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헌과 바위글씨로 조명한 지리산 용호구곡(龍湖九曲)의
입지 및 경관특성
노재현*
․강병선**
*
우석대학교 조경도시디자인학과․**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
A Study on the Location and Landscaping Characteristics of Yonghogugok
of Jiri Mountain Illuminated by Old Literatures and Letters Carved on the Rocks
Rho, Jae-Hyun*
․Kahng, Byung-Seon**
*
D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Urban Design, Woosuk University **Species Restoration Technology Institute, Korea National Park Service
ABSTRACT
The results of this study conducted to identify the substance, regional characteristics or landscaping of Namwon Yonghogugok,
which is the only valley of Jiri Mountain, based on Kim Samun's ‘Yonghokugok-Gyeongseungannae(龍湖九曲景勝案內)',
‘Yongseongji(龍城誌)' and position, meaning of letters carved and projection technique by ArcGIS10.0 on the rocks are as below.14)
The feature landscapes of the canyon of Yonghogugok, which is an incised meander and one of the Eight beautiful scenery
of Namwon, ponds, cliffs and rocks generated with metamorphic rocks and granites weathered by rapids torrents. As a result
of measuring the GPS coordinates of the letters carved on the rocks, excluding the 3 Gok Hakseoam and the distances based
on the origin and destination of the letters carved on the rocks using the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function
of Daum map, the total distance of Yonghogugok was 3.5㎞ and the average distance between the each Gok was 436.5m.
It is assumed that Yonghogugok was designated by Sarim(士林) of the Kiho School(畿湖學派) related to Wondong Hyangyak(元洞鄕
約) which is the main agent of Yonghojeongsa(龍湖精舍), the forerunner of Yonghoseowon(龍湖書院), betwee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early Japanese colonial era, in 1927. Its grounds are the existence of Yonghoyeongdang mentioned on
‘Yonghojeongsilgi'(龍湖亭實記), records of ‘Haeunyugo(荷隱遺稿)', ‘Yonghopumje(龍湖品題)' of Bulshindang(佛神堂),
‘Yonghojeongsadonggu Gapjachun(龍湖精舍洞口 甲子春)’ letters carved on the rocks and ‘Yonghogugok-Shipyeong(龍湖九曲十
詠)' posted on Mokgandang of Yonghoseowon.
Comprehensively considering the numerous poetry society lists carved on the stone wall of Punghodae(風乎臺), the Sixth
Gok Yuseondae, its stone mortar, ‘Bangjangjeildongcheon(方丈第一洞天)’ of Bulshindang and Gyoryongdam(交龍潭), the
Yonghoseokmun(龍湖石門) letters carved on the rocks, Yeogungseok adjacent to the First Gok and Fengshui facilities, centered
on Yonghoseowon and Yonghojeong, Yonghogugok can be understood as a unique valley culture formed with the thoughts
of Confucianism, Buddhism, Taoism and Fengshui.
‘Yonghogugok-Gyeongseungannae' provides very useful information to understand the place name, called by locals and landscaping
aspects of Yonghogugok in the late Joseon Dynasty. In addition, the meaning of “Nine dragons” and even though 12 chu(湫:
pond) of Yonghogugok Yongchudong including Bulyeongchu, Guryongchu, Isuchu, Goieumchu and Daeyachu are mentioned
on Yongseongji, a part of them cannot be confirmed now. Various place names and facilities relevant to Guryong adjacent
to Yonghogugok are the core of the place identity. In addition, the accurate location identification and the delivery of the
landscaping significance of the 12 ponds is expected to provide landscaping attractiveness of Yonghogugok and become very
useful contents for landscaping storytelling and a keyword of storyboard.
Keyword : Guryong Valley, Yonghojeongsa, Yonghogugok-Gyeongseungannae, Yonghogugok-Shipyeong, Bangjangjeildongcheon
■ 국문초록
김사문의 『용호구곡경승안내』와 『용성지』 그리고 바위글씨 의 위치와 내용 및 ArcGIS10.0의 투영기법을 활용한 지형분석 등을 통해 지리산에 설정된 남원 용호구곡의 장소 및 경관 특질을 밝히고자 한 본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남원팔경 제1경인 용호구곡의 협곡은 감입곡류천으로 변성암과 화강암 풍화층이 급류에 깎이면서 곳곳에 소(沼)와 단애(斷崖) 그리고 반석(盤石)이 특징적인 지형경관을 이루었다. 제3곡 학서암을 제외한 구곡 바위글씨 위치의 GPS좌표를 측정하고, 바위글씨를 기종점(起終點)으로 다음(Daum)지도 상의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기능을 이용하여 거리를 측정한 결과, 용호구곡의 총 연장거리는 약 3.5㎞이었으며 각 곡간의 평균거리는 436.5m로 계상되었다. 용호구곡은 1927년 용호서원의 전신인 용호정사(龍湖精舍)의 경영주체인 원동향약계와 관련된 기호학파 사림에 의해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 초기 사이에 설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근거는 「용호정실기(龍湖亭實記)」에 언급된 용호영당(龍湖影堂)의 존재와 『하은유고(荷隱遺
稿)』의 기록, 불신당(佛神堂)의 ‘용호품제(龍湖品題)’ 와 ‘용호정사동구(龍湖精舍洞口) 갑자춘(甲子春_1924년 봄)’ 바위글씨 그리고 용호서원 목간당에 게판(揭板)된「용호구곡십영(龍虎九曲十詠)」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용호서원과 용호정을 중심으로 풍호대(風乎臺) 석벽에 새겨진 다수의 시사명단(詩社名單) 그리고 제6곡 유선대(遊仙臺)와
그 곳의 돌절구, 불신당과 교룡담의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및 ‘용호석문(龍湖石門)’ 바위글씨 그리고 1곡 주변의
여궁석(女宮石)과 비보풍수 시설 등을 종합해 볼 때, 용호구곡은 유·불·선(儒·佛·仙)과 풍수지리사상이 습합되면서 형성된 독특한 구곡문화의 현장으로 이해된다.
