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선수들(15)...호남 고교야구의 전설
김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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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광주서중의 청룡기 우승, 그리고 26년. 그간 광주의 야구는 불모지처럼 변해있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5월 14일 광주야구는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고교야구 사상 최초의 3연타석 홈런이라는 전대미문의 화려한 축포가 성동원두를 화려하게 수놓으면서...이 3연타석 홈런을 쏘아올린 사나이가 바로 김윤환이었습니다. 그때 그 선수들 열다섯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김윤환의 스토리를 풀어보기로 하겠습니다.
26년만의 우승 이끈 김윤환의 축포
광주 사레지오초등학교에 다니던 김윤환은 아버지가 파일럿이었습니다. 김윤환은 당시로선 부유했던 집안의 장남이었고 하고싶은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던 소년이었죠. 그런 그가 6학년이 되면서 멋진 유니폼에 반해 야구부에 가입하게 되는데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겠지 하던 어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그의 전부가 되고 만것 입니다.
광주일고는 1949년 김양중이 활약하며 제4회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한 이래 26년만에 대통령배 쟁탈 고교 야구대회에서 정상에 뛰어오르게 됩니다. 이날 광주일고 4번타자 김윤환의 3타석 연속 홈런은 서울 운동장 야구장 개장이래 최대의 인파인 3만 5천여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김윤환은 5회 초 첫 타자로 나와 경북고 선발이자 초고교급 투수라 불리던 성낙수의 제2구를 통타, 레프트스탠드에 떨어지는 선제 솔로홈런을 날려 균형을 깨고 6회초 2번 이기종이 우전 안타로 나가고 3번 이현극이 사구를 골라 2사 주자 1, 2루가 되자 김윤환은 성낙수의 제2구를 또다시 강타, 광주일고 응원석 중단에 떨어지는 3점홈런으로 연결시켜 관중들을 열광케 만듭니다.
김윤환의 연속 2타석 홈런으로 기염을 토한 광주일고는 7회초 사사구 2개와 투수의 2루 견제 악송구로 다시 1점을 얻고, 8회 초 1사 후 타석에는 이날의 주인공 김윤환이 다시 들어섭니다. 김윤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성낙수의 제2구를 다시 레프트로 넘겨 기적과도 같은 연속 3타석 홈런이라는 위업을 세우게 됩니다.
경북고는 김윤환에게 연속 3타석 홈런을 맞고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맙니다, 광주일고의 에이스 강만식에게 삼진 13개를 뺏긴채 끌려가던 경북고는 9회말 3안타를 집중시켜 2점을 빼내 영패를 모면, 야구 명문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경기를 직접 관전했던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저로선 이후로 김윤환이라는 이름을 항상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김윤환은 이날 활약으로 최우수선수상을 비롯해 타격상(4할 6푼 7리), 타점상(9타점), 최다안타상까지 모조리 휩쓸고 그해 일암야구상 수상자가 됩니다. 대학부에서는 김재박이, 일반부에서는 윤동균이 수상자였습니다
그 한해 전이었습니다.
광주일고는 1969년 야구팀을 부활시켰고 4년만에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됩니다. 8강까지 진출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 팀이 제법 알차게 꾸려졌습니다. 2학년 투수 강만식과 내야를 지휘하는 3학년 차영화와 이현극과 김윤환의 중심타선으로 우승권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광주일고는 대구의 대건고와 맞붙어 1-0으로 승리하고 8강전에 진출하게 됩니다. 강만식의 호투와 김윤환의 9회 결승타가 어우러진 결과였습니다. 이날 9회 4번 타자 김윤환은 1사 만루에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1. 2루 사이로 빠지는 안타성 타구로 3루의 심상수가 여유있게 홈인,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김윤환은 안타를 치고도 기쁨에 들뜬 나머지 1루도 밟지 않고 덕아웃으로 뛰어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이 타구는 라이트앞 땅볼로 기록에 남게 됩니다.
8강전에서 철도고를 물리친 광주일고는 4강전에서 대구상고를 만나지만 패배, 기회를 다음으로 미룹니다.
