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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러 카페 폭발로 '56만 군사블로거'블라들렌 타타르스키 사망·30명 부상
러시아 제2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카페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해 러시아 유명 군사 블로거 블라들렌 타타르스키(40·막심 포민)가 사망하고 최소 30명이 다쳤다.
이번 사고에 약 300~500g 규모의 강력폭약 TNT가 동원됐다고 보고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해당 폭발 규모는 수류탄 2개의 폭발력과 맞먹는다고 러시아 당국은 전했다.
이 사고로 사망한 타타르스키는 56만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한 러시아 유명 군사 블로거로, 줄곧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지난해 9월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 4개 지역에 대한 합병을 선언하는 크렘린궁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날 타타르스키는 카페에서 독자들과 만남을 진행하고 있었다. 매체는 한 여성이 그에게 작은 조각상을 선물한 뒤 폭발이 발생했다고 전하며 조각상에 폭발물이 들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그러면서 이번 공격에 사용된 폭발물은 비누 한 개 정도의 크기라고 러시아 사법당국을 인용해 부연했다.
2023년 이탈리아 환경단체, 스페인광장 분수에 먹물 투척 시위
이탈리아 환경단체 '울티마 제네라지오네'(마지막 세대)가 로마 명물 스페인 광장 분수대를 검게 물들이며 시위를 벌였다. 이 단체는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광장의 스페인계단 아래 있는 배 모양 분수인 '바르카치아 분수대'에 검은 액체를 쏟아부었다.
이 단체가 트위터에 올린 영상을 보면, 이 단체에 소속된 남성 3명과 여성 1명은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 주머니에 든 검은 액체를 물에 부었다. 이들은 이 액체가 숯으로 만든 식물성 먹물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검게 물든 분수대 위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말자"고 적힌 현수막을 펼쳐 들며 시위를 벌였다
2022년 ‘V10’ T1, ‘완전체’ 젠지 꺾고 사상 첫 LCK 전승 우승 ‘금자탑’ 10회 우승
T1이 2일 2022 LCK 스프링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T1은 LCK 첫 10회 우승과 함께 리그제 전환 이후 첫 전승 우승 기록을 세웠다.
T1이 리그오브레전드(LoL) 한국 e스포츠 LCK(LoL 챔피언스 코리아) 역사를 새로 썼다. 리그제 전환 이후 첫 전승 우승 기록과 함께 LCK 역사상 최초로 10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올해 처음으로 T1과의 맞대결에서 주전 선수를 모두 기용하며 ‘완전체’로 나선 젠지는 첫 우승 도전에 실패했다.
T1은 2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킨텍스 제1전시장 5홀에서 열린 ‘2022 LCK 스프링’ 결승전에서 젠지를 세트스코어 3대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T1은 이날 우승으로 2015년 리그제 전환 이후 첫 전승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LCK 역사상 최초의 10회 우승 팀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 T1의 주장 ‘페이커’ 이상혁 역시 첫 LCK 10회 우승자라는 명예를 얻게 됐다
2021년 대만 열차 탈선사고로 50여명 사망 160여명 부상
이번 열차 사고는 2일 오전 9시 28분(현지시간)께 대만 북동부 화롄(花蓮)의 다칭수이(大淸水) 터널에서 발생했다. 사고는 철로 주변 산비탈의 공사 현장에 주차돼 있던 트럭이 선로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승객과 승무원 등 약 500명이 타고 있던 열차와 부딪히면서 일어났다. 이번 사고로 사망자는 최소 50명, 부상자는 160~170명 수준으로 전해진다. 사상자 다수는 열차 앞쪽 객차에서 나왔다.
사망자 중에는 프랑스인 1명이, 부상자들에는 일본인 2명과 마카오인 1명이 각각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으며 사고 당일은 청명절 나흘 연휴 첫날이어서 대다수 승객이 성묘를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이었다.
2019년 동성애자 로리 라이트폿 시카고 첫 흑인 여성 시장 당선
2018년 중국 실험용 우주정거장 텐궁 1호 남태평양 칠레 앞바다로 추락
2015년 시카고에 한인 여성 이름 딴 도로 생겨
미국 3대 도시인 시카고에 한인 여성 기업가의 이름을 딴 도로가 생겼다. 시카고시는 2일 도심 북서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킴볼 애비뉴’의 ‘애디슨 스트리트’부터 ‘벨몬트 애비뉴’ 사이의 800m 구간을 ‘앤 S 진 웨이(Ann S Jhin Way)’로 명명하고 도로명판 설치 행사를 가졌다.