김사문의『용호구곡경승안내』는 조선 말기 지역민이 가졌던 용호구곡의 지명과 승경관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또한『용성지』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용호구곡 용추동(龍湫洞)에는 불영추(佛影湫), 구룡추(九龍湫), 이수추(梨樹湫), 괴음추(槐音湫), 대야추(大也湫) 등 총 12개의 추(湫)가 언급되고 있으나 아쉽게도 일부는 현재 확인이 곤란하다. 한편 용호구곡 주변에 충만된 구룡(九龍) 관련 지명과 시설은 이곳 장소정체성의 핵심일 뿐 아니라 12개 추의 정확한 장소 규명과 경관의미 전달은 용호구곡의 경관매력도 제공은 물론 경관 스토리텔링을 위해 매우 유효한 콘텐츠이자 스토리보드의 키워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제어 : 구룡계곡, 용호정사(龍湖精舍),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용호구곡십영(龍湖九曲十詠),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 Ⅰ. 서론
중국 남송시대 주자(朱子: 1130∼1200)로 부터 연원(淵源)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의 구곡문화(九曲文化)는 조선조 성리학자들에게 도학(道學)의 가르침을 일깨어 주는 성리문화(性理文化)의 전범(典範)으로 널리 전파되고 또 향유되어 왔다(Rho, 2009).
구곡으로 설정된 계곡 및 하천은 뛰어난 자연경관일 뿐 아니라 구곡 설정자나 조영자의 유가미학적(儒家美學的) 정신이 오롯이 반영된 문화경관으로, 최근 자연 및 문화경관이 복합된 ‘구곡원림(九曲園林)’을 산수정원의 장르(genre)로 까지 인식하는 가운데 지역을 대표하는 경승지이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국내에 설정된 구곡이 주로 속리산권과 영남지역에 집중 형성됨에 따라 경상북도와 문경시 그리고 충청북도 제천시 등에서는 지역의 구곡 자원을 활용하여 ‘지역의 정체성 확립’, ‘문화재 지정 건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한 민간 활동’, 그리고 ‘구곡 관련 서적 발간’ 등 다양한 방법의 활용과 보전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실정에도 불구하고 구곡원림의 형성 및 향유가 폭넓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전라북도권역에서는 구곡 존재 여부의 확인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단지 노재현(Rho, 2011)이 임실과 진안에 걸쳐 설정된 이산구곡(駬山九曲)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 방안을 제시한 연구와 명승자원조사의 일부로서 무주 무계구곡(武溪九曲)을 기술(記述)한 것을 제외하고는 구곡의 자연 및 문화경관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연구는 전무하다.
본 연구의 대상인 용호구곡(龍湖九曲)은 이산구곡, 변산구곡(邊山九曲) 그리고 무계구곡(武溪九曲)과 함께 전라북도권에서 실체가 확인된 4개 구곡 중의 하나로, 지리산권 구곡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Kang, 2013)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의 있는 곳이다. 더불어 용호구곡은 현대 남원팔경의 제1경이며, 전래 남원팔경의 제7경인 ‘원천폭포(源川瀑布)’의 ‘원천’은 구룡계곡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1). 용호구곡이 위치한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와 구룡계곡은 지리산 둘레길과 연결하여, 트레킹코스로 정착되면서 서부 지리산을 대표하는 관광지로서도 각광 받고 있다2). 이에 따라 용호구곡의 각 경물이 단순한 구룡계곡의 경관자원으로 활용되고는 있지만, 구곡의 연원이나 특성 및 구곡문화와 관련된 가치와 의미를 제시할 만한 뚜렷한 안내서조차 없는 실정일 뿐만 아니라, 용호구곡의 경관구조와 장소 특성을 개괄한 문헌 및 자료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본 연구는 용호구곡에 대한 실체를 확인하고 구곡 설정자와 설정시기, 주변 지명 및 경물과의 관련성 그리고 구곡 위
치 및 경관특성 등을 조명함으로써 전라북도 구곡 문화경관의 보존과 활용 그리고 지리산국립공원의 탐방자원관리에 활용될 수 있는 기초자료 제공 등을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 Ⅱ. 연구방법
연구 대상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일원의 구룡계곡(Figure 1 참조) 중 용호구곡 구간이다. 본 연구는 문헌분석과 현장조사 그리고 주민 인터뷰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현장연구는 용호구곡 주변을 중심으로 상하 100m 권역 내 경물과 바위글씨 등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문헌조사는 지역향토지와 유산기 등을 통해 용호구곡의 지역성, 경관 및 장소 특질 등을 살피고 그 속에서 구곡과의 관계를 파악하였다. 본 연구의 핵심문헌은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의 1940년 작 국한문혼용체인『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3)와 남원 지지(地誌)인 『용성지(龍城誌)』4)번역본 그리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연재집(淵齋集)에 실린「두류산기(頭流山記)」를 중심으로 장소 및 경관 특성을 고구(考究)하고 지명과 문화경관적 요소를 고찰하였다. 현장조사는 GPS 측정기(좌표계: WGS84)를 통해 구곡 바위글씨를 기점으로 위치정보를 측정하였다. 이 때 국립지리정보원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항공사진자료(좌표계: TM 한국중부원점)를 바탕으로 ArcGIS10.0의 투영기법을 활용하여 구곡이 명기된 바위글씨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또한 ArcGIS10.0의 3D Analyst Tool을 활용하여 수치지도 상에 DEM(Digital Elevation Model, 수치표고모델)을 제작한 후 구간별 프로파일(Profile)을 분석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종․단면도를 작성하여 구간별 평균 경사도를 계상하였다. 더불어 위성지도와 1 : 25,000 지형도(도엽명: 남원)에 곡별 위치를 비정하는 한편 다음(Daum)지도 상의 응용 프로그램인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를 이용
하여 곡간 거리를 측정하고 구곡 분포도면을 작성하였다.
■ Ⅲ. 결과 및 고찰
1. 용호구곡의 입지특성
1) 지리적 특성
남원팔경의 제1경이기도 한 구룡계곡의 핵심을 용호구곡 또는 구룡구곡(九龍九曲)이라고도 한다. 구룡계곡은 지리산 만복대(1,438m)에서 발원하여 남원시 주천면으로 흘러드는 원천천(源川川, 일명 용담천) 중간에 형성된 계곡으로 만복대에서 급경사로 흐르던 계류가 주천면 고기리·덕치리에서 운봉분지의
외곽을 이루며 완만하게 흐르다 구룡폭포에서 경사가 급하게 변하며 용호구곡의 시점(始點)을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원에 태을(太乙), 북극신(北極神)이 그 위에 거하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거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5). 한국어문학회(The Korean Language Society, 1988)에서 찬술한「한국의 지명총람」에는 “구룡폭포, 내촌 동쪽에 있는 폭포로 구룡농주(九龍弄珠)란 명당이 있다.”라는 풍수지명이 실려 있다. 최창조(Choi, 2011)의 『한국의 자생풍수 2』에는 “구룡폭포, 내촌 동쪽에 있는 폭포, 구룡쟁주형(九龍爭珠形)의 명당이 있다”라고 기술되고 있다.
