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2,36-41
복 음 : 요한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3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특이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것도 조그만 이벤트성 행사라 할 수 있는 지역 대회가 아닌 국제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 대회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쓰레기 줍기 세계 대회”
정해진 시간 내에 쓰레기를 가장 많이 줍는 팀이 우승하는 경기입니다.
자그마치 21개국에서 참가했고, 이 참가자들은 인근에서 90분간 550kg의 쓰레기를 수거했습니다.
한 참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든 지든, 모두가 기분 좋은 스포츠였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했을까요?
90분 동안 계속해서 쓰레기를 주울 수 있는 체력을 키웠을 수도 있습니다.
또 쓰레기인 것과 쓰레기 아닌 것을 구별하는 훈련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무엇보다도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쓰레기 줍는 것도 하나의 의미 있는 대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실천하기 세계 대회’를 한 번 개최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더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채점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특히 자기들의 우승을 사랑의 마음으로 양보할 것이기에
우승자를 가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대회가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만을 보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받는 사랑, 조건적인 사랑, 그래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왜 울고 있을까요? 누가 때려서 우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주님께서 직접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음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자기 이름을 부르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마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또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주님과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만이 주님을 알아보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더 많이 사랑합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 그저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을 것이고,
더더욱 향유를 준비하여 이른 아침 무덤에 달려올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큰 사랑을 지닌 마리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고,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주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울러 그 주님을 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랑이 주님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사랑합시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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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김춘수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계가 그럴까? 나와의 관계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가슴이 벅찼던 때가 있다면 언제가 있을까요?
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떠오릅니다.
월드컵 사상 첫 16강은 가슴 벅참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8강전에서 이탈리아와 연장전까지 가고
안정환 선수의 결승 골로 4강으로 진출했습니다.
4강전에서 대한민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 끝에
골키퍼 이운재 선수의 선방과 홍명보 선수의 결승 골로 4강에 진출했습니다.
비록 결승전의 문턱에서 독일에 패배했지만
2002년 대한민국은 둥근 축구공 하나로 축제의 날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멋진 말들이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현수막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했던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말입니다.
서울의 광화문과 시청을 가득 메운 응원단이 있었습니다.
저도 본당의 마당에서 교우들과 함께 대한민국 축구를 시청하면서 응원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붉은 악마’로 불리던 빨간 응원복과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며 응원했던 박수입니다.
아! 또 가슴 벅찼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트럭에 소를 싣고 판문점을 넘던 장면입니다.
그 일이 물꼬가 되어서 남과 북의 경제협력 상징이 되었던
‘개성공단’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뜨거운 축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도 가슴 벅찬 일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제가 투표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입니다.
8번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고, 3번은 제가 투표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투표한 후보가 두 번 더 대통령이 된다면
제가 투표한 후보가 50%는 당선되는 것을 볼 것 같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는
한바탕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학력고사를 보고 신학교에 지원했을 때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직접 학교에 가서 벽보에 적혀있는 이름을 확인하였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저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 가슴이 벅찼습니다.
공부에 그리 취미가 없었는데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달콤한 유혹에 공부했었습니다.
드디어 10등 안에 들었는데 친구들도 선생님도
저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커닝했다는 의혹의 눈초리로 대하였습니다.
서운함과 억울함에 코피가 나도록 공부했고,
커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등수를 얻었을 때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슴 벅찼던 것은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을 때입니다.
바닥에 엎드려 기도할 때입니다.
서품식에 참석한 교우들은 모두 ‘성인 호칭기도’를 불러주었습니다.
성인들의 전구 함을 청하며
주님의 제단에 봉사할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가슴 벅찬 체험을 하셨는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는 나약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꼈고,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절망에 빠지고, 어둠 속으로 빠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전에 세상 것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
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당당했고, 두려움도 없었고,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에만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배움이 부족했던 백정도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도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력이 약한 노인도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는 지식도, 나이도, 건강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을 받으면
주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라뿌니!’라고 가슴이 벅차 소리쳤습니다.
사도들도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우선순위를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즐겼던 오락, 취미, 만남이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선교 그리고 나눔의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슴 벅찬 목소리로 ‘라뿌니’라고 소리치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실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세상 부끄러운 초대형 참사들을 유독 많이 겪은 우리 백성들입니다.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인재라서 더욱 안타깝고 서글픕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할 지라도
희생자 유가족들의 참담한 슬픔은 결코, 가시지 않습니다.
유가족들 가운데서 가장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으니,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되거나 아예 찾지도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분들의 간절한 바람은 오직 한가지 시신이라도 돌아왔으면!입니다.