이 도로 이름은 시카고에 본사를 둔 미용 재료 도매업체 ‘지니 뷰티’의 진안순(69·한국명 서안순·사진) 회장을 기념해 붙여졌다. 지니 뷰티 본사가 이 도로 북쪽 끝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총경인 고(故) 김정호 초대 여경회장의 맏딸인 진 회장은 1969년 미국으로 가 1981년 지니 뷰티를 설립했다. 2010년부터 한인 단체인 ‘한미우호네트워크’와 연말마다 미 중서부의 노숙자들과 저소득층 가정에 ‘사랑의 점퍼 나누기’ 행사를 주도하는 등 사회 공헌에 적극적이었다. 이를 높이 평가한 시카고시는 2013년 1월 19일을 ‘진안순의 날(Ann S Jhin Day)’로 정했다.
그는 개성 출신으로 2006년 별세한 남편 진태훈씨의 통일 염원을 이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시카고지역 협의회장을 맡는 등 고국과의 가교 역할에도 앞장서고 있다. 경북 출신인 진 회장은 독도 명예 주민이다. 미 오하이오주와 경상북도의 자매결연과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재작년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시카고시가 도로에 한인 이름을 붙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2년 지역 경제에 기여한 심지로(2012년 별세)씨와 아내 심해옥씨를 기념해 ‘웨스트디버시 애비뉴’ 일부를 ‘지로 앤드 오션 심 웨이(Zero & Ocean Shim Way)’로 명명했었다. 이에 앞서 2002년엔 한인 상권이 밀집한 ‘로렌스 애비뉴’ 일부를 ‘서울 드라이브(Seoul Drive)’로 명명했다.
2015년 106세 최고령 영화감독 올리베이라 별세
무성영화에서 디지털영화 시대까지 아울러 온 현역 최고령 감독인 포르투갈의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가 2일(현지시간) 106세를 일기로 포르투갈 포르투 자택에서 별세했다.
1908년 12월 11일 포르투갈 제2도시 포르투에서 태어나 성장한 올리베이라 감독은 1931년 메가폰을 처음 잡은 이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포함해 50여편을 연출했다.
마지막 작품은 단편영화 ‘벨렘의 노인(The Old Man of Belem)’으로 지난 해 11월 포르투에서 시사회를 열었고 지난 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도 출품했다. 올리베이라는 1942년 첫 번째 장편 극영화 ‘아니타 보보’를 내놓았다. 그는 드문드문 작품을 내놓다가 76세 이후 1년에 한 편꼴로 영화를 내놓는 등 노년에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했다.
대표작은 ‘언어와 유토피아’ ‘나는 집으로 간다’ ‘나의 어린 시절 포르투’ ‘불확실한 원칙’ ‘토킹 픽처’ ‘제5제국’ ‘마법의 거울’ ‘세브린느, 38년 후’ ‘나의 영화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니그마’ ‘금발 소녀의 기벽’ ‘보이지 않는 자들’ ‘센트로 히스토리코’ ‘아브라함 계곡’ ‘신곡’ ‘헛된 영광’ 등이 있다.
2015년 씨랜드 유가족 대표, ‘안전’으로 박사학위 받아
“재난 현장에서 안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 못지않게 평소 아이들이 사고에 민첩하게 대처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분야엔 제대로 된 연구가 없더군요.”
1999년 경기도 화성 씨랜드 화재 사고로 일곱 살 쌍둥이 딸을 잃은 고석(53) 한국어린이안전재단 대표가 최근 ‘스포츠 지도자의 안전 인식이 안전 문화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경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극을 겪었던 고 대표는 2000년 다른 유가족들과 보상금을 모아 ‘어린이안전재단’을 설립했다. ‘안전 지킴이’ 활동을 하며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느낀 고 대표는 2006년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박사과정에도 도전했다.
그는 국민이 세월호 사건과 같은 대형 재난을 보며 분노하지만 금세 ‘나와는 무관하겠지’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이들 스스로 사고에 대처하도록 교육을 강화하는 등의 중장기적 대책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 “우리 아이들은 중국·일본 아이들보다 체격은 크지만 체력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체력이 받쳐줘야 정신이 건강하고 아이들 미래도 밝아집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2013년 북한 영변 원자로(5㎿) 재가동 선언
2009년 G20 정상회의 개막
세계 금융위기를 타개하고 새로운 국제금융질서의 토대를 모색하기 위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2009년 4월 2일 영국 런던에서 개막했다.