구룡계곡은 주천면 고기리의 정령치 아래 선유폭포로부터 흘러내리는 구룡천이 만드는 계곡으로 구룡천은 섬진강의 지류인 요천의 또 다른 지류로 500m가 넘는 운봉고원의 서쪽을 차별 침식시켜 급경사를 이루며 주천면으로 흘러내려 간다. 구룡천은 급사면의 두부침식(頭部侵蝕)으로 운봉분지에서 하천쟁탈을 일으키면서 분수계를 변화시킨 하천으로 구룡천에 의해 만들어진 계곡은 감입곡류천의 형태를 보인다.
고기리 아래의 단층부에서 구룡폭포가 형성되어 절경을 이루며,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급경사 계곡은 주변의 변성암과 화강암 풍화층을 깎으면서 곳곳에 용호석문의 용소와 같은 소(沼)와 유선대, 경천벽과 같은 단애(斷崖), 반석(盤石) 등을 형성한다
http://namwon.grandculture.net
용호구곡의 지형 특성을 확인하기 위한 종단면도로서 용호구곡의 제9곡인 교룡담을 핵심으로 하는 구룡폭포는 산지 정상부에 형성된 구곡으로 9곡을 기점으로 제8곡인 경천벽, 제7곡 비폭동 구간은 매우 급한 경사를 보이다가 제5곡 유선대를 기점으로 서서히 경사가 완만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Figure 2 참조).
이렇듯 용호구곡은 대표적 산지형 구곡으로서의 특성을 보인다. 용호구곡의
각 곡 사이 평균 경사도를 파악한 결과, 6-7곡 사이가 26.3°로 가장 급했으며, 7-8곡과 5-6곡이 각각 18.6°와 18.5°의 경사를 보인 반면, 2-3곡이 2.1°로 가장 낮았다. 평균 경사도의 평균값은 13.2°로 확인되었다(Figure 2 참조)
2) 구곡 좌표 및 거리
구곡별 경관의 특징적 이미지는 Figure 4와 같다. 또한 용호구곡 각 곡의 경관상과 바위에 새긴 곡명 및 GPS좌표는
Table 1과 Figure 5와 같다
한편 구곡 간의 거리를 측정한 결과, 제1곡 송력동에서 제9곡 교룡담까지 용호구곡의 총 연장거리는 약 3.5㎞로 계상되었다. 제3곡 서암에서 제4곡 유선대까지의 거리가 887m로 가장 길었으며, 제7곡 비폭동에서 제8곡 경천벽까지가 147m로 가장 짧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각 곡간의 평균거리는 436.5m로
계상되었다(Table 1 참조).
3) 구룡전설과 관련 지명
용호구곡 제9곡인 교룡담은 만복대에서 발원한 계류가 이곳에 이르러 중앙에 불쑥 튀어나온 바위로 인해 두 갈래 추(湫)를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꿈틀거리듯 하므로 유래된 명칭이다(Figure 7 참조). 이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라는 전설이 담겨 있는 길이 약 30m의 와폭(臥瀑) 형태이다.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하늘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내려와 폭포를 하나씩 끼고 놀다 승천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명승 제1호인 청학동 소금강계곡에도 아홉 마리의 용이 폭포 하나씩을 차지하였다고 하여 구룡폭포라 전해지는 바, 지리산 구룡폭포 또한 동일한 전설과 상징을 잉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에 입지한 구룡폭포 또한 폭포 아래 금강산을 지키던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깊이 13m 가량의 구룡연이 있으며, 폭포 위에는〈금강산 8선녀〉의 전설로 유명한 상팔담(上八潭)이 있고, 그 주위에는 화강암의 암추(巖錐)와 계곡이 어우러진 절경을 이룬다. 이렇듯 ‘구룡’이 포함된 명칭의 폭포는 승경의 요처로, 구곡의 숫자 ‘9(九)’와 ‘아홉 개 못(潭)을 점유한 굽은 모양의 아홉 마리 용’은 상호 의미상승 작용을 유도하며 구곡 승경의 절정을 이룬다. Figure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용호구곡 주변에는 ‘구룡(九龍)’ 즉 아홉 마리 용과 관련된 지명과 시설로 충만하다. 관련 지명으로는 구룡계곡과 구룡폭포 이외에도 구룡천(九龍泉), 구룡대(九龍臺), 구룡치(九龍峙), 구룡패(九龍沛), 구룡봉(九龍峰) 등의 지명이 발견되며, 시설로는 구룡암(九龍庵), 구룡정(九龍亭), 구룡사(九龍寺), 구룡교(九龍橋) 등이 산재한다.
2. 용호구곡의 설정과 바위글씨
1) 용호구곡의 설정자와 설정시기
용호구곡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㤠, 1607~1689)의 화양구곡을 필두로 기호사림에 의해 설정된 구곡임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쉽게도 용호구곡의 설정시기와 설정자에 대한 명문화된 기록이나 자료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용호구곡 제2곡 육모정 인근의 용호서원 또는 그 전신(前身)인 용호당서원이나 용호정사의 운영 및 이용주체에 의해 구곡이 설정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Figure 8-h 참조). 본 연구의 조사과정에서 목간당에 게판된「용호구곡십영(龍虎九曲十詠)」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는 구곡시와 팔경시가 습합된 양상으로서 그 내용은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悼歌)를 차운한 구곡시의 성격을 보인다. 왼쪽 간지에 ‘호상병수(湖上病叟)’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의 작자(作者)가 ‘병수(病叟)’라는 인물임이 간파된다. 이를 통해 병수라는 인물에 의해 용호구곡이 설정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추후 포괄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조사를 요하는 부분이다.
한편 1곡과 2곡 사이에 위치한 불신당 석벽에는 일부 마모되어 식별이 곤란한 “龍湖品題 己巳春松秦與諸 金逆次九曲池名□□□年 八斗孫待行三月望日”이란 가는 글씨[細筆]가 음각되었
는데(Figure 6 참조), 이 중 ‘용호품제(龍湖品題)’라는 글로 미루어 용호구곡 제영과의 관련성이 있음이 감지된다. 용호구곡의 설정시기 또한 단정 지을 수 있는 자료가 현재까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상기 바위글씨의 ‘己巳年 春’이란 기록에 주목할 때, 고종6년(1869년) 또는 1929년으로 추정됨에 따라 조선 말기
또는 늦어도 일제강점기 초에 설정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Figure 6. Letters Carved on the Rocks
(Yonghopumje)
2) 구곡명의 의미 및 사상
바위글씨에 의존하여 파악된 구곡별 명칭은
제1곡 송력동(松瀝洞),
제2곡 옥룡추(玉龍湫),
제3곡 학서암(鶴捿岩),
제4곡 서암(瑞岩),
제5곡 유선대(遊仙臺),
제6곡 지주대(砥柱臺),
제7곡 비폭동(飛瀑洞),
제8곡 경천벽(擎天壁) 그리고
제9곡은 교룡담(交龍潭)이다.
