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패리멘타
Jean-Michel Basquiat
1960년 12월 22일
장-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뉴욕 브루클린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는 하이티 포르 오 프랭스 태생이며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는
푸에르토리코 태생인, 양친 사이에서 바스키아가 태어났다.
1966년 바스키아 가족은 파크 슬로프에서
브루클린의 이스트 플랫부시 지역으로 이사했다.
어릴 때부터 바스키아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패션 디자인과 스케치에 관심이 많았고
바스키아와 함께 자주 그림을 그렸으며 그를 가끔 미술관에 데려가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미술에 대한 바스키아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북돋아주었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67년 바스키아는 사립 카톨릭 학교인 성 안나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친구였던 마르크 프로쪼(Marc Prozzo)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둘은 바스키아가 글을 쓰고 프로쪼가 삽화를 그려 어린이 책을 만들었다.
바스키아는 알프레드 히치코크 영화, 자동차,
만화책, 매드 매거진 속의 인물인 알프레드 E. 노이만(Alfred E. Neuman)에게서
영감을 받은 만화 같은 드로잉을 계속해서 그렸다.
1968년 바스키아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팔이 부러졌고
여러 가지 내부 상처에 시달렸으며 비장을 들어내야만 했다.
한달 간 입원해 있으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
복사본을 선물 받았다.
이 책의 영향은 후의 해부학적 드로잉과
판화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979년 그가
공동으로 결성했던 음악 밴드의 이름 '그레이' 역시 이 책에서 따 온 것이다.
바스키아가 일곱살 때 그의 부모는 이혼하였고- 3남매와 함께
그의 아버지는 이스트 플랫부시에서 계속해서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1971년에 브루클린의 보에럼 힐 구역으로 이사하였다.
1974년 그의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는 승진 하였고,
세 자녀와 푸에르토리코의 미라 마르로 가게 되었다.
바스키아는 아버지의 골치거리가 되기 시작했고 최초로 가출을 시도하였다.
1976년 11월 그의 아버지는 뉴욕으로 다시 전근을 왔다.
바스키아는 에드워드 R. 머로우(Edward R. Murrow) 고등학교에서
다시 학교 공부를 시작하였다.
몇 주 후 그는 맨하탄의 진보적인 학교, 도시학교(City-as-School)로 전학하였다.
그 학교는 산학 실습이 고등학교 졸업을 위한 학점으로 인정되는 신방식 학교였다.
그곳에서 바스키아는 맨하탄 로워 이스트 사이드의
제이곱 리즈 프로젝트(Jacob Riis Project)의 낙서화가
알 디아즈(Al Diaz)와 만났다.
그들은 가까운 친구이자 초기의 미술 공동 제작자가 되었다.
12월 바스키아는 다시 집을 나갔다.
그는 2주동안 그리니치 빌리지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노숙하면서 환각제 LSD를 사용해 보았다.
도시 학교를 통해 바스키아는 '가족극단'이라고 불리는
어퍼 웨스트 사이드 연극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사이비 종교를 전파하는
SAMO(같은 늙은 바보 same old shit의 약어)라는 이름의
가공적 인물을 창조해냈고 SAMO 프로젝트를 '
여분의 증기를 빼는 방법'으로서 공동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IND 지하철 노선의 D 전철과 로워 맨하탄 주위의 건물에
스프레이 물감으로 경구를 써넣기 시작하였으며
그 문구는 기지넘치는 철학적 시들로 이루어졌다.
비록 졸업을 겨우 1년 앞두고 있었지만,
바스키아는 학교에 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버지의 새 반려자인 노라 피츠패트릭(Nora Fitzpatrick)과
아버지는 바스키아에게 안정되고 환영하는 가정을 만들어 주었지만
1978년 6월 그는 영구히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바스키아는 이렇게 말했다.
"열일곱살 때부터 나는 내가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모든 영웅들- 찰리 파커(Charlie Parker),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등을 생각하곤 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유명해졌는가를 낭만적으로 여겼다."
이러한 스타덤에 대한 매료는 바스키아 생애를 통해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다.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지미 헨드릭스, 찰리 파커, 빌 홀리데이(Billie Holiday),
슈가 레이 로빈슨(Sugar Ray Robinson)과
조 루이스(Joe Louis) 같은 음악가, 가수, 권투선수에 대한 흠모는
그의 후기 작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집을 떠난 후 바스키아는 여러 친구들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그
중에서도 다운타운의 프레드 브래스웨이트(Fred Braithwaite)와
리퀴노니스(Lee Quinones)를 비롯,
업타운의 낙서화가들을 불러 파티를 열었던
영국 화가 스탠 페스켓(Stan Peskett)의 커널 스트리트 꼭대기 방에 자주 묵었다.
