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3,1-10
복 음 :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 부활 판공 때는 다른 때와 달리 평일이 아닌 주일에 판공성사를 했습니다.
9시와 11시 미사 전 1시간, 총 2시간을 교구청 신부와 학교 신부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두 시간 동안 고해성사 보신 분이 자그마치 600명이 넘었습니다.
평일에 했던 판공성사보다 2배 이상 많은 사람이 고해성사를 본 것입니다.
얼마 뒤, 우리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던 신부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
요즘에 부활에는 거의 성사를 보지 않던데, 그렇게 많이 성사 보실 줄 몰랐어.”
맞는 말입니다. 신자들에게 너무 감사했고,
이런 본당의 본당신부라는 사실에 특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한 모습에 더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만약 성탄 판공성사 본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성사 보는 사람이 적었다면,
‘우리 신자들은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마음이 부족하다’라며
저 역시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영향을 받는 우리입니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누군가가 그 모습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타본당신자가 미사 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냉담하다가 이곳 성당에 우연히 오게 되었는데,
성당이 깨끗해서 기도하고 싶어졌어요. 이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우리 성당 교우들은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알아서 치웁니다.
‘누가 치우겠지’라면서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해서 치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성당이 늘 깨끗합니다.
자기 모습이 바로 전교 활동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전교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자기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주님을 가장 잘 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교 활동을 잘하고 있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요.
이미 몇 차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하지 않고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가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전하기보다는 과거로만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비로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믿음을 통해 주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믿음을 통해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삶으로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 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 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고 절망하고 슬픔에 빠져,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 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는 말한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계 안에 매달리는 대신 그 너머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뼛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서 먼저 알려주셔야 알 수 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에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허망함은 사랑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무덤의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려면 영의 눈이 열려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고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더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 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엠마오(따뜻한 샘물)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는데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 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였듯이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오시든지 가시든지 그냥 놓아두지 말고 못 가시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시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에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길을 걸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으며,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하면서 마음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곧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들이 육안으로 부활한 영의 몸을 볼 수 없었을 뿐입니다.
실망을 환희로 바꾸는 당신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남아계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즉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가르침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오늘도 말씀을 대할 때에는 지식이 아니고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저는 아프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고통을 받지만 낙담하지 않습니다.
혼란되지만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시련을 받지만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내쫓기지만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시련은 잠시뿐이지만
다가올 삶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성녀 엘리사벳시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헬렌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날. 나는 나에게 친절과 따뜻함, 그리고 우정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둘째 날, 새벽 여명과 함께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며
지구가 깨어나는 그 경이로움을 지켜보고 싶다.
마지막 셋째 날. 다시 나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아침을 지켜보며
이날의 새로운 계시를 체험하고 싶다.
이날 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밤중이 깊어 가 나의 마지막 밤이 문을 닫을 때
나는 이 사흘간 보았던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감사할 것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마찬가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단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자 평생 걷지 못했던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날 걷지 못했던 사람은 결코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뉴욕에서 왔을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댈러스에는 볼 것이 별로 없답니다. 운동도 골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댈러스에 와서 1달이 지났는데 댈러스에는 볼 것도 많고, 운동할 것도 많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성당까지 차로 가면 5분이지만 걸어가면 50분이 걸립니다.
매일 성당 갈 때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새벽의 바람과, 오전의 바람 그리고 오후의 바람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대형을 유지하며 날아가는 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모양의 구름, 양 모양의 구름도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로질러 가는 뱀도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제법 온 날에는 둑 가까이 불어난 불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껑충껑충 뛰어가는 토끼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 숲속을 걸으면 산책 나온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고, 길을 청소하는 차량도 볼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걸으면서 강의를 듣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1달이 조금 넘었는데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댈러스는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제게 보여 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함께 할 공동체가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물리적인 시간)은 어쩌면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의미의 시간)은 언제나 감격과 감탄의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서는 사제관에서 성당 가는 길이 곧 엠마오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은 말 그대로 충격, 경악, 감탄,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되었을지라도 곧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박해와 고문과 죽음을 계속 이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박해와 고문을 받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당하게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피와 땀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2000년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라뿌니’라고 소리쳤던
마리아와 같은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긴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빵을 나누었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진한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헬렌켈러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방긋 웃는 아의 모습에서도,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의 땀방울에서도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리들 또한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성가 461번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을 이 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 마저 하시며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뜻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엠마오의 제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두 제자가 길을 가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유대인들의 불의한 짓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함께 걸으시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제자들은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좌절과 상처를 감추지 않고 곧장 의사이신 그분께 모두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그들의 모든 바람을 수포가 되게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려고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에게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불타올랐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신 다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어,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아직 빛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다.
떼어진 빵 조각이 눈을 열어주는 열쇠다.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성사로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교회의 성찬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담긴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사라지신 것은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 빵은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빵이다.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 빵이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이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로 그분을 알아봄으로써 하나가 된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볼 수 있다.