구곡 명칭의 의미를 문헌과 증언에 의해 추적한 결과는 Table 2와 같다.
대부분의 구곡이 일정한 설정주체에 의해 계획적인 기도 하에 구곡 경물명을 부여한 것과는 달리 용호구곡 경물명 설정에는 여러 사상이 녹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제7곡의 명칭인 ‘지주대’나 제8곡 ‘경천벽’과 같은 유교적 개념이 있는가 하면, 반면 ‘독경하는 중의 모습’을 표
현하는 ‘서암’과 같은 불교적 색채도 가미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5곡 ‘유선대’와 같은 도교적 색채도 드러나고 있다. 또한 제4곡 ‘학이 깃든 바위라는 의미의 학서암’에서 ‘학(鶴)’은 부처의 화현(化現)이자 신선세계와 장수의 희구, 은일자의 고고한 삶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서(Kim and So, 2012: 57) 학서암은
학과 같이 고고하게 살겠다는 유자(儒者)로서의 포부뿐만 아니라 불교·도교적 상징 의미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3) 바위글씨
Table 3은 용호계곡에서 확인된 바위글씨를 구룡분소에서 육모정 사이의 불신당구역, 육모정과 용호정 영역 그리고 구룡폭포 상부와 구룡정 주변으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이다. 불신당구역에서는 반감실(半龕室) 암벽에 용호석문,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등의 바위글씨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남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은 불교 염불신앙에서의 기원을 표시한 범어(梵語)가 적혀있는데, 이는 1곡 송력동에서 약 200m 이격된 동남쪽에 자리한 폐사된 송림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육모정과 용호정 주변 즉 용호구곡 제2곡인 옥룡추 주변에는 바위글씨가 밀집되어 있는데, 특히 이 구역의 바위글씨는 육모정 아래의 불이대(不二坮)와 풍호대(風乎臺) 석벽에 집중되어 있다. 풍호대 명칭은 후술할 김시문의『용호구곡승경안내』에서는 고암대(鼓巖臺)로 지칭되고 있다.
용호정 아래의 풍호대 석벽에는 ‘용호육우(龍湖六愚)․용호구로회(龍湖九老會)․용호삼우(龍湖三友)․삼남매동작(三男妹同酌)’ 등 주로 용호시사(龍湖詩社) 모임과 관련된 인명이 빼곡히 적혀있어 이곳이 원동계회(元洞契會)와 시율풍류(詩律風流)의 현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용호육우’와 ‘용호구로회’ 바위글씨 관지에 갑자년임을 밝히고 있어, 불이대 바위글씨와 함께 1864년 또는 1924년 쓰였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한편 용호구곡 각 곡의 바위글씨는 모두 유사한 크기의 해서체로 확인됨에 따라 일정한 설정 주체에 의해 구곡 바위글씨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2곡과 4곡 그리고 6곡은 종서(縱書)로, 그 나머지는 횡서(橫書)로 기재되어 있다. 제9곡 교룡담에서는 이종묵(李鐘默, 생몰년미상)과 이종학(李鐘鶴, 생몰년미상)이 새긴 것으로 보이는 방장제일동천과 용호칠주(龍湖七柱) 태홍기(太弘基) 등 7인의 명단 위에 ‘구룡패’라는 바위글씨가 또렷하다. 한편 구룡폭포 상부와 기우제를 지냈다는 구룡정 아래 석벽에는 종서로 ‘구룡대’라는 바위글씨가 보
이며(Figure 7-d 참조), 이밖에도 친목계원의 명단 등을 각자한 인명글씨가 파악된다.
3. 용호구곡의 경관특성
1) 구곡 설정과 향유의 중심인 용호서원
용호구곡 제1곡인 송력동은 관리사무소에서 아래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6). 이곳을 통상 ‘약수터’라고 하는데 탐방객들의 접근이 어려워 제2곡인 옥룡추가 사실상 용호구곡의 관문(關門)이 되고 있다. 제2곡 옥룡추 인근에 위치한 용호서원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원동향약계(源洞鄕約契)7)에 소속된 지역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하였다. 초기에는 중국의 주자(朱子)를 배향하였으나, 이후 연재 송병선을 비롯하여 그의 문하생이며 설립 주체인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생몰년미상),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생몰년미상) 등을 배향하고 있다8). 1974년 시설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경양사(景陽祠)를 건립하였다http://namwon.grandculture.net
솟을대문으로 구성된 외삼문에는 용호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로 “龍湖九曲開南州名院’, ‘方壺千疊作東國巨嶽”라고 쓰인 주련(柱聯)은 지리산과 용호구곡 그리고 용호서원의 관련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Figure 8-a 참조). 또한 내삼문에는 용호정사(龍
虎精舍)라 게판되어 있고(Figure 8-b 참조), 내부에는 서재 시설인 목간당(木澗堂: Figure 7-d 참조)과 수성재(須成齋:
Figure 7-c 참조) 그리고 맞배지붕의 경양사(Figure 8-f 참조)가 자리하고 있다.
목간당과 수성재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파악되며, 목간당의 주련 글귀 중 하나인 “永棄人間事 吾道付滄洲(영원히 인간을 버리고 나면 나의 도가 은인이 사는 곳과 부합된다”(Figure 8-g 참조)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귀는 기호 사림의 맹주이자 그의 9대손인 주벽 송병준과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련의 내용은 송병
선이 설정한 무주 무계구곡(武溪九曲) 제4곡 일사대에도 바위글씨로 남아있다
육모정 하단 석벽에는 ‘용호정사동구(龍湖精舍洞口)’와 ‘갑자춘(甲子春, Figure 9 참조)’이란 바위글씨가 전한다. 이 바위 글씨는 1864년 또는 1924년 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은 정령치에 이르는 60번 지방도로가 개설되기 전에 용호서원으로의 접근 양상을 짐작케 하는 바위글씨로, 1927년에 개원(開院)된 용호서원이 최소한 갑자년인 1924년 전후에 이미 ‘용호정사’라는 이름의 정사로 존재했음을 알리는 표식으로 간주된다. 나아가 용호서원 내삼문의 현판이 ‘용호정사’인 점 또한 이러한 추론을 반증하고 있다.