그러나 파티에서는
미술보다는 음악적 견해에 대한 의견 교환을 더 많이 나누었다.
또 이 파티에서 바스키아는
후일 그레이의 단원이되는 마이클 홀먼(Michael Holman)과
이내 다운타운 나이트 클럽의 상대가 된 대니 로젠(Danny Rosen)을 만났다.
바스키아는 돈을 벌기 위해
손으로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그는 소호의 한 레스토랑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에게 접근,
워홀에게 엽서 한장을 팔았다.
바스키아는 알렉시스 애들러(Alexis Adler)와 데이트를 시작하였고
둘은 맨하탄 시내의 친구들 집에서 종종 함께 지냈다.
그들은 가까운 친구 펠리스 랄스터(Felice Ralster)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동안 이었다. 바스키아가 냉장고,
서랍장, 옷장, 상자, 문등 아파트의 모든 것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대어 랄스터가 더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스키아와 애들러는 그의 최초의 고정된 주소지-
이스트 12번가 527번지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새로운 다운타운가 명소에서 어울리는
영화 제작자, 음악가, 미술가 무리의 고정멤버가 되었다.
이러한 다운타운 클럽의 모습과 동시에 업타운에서도 할렘 거리와
남쪽 브롱크스의 지하에서 문화적 미학을 꽃피웠다.
힙합 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랩, 낙서, 브레이킹이 그것이다.
브래스웨이트는 바스키아에게 낙서화가
라멜지(Rammellzee)를 포함하여
업타운의 낙서화가들과 랩 아티스트들을 소개해주었다.
바스키아와 라멜지는 대립적이지만 진정한 우정을 나누었다.
1978년 12월 11일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 지에
뉴욕 근방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던 SAMO 문구에 대한
필립 패플릭(Philip Faflick)의 글이 실렸다.
이 기사가 나간 직후 바스키아와 디아즈는 의견 대립이 생겨
SAMO 공동 작업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소호의 여러 담벼락 위에 "SAMO는 죽었다"라는 문구가 쓰여졌다.
1979년 초 바스키아는 티셔츠에 그림을 그리고 엽서,
드로잉, 꼴라쥬를 제작하는데 몰두하였다. 이 작품들은
낙서미술과 추상 표현주의를 섞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바스키아는 이 작업의 많은 부분을
존 섹스(John Sex), 제니퍼 스타인(Jennifer Stein)과 공동으로 하였고,
작품들을 소호 근처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와
웨스트 53번가의 현대 미술관 앞에서 팔았다.
5월에 바스키아는 마이클 홀먼,
섀넌 도슨(Shannon Dawson), 빈센트 갈로(Vincent Gallo)와
'채널 나인(Channel 9)'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다.
이 밴드의 이름은 나중에 테스트 패턴(Test Pattern)을 거쳐
그레이(Gray)로 바뀌었다.
나중에 웨인 클리포드(Wayne Clifford)와 닉 테일러(Nick Taylor)가
밴드에 합류하였다.
바스키아는 클라리넷과 신디사이저를 연주하였는데,
그룹의 음악은 재즈, 펑크, 신스 팝을 독특하게 섞어놓은
일명 '소음 음악(noise music)'이었다.
1979년 가을 시각 예술 학교(School of Visual Arts)를 방문하던 중
바스키아는 동료화가이자 다운타운의 무대제작자-
키이스 해링(Keith Haring)과 케니 샤프(Kenny Scharf)를 만났다.
바스키아와 해링은 평생 비정상적인 우정을 나누었지만
바스키아는 해링 작품의 다듬어지지 않은 낙서적 성격에 감탄하였고,
자신과는 다르게 해링이
낙서문화의 진정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바스키아는 프레드 브래스웨이트를 통해
뉴욕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TV 파티의 제작자이자
인터뷰 잡지의 음악 편집자인 글렌 오브라이언(Glenn O'Brien)을 만났다.
머드 클럽(Mudd Club)에서 바스키아는
화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디에고 코테즈(Diego Cortez)를 만났는데,
그는 바스키아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고 드로잉 몇 점을 팔아주었으며,
나중에는 화상에게 작품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바스키아를 헨리 겔트잘러에게 공식적으로 소개해 주었는데
겔트잘러는 바스키아의 친구이자 초기 작품의 수집가가 되었다.
