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處士墓表】
채처사 묘표
蔡爲達之著姓。而居硏經者又甞以富豔稱鄕里。問孰開創是則曰惟處士松峰公。處士諱元祥字子徵。其先出仁川。高麗末有諱貴河。以戶曹典書。國亡守義不仕。謚貞義公。其後有曰柳亭諱澄。曰大谷諱先謹。曰遯庵諱楘。三世爲退溪,旅軒從遊弟子。曾大夫曰尙夏。大父曰斗杓。考曰師龍。妣達城徐氏翊豪女。
채씨(蔡氏)는 대구〔達城〕의 널리 알려진 성씨이고 연경(硏經)에 사는 이들은 또 일찍이 부유한 것으로 향리에 칭송이 있었다. 누가 이 전통을 열었는가 물으면, 오직 처사 송봉공(松峯公)이라고 한다.
처사의 휘는 원상(元祥), 자는 자징(子徵)이다. 그 선계는 인천(仁川)에서 나왔는데, 고려 말에 휘 귀하(貴河)는 호조 전서(戶曹典書)로서 나라가 망하자 의리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고 시호는 정의공(貞義公)이다. 그 후에 유정(柳亭) 휘 징(澄), 대곡(大谷) 휘 선근(先謹), 돈암(遯菴) 휘 목(楘) 3대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에게 배운 제자이다. 증조는 상하(尙夏), 조부는 두표(斗杓), 부친은 사룡(師龍)이다. 모친은 달성 서씨(達城徐氏)이니 익호(翊豪)의 따님이다.
處士少聦明饒心計。以家之貧也。且耕且學。不數十年。二者皆得成立。
처사는 어려서 총명하고 심계(心計)가 넉넉하였다. 집이 가난한 것 때문에 한편으로 농사를 짓고 한편으로 학문을 하여 수십 년이 되기 전에 농사와 학문을 모두 성립할 수 있었다.
其理財也。趍業如水。重糓如金。而至食料不問其多少。買土庄必先置祭田。兄弟未甞異貲。而禁家人無得私蓄。窖中常貯二年食。至歲大歉則盡傾之。以賑貸隣里族黨。
재물을 다스리는 데는 일에 급히 달려가기를 빠른 물처럼 하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기를 귀한 금처럼 하였다. 그러나 식료(食料)에 이르러서는 그 많고 적음을 묻지 않고, 토지와 집을 구매할 때는 반드시 제전(祭田)을 먼저 마련하였다. 형제가 재물을 달리한 적이 없었고, 집안사람들이 사사로운 재물을 축적하지 못하게 하였다. 움집에는 항상 2년 먹을 양식을 비축하여 큰 흉년이 들 때면 이를 다 꺼내어 이웃과 족당에 진휼하여 나누어 주었다.
其嚮學也設書塾購經史。以業子弟。雖平日所不知者。願留學則聽。飮食服用。視均子姪。子姪或怠荒有過。輒自笞以驚恐之。以是多所成就者。
학문을 하는 데는 서당을 짓고 경사(經史)를 사서 자제가 공부하도록 하였다. 비록 평소에 알지 못하던 사람이라도 머물러 배우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 음식과 의복을 아들 조카들과 균등하게 하였다. 자질들이 혹 태만하여 허물이 있으면 문득 스스로 매를 쳐서 그들을 놀라고 두렵게 하니, 이 때문에 성취함이 많았다.
其他如築先祠刊先集。建修東川硏經書院。定月講規。賞罰一鄕士。率銳身爲之。一以爲用財。一以爲勸學。無非推其所自成立者而行之也。
그 밖에 선대의 사당을 짓고 선대의 문집을 간행하며, 동천서원(東川書院)과 연경서원(硏經書院)을 건립하고 중수하였다. 월강(月講) 규약을 정하여 한 고을의 선비들에게 상과 벌을 내리는 데 적극적으로 솔선하여 행하였다. 한편으로는 재물을 쓰고 한편으로는 학문을 권장했던 것이 스스로 성립한 것을 미루어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處士以純廟癸巳十二月二十三日卒。享年六十八。
처사는 순조 계사년(1833) 12월 23일에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이 68세이다.
墓在道德山台峰負酉之原。配星山呂氏載耆。生四男沁,灚,瀗,瀷。沁男震植。灚男衡植,寅植,佑植,周植出系。瀗男容植。瀷男萬植。震植嗣男炳樞。
묘는 도덕산(道德山) 태봉(台峯) 유좌(酉坐) 언덕에 있다. 부인은 성산 여씨(星山呂氏)이니 재기(載耆)의 따님이다. 4남을 낳았으니 심(沁), 교(灚), 헌(瀗), 익(瀷)이다. 심의 아들은 진식(震植)이다. 교의 아들은 형식(衡植), 인식(寅植), 우식(佑植), 양자로 나간 주식(周植)이다. 헌의 아들은 용식(容植)이다. 익의 아들은 만식(萬植)이다. 진식의 사남(嗣男)은 병추(炳樞)이다.
衡植男炳樞出,嗣男炳穆。寅植男炳穆出,炳鎔,炳洙。佑植男炳斗,炳葉,炳胤。周植男煕東,煕九。容植男炳台,炳憙。萬植男炳德。以下不能盡載。
형식의 아들은 양자로 나간 병추(炳樞), 사남(嗣男) 병목(炳穆)이다. 인식의 아들은 양자로 나간 병목(炳穆), 병용(炳鎔), 병수(炳洙)이다. 우식의 아들은 병두(炳斗), 병엽(炳葉), 병윤(炳胤)이다. 주식의 아들은 희동(煕東), 희구(煕九)이다. 용식의 아들은 병태(炳台), 병희(炳憙)이다. 만식의 아들은 병덕(炳德)이다.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
四世孫鳳基以其所爲狀。來請墓文甚勤。余惟古之所謂賢能者。不必其施於政。則觀於修之家者而可知矣。修於家而能有所立。其爲政孰多於是。而世恒重彼而輕此惑已。
현손 봉기(鳳基)가 자신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문을 청함이 매우 부지런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옛날에 이른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여 반드시 정사를 행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가정에서 닦은 것을 살펴보고 그 현명하고 유능함을 알 수 있다. 가정에서 닦아 능히 수립한 것이 있다면 무슨 정사가 이보다 크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는 항상 저것을 무겁게 여기고 이것을 가볍게 여기니 미혹스럽다.
若處士旣修於一家。其不爲世所稱賢能者。特未能擧而試之爾。夫旣不能擧而試之。而又不予以其名。使來者何勸焉。此余之所以表也。
처사의 경우는 이미 한 가정에서 닦았는데도, 세상에서 현명하고 유능하다고 일컬어지지 않은 것은 다만 능히 천거를 받아 시험해보지 못해서일 뿐이다. 이미 능히 천거를 받아 시험해보지 못했는데, 또 그 이름마저 부여하지 않는다면, 후인에게 무엇으로 권면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드러내는 까닭이다.
●諱 원상(元祥)의 묘표(墓表)이다. 묘표를 찬한 사람은 조긍섭(曺兢燮)이다.
♣동천서원(東川書院) : 동산서원(東山書院)을 말한다.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을 제향한 서원이다. 1787년(정조11)에 동천서당이 창건되고, 1820년(순조20)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 마을에 있었다.
♣연경서원(硏經書院) :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배향(配享)한 서원이다. 1563년(명종18)에 창건되었고, 1660년(현종1) 3월에 사액(賜額)되었다. 대구부(大邱府)의 북쪽 20리 밖 화암(畫巖) 아래 있었다. 《大邱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