서방선진 7개국(G7) 외에 한국,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주요 신흥시장국들이 망라된 G20 정상들은 이번 회의에서 2008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첫 회의의 합의를 토대로 대공황 이후 최악의 위기에 처한 세계 경제의 회복 방안과 금융 시스템 강화 방안 등을 논의해 구체적인 이행 방법을 도출할 계획으로 시작된 G20 금융정상회의는 애초 기대했던 것보다는 성과를 거두고 막을 내렸다.
정상들은 국제통화기금(IMF) 기능 강화, 헤지펀드·조세피난처 활동 규제, 보호무역 배격 등에서 분명히 일치된 목소리를 냈고, 유럽과 뉴욕 증시는 G20 회의의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자 급등했다. 그러나 각국이 공조하는 추가 경기 부양 방안과 은행 부실자산 처리에 대한 구체적 액션 플랜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다.
G20 정상들은 외환 유동성문제로 부도 위기에 빠진 국가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의 운용기금을 7500억달러(현재는 2500억달러)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정상들은 또 세계 경제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역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보고 2500억달러 규모의 무역금융기금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무역금융기금은 기업이 수출입 과정에 필요한 결제대금에 대해 저리(低利)의 대출이나 지급 보증을 해줘 무역을 촉진하는 기능을 한다.
각국의 보호주의정책을 억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에도 합의했다. ▲국내외 기업보조금 ▲은행 대출의 차별 ▲수입품 관세 인상 ▲해외로의 공장 이전 금지 등 구체적인 보호주의 정책 유형을 적시하고, 세계무역기구(WTO)가 위반 여부를 감시해 분기별로 현황보고서를 만들어 경고하도록 했다.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2005년 4월 2일(현지시간) 지병으로 서거했다.
1920년 폴란드 남부의 바도비체에서 태어난 그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한때 재능있는 배우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 대학을 폐쇄하면서 그는 배우의 꿈을 접고 신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46년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사제가 된지 18년만에 크라코프의 주교로 임명됐다. 3년 뒤인 1967년에는 추기경에 올라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치며 명성을 쌓아갔다.
1978년 요한 바오로1세가 등위 33일만에 사망하자 그는 1978년 10월 58세의 나이에 교황으로 임명됐다.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사제가 교황으로 임명된 것은 455년 로마 교황청 역사상 처음이다.
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도 활발한 해외 선교활동을 했다.
1979년 6월 공산체제하에 있던 조국 폴란드를 방문해 자유노조를 지지함으로써 동유럽 공산체제 붕괴의 계기를 마련했다.
1984년 5월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103명의 성인들에 대한 성인식을 주관했고,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도 방한해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했다.
또한 분쟁지역과 독재국가, 오지 등도 순방하며 `평화의 사도`라는 칭송도 받았다. 1994년 11월에는 `3천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하여 교회가 과거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관용과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인간 기본권의 유린을 묵인한 것은 잘못임을 인정하는 가톨릭으로서는 진일보의 고백을 함으로써 요한23세 이후에 조성된 구·신교 일치운동에 화해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2
001년 5월에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이슬람 사원을 방문해 종교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노력했다.
이러한 선교활동 과정에서 1981년에는 이탈리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암살범의 공격을 받아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건강악화에 시달렸던 그는 파킨슨씨 병으로 고통을 겪고, 고령까지 겹쳐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전 세계 수많은 신도들이 바티칸에 모여들어 그의 회복을 기원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 라는 마지막 말을 전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재임기간은 26년으로 역대 교황의 평균 재임기간의 7.3년을 크게 웃돌아 초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와 비오9세에 이어 역대 3번째 장수 교황으로 기록됐다.
2003년 이라크 파병안 국회통과
국회는 2003년 4월 2일 본회의를 열어 ‘국군부대의 이라크전쟁 파견 동의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날 전자표결에는 재적의원 270명 중 한나라당 의원 145, 민주당 96, 자민련 10명 등 256명이 참석해 찬성 179, 반대 68, 기권 9명으로 가결됐다. 한나라당은 찬성 118, 반대 22, 기권 5명으로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민주당은 찬성 49, 반대 43, 기권 4명으로 찬반 숫자가 비슷했다.
정부 제출 동의안에 여당이 야당보다 반대표를 훨씬 많이 던진 것은 드문 일이다. 이에 앞서 의료지원단만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파병 동의안 수정안은 찬성 44, 반대 198, 기권 14명으로 부결됐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566명(특전사 소속 경계병력 60명 포함) 규모의 건설공병단(1개 대대)과 100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선발대와 본대로 나눠, 선발대는 4월 말에, 본대는 5월 중순까지 각각 현지에 파병하기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회 국정연설을 통해 “명분을 앞세워 한·미관계를 갈등관계로 몰아가는 것보다 미국을 도와주고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국회의 파병안 처리를 당부했다.
