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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劉氏) 본관(本貫) 강릉(江陵)입니다. 족보개설신청을 하시면 등록하여 드립니다.
[관향의 연혁] 강릉(江陵)은 강원도(江原道) 영동지방(嶺東地方)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예국(濊國)이었는데 한사군을 정할 때 임둔(臨屯)이 되었다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량(河書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라 하였고, 통일신라(統一新羅) 선덕(善德王)이 소경(小京)으로 삼아 사신을 두었다. 685년(태종 무열왕 5) 하서주(河西州)로 개편, 경덕왕(景德王)때 다시 명주(溟洲)로 개편하였으며, 936년(태조 23) 다시 영주로 고쳤다. 그 여러 변천을 거쳐 1388년(우왕 14)에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로 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때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임영(臨瀛)이라 하였다. 1395년(조선 태조 4) 강원도로 개칭하고, 세조(世祖)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1666년(현종 7) 원양도(原襄道)로 개칭하여 강릉현으로 강등되었고, 1675년(숙종 1) 다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정조(正祖)때 다시 현으로 강등되어, 도명(道名)을 원춘도(原春道)로 개칭하였다가 1789년(정조 13) 강릉부(江陵府)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관찰부(觀察府)를 두었으며, 1896년(고종 33) 13도제(道制) 실시로 강원도 강릉군(江陵郡)이 되었다.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고, 1955년 강릉읍과 성덕면(城德面)․ 경포면(鏡浦面)을 편입하여 강릉시(江陵市)로 승격되었다.
[가문의 유래] 유씨(劉氏)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우리나라 유씨(劉氏)의 연원(淵源)은 유 방(劉 邦)의 41세손으로 송나라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유 전(劉 筌)이 8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경북 영일군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전(筌)의 맏아들인 견규(堅規)가 거타(居陀 : 거창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거창(居昌)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견규의 동생 견구(堅矩)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견구(堅矩)의 아들 웅열(雄悅)이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졌다. 견규(堅規)의 손자 성(成)이 추밀원부사(樞密員副使)와 대장군(大將軍)을, 증손 찬(贊)이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 외에도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한작(漢灼)과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한 해(海), 그리고 어모장군(御侮將軍)에 이른 귀손(貴孫)이 유명하였으며, 특히 한우(旱雨)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낼 때 중국(中國) 황제(皇帝)의 부름에 따라 기우제관(祈雨祭官)으로 판견되어 3일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니 한재(旱災)가 계속된 중국대륙(中國大陸)에 비가 내렸다 한다. 이에 황제(皇帝)가 크게 기뻐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였다.
강릉유씨(江陵劉氏)는 거창유씨(居昌劉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도시조(都始組) 유 전(劉 荃)의 9세 손 유승비(劉承備)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벼슬이 누진하여 좌복야(左僕射)로 치사했고, 그의 증손(增損) 창(敞)이 조선개국2등공신(朝鮮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 말에 둔촌(遁村) 이 집(李 集 : 학자)이 목은(牧隱) 이 색(李 穡)에게 좋은 사위감을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목은 이색(李 穡)은 자기 문하(門下)에 재주꾼이 많지만 권 근(權 近)과 유 창(劉 敞)을 당해 낼 재주는 없다 하자 이 집(李 集)은 유 창(劉 敞)을 사위로 맞이했다고 한다. 특히, 창은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어 소요산(逍遙散)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 대제학(大提學)․ 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역임한 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창(敞)의 증손 한량(漢良 : 이조좌랑 계주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진주성(晉州城) 방어에 참전, 왜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죽창(竹槍)으로 대전했으나 성(城)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으며, 창(敞)의 현손(玄孫) 세분(世玢)은 진원현령(珍原縣令)으로 나가 청백(淸白)한 정사(政事)로 소문났었다. 참판(參判) 선보(善寶)의 아들 호인(好仁)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며, 학문(學文)에 열중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1574년(선조 7) 여름,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祈雨) 할 결심으로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정좌(正坐)하고 기원하면서 나무에 불을 지르니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왕(王)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하사했다. 특히 호인(好仁)은 일생을 낙천적으로 살았는데, 자기가 사는 동명(洞名)을 자하동(紫霞洞), 자기 거처를 정정당(定靜堂), 바깥 사랑채를 불우당(不憂堂), 집앞에 있는 못을 완료호학지심지(琓妙好學之心池)라 이름하고 풍류와 환락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 에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나갔던 덕문(德文)과 전주(全州)에서 유효자(劉孝子)로 유명했던 경달(景達)이 뛰어났으며, 그의 아들 기원(基源)은 가뭄 때 기민(飢民)구휼에 훌륭한 업적을 남겨, 효(孝)와 충(忠)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동원(凍原 : 경달의 아들), 효도삼대(孝道三代)의 정맥(旌脈)을 이은 병관(秉瓘 : 동원의 아들)과 함께 강릉 유씨의 전통을 이었다. 배천(白川)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 도랍현(刀臘縣)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구택(雊澤)으로 고쳐 해고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배천(白川)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때 평주(平州)에 속했다가 의종(毅宗) 때 다시 배주로하여 해주(海州)에 속하게 하였다. 고종(高宗) 때 부흥군(復興郡)으로 승격되었으나 공민왕(恭愍王)때 배주로 고쳤고, 1413년(태종 13)에 배천군으로 개칭되어 경기도(京畿道)로부터 황해도로 옮겼고, 1526년(중종 21)에는 현(縣)으로 강등시켰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연안(延安)에 병합되어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배천유씨(白川劉氏)의 시조(始祖) 유국추(劉國樞)는 도시조(都始祖) 유 전(劉 筌)의 8세손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되고 배천군(白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국추(國樞)를 시조로 받들고 거창 유씨(居昌劉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배천(白川)으로 하게 되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국추의 아들 승(升)이 고려 명종(明宗 : 제19대 왕, 재위기간 : 1170~1197) 때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한 후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졌으며, 손자(孫子) 현(賢)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여 명망을 떨쳤다. 한편 대제학 현(賢)의 맏아들 시준(時俊)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한 후 부흥군(復興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보국(補國 : 통정대부)과 서(瑞 : 장군)의 형제가 뛰어났으며, 현(賢)의 막내아들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던 여준(汝俊)과 임진왜란 때 무명(武名)을 떨쳤던 후손 극량(克良)이 유명했다. 선조(宣祖)초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극량(克良)은 위장(衛將)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3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죽령(竹嶺)을 수비했으나 패전하고 수어사(守禦使) 신 할(申 硈)의 참모가 되어 임진강(臨津江) 방어 작전을 수행했다. 적의 파죽지세로 한강(漢江) 수비에 패하고 한양(漢陽)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선조(宣祖)가 북으로 피난 가는 와중에 임진강에서 적과 8, 9일간 대치하는데 무슨 수작인지 적은 그들의 병막(兵幕)을 모두 태우고 후퇴하였다. 이에 수어사 신 할(申 硈)이 적이 쾌퇴한다 하여 진격을 하명하자 극량은 “적이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니 경솔하게 진격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장의 명령에 항명한다고 하여 참형(斬刑)하려 했으나 좌우가 말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우군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도강하여 진격하다가 적의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신 할(申 硈)도 죽고 극량도 군사들을 지휘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그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개성(開城)의 숭절사(崇節詞)에 배향되어 배천 유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