광주야구의 씨앗이 된 김윤환
김윤환의 미친 듯 한 활약으로 26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컵을 안은 광주일고는 이후 야구 명문고로 거듭 납니다. 5년 후인 80년 대통령배 결승에서는 사상 최초로 광주지역의 팀끼리 한판 대결을 펼쳤습니다. 초고교급 선수들인 광주일고 선동열과 김태업의 맞대결로 관심이 쏠립니다만 광주일고의 싱거운 승리로 끝납니다.(선발이 선동열이 아닌 차동철이었습니다) 이어 광주일고가 고교야구 최강팀으로 자리매김 한 것은 83년이었습니다. 문희수, 이강철, 박준태, 김선진, 서창기, 정영진 등 막강멤버를 자랑하며 대통령배, 봉황기, 황금사자기를 차례로 차지하게 됩니다. 특히, 에이스 문희수는 3개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에 선정될만큼 절정의 투구를 선보입니다. 84년에도 박준태, 이강철, 정회열 등이 활약하며 황금사자기를 차지하며 전통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88년 청룡기 결승에서는 군산상고를 상대로 11회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5:4로 역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마침내 39년 만에 청룡기를 품에 안은 것입니다. 3:4로 뒤진 11회 말 2사 1, 3루에서 끝내기 2루타를 친 선수가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었습니다. 훗날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스타의 탄생을 알리는 예고편이었습니다. 95년 청룡기에서는 메이저리그 출신 트리오인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이 맹활약하며 7년 만에 다시 왕좌에 올랐습니다. 김병현은 덕수상고와의 결승전에서 18탈삼진을 뺏는 역투를 펼쳐 대기의 편린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후로도 광주일고의 강세는 이어집니다.
이상윤, 선동열, 문희수, 이강철, 이종범, 서재응, 최희섭, 김병현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야구명가의 역사 그 시작이 바로 1975년 김윤환의 3연타석 홈런이 그 출발의 고동소리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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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대통령배 고교야구 결승에서 타석에 들어선 김윤환
고려대의 거포로
많은 기대속에 고려대에 진학한 김윤환 선수는 명불허전이었습니다. 1학년때부터 주전자리를 꿰차며 좋은 활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타격에 묻혀 넘어갔던 수비에문제가 간간히 돌출되면서 고교무대와는 달리 대학무대에선붙박이 3루수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외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뛰어난 장타력에 비해 세기가 부족한 점이 부각되며 기복이 심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이로인해 대학생활 내내 대학대표까지는 선발이 됐지만 단 한번도 태극마크를 가슴에달아보진 못했습니다.
특히 비교적 좋은 활약을 보였던 신입생 시절에 비해 2학년에 진급하면서 부터는 부진을 면치 못합니다.
당시 김윤환의 고려대는 최동원의 연세대, 김시진-김용남 선수를 보유한 한양대에 비해 투수력에서 열세를 보이며 다소 부진한 성적을 올렸는데, 김윤환 선수는 후배 박종훈, 동기생 우경하 선수와 함께 꾸준히 중심타선에서 활약은 하지만 성적의 기복으로 인해 큰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사실 김윤환이 고려대 2, 3학년 시절의 활약은 각 신문사의 야구기사에서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김윤환의 대학 2,3학년 시절은 암흑기였습니다.
1979년 4학년이 되면서 김윤환의 활약은 다시 빛을 냅니다. 봄에 벌어진 중앙대와의 경기에서 혼자 타점을 모두 쓸어담는 맹타를 터뜨리며 부활을 알린 뒤 당당하게 한미대학야구 대표로도 선발이 됩니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한국화장품으로 스카웃됩니다.
프로입단, 고향팀 해태서 퇴출
김윤환이 입단 이전까지 김재박의 활약으로 실업최강으로 군림하던 한국화장품은 김재박의 군입대로 전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한국화장품에서 김윤환은 주전으로 뛰며 괜찮은 선수로 활약하지만 언제나 2%가 부족해 보입니다. 그런 김윤환이 프로야구가 탄생하기 직전에 군입대를 결정합니다. 이것이 김윤환의 야구인생 최악의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후의 김윤환야구는 꼬일대로 꼬입니다. 프로 첫해 선수부족으로 힘들었던 해태에 갔더라면 외야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군복무를 모두 마친 83년 말에야 해태로 입단하게 됩니다.