한편 1936년 조선 말기의 문인 정상호(鄭尙鎬)가 편저한 문집인『하은유고(荷隱遺稿)』「상시설(傷時說)」에서는 향약 재실을 중수하면서 남원의 용호당서원(龍湖堂書院)이 철폐되어 봉안할 곳이 없어진 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의 영정을 모셔온 시말(始末)과 이후 서원 내 재실이 성립되면서 이 영정이 철거된 일을 기록해 유가(儒家)의 도가 땅에 떨어짐을 근심하는 내용이 발견된다(http://encykorea.aks.ac.kr).
용호정에 현액된「용호정실기(龍湖亭實記)」에 따르면 “숙종 을묘년(1675년) 마을에 세거하던 문중이 계(契)를 결성하고 성금을 추렴하여 용호가에 중국에서 가져온 남전(藍田) 여대림(呂大臨, 1040~1092)과 회암(晦庵) 주자의 진영(眞影)을 봉안할 사당을 세웠다. 처음에는 ‘무이(武夷)’라고 부르다가 후에 ‘용호(龍湖)’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용호영당 곁에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선비들의 강신(講信) 장소로 활용하였다가 후에 우암의 영정을 함께 봉안하고 봄·가을로 향사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원천방
용호동(源川坊 龍湖洞)이라 불리던 곳이다.”(Kang, 2013; 101
Requotation)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전에 이미 ‘용호당서원’ 또는 ‘용호영당(龍湖影堂)’이란 명칭의 서원이나 정사가 있었음에 무게가 실린다.
이와 같은 조사 내용으로 볼 때 여타 구곡과 같이 용호서원 또는 그 전신인 용호정사의 주체인 유자(儒者)들이 중심이 되어 설정되고 향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용호서원은 중국 복건성의 주자가 경영한 무이구곡 제5곡에 건립된 무이정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2) 선계와 불계의 공존
앞서 언급한 제1곡과 제2곡에 이르는 도로 왼쪽 석벽에 ‘용호석문(龍湖石門)’ 이라 음각(陰刻)된 바위글씨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9)의 필적으로 전해진다(Figure
10-a 참조).
이곳은『용호구곡승경안내』에서 불신당(佛神堂)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자연 암벽이 벽감(壁龕)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측면에는 노주현(盧洙鉉)이 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이란 불교 기도법의 어휘가 종서(縱書)되어 있고, 기도터로 활용되었던 흔적이 발견된다. 그 좌측으로는 ‘방장제일동천 김두수(金斗秀) □□서(□□書)’라고 새겨져 있다(Figure 10-b 참조). 이 문구는 ‘방장산 즉 지리산의 으뜸 경관’이자 ’신선(神仙)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서, 승경 용호구곡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있다. 후술할 김사문의 『용호승경안내』에 따르면 이 바위글씨는 오른쪽 관지(款識)의 표기처럼 ‘김두수’가 8세 때에 육필(肉筆)한 것이라고 한다.
구곡 교룡담에도 이종묵(李鐘默, 생몰년미상)과 이종학(李鐘鶴, 생몰년미상)이 새긴 것으로 보이는 ‘방장제일동천’이란 동일한 내용의 바위글씨가 또렷하다(Figure 7-c 참조). 또한 제6곡 유선대(遊仙臺)에는 신선바둑의 전설과 함께 은선병(隱仙屛)과 돌절구가 있다. 괴산 선유동구곡 제4곡의 연단로(鍊丹爐)처럼 이곳의 은선병 전면에 위치한 돌절구는 위가 평평하고 가운데가 절구처럼 움푹 패어 있어 신선들이 약 금단(金丹)을 만들던 시설로 추정된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용호구곡경승안내』에는 “절벽 위에는 석굴(石窟)있어 이 역시 선인들이 약(藥)을 저장(貯藏)해 놓은 곳”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돌절구에서 생산한 환약(丸藥)을 보관하기 위한 암굴로써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상징화한 공간으로 짐작된다10).
이렇듯 용호구곡에는 신선세계와 신선전설을 제재(題材)로 동천복지(洞天福地) 및 유선(遊仙)과 연단복약(鍊丹服藥)을 통해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등 구선(求仙)의 흥취와 동경(憧憬)이 담겨있다.
3) 여궁석과 비보풍수의 현장 내촌마을 입구 맞은편의 용호구곡 제1곡 송력동 바로 아래 지류에는 ‘석녀골(石女谷)’ 혹은 ‘보지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Figure 11-c 참조). 이곳은 하류(河流)가 기반암을 아래로 파서 형성된 모양이 마치 여자의 성기(性器)와 흡사해 붙은 지명으로(Figure 11 참조), ‘씨녀바위’ 혹은 여궁석(女宮石)으로 불리는 이 일대는 음기(淫氣)가 강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고 전한다. 또 일설에는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언덕으로 냇물에서 목욕을 할 경우 멀리서도 노출되어, 음기를 약하게 하고 자유롭게 목욕 할 수 있도록 둑을 쌓고 소나무를 식재하였다고 한다(http://namwon.grandculture.net).
지금도 석녀골 앞에는 열 그루의 노거목인 소나무가 무성하며, 높이 2~3m, 폭 2m, 길이 15m 가량의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Figure 11-b 참조), 이후 더 이상 흉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음기도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의 일부 남자들은 여궁석에 몸을 담그고 기(氣)를 보(補)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용호구곡 입문처인 제1곡은 비보풍수적 경관 특성이 부각되고 있다.
지금껏 거론된 바와 같이 용호구곡의 경물명 명명(命名)의 특성 중, 주변의 경관 및 장소 특성 속에는 용호구곡에 혼재되
어 펼쳐진 유·불·선과 풍수지리사상 등이 재차 확인된다. 이와 같은 결과를 볼 때, 용호구곡은 Choi(1990)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실적 차안(此岸)에서 초현실적 선계 동경의 의지뿐 아니라, 불교적 피안(彼岸)의 염원 등 유·불·선교의 사상이 담겨진 관념적 실체로 파악된다. 여기에 더하여 풍수지리를 통한 현세 발복(發福)과 미래낙원(未來樂園) 사상이 펼쳐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4. 고문헌 속의 용호구곡
1) 김사문의『용호승경안내』
김사문의 『용호구곡승경안내』저술 이전의 용호구곡 관련 자료는 연재 송병선의「두류산기(頭流山記)」가 있다. 이 유람기에서는 용호구곡에 대해, “길을 돌아 용호동(龍湖洞)으로 들어서니 계곡이 매우 깊고 그윽하며 흰 바위가 있었다. 시내의 너럭바위에는 구멍이 파
여서 도랑을 이루었는데, 맑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아래로 떨어져 맑은 못을 이루었다. 그 위에는 또한 주자(朱子), 송자(宋子) 두 선생의 영정을 모셨던 집의 옛 터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숙성령(宿星嶺)을 넘어 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으니, 이곳이 지리산 남록(南麓)으로 하동(河東) 땅이었다11).”라고 서술한 부분이 있다.