그러면 흔들고 대성통곡이라도 할 텐데, 붙들고 울부짖기라도 할 텐데...
그만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신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추모하고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그리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기절초풍할 일을 겪었습니다.
스승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누군가가 탈취해 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내려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해 주신 주님이었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바 없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손 내밀어주셨던 분,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분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세상 다 끝난 심정이던 마리아 막달레나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윽고 하시는 말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너무나 놀랍고도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뛸 듯이 기뻤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라뿌니!" 하고 외치면서 예수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두 발을 꼭 붙들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던지신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종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고 우리를 동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우리 각자의 내면 깊숙이,
우리 영혼의 성 안으로 들어오시겠다는 표현입니다.
때로 미풍 같은, 때로 태풍 같은 성령의 현존으로,
때로 우리를 영생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체성혈의 형상 안에
영원히 살아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마리아가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묻는다(13절).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한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마리아는 “라뿌니!”(16절)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셨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똑같이 되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신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사람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부활절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어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부활 체험에도 단계가 있다: 우선 내가 왜 우는지 알아야!
전삼용 요셉 신부
1년에 100억 이상을 버는 인기 강사 이지영 선생도
중3 때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이 워낙 가난했고 부모님은 동시에 암에 걸리셨고
심지어 지하에 사는데 홍수 물까지 들이닥쳐
옷가지는 물론 그동안 필기한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선배가 버리고 간 교복을 입고 남들이 빌려준 연필과 노트로 공부하고 있는
그 비참함은 누가 봐도 살 의욕을 잃게 만듭니다.
지영 학생은 국어 수업 중에 벌떡 일어나 나갔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죽으러 간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잡아주려니 생각했겠지만, 선생님은 화장실 빨리 다녀오라고만 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운 건물 맨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무서워서 못 뛰어내리겠더랍니다.
그때 느낀 것은 삶은 죽음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서울대에 들어갑니다.
인생 두 번째 전환점은 법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배우며 한 대법원장에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묻지마 살인사건 용의자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본인도 자살 시도하며 죽여달라고 하고
검사나 모든 여론이 사형을 구형하라고 압박을 가해왔지만,
대법원 판사는 무기징역을 구형하였습니다.
그는 죽으려고 했던 것에 착안하여 재판 때 피고인에게
“자살. 자살. 자살….”이라는 단어를 열 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살이 “살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쏟았고 대법원장은 자신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도 죽고 싶었던 이지영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기 경험을 나누며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힘들어서 우는 이유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천사를 먼저 만납니다.
천사는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묻습니다.
왜 울고 있었을까요? 그녀에겐 스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다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돌려달라고 청합니다.
아직 자신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지기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는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드디어 만났습니다. “나의 선생님”(라뿌니!)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게 나를 이끌어 줄, 나의 이름을 불러줄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음을 알지 못하면 나의 모든 에너지는 돈을 버는 곳에,
애인에게, 혹은 세속적 성공을 위해 다 써버릴 것입니다.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에서 보듯 알려고만 하면 믿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싶은 욕구가 헛된 곳에 소진되게 됩니다.
김양회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남아프리카 여행 중에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앙골라 가는 비행기를 놓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면세점에서 아프리카 토속품들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미처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어 실력도 좋지 못해서 출입국 직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은 괜찮았지만 자신이 신부라는 것은 밝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사제가 영어도 못하고 비행기도 놓치고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직업에 대해 질문을 했고
신부님은 결국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실대로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작은 수수료만 내고 타고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참조: 김양회 신부, 부르면 희망이 되는 이름, 바보 같은 신부]
맨날 똑같은 내용일지 모르지만, 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이 우울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해서, 연애가 안 돼서 등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발견하고는 ‘스승’이 없어서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이 책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학교에서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살펴봅시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나를 울게 만들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진짜 내가 울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잡아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책이라도 읽어봅시다.
반드시 나의 이름을 부르며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빈무덤은 부활신앙의 씨앗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요한복음은 예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요한복음은 원래 20장을 마지막으로 편집되었고,
21장은 나중에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21장을 단락으로 구분하면,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발현,
예수와 首弟子 베드로, 예수와 愛弟子, 에필로그(맺는 말)의 4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곰곰이 살펴보면, 이 대목을 추가로 편집해야 했던 의도, 또한 쉽게 밝힐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이미 배반한 적이 있는 베드로(요한 18,15-18,25-27)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단의 으뜸으로, 그리고 초대교회의 首長으로 인정하고 내세우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를 엮어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특히 첫 단락 마지막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21,14)라고
明記함으로써 앞서 두 번의 발현(20장)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점이 흥미롭다.