바스키아 미술은 1980년 6월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 근방의
빈 건물에서 열린 그룹전 '타임스 스퀘어 쇼(Times Square Show)'에서
공식적인 첫선을 보인다. 이 전시회는 미술계의 호평을 받았고
이스트 빌리지 클럽의 미술가들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첫 단계가 되었다.
바스키아는 한 벽에 SAMO 대형 설치 작업을 하였다.
자신의 미술적 재능에 대한 인정에 고무되어
바스키아는 그레이 그룹을 그만둘 것을 선언하고
8월 3일 머드 클럽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였다.
글렌 오브라이언은 바스키아를 그가 쓴 영화
'뉴욕 비트(New York Beat)'의 주인공으로 발탁했다.
이 영화는 개봉되지 못했는데 대략 다운타운 미술계와 바스키아 이야기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바스키아를 한껏 부추긴
오브라이언은 그를 앤디 워홀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바스키아는 영화 출연료로 미술도구를 구입할 수 있었고,
최초로 진지하게 작업할 장소와 거주할 공간이 되었던
그레이트 존스 스트리트의 영화 제작 사무소를 얻을 수 있었다.
1981년 초 바스키아와 그의 여자친구인 가수이자 미술가,
수잔 멀록(Suzanne Mallouk)은 이스트 1번가 68번지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81년 2월 바스키아는
디에고 코테즈가 기획, 롱 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예술 및 도시자원 연구소(Institute for Art and Urban Resources)의
P.S.1, 대형 갤러리 공간에서 열린
'뉴욕/뉴 웨이브(New York/New Wave)展'에 포함되었다.
이 전시회는 20명 이상의 미술가로 구성되었다.
바스키아는 한 벽면에 설치한 20여점의 드로잉과 회화작품으로
이 전시에서 부각되었다.
이 작품들을 에밀리오 마졸리(Emilio Mazzoli),
브루노 비숍버거(Bruno Bishofberger), 애니나 노제이(Annina Nosei)와 같은
화 상들의 주목을 끌었다.
P.S.1 전시가 끝나자마자 해링은 바스키아를 코함하는 70여명의 화가를 선정,
머드 클럽에서 '로워 맨하탄 드로잉 전시회
(Lower Manhattan Drawing Show)'를 기획하였다.
4월에 브래스웨이트와 퓨처라(Futura)는 '언어를 넘어서 :
낙서에 기본하고, 뿌리를 두고, 영감을 받은 작품들
(Beyond Words : Graffiti Based-Rooted-Inspired Works)'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머드 클럽에서 열었다.
1981년 5월 바스키아는 유럽을 최초로 여행하였다.
이태리 모데나에 있는 에밀리오 마졸리 화랑
(Galleria d'Arte Emilio Mazzoli)에서 열리는
최초의 개인전 때문이었다. 작품은 SAMO라는 제목 하에 전시되었다.
이때 바스키아는 애니나 노제이로부터 9월 자신의 화랑에서 열리는
그룹전 '공공 연설(Public Address)展'에 출품해 줄 것을 제의 받았다.
이 전시회의 초점은 미술에 있어서의 사회 정치적 내용이었다.
이 전시 후에 노제이는 바스키아의 주요 화상이 되었고,
그가 독자적인 작업실이 없는 것을 알고
그녀의 화랑 지하공간을 작업실로 사용하게끔 제공하였다.
또 노제이는 바스키아와 수잔 멀록을 소호의
크로스비 스트리트 151번지 아파트로 이사오게 하였다.
바스키아에 대한 최초의 긴 논평은
1981년 12월호 아트포름(Artforum)지에 실린 르네 리카르
(Ren Ricard)의 글이었다. 그는 바스키아에 대해
"같은 주제(낙서)에서 비롯하는 톰블리의 우아함이 있으며
젊은 뒤뷔페의 느낌 또한 있다."고 적었다.
1982년 3월 바스키아는
미국에서의 최초의 개인전을 애니나 노제이 화랑에서 가졌다.
이 전시회는 미술가, 수집가, 비평가들 사이에서 모두 극찬을 받았다.
바스키아는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Achille Bonito Oliva)가 기획하여
이태리 모데나의 사비카 델 코뮨 화랑
(Galleria Civica del Comune)에서 그룹전 '트랜스 아방가르디아 :
이탈리아/미국(Transavanguardia : Italia/America)展'에서도 역시 두드러졌다.