위 기록에 따르면 호경마을에 주자와 우암을 모신 사당이 존재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용호구곡경승안내』에서는 이를 찾을 수 없다.
김사문의 『용호구곡경승안내』에는 제1곡인 송력동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송림사가 폐사 된 전설,
제2곡 불신당 주변의 석문(石文)을 쓴 작자들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석상(石像)을 안치한 ‘불신당(佛神堂)’을 고대 송림사(松林寺)의 유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제2곡 옥룡추를 설명하면서 천명이 앉을만한 바위, 명창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이 소리를 익히던
곳, 고암대 석벽의 수많은 인명 바위글씨를 언급하였다. 권삼득은 우리나라 최초의 양반출신 소리꾼으로서 그가 소리공부로 득음(得音)한 바위를 명암(鳴岩)이라 하는데, 이 바위는 날이 가물 때 바위가 울었다고 한데서 유래되었다12).
현재 이곳에는 그의 행적을 알리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제4곡에서는 칠성암(七星唵)의 명칭 유래, 제5곡은 유선대에 전해지는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13)이 세상을 등지며 방장산 용추동에 별장을 짓고 ‘산서병옹(山西病翁)’이라 자처하며 은둔(隱遁)하였다는 일화(“絶意世事 遂築別業於方丈山西龍湫洞裡 徜徉逍遙 自稱山西病翁”)와 신선의 돌절구[搗藥石臼]를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제9곡 교룡담을 석룡이 구부려 누워 머리를 든 채 물결소리를 듣는 용화굴(龍化窟)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용호의 구룡이 삼신산의 으뜸 승경임을 자부하고 있다14).
현재 용호계곡을 대표하는 지명은 육모정(六茅亭)이다.『용호구곡경승안내』에는 “봉우리를 돌아 길을 접어들면 육각형의 새로 지은 정자가 옥룡추의 쏟아지는 폭포에 임하여 멀리 아득하게 보이니”라고 표현했음을 볼 때, 1930년대 후반의 용호정은 육모 형태였음이 추론된다. 육모정은 용호구곡 제2곡 옥룡추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호정은 계곡 건너 육모정 맞은 편 둔덕에 위치한다.
『용호구곡경승안내』에는 용호정이 건립된 곳의 지명을 고암대(鼓巖臺)로, 이와 연결된 둔덕의 명칭은 옥녀봉(玉女峰)으로 소개하는 바, 이는 중국 무이구곡 제2곡의 옥녀봉을 그대로 차용한 경물명이다. 고암대와 옥녀봉은 용호구곡 제2곡 용소를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육모정은 역사 속에 실재하지 않았고, 육각형의 용호정(龍湖亭)만 있었을 뿐인데도 실제로는 육모정이 지역의 대표적 명승으로 이름나 있다는 점이다15). 이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육모정이 용호구곡 탐방의 기점이란 인식이 만연하여 실제 용호구곡 제1곡인 송력동은 탐방 트레일(trail)에서 소외
되고 있는 실정이다.
2) 용성지(龍城誌)
용성지에 기록된 용호구곡 내용은 계곡에 형성된 추(湫)를 중심으로 기술되었음을 볼 때, 용호구곡의 못(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형경관적 특성이 여실히 드러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추동(龍湫洞), 원천방(源泉坊)은 지리산 가운데에 있는데, 열두 개의 추(湫)가 있다16). 첫째로 불영추(佛影湫)요, 둘쨰로 구룡추(九龍湫)이다. 구룡추 위에는 옥녀봉(玉女峯)이 있고, 옥녀봉 아래에는 풍호대(風乎臺)가 있다. 풍호대 아래에는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커서 손님 3∼4명이 앉을 만하고, 그 깊이는 가히 한발 남짓하다. 주위에 또 반석(盤石)이 있는데, 백여 명이 가히 앉을 만하다. 반석 동쪽에는 서재(書齋)가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불영추는 제2곡 옥룡추의 이명(異名)인 것으로 추론된다(위치상 오류가 있음). 구룡추 또한 반석과 서재 등 지형과 주변 경물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현 육모정 아래에 있는 제2곡 옥룡추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니, 용성지의 나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셋째로 못에 마구간이 있어 그 모양이 마치 말구유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이르기를 이수추(梨樹湫: 배나무못)라고도 하는데, 못 위에 신선(神仙)들이 놀았다는 대(臺)가 있고, 대의 변(邊)에는 조그마한 돌절구가 있다.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선인(仙人)들이 약(藥) 방아를 찧는 곳이라 한다. 절벽 위에는 석굴(石窟)있어 이 역시 선인들이 약(藥)을 저장(貯藏)해 놓은 곳이라 한다. 또 이르기를 괴음추(槐音湫)라고 한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진술 내용으로 보아 말 구유 즉 말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과 비슷한 형상을 갖는 곳은 도로개설에 따른 교란으로 다소 변형
되었지만, 용호구곡 제4곡인 챙이소와 구시소17) 중 후자의 설명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단락 구분 없이 신선이 놀았다는 대(臺)를 운운(云云)한 것으로 미루어 이는 제5곡 유선대를 구분하지 않고 연속하여 설명함으로써 비롯된 오류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수추에 있다는 직경 14㎝, 깊이 16㎝ 크기의 돌절구
는『용호구곡경승안내』에서도 등장하는데(Table 4 참조), 현재도 제5곡 유선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괴음추 역시 유선대 전후에 존재했던 못으로 판단되는바 상류에 돌절구가 있다는 설명으로 미루어 돌절구 하류 구간에 형성된 못을 지칭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용호구곡경승안내』에서 언급한 절벽 위의 석굴은 본 연구에서 확인하지 못하였다.또한 승경안내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또 이르기를 못의 문(門) 부분에는 큰 돌이 잘려 세워져 문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곳에서 놀기 위해서
는 모두가 이곳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고 나오고 한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새로운 못이라 하는데, 깊고 푸르러서 검게
보이며, 신령(神靈)스러운 영물(靈物)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대야추(大也湫)라 하는데, 여기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라 하였다. 그 나머지 세 개의 추는 이름이 없다.”
이 대목 또한 분절이 없이 서술하고 있어 하나의 경물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서 진술내용과 같이 별도의 대상을 구분 없이 연결하여 설명함으로써 생긴 오류로 보인다.
여기서 언급된 것은 각각 석문추와 대야추로 석문추는 제8곡 경천벽(擎天壁) 인근에 형성된 추로 추정된다. 더불어 ‘신령스러운 영물이 사는 곳’,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는 설명의 추는 제9곡 교룡담을 지칭한 것으로 사료된다. 6또한 Table 4는 용성지 관련 용호구곡 추의 명칭과 해당 지명의 추정지(推定地)를
정리한 것이다.
