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潭李公墓碣銘】
석담 이공 묘갈명
公諱潤雨。字茂伯。姓李氏。別自號石潭。
공은 휘는 윤우(潤雨)이고 자는 무백(茂伯)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다. 별도로 석담이라 자호하였다.
其先廣陵人。高麗時有判典校寺事集。古之聞人。子孫連爲大官顯者。
그 선대는 광릉(廣陵) 즉, 광주(廣州) 사람이다. 고려 때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집(集)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명성이 높았다. 그 자손들이 연이어 큰 벼슬을 하여 드러났다.
四世至承仕郞摯。始居星州。於公爲高祖。
4세(世)인 승사랑(承仕郞) 지(摯)에 이르러 비로소 성주(星州)에 살기 시작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曾祖諱德符。成均進士。祖諱遵慶。早世。
증조는 휘가 덕부(德符)인데 성균관 진사이고, 할아버지는 휘가 준경(遵慶)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父諱煕復。賢而不著。後追爵承政院左承旨。母道州金氏。圖畫署別提崇祖女也。
아버지는 휘가 희복(煕復)인데 현능하였으나 드러나지 않았다. 나중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도주 김씨(道州金氏)인데 도화서 별제(圖畫署別提) 김숭조(金崇祖)의 따님이다.
公少師事鄭寒岡先生。聞爲學之方。二十三。取進士。
공은 어려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하는 방법을 배웠고, 23세에 진사가 되었다.
後十六年。選博士科。補成均權知。光海初。爲政院注書兼記事官。改藝文檢閱兼侍講說書。
그 후 16년 만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權知成均館)에 보임되었다. 광해군 초기에 승정원주서 겸 기사관이 되었다가 예문관검열 겸 시강원설서로 옮겼다.
時鄭仁弘方用事。公在史局。直書其所爲。爲韓纘男所劾去。後陞待敎,奉敎。皆不就。
당시에 정인홍(鄭仁弘)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공이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그의 행위를 그대로 모두 기록하다가 한찬남(韓纘男)에게 탄핵을 받아 물러나게 되었다. 뒤에 대교(待敎), 봉교(奉敎)에 승진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連貶官。以典籍。出爲輸城道察訪,鏡城府判官。輸城,鏡城。皆絶塞累千里。
잇따라 폄직되어, 전적(典籍)으로 있던 중에 수성도 찰방(輸城道察訪), 경성부 판관(鏡城府判官)이 되어 나갔다. 수성과 경성은 모두 수천 리 떨어진 변방이다.
鏡城。古石幕之墟。其俗雜胡羯。尤難治。公爲政以誠。善推恕。旣還。其人治鑄鐵碑。追思不已。
경성은 옛날 석막(石幕)이 있던 지역으로서 그 풍속이 호갈(胡羯)의 풍속과 섞여서 다스리기가 더욱 어려운 곳이었다. 공이 정성을 다해 다스리면서 관대하게 대해 주었다. 돌아온 뒤에 그곳 사람들이 철비(鐵碑)를 만들어 세우고 추모하여 마지않았다.
旣時事大變。不復以仕進爲心。講禮於泗上。
세상일이 크게 변한 뒤로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칠곡(漆谷)의 사수(泗水) 가에서 예(禮)를 강론하며 보냈다.
庚申。鄭先生歿。行心喪之禮。癸亥。仁祖旣反正。召拜禮曹正郞。旋改司諫院正言。尋薦玉堂。以修撰陞校理。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한강 정구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심상(心喪)의 예를 행하였다. 계해년(1623)에 인조가 반정(反正)하고서 공을 불러 예조 정랑에 제배했다. 곧이어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 수찬(修撰)으로 옥당에 천거되고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
甲子。李适叛。上南狩。以公嘗出北路得吏民心。特拜招諭御史。冬。爲應敎。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이 남쪽으로 파천(播遷)할 때에, 공이 북쪽 변방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 관리들과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받았다고 하여 공에게 특별히 초유어사(招諭御史)를 제배하였다. 겨울에 응교가 되었다.
論政弊。仍白上曰。君臣之禮太嚴。抑損天威。以親臣下。上從之。
정치의 폐단을 논하고 이어 상에게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예절이 너무 엄격하니, 상의 위엄을 줄여서 신하들을 친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대로 따랐다.
丙寅。有啓運之喪。一用后妃禮。公方爲司諫。歷擧違禮大者六事。力爭。
병인년(1626, 인조4)에 계운궁(啓運宮)의 초상이 나자 상이 한결같이 후비(后妃)를 장사하는 예법을 사용하였는데, 공이 당시에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 부당함을 강력히 쟁집하였다.
上怒遞司諫。改成均司成。尋遷政府舍人,知製敎。明年。行世子嘉禮。
상이 진노하여 사간을 체차하고 성균관 사성을 제수하였다. 얼마 뒤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지제교(知製敎)로 옮겼다. 이듬해에 세자의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公以輔德。加通政。出爲潭陽。爲政必先學敎。禁奸猾。邑大治。去後。有政淸碑。又有興學碑。
공이 보덕(輔德)의 직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었고, 담양(潭陽)의 수령으로 나갔다. 고을을 다스림에 반드시 교육을 우선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짓을 금지하였더니 고을이 아주 잘 다스려졌다. 떠난 뒤에 정청비(政淸碑)가 세워졌고 또 흥학비(興學碑)가 세워졌다.