이 무렵 바스키아는 바바도스 출신의 미술가
셴지 카파로아(Shenge Kapharoah)를만났다.
둘은 뗄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 바스키아의 많은 친구들과
동료 미술가에게는 흥미있는 주제가 아닌 아프리카사상과
아프리카인의 이주에 대해 미술가로서의 관심을 함께나누었다.
4월 바스키아는 가고시언과 애니나 노제이가 함께 준비한
래리 가고시언 화랑(Larry Gagosian Gallery) 개인전을 위해
로스 앤젤레스로 갔다.
그는 헐리우드의 샤토 마몽 호텔과 친구 집에서 6개월간을 머물렀다.
같은해 6월 바스키아는 21세의 나이로 독일 카젤에서 열린 국제전시
'다큐멘타 7(Documenta 7)展'에 초청 받았는데, 그는 참가 미술가 중 최연소자였다.
9월에는 취리히의 브루노 비숍버거 화랑에서의 첫번째 개인전을 가졌으며
비숍버거는 그의 독점 화상이 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가장자리의 가로대가 노출된 작품이 최초로 전시되었다.
이 무렵 바스키아는 '해부학(Anatomy)'라는 제목의 최초의 판화집을 완성,
애니나 노제이 화랑에서 발간하였다.
(그러나 1982년 봄, 바스키아와 노제이는 개인적 차이로 인해 결별하게 된다.)
1982년 11월 바스키아는 펀 갤러리(Fun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애니나 노제이의 충고에 반해 개최된 이 전시회로
바스키아와 최초의 미국 화상간의 관계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 전시회의 작품들은 크로스비 스트리트의 작업실에서 은둔하는 동안
제작한 것들로 매우 호평 받았다.
또한 바스키아는 할렘 르네상스의 다큐멘타리 사진과 그 시대 미술가,
가수, 작가의 초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제임스 반 데 지
(James Van Der Zee)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사진 초상은 바스키아를 20세기 흑인 미술가 족보에 올려놓고 있다.
12월 로테르담 델타 화랑(Galerie Delta)에서
바스키아는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라멜지와 낙서화가 토시크(Toxic)와 함께 로스 앤젤레스로 돌아왔다.
그는 에르미타쥬 호텔에 자주 머물면서
1982년과 83년 겨울을 로스 앤젤레스에서 보냈다.
바스키아는 화상이자 그의 작품의 애호가인 프레드 호프만
(Fred Hoffman)을 만났다.
그는 호프만의 도움으로 판화집 5판을
1983년 베니스의 뉴 시티 에디션(New City Editions)사에서 출판하였다.
음악에 대한 바스키아의 흥미는 지속되었고
그는 프레드 브래스웨이트, 토시크, 에이 원(A-One), 알 디아즈, 라멜지와 함께
랩 레코드를 제작 지휘하였다.
가끔 그는 여러 맨하탄의 클럽에서 DJ를 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은 재즈 음악가의 작품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여준다.
이에 덧붙여 바스키아의 문학적 참고는
윌리엄 버로우(William Burroughs)와
잭 케루악(Jack Kerouac)까지를 포함하였다.
1983년 3월 바스키아는 래리 가고시언 화랑에서의 두번째 개인전을 위해
로스 앤젤레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3월에 바스키아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에서 개최된
'1983년 비엔날레 전시회(1983 Biennial Exhibition)'에 포함되었다.
이 전시는 40명 이상의 미술가로 구성되었으며
그들 중 다수가 뉴욕의 미술관에서는 최초로 전시하는 것이었다.
22살의 바스키아는 비엔날레 사상 최연소 미술가였다.
8월 15일 바스키아는 그레이트 존스 스트리트 57번지로 이사했다.
바스키아는 인터뷰 지의 편집자이자
그의 열광적인 팬인 페이지 파웰(Paige Powell)과 데이트를 시작하였다.
파웰을 통해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둘은 함께 운동하였으며 서로의 초상화를 그렸고
미술행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바스키아의 가족경험뿐 아니라
인생과 미술에 대한 철학을 정기적으로 토론했다.
9월 최리히의 비숍버거 화랑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10월에 바스키아와 워홀은 뉴욕에서 밀라노로 함께 여행하였다.
