상품을 중심으로 물리적으로 구현하는데 있어 공간의 특성을 구현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도화된 MD기능은 각각의 상품그룹 별 전개특징을 명확히하여 설계사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대기업의 시설개발과 시행시장에서의 설계의뢰의 차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당시 필자가 삼성물산 개발부문의 주무대리로 근무할 때 검토하지 않은 업태가 없었다. 삼성물산이 유통을 진출하기 위해 어떠한 MD를 중심으로 하는 업태가 효과적인가가 핵심 현안이었는데...결론은 백화점은 관계사인 신세계 때문에 어려우니 할인점이나 전문점, 쇼핑센터 쪽 개발이었다. MD는 이러한 업태를 구현하는데 있어 어떤한 상품과 거래선, 운영체계가 중요한지를 다루는 것이었고, 이를 승인받아 집행하는 것은 또 다른 부서의 역할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업태개발을 기획하는 업무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나타나게 된 것이 할인점 홈플러스, 전문(대점)인 명동의 유투존, 쇼핑센터 포맷 내지 메가스토어로 구상하였던 분당 서현점(현 AK백화점) 등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기획 만 하였지 실행을 전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행업무를 위하여 부문전배를 신청하였는데, 삼성물산에서의 부문이동은 회사를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역부문에 속한 개발부문에서 의류부문으로의 이동은 퇴사나 마찬가지. 실제 그 전까지 A 고과를 받아온 필자 삼성물산 의류부문(에스에스패션)으로 이동할 때는 D를 먹어서 기존 특진 대상에서 과장진급 유급 대상자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어쨌든 개인적 희생을 무릎쓰고 의류부문에 와서 브랜드 매니저를 하려고 했지만, 유통 경력으로 인하여 직판부서에서 전문점 개발을 맡기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래도 에벤에셀몰에 이어 국내 두 번째의 멀티브랜드 스토어인 쌩상(Saint Saens) 매장을 기획에서 오픈까지 총괄하였다. 그 매장은 영화 '그대안의 블루' 촬영현장이 되어 영화에도 남아 있는데...어쩌면 국내에서 필자가 개발한 매장이 영화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매장이 되었다.
쌩상 매장은 순매장 면적이 210평에 불과한 중소규모였지만 회사의 새로운 사업전략이어서 리모델링비를 다른 매장의 3배 이상인 7억원을 들여 개발하였다. 돈 많은 회사에서 일해서 그런 점도 있지만 그 특징은 삼성 의류부문 즉, 에스에스 패션의 브랜드 뿐만 아니라 타사 브랜드를 도입하여 복합적으로 전개하는 혁신적 매장이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백화점을 제외하고 전문점에서 타사 브랜드를 함께 취급하는 그런 경우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 의류 유통은 철저히 자사 상품 만 파는 대리점 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삼성에서 만든 대형전문점에서 에스에스패션 브랜드 말고도 다른 회사의 브랜드를 함께 구성한 첫 사례였었다는 점에서 의미는 컸었다. 이는 일 개 회사 차원이 아닌 우리 나라 유통체계에 있어 혁신적 사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돈이 엄청 들어갔다. 설계 역시 보다 특화를 위하여 일본 마루이건설 쪽과 함께 작업을 하였다. 차별화딘 멀티브랜드 스토어 포맷을 개발하기 위하여 고도화된 인테리어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는데, 그 깊이는 그 후 필자가 경험하는 건축 영역보다 깊이가 있다고 할 정도 였다.
MD차원에서 이 시기의 어려움은 브랜드 유치였다. 당시 삼성물산이 국내 GNP의 10%나 수출하는 국내 최대기업이었지만 유통시장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다. 필자가 브랜드 유치를 위하여 엄청 많은 수의 브랜드 업체를 만났지만, 업체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소매시장이나 국내 유통시장에서 삼성은 별로 업체에게 인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우 겨우 채어넣은 것이 컬러 브랜드인 베네통, 트래드(Neo Traditional) 브랜드인 노티카, 다이마루 브랜드인 애녹(Aenoc) 등 이러한 타사 브랜드 들을 겨우 유치하여 210평을 채웠다. 아마 이 때 브랜드 유치의 어려움을 처음 경험하였던 시기에 해당한다.