지금껏 고찰한 바처럼 구룡(九龍)의 상징성과 함께 12개 추의 정확한 구명과 경관의미 전달은 용호구곡의 경관매력도 제공은 물론 경관 스토리텔링을 위해 매우 유효한 콘텐츠이자 스토리보드 키워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9
■ Ⅳ. 결론
본 연구는 용호구곡의 입지특성과 구곡 설정자와 설정시기 그리고 구곡 위치 및 경관특성 등을 조명하고자 김사문의『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와『용성지(龍城誌)』 그리고 바위글씨를 통해 지리산에 설정된 용호구곡의 입지 및 경관 특질 등을 밝힘으로써, 전라북도 구곡 문화경관의 보존과
활용 그리고 지리산국립공원 탐방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초자료 제공 등을 목적으로 시도되었으며, 연구를 통해 추출된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남원팔경 중 제1경이기도 한 용호구곡의 제9곡 교룡담은 ‘구룡농주(九龍弄珠)’ 또는 ‘구룡쟁주형(九龍爭珠形)’의 명당으로 지리산 서북쪽 능선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대표적 명승이었다. 용호구곡의 지형경관은 급사면의 두부침식(頭部侵蝕)과정을 통해 운봉분지에서 하천쟁탈을 일으키면서 분수계를 변화시킴에 따라 형성되었다. 감입곡류천 형태의 협곡은 변성암과 화강암 풍화층이 급류에 깎이면서 곳곳에 소(沼)와 단애(斷崖) 그리고 반석(盤石) 등이 특징적인 하천경관을 이루었다.
●둘째, 바위글씨를 기점으로 한 현장 확인 및 GPS좌표 측정 결과,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 제2곡은 옥룡추(玉龍湫), 제3곡은 학서암(鶴捿岩), 제4곡은 서암(瑞岩), 제5곡은 유선대(遊仙臺), 제6곡은 지주대(砥柱臺),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 제8곡 경천벽(擎天壁), 제9곡은 교룡담(交龍潭)으로 파악
되었으나, 도로 개설 등의 개발사업에 따른 훼손과 교란으로 제3곡 학서암 바위글씨는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Daum)지도
API상의 거리재기 기능을 통해 분석한 결과, 바위글씨를 기종점(起終點)으로 한 용호구곡의 총 연장거리는 약 3.5㎞이었으며, 최단은 7-8곡 사이의 147m였고, 최장은 4-5곡 사이로 887m의
거리를 보였으며, 각 곡간의 평균거리는 436.5m로 계상되었다.
●셋째, 용호구곡은 1927년 용호서원의 전신으로 파악되는 용호정사(龍湖精舍)의 경영주체인 원동향약계와 관련된 기호사림에 의해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에 설정 경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근거는「용호정실기(龍湖亭實記)」의 용호영당(龍湖影堂)의 존재『하은유고(荷隱遺稿)』의 기록과 불신당(佛神堂) ‘용호품제(龍湖品題)’ 및 ‘용호정사동구(龍湖精舍洞口) ‘갑자춘
(甲子春)’ 바위글씨 그리고 용호서원 목간당에 게판(揭板)된「용호구곡십영(龍虎九曲十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넷째, 용호서원과 용호정을 중심으로 풍호대(風乎臺) 석벽에 새겨진 다수의 시사명단(詩社名單) 그리고 제6곡 유선대(遊仙臺)와 신선전설과 주변 돌절구, 불신당(佛神堂)과 교룡담의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및 ‘용호석문(龍湖石門)’ 바위글씨 또한 제1곡 주변의 여궁석(女宮石)과 비보풍수 시설 등을
종합해 볼 때, 용호구곡은 시간 경과에 따라 유교와 선교 이외에 불교와 풍수지리사상 등의 향유자에 의해 습합되면서 형성된 구곡문화의 현장으로 이해되며, 이는 추후 보다 심화된 연
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다섯째, 김사문의『용호구곡경승안내』에는 제1곡 송력동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송림사가 폐사가 된 전설, 제2곡 불신당 주변의 석문(石文)을 쓴 작자들, 제4곡 칠성암(七星唵)의 명칭 유래, 제5곡 유선대에 전해지는 산서(山西) 조경남(1570~ 1641)의 일화, 제8곡 경천벽(擎天壁)과 제9곡 용화굴(龍化窟)의 경관상 등을 자세하게 설명·묘사하고 있어 조선 말 지역민이 품었던 용호구곡의 경관 인식과 용호구곡의 경물 및 관련
지명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여섯째,『용성지』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구룡계곡에는 용추동(龍湫洞)의 불영추(佛影湫), 구룡추(九龍湫), 이수추(梨樹湫: 배나무못), 괴음추(槐音湫), 대야추(大也湫) 등 총 12개의 추(湫)가 언급되었으나, 일부는 현재 확인이 곤란하다. 한편 용호구곡 주변이 구룡 관련 지명과 시설로 충만함을 볼 때, 구룡(九龍)의 상징성과 함께 이들 12개 추의 정확한 구명과 경관의미 전달은 용호구곡의 경관매력도 제공은 물론 경관 스토리텔링을 위해 매우 유효한 콘텐츠이자 스토리보드 키워드로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용호구곡 제2곡 주변에 입지한 육모정은 역사 속에서는 실재하지 않았고, 육각 모형의 용호정만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육모정만이 높은 지명도와 잘못된 인식으로 왜곡된 현실은 조속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전래구곡의 이해와 경관해석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구곡시와 구곡도가 매우 유효한 자료를 제공해 주지만 용호구곡은 구곡시나 구곡도가 전해지지 않는 까닭에 한정된 문헌자료와 바위글씨에 의존한 관계로 고증의 어려움이 수반되었다. 또한 주변 여러 시설과 문화현상에 깃든 사상적 배경에 대한 심화 연구가 절실함을 느낀다. 더불어 추후 용호서원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후속연구와 새로운 사료의 발굴 등으로 구곡 설정자 및 설정시기에
대한 충분한 고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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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1982년 10월 남원문화원과 남원산악회가 공동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설정한 현대 남원십경은
①구룡계곡
②뱀사골의 옥류와 단풍
③광한추월
④만복대의 갈대와 백설
⑤실상사의 아침과 3층석탑
⑥반야봉의 낙조
⑦세걸산에서 본 지리연봉
⑧교룡낙조
⑨춘향과 이도령고개
⑩여원치의 석양이다.