바스키아는 마드리드와 취리히에서 시간을 보냈을 뿐 아니라
아키라 이케다 화랑(Akira Ikeda Gallery)에서 계획된
11월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브루노 비숍버거와 도쿄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비숍버거의 노력어린 커미션을 받아
그와 워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
(Francesco Clemente)는 뉴욕에서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바스키아와 워홀은 독자적으로 공동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1983년 12월 바스키아는 로스 앤젤레스로 돌아와
에르미타쥬 호텔에 머물면서
이스트 빌리지와 머드 클럽의 친구였던 마돈나와 시간을 보냈다.
래리 가고시언과 프레드 호프만을 통해 바스키아는
캘리포니아 베니스의 마켓 스트리트에 작업실을 얻어
나무 판넬 작품 시리즈를 시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후에 뉴욕의 메리 분 화랑(Mary Boone Gallery)에 전시되었다.
83년말까지 스위스의 비숍버거만이 바스키아의 유일한 거래
화상이었으며 화상들과의 문제는 계속되었다.
1984년 1월 바스키아는 로스 앤젤레스를 떠나 하와이 마우이로 갔다.
이후 그는 그곳을 자주 방문하게 된다.
그는 작업실을 둔 하나(Hana)의 공항에서 3시간 떨어진
섬의 오지에 농장을 하나 빌렸다.
2월에는 제라르 바스키아(his father),
노라 피츠패트릭(his step mother), 제닌 바스키아(his sister)와
페이지 파웰(an avid fan of his work)이 마우이로 바스키아를 방문하였다.
다시 3월에 그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다른 화상과 손잡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그는 메리 분 화랑에 합류했다.
그녀와 비숍버거는 바스키아의 주요 화상이 되었다.
5월에 바스키아는 메리 분 화랑에서의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바스키아는 뉴욕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이
보수 및 확장 후 재개관 기념전으로 기획한
'최근 회화와 조각의 국제전
(An International Survey of Recent Painting and Sculpture)'에 출품하였다.
8월에는 에딘버그(Edinburgh)의 프룻마켓 미술관
(Fruitmark Gallery)에서 최초로 미술관 전시를 개최하게 되었다.
9월에는 처음으로 바스키아와 워홀과
클레멘테와의 공동작품이 위리히의 브루노 비 숍버거 화랑에서 전시 되었다.
1984년 말 바스키아는 뉴욕 크럽의 주인인 아리아(Area)의 동생
제니퍼 구드(Jennifer Goode)를 만났다.
둘의 관계는 바스키아의 일생중 가장 진지한 연애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바스키아의 많은 친구들은
점점 더 과도한 마약 사용을 걱정하게 되었다.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그답지 않게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1985년 1월 바스키아는 취리히의 브루노 비숍버거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월 10일에는 캐스린 맥귀건(Cathleen McGuigan)의
'새로운 미술, 새로운 돈 : 한 미국 미술가의 마켓팅
(New Art, New Money : The Marketing of an American Artist)'
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위해
맨발로 포즈를 취한 바스키아의 사진이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하였다.
3월 바스키아는 메리 분 화랑에서의 두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같은 해 5월에는 헨리 겔트잘러의 추천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 키이스 해링, 케니 샤프와 함께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와 앙드레 퓌망
(Andree Putman)이 고치고 디자인한 이스트 14번가의 새로운 클럽,
팔라디움(Palladium)의 설치작업을 맡게 된다.
바스키아는 팔라디움의 마이클 토드 방에 대형 벽화 크기의 그림을 그렸다.
9월 뉴욕의 토니 샤프라지 화랑
(Tony Shafrazi Gallery)에서 바스키아와 워홀이 공동제작한
열 여섯 작품이 전시되었다.
샤프가지의 제안으로 두 미술가는 전시 광고 포스터를 위해
권투 트렁크를 입고 장갑을 낀 모습으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 전시에 대한 악평은 둘 사이의 긴장을 야기했고
종국에는 바스키아와 워홀의 우정을 흔들리게 했다.
12월 바스키아는 아키라 이케다 화랑의 개인전 개막식 관계로
도쿄에 일주일간 머물렀다.
같은 달에 애니나 노제이 화랑은 1982년에 완성된
바스키아 작품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바스키아의 망가진 건강은 점점 더 친구들 사이에 알려졌으며
특히 얼굴의 검은 반점들이 두드러졌다.
1986년 1월에 바스키아는
래리 가고시언 화랑에서의 마지막 전시를 위해 2주간 로스 앤젤레스를 여행하였다.