쌩상이라는 멀티브랜드 스토어를 성공적으로 개발하여 오픈하니 그 다음 내게 맡겨진 것이 명동 제일백화점을 인수하여 유투존(Utoo zone)이라는 대형전문점(전문대점)을 개발하고 그 다음 MD를 맡는 것이었다. 필자는 유투존의 3개층 MD를 총괄하였는데, 이 역시 단순한 업체 유치는 아니었다. 설사 업체를 유치하라고 해도 잘 될리 없었지만, 기본 방향은 백화점과 같은 운영방식을 기반으로 전형적인 백화점MD와는 차별화된, 젊은 층에 소구할 수 있는 새로운 MD구현이었다.
필자의 경우 1층에서 3층의 패션부분을 맡았고 지하층의 타워레코드나 4층의 식당은 필자 관할이 아니었다. 이 때 차별화를 위하여 동대문 디자이너 들을 입점시켜 육성하는 것이 주력이었다. 아마 개발이 아닌 유치방식을 썼으면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지금도 입지가 좋으니 업체 들이 기꺼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을 기대하는 시행사 들에게 조언할 때 경험은 이 때를 기준으로 한다. 명동이라는 국내 최고의 상권을 배경으로 한 때 백화점으로 운영되었던 곳에 새롭게 고급으로 구성한 매장에서도 브랜드 유치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만큼 MD유치는 녹녹치 않다는 것. 이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시행사 들은 부심도 안되는 지역,교외지역, 검증되지 않은 신도시 상업지역에 상가 하나 지어놓은 후 상권이나 입지 좋으니 업체를 유치해 달라고 할 때 쉽게 끄덕거릴 수 없게 하는 경험이 이 때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유감스럽게 유투존MD총괄(선임과장)을 하면서 열심히 했지만 실제 오픈 바로 전에 또 다시 전배가 이루어졌는데, 그게 바로 그룹차원에서의 특명 수행을 위하여 영국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 도입이었다. 막스앤스펜서는 영국을 대표하는 종합브랜드로 단일 브랜드이지만 현재 SPA브랜드보다도 훨씬 큰 1천평 이상의 점포였다. 아시아 판권은 싱가폴에서 갖고 있어서 싱가폴과 홍콩을 왔다 갔다 하면서 유치성공에 가까워 갔다. 실제 삼성물산이 유치대상 업체 1순위로 영국본사에 추천되었지만...웬걸 결과는 삼성물산이 떨어지고 성주인터내셔날로 사업권이 넘어갔다. 일설로는 성주인터내셔날 대표의 당시 남편이 영국인이어서 로비에 밀렸다는 등 별 말이 다 있었지만...문제는 비서실에 도입이 확정적이라고 보고된 대형MD가 날라갔다는 점에서 엄청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부랴 부랴 대체 브랜드로 추진한 것이 통판 브랜드이면 전문점 브랜드로 유명한 넥스트(Next)였다.
넥스트 도입이 필자의 주업무이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필자는 삼성물산 유통부문의 기획실 해외업무팀 팀장 대리로서 전체 조직을 총괄하였다. 원래 기획실 실장(이사)가 팀장을 겸직하는 구조였지만, 실장이 유통은 잼뱅이어어서 비록 당시 고참 과장에 불과한 필자가 팀장 대리로서 해외브랜드 도입 업무를 관리하였다.