한편 전래 남원팔경은 ①蛟龍落
照 ②丑川暮雪 ③錦岩漁火 ④飛亭落雁 ⑤禪院暮鍾 ⑥廣寒秋月 ⑦
源川瀑布 ⑧鶉江歸帆 ⑧萬福歸僧이며 이 중 제7곡 源川瀑布는 일
명 구룡폭포로 용호구곡의 최정점 교룡담을 지칭한다.
주 2) 남원시는 관광객들을 위해 9.5km에 이르는 구룡폭포 트레킹 길을 조성했
고 구룡폭포 주차장에서 지리산 둘레길인 회덕마을-정자나무숲-구룡치-개
미정지 쉼터-내송마을-육묘정으로 이어지는 산책코스를 개설한 바 있다.
주 3) 남원 朱川面 湖景理 兩浩亭에서 출생한 김사문은 평생 학문수양과
강학에 종사했는데, 저술인 「寒喧問答」·「講古野說」·「漢文屬
法海」·「簡札入門」 등은 후학들을 지도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
다.「용호구곡경승안내」는 그가 평생 이 지역에 살면서 직접 보
고 느낀 경험과 축적된 지식에 근거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를 가진다(Jeon, 2013: 151-152).
주 4) 영조28년(1752년)에 간행된 남원지역의 역사문화 지리서인 읍지를 번역서로 과거 남원지방의 건치연혁, 산천의 형세와 강계, 인물의
성쇠, 고금의 사적, 호구의 변천 등이 기록된 역사지리지로 남원
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자료이다.
주 5) 新增東國輿地勝覽 39, 全羅道 南原都護府, “爭羅取之 諺傳 太乙居
其上 群仙之所會 龍象之所居也”
주 6) 계곡 한가운데 멱 감을 만한 소를 약수터라 부른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
르면 한여름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더위병과 땀띠가 없어진다는 전설이
있어 부근에 도로가 나지 않았던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인
근 부녀자들이 몰려들어 한낮에도 물맞이라 하여 멱을 감았다고 한다.
주 7) 1572년 남원도호부 관내에서 만들어져 현재까지 유지·계승되고 있
는 향약계이다.
주 8) 설립 당시 봉안되었던 주자 영정은 명종10년(1555년)에 光州 선비
朴光玉이 명나라에 서장관 신분으로 파견되었을 때, 중국의 주자
와 여대균의 영정을 들여와서 원천방의 풍천노씨 집에 보관하였다.
주 9)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允遠이며, 호는 蒼巖 · 强巖 · 剛齋 등이다. 전
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만년에는 전주에서 살았으며, 李匡師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도처에서 그가 쓴 扁額과 바위글씨를 볼 수 있다.
주 10) 단양군 대강면 남조천에 설정된 雲仙九曲 제4곡 또한 ‘煉丹窟’이며 도
봉산 입구 계곡에도 ‘鍊丹窟’ 바위글씨와 함께 자연 암굴이 존재한다.
주 11) 淵齋先生文集 卷之二十一 雜著. “轉入龍湖洞 澗谷深幽 有白石溪中
盤陀 坎而成溝 淸流瀉出 墜爲澄潭 上 有朱宋兩夫子影堂舊址 彷徨
久之 踰宿星嶺 循江 而下 抵花開洞”
주 12) 이 바위에서 나무로 장단을 맞추며 소리에 열중했다고 전하는데,
소리 한탕을 끝내면 콩을 하나씩 폭포에 던졌는데 나중에 콩을 세
어보니 서 말이 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권삼득은 원래
완주군 용진에서 명문가인 안동 권씨 양반집 출신으로 소리를 한
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쫓겨난다. 그때 외가가 있는 남원시 주천으
로 와서 소리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중 변강쇠전을 가장 잘 불렀
다고 전한다(SeaJeonbuk-Newspaper, 2001).
주 13) 본관은 漢陽, 자는 善述, 호는 山西, 山西病翁, 산서처사, 晝夢堂主
人으로 전라북도 남원 출생이다. 선조31년(1598년) 29세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李光岳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의 왜군을 무찔렀다. 선조41년(1608년) 39세에는 鄕試 兩場에,
광해군4년(1614년) 45세에는 三場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을 비난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http://db.itkc.or.kr/ 한
국문집총간 東岡遺稿, 東岡先生遺稿卷四 序).
주 14) 골짜기 형태가 깊어 하늘을 우러러보매 단지 한 닢 동전 같은 푸른
하늘이 보이고 상쾌한 기운이 사람에게 엄습해오는 중간이 두 갈래로
나뉘는 은빛 물결이 수직으로 千尺을 떨어져 흩날리며 부서지니 ‘은하
수가 구만 리 장천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라는 시구로 李白이 묘사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인정하리라. 다음과 같이 평하노라. “용호의
승경, 용호의 승경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 여러 빼어난 곳이 있다는 것
을 누가 알겠는가. 어느 누가 三神山 중에서 어느 산이 가장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九龍이 제일 승경이라고 대답할 뿐이다(Kim, 1940).
주 15) 선조5년(1572년) 남원도호부 관내에서 源洞契와 관련하여 계원들
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기 위한 모임 및 詩社 장소로 활용하고자
용소 앞 너럭바위 위에 만든 육각형 모양의 정자를 지어 용호정이
라 하였으나 1961년 큰 수해로 유실됨. 다시 같은 해 가을 옥녀봉
중턱에 재건하였으나 태풍으로 전복되었다가 1997년에 현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 또한 그 건너에는 다시 별도의 용호정이 건립됨
으로써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현재는 위치도 명칭도 전통성도 없
는 육모정이 핵심적 공간이자 명칭으로 자리하였다. 호경리 도로
이정표에서도, 마을 입구의 식당이나 상점 간판에도 온통 ‘육모정’
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육모정복원기」에도 확인되었듯, 육모정이 원동향약(전북유형문화재 제146호)과 관련한 역사적
유적이라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조속
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주 16) 용성지 또한 柳敷의 시를 이용하여 12개의 못이 드러나 있음을 알
리고 있다. “十二湫中水 長含碧玉淸 樹疎孤石出 薝靜細烟生(열두
개 못 가운데 물에는 오래도록 푸른 옥처럼 맑음을 머금었다. 나
무는 드물어 외로운 돌만 돌출해 있고 薝靜細烟生 처마에서는 조
용히 가는 연가가 솟아난다.)”
주 17) 구시는 ‘구유’ 즉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
릇의 경상·전라·충북·함경 등지의 방언이다(http://krd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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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풍호(星乎)는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나오는 글로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浴乎沂 風乎舞雲詠而歸"(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雲에서 바람을 쐰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고 한 말에서 차운(次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