다음달 그는 페이 골드 화랑(Fay Gold Gallery)
전시를 위해 조지아주 애틀랜타를 방문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이자 유일한 남부 여행이었다.
8월 바스키아는 제니퍼 구드와 그녀의 남동생 에릭과 함께
아프리카를 난생 처음 여행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브루노 비숍버거와 합류하였는데
그는 바스키아의 요청으로
아이보리 코스트의 아비쟌(Abidjan)에서 전시회를 주선했다.
메리 분과의 관계는 점점 나빠졌고
같은 해 말에 다시 한번 뉴욕 화상과의 거래가 끊어지게 되었다.
11월 칼 하엔라인(Karl Haenlein)의 기획으로
60점 이상의 회화와 드로잉이 전시되는 대형 전시회가
하노버의 케스트너 게젤샤프트(Kestner-Gesellschaft)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바스키아가 유럽 미술관에서 가진 두번째 전시회였는데,
그당시 그의 나이 25세로
하노버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던 미술가 중 최연소자였다.
이 해 말 제니퍼 구드와 바스키아는 헤어졌다.
그녀는 바스키아의 친구들에게
그의 헤로인 남용을 종종 불평하였는데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둘의 관계를 청산하게끔 하였다.
동료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바스키아의 문제에대한 악의 어린 소문 외에도
미술계 인사들 사이에서 커져가던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 역시
그의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1987년 1월 바스키아는 파리의 다니엘 탕플롱 화랑
(Galerie Daniel Templon)에서 12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2월 22일 앤디 워홀이 사망하였다.
비록 지난해 둘 사이의 우정은 흔들렸으나 바스키아는 그의 죽음에 망연자실했다.
바스키아는 뉴욕, 파리, 뒤셀도르프에서 계획된
1988년 전시를 위한 작품 제작을 시작하였다.
바스키아는 뉴욕에서 1년 반 이상이나 전시회를 갖지 않았다.
1988년 1월 바스키아는 프랑스와 독일 전시를 위해 유럽에 보낼 그림을
뉴욕 브레지 바쿠미언 화랑(Vrej Baghoomian Gallery)에서
딱 하루 동안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나서 이봉 랑베르 화랑
(Galerie Yvon Lambert)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아이보리 코스트 출신의 화가 쿼타라(Quottara)를 만났다.
여름 이후 쿼타라는 아프리카 자신의 집으로 바스키아를 초대하였다.
같은 달에 바스키아는 한스 마이어 화랑
(Galerie Hans Mayer)에서의 개인전을 위해 뒤셀도르프로 여행하였다.
4월에는 브레지 바쿠미언 화랑에서의 개인전 때문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몇몇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을 칭찬하였으며
마치 바스키아가 갑자기 구제된 것처럼 보였다.
바스키아는 마약 남용을 중단하려는 뚜렷한 의지로 뉴욕을 떠났다.
한동안 머물기 위해 하와이의 농장으로 떠나는 중에
그는 달라스와 로스 앤젤레스를 들렸다.
그는 6월 말까지 마우이에 머물렀다.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로스 앤젤레스를 들려 일주일을 보냈다.
로스 앤젤레스 작업실의 조수였던 브라이언 윌리엄스
(Brian Williams)는 바스키아가 매우 행복해 보였으며
마약을 아주 끊었다고 말했다고 회고하였다.
1988년 8월 12일 금요일 장-미셀 바스키아는
자신의 그레이트 존스 스트리트 꼭대기 방에서 2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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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th Haring
팝아트의 거목 앤디 워홀의 열열한 숭배자,
바스키야의 동성애 파트너로 알려졌던
또한 사람의 거리 화가 키이스 헤링...
흑인사회의 낙서와 대중적인 만화를 예술로 승화시켰고
인종문제, 성의 자유, 에이즈, 사회정의 등에 관심을 가진
대중과의 소통을 통한 "대중을 위한 예술"을 주창했다
뉴욕화단의 천박한 상업주의 근성의 희생양이란 얘기도 있지만
추함을 아름다움(美)으로 성화시킨 위대한 예술가들의
계보를 이었다고 생각된다
바스키아는 해링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했었고
그의 재능을 높이 인정했었다
AIDS에 걸린 헤링은
27세에 마약 과다복용으로 요절한
바스키아 사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28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했다
팝아트 상품으로 많이 보여지는 해링의 드로잉들..
도쿄Pop Shop 에서...
In ThE SuBway..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