필자가 맡은 것은 유럽지역 브랜드 도입 담당으로 넥스트가 중심이었지만, 다른 브랜드 도입도 관리하였다. 어쨌든 넥스트 도입을 위하여 스펠링도 요상한(영어같지 않은) 레스터 시 넥스트 본사에 가 협의를 해서 실제 도입 계약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실제 도입되는 싯점에 삼성물산이 유통부문을 스크랩한다고 했기에 실제 도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시기 필자가 도입에 성공한 것인 도나카란(DK) 및 DKNY, 아가타(Agatha), 독일의 스트레니스 그룹(브랜드명이 그렇다)이었고 엘렌트레이시 컴파니나 넥스트 등은 도입 대기 전 상태 등 많은 브랜드 유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업무개입은 안한 것으로 오쉬만스포츠 등도 있고...하여간 많은 브랜드 들의 도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도입은 서현점 오픈을 위한 MD차별화였다. 기존 백화점에 구성된 MD로는 분당이라는 신도시에 들어서는 당시 지역 최대규모의 신생백화점의 성공을 이끄는데 한계가 있어, 백화점 MD구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해외 브랜드 도입이 추진되었고, 필자가 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해외업무팀 팀장 대리를 하면서 함께 검토된 것이 우편판매 및 잡제품 수입이었다. 넥스트라는 브랜드 도입 과는 별도로 구색의 구비가 중요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잡화류 수입이 주목받았다. 차별화된 고급 생활잡화 수입을 위하여 유럽의 상품 견본시장에 가서 상품을 발주하였는데, 독일 프랑크푸르트 메쎄(messe), 이태리 밀란의 마체프(macef), 영국의 버밍험 페어(fair), 그리고 함부르크, 벨지움, 프랑스 등에서 있는 각종 페어에서 온갖 상품을 발주하는 것이었는데 이 때 발생된 문제가 물류 포워딩(fowrading)이었다.
보통 학교에서 무역 같은 것을 배우면 FOB(Free On Board)나 CIF(Cost, Insurance, Freight) 등으로 수출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배운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상품수입은 이러한 조건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잡제품은 수공예 상품이 중심이고 영세한 업체다 보니 공장에서 직접 상품을 수령하여 보험들고 배나 비행기를 찾아 한국으로 보내야 하는 현장인도조건(Ex Factory, Ex Work)이 대부분이었다. 점포도 분당 서현점과 명동 유투존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발주 물량도 맞추기 어려웠다. 한 박스 정도만 채워도 진열을 한다면 실제 10개 매장에 깔 물량이 될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잡제품을 한 컨테이너 채울려면 상품물대 보다도 픽업하는 비용이 더 컸다는 점에서 수입발주의 어려움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도 인터넷 쇼핑이 없었던 싯점이라 수입 물량(lot)확보는 현실적으로 용이하지 못하였다.
당시 필자는 해외업무팀장 대리로서 유럽 등 해외 지사에 지원금 배부 권한이 있었다. 1년에 6백만불을 지사나 지점에 나누어줄 수 있었는데, 영국(UK)이나 프랑크푸르트, 싱가폴, 밀란 등은 80만불에서 100만불을 그 밖에는 30만불 미만으로 지원하였다. 이렇게 지원하는 금액이 바로 발주된 물량을 지사에서 책임지고 픽업하여 포워딩하는 것인데, 실제 이 정도 지원금으로 이러한 비용이 커버가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금액은 지사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여 적자 임에도 불구하고 발주된 것을 픽업하여 보내주었다. 하지만 삼성물산과 같은 해외 네트웍이 수반되지 않는 상태에서 브랜드가 아닌 잡제품의 수입은 정말 용이하지 못한게 사실이다. 브랜드가 아닌 단품 중심의 수입에서 물류문제는 MD의 발목을 잡는 그러한 요소이기도 하다.