군 팀인 성무에서도 중심타자로 활약하던 김윤환 선수는 뛰어난 선수들이 대부분 프로무대로 진출한 83년까지도 가을걷이가 끝난 듯 황량한 실업무대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고질병이 되는 허리부상을 안게 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83년말 해태 입단 당시 김윤환 선수에 대한 팬들이나 구단의 기대는 대단했습니다. 광주일고 시절의 3연타석 홈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대학과 실업무대에서 보여줬던 기량도 프로에서 충분히 통할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악화된 김윤환에게 83년 우승을 차지하며 이미 강팀의 반열에 오른 해태에 김윤환이 설 자리는 이미 없었습니다. 김종모, 김준환, 김일권에 김종윤 등이 버틴 외야에 김윤환은 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성한 몸이라면 몰랐지만 말입니다. 결국 단 한경기도 출전을 해보지 못한채 팀에서 2년만에 퇴출되는 설움을 겪습니다.
김윤환 선수로서는 광주야구의 영웅에서 쓸쓸하게 밀려나는 것이 서운했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프로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던 김윤환은 청보 핀토스에 입단을 하며 마지막 기회를 노리게 되고, 87년에 타율 0.283, 홈런 6개, 42타점의 준수한 성적을 올리며 다시한번 주목을 받습니다.
이듬해인 88년에는 청보가 태평양으로 매각되는데, 김윤환 선수는 팀 중심타자로 활약하면서 타율 0.272, 홈런 10개, 40타점의 성적을 올리고, 91년까지 꾸준히 활약하며 통산 타율 0.257, 홈런 28개, 170타점의 김윤환스럽지 않은 평범한 성적을 올린 가운데 팀의 노장정리작업과 맞물리면서 파란만장했던 야구장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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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시절의 김윤환
덧붙이기
김윤환이 고교시절 3연타석 홈런을 친 것은 당연히 고교무대에선 최초의 일이었지만 그 이전인 70년에 실업무대에서 이재우선수(당시 제일은행)가 상업은행전에서 처음으로기록했고 대학무대에선 3년 후인 73년 연세대의 김봉연이 동아대와의 경기에서 기록했습니다.(김봉연은 김윤환이 3연타석 홈런을 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백호기 대회에서도 3연타석 홈런을 치며 거포로서의 위용을 뽐냅니다.)
그리고 2004년 지금 넥센의 거포 박병호가 성남고 시절 4연타석 홈런을 치면서 고교야구 최초의 기록을 씁니다. 그 이전까지 고교야구에서 3연타석 홈런을 친 선수는 1975년 김윤환(당시 광주일고), 89년 박정혁(당시 휘문고)91년 김종국(당시 광주일고),99년 장요상(당시 전주고)과 박병호가 한차례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야구를 통털어 최다 연타석 홈런을 친 선수는 88년 한국화장품 소속이던 강기웅이 대통령배 봄철 실업연맹전에서 기록한 5연타석 홈런입니다.
김윤환씨는 경기도 고양시의 신설 야구팀이었던 주엽고의 감독직을 지내면서 야구와 연을 이어갔으나 주엽고의 해체로 다시 야구와 이별을 하게 됩니다. 현재는 부산에 거주중이며 몇해 전까지는 자재상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고 최근에는 농산물 유통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첫댓글 전 김윤환 3연타석 홈런 친 경기 티비로 본 기억이...
김윤환 다음에 김정혁(?출신고는 가물... 나중에 고대 갔는데)이 공주고 박찬호에게 3연타석 홈런 치지 않았나요?(한 게임 3홈런인가?)
네 지적을 보고 확인해봤습니다. 1989년 박찬호가 1학년때 봉황대기에서 휘문고와의 대결에서 박정혁에게 3연타석 홈런을 맞은 것으로 나와 있더군요. 뿐만 아니라 박정혁은 다음 경기인 진흥고와의 경기 첫 타석에서도 홈런을 친 것으로 나와 있어 박병호에 앞선 4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일 수도 있습니다. 그 기록의 진위(眞僞) 여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늘 2%(20%일수도^^) 부족한 글에 오류를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그 박정혁선수가 이미 고인이 되었더군요. 고대진학 후 선배의 구타로 허리를 다쳐 야구를 접었고 이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확인했습니다.
네 안타깝게도...
어렸을 때 해태랑 빙그레 야구하는 거 어깨 너머로 보다가 김윤환 홈런 치는거 본 기억이 스물스물 나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