즉 예루살렘까지 30리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체험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때
완전히 자기의 체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24,29)
돌이킬 수 없는 주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며 절망하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는 부활의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죽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이었음에도
죽음이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때,
제자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힘차게 달려갔음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주님은 아주 특별한 모습이나 요란스럽게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향해 낙담한 채 걸어가는 제자들에게 살며시 다가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슬픔과 낙담으로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힘들게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며시 다가오셨겠지만,
우리 역시도 세상일로 마음이 분산되어 있어 알아보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로 두 제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시면서 예수님은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24,17) 하고 묻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도록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듣는 게 아니고, 자신이 한 이야기를
자신도 듣도록 응답하고 공감해서 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가운데 멈추어 서서, 클레오파스가
“아니,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24,18)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왜 침통해하신 가를 말할 수 있도록 “무슨 일이냐?” (24,19) 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문제를 말하도록 질문을 다시금 던지십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제자들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으며,
베드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서 알려준 사실과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반신반의 상태에서 믿지 못하는 자신들의 답답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길을 떠나려고 할 때,
두 제자는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24,29) 하고 초대합니다.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자” (24,30)
그때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내 사라지셨습니다.
낙담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는 잘 듣지 못하며,
슬픔과 실망으로 넋이 나간 상태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매일 말씀으로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주시고,
성체로 매일 우리의 닫힌 눈과 마음을 뜨게 해주시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희망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고 증거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부활을 확신한 베드로 사도는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3,6) 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3,8)
이 모습이 바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습하고 암울하며 싸한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기쁨과 환희로 넘쳐 ‘알렐루야!’를 힘차게 노래하며
그 기쁨을 누군가와 나눠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주님을 초대하는 마음은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알렐루야.” (영성체송)
많은 공동체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부활 축제 기간에 엠마오를 다녀옵니다.
사순시기 동안 주님의 남은 고난에 열심히 참여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사순시기 동안 겪었던 것을 서로 나눕니다.
이 엠마오 여행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 여정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의 고마움과
또한 자신의 걱정과 어려움을 기꺼이 들어주는 동반자가 있다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함께 걷는 형제자매가 바로 지금 우리가 만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들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의 기준이며,
지금 누군가가 여러분의 십자가와 고난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기에
여러분 또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그 형제자매에게 행복을 주길 바랍니다.
부모에게 효도가 당연한 사람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전삼용 요셉 신부
러시아에서 호랑이 새끼들을 젖 먹여 키운 개에게
다 성장한 호랑이들이 순종하고 애교까지 부리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이것이 당연하게 보이면 분명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날이 머지않았고,
당연하지 않고 이상하게 보이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짐승들까지도 자신에게 젖을 준 동물을 자기 부모라 여깁니다.
호랑이가 되었지만, 호랑이가 되는 법을 개는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냥 젖을 준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호랑이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여기엔 놀라운 두 가지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호랑이 새끼들은 젖을 주는 개를 자기 어미라 믿었습니다.
젖은 살과 피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젖을 준 어미는 당연히 영광도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게 두 호랑이가 싸울 때 다 늙은 어미 개가 얼굴을 물며 말려도
어미 개에게 호랑이도 순종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여인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당연히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항상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부모 없이 자랐어도 우리를 고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당연히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또 어머니는 부족하다고 말은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월급봉투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아버지의 돈을 받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창조자는 피조물을 위해 당연히 피를 흘리고 그 피 흘림에 대한 영광을 당연히 받습니다.
이것이 당연하지 않다면 효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게 된 게 부모의 피 흘림 없이 가능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짐승에게 길러지면 짐승으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부모를 당연히 공경합니다. 영광을 드립니다.
구약성경은 이 내용들이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는 피조물을 위해 당연히 피를 흘려야 하고
그 피 흘린 메시아는 어머니처럼 당연히 부활의 영광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셨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분별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이미 부활에 대한 진리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분을 만나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가발을 처음 쓰셨을 때 어머니에게 “아주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정말 어머니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가발을 쓰실 것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다른 사람으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로 유학 간 직후에
버스에서 분명 아는 얼굴을 보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부부였습니다. 계속 보며 결국엔 TV에서 보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먼저 다가와 저에게 인사하며 같은 본당 신자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유학 나오기 직전에 분명 인사를 한 잘 아는 부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로마로 여행하러 온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같은 버스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만약 자녀가 있다면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구약성경의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의 당연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고 있어야 눈에 보입니다.
특별히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 당신 살과 피라고 하실 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머니라 여기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면 아주 쉽습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모든 돈을 쓴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돈을 더 벌어다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기에 인간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기초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부모를 이해하고 공경합시다. 그러면 구약성경을 이해한 것입니다.
이제 빵을 떼어주시는 분이 우리 창조자일 수밖에 없음이 이해되고
그러면 성체 안에서 주님을 알아보게 될 일만 남습니다.