필자가 그로부터 10여년 후 GS리테일 임원 재직시 상품발주를 진행할 때는 유럽 대신 중국의 광동페어 등에서 상품발주하였는데, 발주든 물류든 로트(lot)문제 해결이 핵심이었다. 그래서 GS홈쇼핑과 GS리테일, 그리고 GS 쪽에 납품하려는 업체 들이 연합하여 인터넷 판매용까지 모두 합쳐 발주물량을 채우려 했던 것도 그 만큼 로트나 물류 문제가 수입상품에 의한 차별화의 어려움을 말한다. 상품 수입이 어렵다는 얘기는 직접(직영매장)이든 간접(임대유치)이든 그러한 매장을 구성하기 의 어려움을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일 경우 관련 업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치는 어렵다. 시행시장에서는 너무 쉽게 MD차별화를 얘기하지만 실제 브랜드 도입입이든 개별 단품의 직수입은 생각하는 것보다 어려움이 많다는 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대부분 그러한 MD로 매장을 구성한다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삼성물산에 새로이 만들어진 유통부문(삼성물산에서 부문은 1개 회사보다 크다. 삼성건설같은 곳도 1개 부문으로 편입되었을 정도)으로 전배되기 전 의류부문에 있을 때는 2개 브랜드(아스트라 골프웨어와 여성복 베르디체)의 브랜드 매니저를 하였다. 이 때 필자의 경험은 의류의 제조 및 대리점 영업이었다.
필자는 아스트라 브랜드를 맡았는데, 당시 브랜드 모델이 박세리였다. 비서실의 지시로 박세리는 대리 대우, 박세리 아버지는 이사 대우로 하여 계약을 하였는데...솔직히 그 때 박세리를 브랜드 모델로 썼지만 필자가 뽑은 것이 아니라 아는 바는 없었다. 어쨌든 이 당시 2개 브랜드를 대상으로 한 시즌에 80스타일 정도를 기획하였다. 한 스타일당 사이즈는 평균 4개, 색상은 3개...그래서 모델수로는 약 500개 정도를 기획하였다.
그 싯점 필자는 사내에서도 유통전문가로서도 인정을 받아왔기에 필자가 맡은 브랜드의 판매진도율에 대한 기대가 매우 높았다. 필자가 브랜드 매니저를 맡기 전 시즌 종료 싯점 아스트라의 판매진도율은 56% 정도 였다. 즉, 100개를 내 놓으면 시즌이 끝날 때 56개 정도 팔리고 나머지 44개는 이월재고가 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온갖 기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올린 진도율은 겨우 4%...겨우 60% 진도율을 겨우 경우 올리게 되었는데...사실 대단한 실적이었지만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회사에는 신세계나 롯데에 행사매장이 아닌 정식매장을 기대했지만, 친정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세계에서도 골프존에 내가 맡는 아스트라 매장을 개설해 주지 않았다. 그것도 한 때 함께 근무하였던 선배가 관리하는 매장에서도...결국 브랜드의 경우 입점이든 유치든 안면이나 인맥 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또 한번 겪었는데...이는 지금도 시행시장에서 MD유치에 대해 자신하지 못하게 된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기도...
삼성에서의 필자의 MD는 회사가 처한 각종 문제상황을 풀어나가는 수단으로서 선택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 저것 잡다하게 경험하다 보니 MD를 기반으로 업무는 무한정으로 확장되었다. 각종 MD를 잘 아니 프로세스를 명확히하여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해서 상품정보시스템 및 영업관리시스템의 아키텍쳐(코드체계 포함)를 설계하기도 하였고, 점포 판매로는 한계가 있으니 무점포 판매를 검토하라고 해서 인터넷 쇼핑몰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MD고도화 수준이 일반적인 영업 레벨을 넘어서는 것으로 국내에서 백화점이나 마트, 편의점 등 모든 업태의 정보시스템 아키텍쳐나 프로세스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필자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설계한 시스템은 유통현업을 떠난 후 컨설턴트로 근무하면서 롯데 백화점의 데이터 웨어하우스, LG백화점의 고객관리시스템(CRM), 이마트의 차세대정보시스템을 설계하였고...인터넷 쇼핑시스템은 인터파크에 이어 국내 2번째로 개발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금은 없어진 삼성인터넷쇼핑몰이었다.