辛未。爲工曹參議。後年。患風痺。辭疾歸田里。三年而歿。
신미년(1631, 인조9)에 공조 참의가 되었다. 이듬해에 중풍을 앓아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自朝之大夫士。以至草野韋布。莫不曰君子人亡矣。相弔如親戚。公嘗以靖社原從。旣歿。追爵吏曹參判。
조정의 사대부들로부터 초야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군자의 덕망을 갖춘 분이 세상을 떠났다.”라고들 하며, 마치 친척을 잃은 듯이 서로 조상(弔喪)하였다. 공은 일찍이 정사 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었기 때문에 죽은 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公生於隆慶三年十一月四日。歿於崇禎七年八月二十九日。年六十六。其十二月十五日。葬陶唐之洞南向之原。
공은 융경 3년(1569, 선조2) 11월 4일에 태어나 숭정 7년(1634, 인조12) 8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66세였다. 그해 12월 15일에 도당동(陶唐洞) 남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公遊於大賢之門。其居家。事父母處昆弟。固君子善行。而能直而和。嚴而有容。
공은 큰 현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집에서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들과 잘 지내는 것은 본디 군자로서의 훌륭한 행실이었고, 곧으면서도 온화하고 엄하면서도 너그러움이 있었다.
事君以直道聞。治郡。必以敎民善俗爲先。居陋室恬靜。與物無競。好讀書。
임금을 섬길 때에는 강직하다는 소문이 났으며,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좋게 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누추한 집에 살면서도 마음을 평안하고 고요하게 가졌고, 남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常謂子弟曰。天道福謙。人道忌盈。吾起自寒門。官至大夫之列。亦足矣。幸無大過。得正而斃。吾日勉焉者也。
항상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천도(天道)는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인도(人道)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한다. 내가 한미한 집안에서 일어나 벼슬이 대부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또한 충분한 것이다. 큰 허물 없이 바르게 죽을 수 있기를 바라니, 이것이 내가 날마다 힘쓰는 일이다.” 하였다.
平生行己必正。辭受必謹。守道不苟。一以興學右文爲心。
평생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고 사양하거나 받거나 하는 일에 신중하였고 도를 지키는 데에 구차함이 없었으며, 한결같이 학문을 일으키고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일로 마음을 삼았다.
夫人仁川蔡氏。國子生員應麟之女。生三男二女。子孫繁衍。其顯者。次男道長。爲弘文應敎。道長長男元禎。司農亞卿。次男元祿。長淵都護府使。元禎長男聃命。初仕爲成均學諭。子係俱列于左。
부인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국자감 생원 채응린(蔡應獜)의 따님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다. 자손이 번성하였는데, 그중에 드러난 이로는, 차남 도장(道長)이 홍문관 응교이고, 도장의 장남 원정(元禎)이 호조 참판이고 차남 원록(元祿)이 장연 도호부사(長淵都護府使)이며, 원정의 장남 담명(聃命)은 첫 벼슬로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다. 자손은 모두 다음에 나열한다.
銘曰。確而廉。和而不疵。可以敎。可以儀。君子哉。魯無君子。斯焉取斯。
그 명은 다음과 같다.
확고하고 청렴했고 / 화합하면서도 흠이 되지 않았으니 / 교훈이 될 만하고 / 본보기가 될 만하네 / 군자답구나 / 노나라에 군자 없었다면 /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러한 덕을 취했겠는가
●위의 묘갈명은 석담 이윤우(李潤雨)에 대한 것이다. 이윤우는 인천채씨 17세 휘 응린(應麟)의 사위로 정한강(鄭寒岡)의 문인이며, 당대의 명사였다. 이윤우의 아들 셋 중 장남은 도창(道昌)이며 도사(都事)를 지냈다. 둘째가 도장(道長)으로 응교(應敎)를 지냈으며, 셋째가 도장(道章)으로 직장(直長)을 지냈다. 도장(道長)의 아들 둘 중 장남 원정(元楨)은 이판(吏判)을 지냈고, 차남 원록(元祿)은 대사헌을 지냈다.
♣계운궁(啓運宮) :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를 가리킨다.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의 딸로 정원군(定遠君, 1580~1619)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한 뒤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되었고, 궁호(宮號)를 계운궁이라 하였다.
♣세자 : 인조의 장자(長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를 말한다. 1625년(인조3)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1627년에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혼인하였다.
♣정사 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 정사 공신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이고, 원종공신은 각 등급의 정공신(正功臣)에 들지는 못했으나 일에 어느 정도 기여한 사람들에게 등외로 내린 칭호이다.
♣천도(天道)는……미워한다 : 《주역》 〈겸괘(謙卦) 단전(彖傳)〉에 “천도(天道)는 가득한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것에는 더해 주며, 지도(地道)는 가득한 것을 변화시키고 겸손한 쪽으로 흐르게 하며, 귀신(鬼神)은 가득한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주며, 인도(人道)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군자답구나……취했겠는가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부자께서 자천(子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군자답구나, 이 사람은.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러한 덕을 취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