한·쿠웨이트 간 SOFA가 체결되면, 2002년1월 한·키르기스스탄 SOFA에 이어 정부가 외국에 군대를 파견해 체결하는 두 번째 SOFA가 된다. 이날 민변·참여연대·녹색연합·천주교인권위원회 등과 같은 재야단체에서는 파병안 통과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 ‘지구적 시민 행동의 날’을 맞아 12일 전국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할 것, 맥도날드, 코카콜라 사먹지 말 것 등 7대 국민행동 지침을 발표했다.
2001년 김대통령 `화염병시위 엄중 조처`
정부는 각종 시위 때 화염병을 사용하는 것을 ‘반 사회적 범죄’ 로 규정, 화염병 시위 투척자에게 엄격한 법적용을 하는 등 강력히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일 청와대에서 신임 차관급 21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최근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 이라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권리는 보장하되 불법·폭력적인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정부는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엄격히 다스린다는 원칙을 지켜나갈 것” 이라면서, “(시위 현장에서의) 화염병과 쇠파이프 등을 엄격히 다스려나가겠다” 고 거듭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어느 선진국 정부도 이같은 불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 이라고 덧붙였다.
청와대의 한 고위 당국자도 이날 최근 잇따르는 서울 도심의 화염병 시위와 관련, “외국 투자자들이 화염병 등장에 따라 우리나라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면서 “외국 투자를 유치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도 화염병 시위는 자제돼야 한다” 고 거듭 강조했다.
1999년 송찬원 축협중앙회장 회계조작 혐의로 구속
1998년 대만전력공사 부사장 "핵폐기물 북한 이전 강행"성명
1995년 서울시, 지하철 7호선 철산역 예정지에서 석회동굴 발견
1995년 스웨덴의 천체물리학자 알벤 사망 - 플라스마 물리학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1988년 외무부, 해외관광여행자 연령제한 완전 철폐
1987년 MS·IBM OS/2 발표
1987년 충남 예산에서 270년 전 미라 5구 발견
1984년 신상옥.최은희 납북으로 확인, 발표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발발
1982년 4월 2일 이른 아침 아르헨티나 해병 2천5백명이 항공모함의 지원을 받으며 포클랜드 수도 포트스탠리를 침공했다. 포클랜드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84명 밖에 안되는 영국군 수비대를 제압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침공 후 아르헨티나는 영국명 포클랜드 대신 아르헨티나명인 말비나스로 개칭하고 영국군을 모두 추방했다. 그리고 섬에 병력을 대폭 증강하기 시작했다.
분쟁의 역사는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던 16세기 스페인과 영국이 서로 먼저 발견했다고 싸우면서 시작됐다.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영유권 분쟁은 아르헨티나와 영국으로 이어졌다. 1933년부터는 사실상 영국이 지배해 왔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갈티에리 대통령은 섬에 살고 있는 1천8백명의 주민과 60만마리의 양을 위해 영국이 전쟁이라는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침공을 감행으나 그것은 판단착오였다. 더구나 경제위기와 군정종식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분노에 봉착한 갈리에티는 돌파구를 이 전쟁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대처 수상은 갈티에리의 예상과 달리 즉각 섬주민의 자치권을 침해한 행위로 비난하며 100척이 넘는 함대를 출동시켰다. 영국군은 4월25일에 남조지아섬을 탈환했고 5월1일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결국 6월14일 아르헨티나는 712명의 사망자와 1만1천명의 포로를 내며 항복했고 갈티에리 군사정권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 사임했다.
1979년 KBS FM, 스테레오 음악방송 시작
1974년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 급서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이 1974년 4월 2일 오후 9시 급서했다. 향년 62세였다. 프랑스 대통령관저인 엘리제 궁은 퐁피두 대통령의 병명은 밝히지는 않았으나 골수병이나 백혈병으로 알려졌다.