삼성물산의 무점포TFT팀장으로서 삼성인터넷쇼핑몰의 전신을 개발할 때 필자는 인터넷쇼핑몰 관련 국내 커머스 측 대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터넷 결제시스템 개발 때 한국 대표로서 쿠알라룸프루에서 열렸던 SET(Secure Electronic Transaction) 컨퍼런스에 참여하여 인터넷 결제기반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방식이 현재 쓰이고 있는 인증서를 활용하는 결제 방식인데...이처럼 MD를 기반으로 상품의 소싱(sourcing)을 넘어 정보시스템 영역이나 건축인테리어 영역까지 확장되면서 필자의 MD솔루션의 다양성을 이룰 수 있게 되었던 점도 있다. 당시 필자가 개발하였던 인터넷쇼핑몰 사업의 후임이 인터넷쇼핑몰협회 회장을 맡기도... 하여간 필자는 MD기반의 신규사업에 있어서는 프론티어에 있어 왔다.
필자가 시행시장 업무와 유사한 경험은 GS리테일 임원으로 있을 때 개발사업을 맡으면서였다. 당시 유통빅3에 속하지 못한 GS리테일의 사업전략은 경쟁력이 떨어진 백화점과 마트를 롯데에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수퍼마켓과 편의점, 그리고 부동산 기반의 개발사업의 축을 강화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 필자가 맡은 영역이 시행사업과 비슷한 개발사업이었다.
필자가 신세계, 삼성, LG그룹에 이어 GS그룹으로 자리를 옯겼는데, 실제 대부분의 그룹사 이동이 필자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신세계에서 삼성물산 이동도 관계사 전배였지만, LG그룹에서 GS그룹 이동도 비슷했다.
필자는 삼성물산 명퇴 후 다른 유통컨설팅회사(KTB네트웍스 및 미래와사람 관계사)를 거쳐 LG CNS에 근무했는데, LG CNS의 컨설팅부문에서 전략 및 프로세스 컨설팅을 맡는 총괄컨설턴트로 있을 때 LG그룹과 GS그룹의 컨소시엄의 PM을 맡았었다.
필자의 발의로 성사된 도시철도 역사 및 차량기지 상업화 프로젝트에서 LG측 공동PM이었는데, GS그룹의 요청으로 LG그룹의 총괄컨설턴트에서 GS그룹 임원으로 이동하였다. 단일 PM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하기 위한 그룹사간 전배였다. 형식은 퇴직절차를 취했지만....
이 때 개발업무가 점포나 인터넷을 중심으로 기존 유통 관점에서 벗어나 지하철 역사와 차량기지를 기반으로 상류와 물류의 통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통합, 각종 고객의 통합을 목표로 서울 도시철도 147개 역사와 4개 차량기지를 상업적으로 리모델링 개발하여 30년간 임차운영하는 건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필자가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컨설팅을 하다가 제안하면서 이루어진 프로젝트로서 발의 이후 상당 수준 진행되는 가운데 언론에서 만든 정경유착이라는 틀에 걸려들어 무위로 그친 그런 건이었다. 이 때 사업의 특징은 네트웍을 기반으로 상류와 물류 등 다양한 기능이 통합된 MD였고,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은 매우 혁신적인 것에 해당하는데, MD고도화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도시철도공사와의 계약으로 추진되었다가 좌절되었지만 이 당시 준비조직을 활용하여 일반적인 MD사업모델로 지하철 9호선 전 역사 매장 일괄임차 운영, 신분당선 역사 일괄임차 운영 등이 필자가 수주하여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접목시켜 운영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델의 특징은 MD라는 것이 처음에는 매장내 입점업체 구성이나 상품조달에서 시작되지만, 고도화 단계에 들어갈 경우 온라인, 물류, 시스템과 연결되어 발전한다는 점이다. 아마 시행시장에서의 MD차별화의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쪽으로 MD가 변하려면 관련된 경험과 이력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시행사가 쉽게 접목하기는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처럼 새로운 MD모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시행사 중심이 아닌 운영사 중심으로 전환이 필요한데, 이러한 쪽으로 필자가 제안하는 것이 수탁운영 등이기도 하다.