아무튼 요한 복음사가의 原福音은 20장으로 끝난다.
요한복음 20장은 총 5단락으로 편집되어 있다.
첫 단락은 빈무덤 사화(1-10)로써 부활대축일 낮 미사 복음으로 읽은 바 있다.
두 번째 단락은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발현하신 내용으로(11-18) 오늘 복음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락은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19-23)을 기록하고 있으며,
네 번째 단락은 예수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 확인을 다루고 있다.
다섯 번째 단락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락은 서로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부활 제2주일 복음으로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요한복음 20장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1,2,3 단락은 단 하루(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서 저녁까지에 일어난 사건을,
4단락은 정확히 여드레 후 같은 날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단락의 내용을 다시금 정리해 보자.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녀는 곧 바로 달음질을 하여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간 것으로 알린다.
이 말을 들은 두 제자는 곧 무덤으로 달음질쳐 간다. 애제자가 더 빨랐으나 안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곧 뒤따라온 수제자가 무덤 안에 들어가 본다. 수의만 있고 예수의 시체는 없었다.
그제야 애제자도 들어가서 보고(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제자는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결론은 빈무덤에 대한 믿음이다.(20,1-10)
오늘 복음은 요한 20장의 두 번째 단락으로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첫 발현을 다루고 있다.
두 제자가 무덤을 떠난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에 남아 울고 있었다.
마리아의 머릿속은 주님이 없어졌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게다가 울고 있었기에 객관성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그녀가 무덤 안에 나타난 두 천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자기 뒤에 서 계신 예수를 보고도 동산지기로 오인하여 없어진 주님을 내놓으라고 한다.
결국 예수께서 그녀에에 “마리아”하고 이름을 부르자
“라뽀니” 하고 응답함으로써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와 비슷한 대목에서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도록 허용했다.
(마태 23,9/ 월요일 복음)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곧 바로 부활 증인으로 임명하고
부활 소식을 전하는 사도로 파견하고 있다.
마리아는 주님을 잃은 슬픔에다 시체 없는 빈무덤 때문에 슬픔이 가중되어 울고만 있었고,
그녀의 생각과 시선은 빈무덤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슬픈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자주 그 일에만 신선을 집중하여
아파하고 걱정하고 억울해하며, 때로는 땅을 치며 운다.
그러니 자기 뒤에 무엇이 있는지,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깨달을 수가 없다.
이럴 때 귀를 세우고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그러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빈무덤이 부활 신앙의 씨앗이 될 수는 있으나, 빈무덤 자체가 부활신앙은 아니다.
마리아는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요한 10,1-6: 목자와 양의 비유 참조)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아 부활신앙을 얻는다.
이때 얻게 된 신앙은 자기만을 위하여 고이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파견과 선포의 임무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마리아더러
“나를 붙잡지 말고, 가서 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마리아가 얻은 부활 신앙이 自力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복음과 독서에는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울다’(‘클라이오’)라는 동사를 네 번이나 쓰는데,
좌절하고 분노하였지만 끝내 항의조차 하지 못하여 상처 입은 감정을 묘사합니다.
한편 독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로
“마음이 꿰 찔리듯 아파”하는 유다인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가책을 느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데
그 답은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울고 있던 마리아는 무덤에서
“뒤로 돌아서”고 “마리아야!”라는 부르심에 또 “돌아섭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덤에서 돌아서고 부르시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스 말 동사 ‘스트레포’는 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동작을 의미하지만,
심경과 인식의 ‘변화’를 뜻하기도 합니다.
‘돌아서다’라는 행위로서 그는 ‘모름’(“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에서
‘앎’(“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으로 건너갑니다.
진정한 파스카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신이 없어졌다.’고만 생각한 탓이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자, 본능적으로 그분을 붙잡습니다.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즉각적이고 단순한 반응이었을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여야 할 일은 당신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은,
이 이야기 바로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썼던 그리스 말 동사
‘호라오’(부재를 통하여 현존을 믿게 되는 의미의 ‘보다’)를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 적용합니다.
이제 그가 주님의 부활을 보고 믿게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김 마리 에바 수녀
주님! 저의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당신이 저를 부르시면 저는 멈추어 서고,
당신이 저를 부르시면 저는 당신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저를 불러주십시오.
당신이 저를 부르시면 저는 눈물을 그치고,
당신이 저를 부르시면 당신을 향하여 내 삶을 돌리겠습니다.
주님! 당신의 부르심으로
마리아가 부활을 선포한 것 같이
저도 부활을 만나고 싶습니다.
부활을 선포하고 싶습니다. 아멘.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