퐁피두는 지난 1969년 4월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퇴진으로 실시된 선거에서 당선돼 그해 6월에 취임했다.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자`는 기치 아래 드골이 세운 제5공화제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5년, 그동안 공업 강대국화를 위한 새로운 사회정책을 실현할 나머지 2년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있기까지 알렝 포에르 상원의장이 잠정적으로 대통령직을 대행한다. 그의 죽음 앞에 프랑스 사회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위대한 세계지도자를 잃었다며 애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4월 3일 장례식에 김종필 국무총리를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1971년 각 대학 교련 반대데모 격화
1971년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1969년 전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 장례식 거행
1967년 키티카초른 태국 수상 내한
1964년 브라질 굴라르 대통령 사임
1963년 소련 루나4호 발사
1962년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 부부간첩 박종수 서차빈 사건 발생
1956년 알제리 반군 소탕전서 프랑스군 1천여명 피해
1951년 구주 통일군 사령부 정식 발족. 나토(NATO)군 창설
1930년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사망
1930년 4월2일,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이 중국 산시성(山西省)에서 비행훈련 중 추락사했다. 29세, 한국인 비행사관학교 설립을 꿈꾸며 중국 군벌 휘하에 몸을 담고 있던 때였다. 8년 전 서울에서 화려한 비행을 하고 홀연히 사라져 근황이 궁금했던 차에 날아든 그의 부음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당시의 조선일보는 “잘 죽는다! 잘 간다! 사람값 하는 사람은 다 가누나!”라며 탄식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안창남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월간지 '개벽' 1920년 12월호에 그의 비행 체험기가 실리면서였다. 1921년 일본 도쿄 오쿠리(小栗) 비행학교를 3개월 만에 마치고 제1회 비행사 면허시험에서 우승한 안창남은 어느덧 민족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1922년 12월10일, 안창남은 서울 여의도 상공에서 한국인 최초로 역사적인 비행을 가졌다. 당시로서는 ‘사건’이었다. 안창남이 5만여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1인승 단발쌍엽 금강호(金鋼號)를 타고 서울과 여의도 상공을 비행하자 사람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이후 '떴다 안창남 보아라 엄복동'은 당대의 유행어가 됐다. 엄복동은 당시 자전거 경기의 1인자였다.
안창남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라는 사실에 수정이 가해진 것은 1992년 공군이 “1920년 2월에 미국에서 비행훈련을 받았던 한장호, 이용선, 이초 등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공식 인정하면서였다. 이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월로스 한인비행학교에서 조국 광복의 염원을 간직한 채 이역만리 창공에서 비행훈련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창남은 이 땅에서 최초로 비행하고 이를 지켜본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준 진정한 최초의 비행사였다.
1924년 한국의 민속학자, 연극이론가 이두현 출생
1917년 윌슨 미국 대통령, 1차 세계대전 참전승인 요청
1917년 4월 2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승인을 요청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사건'과 '짐머만 전문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미국은 순수한 무역거래라는 명목하에 연합국 측에 막대한 양의 전쟁물자를 공급하며 실리를 챙기면서도 참전만은 거부한채 중립을 지켜오던 중이었다.
독일의 도발은 윌슨 뿐만 아니라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어 참전승인 요청 후 이틀이 지난 4월 4일에 상원에서 82대 6, 4월 6일에는 하원에서 373대 50의 압도적인 표차이로 윌슨의 대독 참전 결의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당시 미 육군의 보유병력은 19만에 불과했고 신병의 선발과 훈련은 최소 6개월이 걸렸기 때문에 연말쯤에 가서야 17만여 명이 유럽에 파견돼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미국의 참전 초기에는 여전히 독일에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됐지만 미국이 전시체제로 전환을 완료한 1918년에 이르자 전세가 역전돼 결국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은 200만여 명이 전선에 투입돼 5만여 명이 전사하고 20만여 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승전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은 획기적으로 변화해 19세기 말 연평균 12억 달러였던 대외수출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연평균 65억 달러로 증가했고, 전후에도 47억 달러 이상의 활황을 유지했다.
미국은 1920년 말에는 116억 달러의 전쟁채권을 포함해 270억 달러의 해외자본을 갖게 돼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됐고, 전쟁 전에는 19억 달러에 못 미쳤던 금 보유량도 전후 몇 년 사이에 46억 달러로 늘어나 전 세계 금 보유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게 됐다. 미국의 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1912년 남북통일 임시정부 북경에서 설립
1906년 대한자강회 조직(회장 윤치호)
1875년 크라이슬러사(社)의 설립자 크라이슬러 출생
1872년 전신기 발명가 모스 사망
1871년 독립운동가, 언론인 우강 양기탁 출생
1840년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 `목로주점`의 에밀 졸라 출생
1805년 덴마크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출생
1791년 프랑스 혁명가 미라보 사망
1725년 `호색한` 카사노바 출생
1618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프란체스코 마리아 그리말디 출생
1580년 프랑스에서 7차 종교전쟁 발생
1372년 제주도 민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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