MD솔루션이라고 하면 쉽게 생각하여 업체를 유치구성하는 그런 것을 넘어 문제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구체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방법은 기존 정착된 관행을 따라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MD 차별화는 현재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전제로 한다. 임대율을 올리거나 하는 것 같은 효율을 올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도저히 기존 방법으로는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롭게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대기업이라서 하는 점도 있지만, 실무적으로 접근하는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는 대기업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는 별로 수긍이 안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본질적인 부분을 터치하여 방안을 찾는 것이 MD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가 삼성물산이 유통부문을 스크랩할 때 명퇴를 선택하여 나오면서 유통컨설팅 회사에 갔고, 여기서 많은 시행 프로젝트에 대한 자문을 해왔다. 여기에는 MD 뿐만 아니라 건축, 운영 등 거의 모든 영역이 MD솔루션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것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베트남 최초의 백화점인 다이아몬드 플라자의 개발이다. 지금은 롯데가 수탁운영하고 있는 이 건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만든 백화점이다. 그리고 동남아 지역에서는 한 동안 유명한 백화점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도 포스코에서 베트남 1군에 고급 상가를 지었는데 당시 시장이 덜 개방된 상태라 베트남에서 조달된 상품으로는 채워 넣어야 하는데 채어 넣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컨설턴트로서 자문하러 가서 시설을 보니 국내백화점보다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외벽은 고급 사암으로 클래식하게 지어졌는데, 이런 건물을 포스코에서는 상가로 운영하겠다는 것이었다.
해당 건축물은 베트남 최초의 철골조 건물. 베트남의 현지법인(Vietnam Steel Company)과 합작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의 문제는 포스코 건설이 시공이익만 생각하고 진행하였는지, 고급스러운 시설에 걸맞는 상품은 베트남에 없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2차례의 마케팅 및 MD 등의 컨설팅(인테리어 설계 포함)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백화점으로 전환하여 위탁운영을 하라는 것이 필자의 솔루션이었다.
이러한 컨설팅 내용을 설득하기 위하여 베트남 공산당 주요 관계자 들에게 백화점이 어떤 것인지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상해 등 공산국가 중 백화점을 개발한 사례를 보여 주면서 겨우 겨우 백화점식으로 운영(임대나 분양이 아닌 직영)하는 것에 대한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필자의 컨설팅해 준 대로 운영을 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 포스코 입장이었고, 결국 필자에게 컨설팅 내용에 대해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졸지에 필자가 컨설팅 단계를 넘어 초대점장으로서 준비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없는 상품 만들어 낼 방법이 없어 당시 호치민시의 모든 상가와 공급 가능한 상품을 모두 조사하여 백화점 브랜드화 시키는 작업을 병행하여 채워 넣고 오픈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 때 보름에 한 번씩, 많을 때는 일주일 두 번씩 들어가며 오픈 준비를 하였고, 서울이 영하 18도일 때 베트남은 영상 30도가 되어 온도차 50도를 극복 못해서 갔다 올 때 마다 태반주사를 맞어가며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때 경험의 시사점은 유치할 업체가 없으면 상품을 모아서든 업체를 교육시켜서든 입점업체를 만들어서라도 채어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시행시장에서 MD의 문제가 이와 유사하다. 시장이 안 좋아져서 상가 쪽 MD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답은 있다. MD에 대한 관점을 업체 유치라는 쪽에 얽메어 있지만 않으면 솔루션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시행이익을 전용하여 MD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해결 가능하고, 실제 MD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분양 임대 방식보다도 더 큰 수익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를 위하여 민간이든 정부든(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제휴도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오로지 유치대행사만 바라보고, 분양이나 임대로는 구조로만 상가MD를 해결하려고 할 경우 실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솔루션 제시에 대해 성공한 사례를 제시하라는 업체가 많다. 그래서 필자가 해왔던 프로젝트 사례를 소개하면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거나 너무 오래 전이라서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하며 새로운 시도를 거절한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현 상가MD는 해결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아니면 모델에 불과한 새로운 시도에 대하여 성공사례를 찾으려고만 하지 말고,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류 세종 대표 / 010-7687-0034 / (주)류앤파트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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