대사제 그리스도의 ’첫 미사‘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의 복음 마지막 부분인 24장에서 예수부활과 승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24장은 총 네 단락으로 편집되어 있다
첫 단락은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벌어진
여인들의 빈무덤 확인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1-12절)
둘째 단락은 같은 날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두 제자의 부활 체험담과 예루살렘 귀경 후 11제자들 앞에서 행한
체험 報告를 기록하고 있으며, 오늘 복음에 해당 된다.(12-35절)
셋째 단락은 엠마오 두 제자가 체험담을 보고하는 중에 돌연 발생한
예수님 발현 사건과 마지막 당부 말씀을 전하고 있다.(36-49절)
마디막 단락은 예수님의 승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50-53절)
이렇게 루카 福音史家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단 하루에 일어난 일로 다루고 있으며,
예수님의 승천 또한 추측컨대 같은 날에 일어난 일로 기록하고 있다.
(1단락: 새벽, 2단락: 낮~저녁, 3단락: 저녁, 4단락: 늦은 저녁)
오늘 복음은 루카 24장의 두 번째에 속하는 단락으로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체험한 부활 사화를 담고 있다.
이는 4복음서가 들려주는 부활사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야기는 상당히 짜임새가 있는 ’도입→전개→결론‘의 구성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 과정을 하나씩 짚어보자.
《도입》 13-14절
오늘의 주인공인 두 제자는 예수님의 12제자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넓은 의미의 제자단에 속한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일흔 두 제자에 속한 것으로 짐작된다.(루카 10,1.17)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모든 희망을 버린 채
좌절과 실의에 빠진 두 사람은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믿었던 예수님의 죽음과 그간 제자로서 따라다니며
허비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 등을 내용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고향으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제 복음에서 본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과 비슷하다.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빈무덤에 시선을 고착하고
울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모습 말이다.
그들은 예수에 관한 모든 추억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전개》 15-27절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선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리 없으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낯선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신다.
예수께서는 이미 사건의 全貌를 알고 계시지만,
제자들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꼬리에 꼬리를 문 對話를 가꾸어 나가신다.
예수님의 예감을 들어맞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희망(예수=구원자)과
실망(예수=실패자, 죽은지 사흘이 지나버림)을 동시에 발견하신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지식은 대단히 단편적이었다.
그들이 여인들(24,10: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깜짝 놀랄 일을 듣기는 했으나, 그것은 결국 빈무덤에 대한 확인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예수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를 비롯한 성서의 기록들을 인용하여
사건 전모의 연관성을 설명하신다.
그들이 비록 나중에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32절)고는 하나,
당장 그 자리에서 깨달은 바는 없었다.
《결말》 28-35절
일행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더 멀리 가시려고 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낯선 이를 붙잡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제자의 태도는 침통한 표정(17절)에서 낯선 사람에게
“함께 묵어가시라”(29절)는 호의를 베풀 만큼 부드러워졌다.
대화와 성서 말씀이 ’뜨거운 감동으로‘ 한몫을 한 것이다.
이야기의 절정이자 핵심은 마지막 부분인 저녁식사에 있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30절)
그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본다.
결국 제자들은 성찬례(최후의 만찬)를 상징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빵을 떼어줌‘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저녁식사(빵을 나눔)가 두 제자들에게
즉시 예수님 최후의 만찬(성체성사 제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두제자는 12제자에 속하지 않았기에
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 不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께서 언젠가 5,000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실 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던 장면(루카 9,16)을 떠올렸을 가능성은 있다.
아무튼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그분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두 제자는 그 길로 예수 부활의 중인이자 선포자가 되어
예루살렘의 제자들을 찾아가 보고서를 제출한다.
《종합》
엠마오 부활 사화는 실의에 빠져 예수에 관한 단편적인 기억을
깡그리 지우려 했던 제자 둘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한 사건이다.
이는 절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를
희망과 확신의 제자로 세운 과정을 들려주는 아름다운 사건이다.
필자는 그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체적 개념 셋을 언급하고 싶다.
제자들이 부활 체험에 이르도록 도와준 매개체는
바로 예수님과의 대화, 성서 말씀 그리고 빵을 나눈 것이다.
이 셋은 祈禱, 聖書, 聖餐禮로 종합된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빵을 나누는 성찬례이다.
그러나 성찬례는 기도와 성서의 두 기둥 위에 서 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방법도 이 셋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셋을 통하여 우리가 자력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의 지평을 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를 통하여 우리를 만남의 지평에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오늘 엠마오에서의 ’빵 쪼갬‘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십자가 제단에서 자신을 제물로 바친 대사제 그리스도의 ’첫미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박 마리 안젤로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루카 24,25)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향하는 두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죽음을 말하며 침통한 표정을 짓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아직 지쳐서 기쁨을 찾아보기 어려운 저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부활했는데, 너의 마음을 어찌 이리 굼뜨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수난하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물하시려고 말입니다.
그러니...
내 영혼아, 잠에서, 지침에서 깨어나 기뻐 용약하자!!
알렐루야!!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