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사진을 보며
이성보
희끗한 모발하며
절로 굽은 등줄기가
호연한 가운 앗은
늙음의 징표 같아
못 볼 것 본 듯도 하여
외면 하고 싶었다.
어디에 쓸까 하다
영점을 떠올렸다
도리질 하다 말고
실눈 뜨고 살펴보니
잊었던 모진 세월의
주름 하나 걸어 왔다.
시조
고물차
이성보
밟으면 잘 나가는
그 이름은 똥차였네
겉치레는 시간에 뜯겨
내실 마저 집어 삼키고
차가 곧 인생의 등급
허리 꺾어 인사한다.
광나는 새차의 꿈
허름한 땟물로 남아
전신에 스며든 상처
버리면 고물이 된다
눈뜨고 당하는 수모
이 물골의 이 행색.
시조
불치하문 不恥下問
이성보
고양이 하는 짓이
볼수록 미욱하다
노니는 새마다 노려
꼼짝도 않더니만
수십 번 실패를 딛고
낚아챈 새 한 마리.
실패의 연속이던
내 지난 세월들이
불현듯 떠올라서
볼이 살짝 붉었는데
늦게사 깨달았다네
고양이의 미욱함을.
◎벽(癖)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버릇이 있다. 버릇 중 무엇을 치우치게 즐기거나 고치기 어렵게 굳어버린 것이 있다. 이를 두고 벽(癖)이라 한다.
화가 중 벽에 빠진 세 사람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百花譜>라는 그림책을 남긴 김 군 얘기다.
“사람이 벽(癖)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란 글자는 질(疾)에서 나온 것이니, 병 중에서도 편벽된 것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박제가(朴齊家)의 <백화보서(百花譜序)>에 나오는 글이다. 박제가(1750~1805)는 조선 후기 국가 경제 체제의 재건을 논했던 북학파의 일원으로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정치 사회 전반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을 담은 <북학의> 내편 • 외편을 쓴 사람이다.
《백화보》는 꽃에 미친 김 군이 1년 내내 꽃밭 아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술의 모양, 잎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책이다.
박제가는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백화보》라는 책은 남들이 하는 대로 하고, 주판알을 튕기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미쳤다는 손가락질, 멍청이라는 놀림에도 아랑곳없이 손님이 와도 시간이 아까워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열정 끝에 그는 이 그림책을 완성했다. 박제가는 김 군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은 훗날 자취조차 없겠지만, 꽃을 사랑해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그의 이름은 후세에 남을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김 군은 이름도 남기지 못했고 그의 책도 지금에 와서는 볼 수가 없다. 김 군의 꽃 그림책은 단순한 소묘에 그치지 않고 꽃잎과 빛깔까지 묘사한 채색화였으나 복사기가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그의 꽃 그림책은 오로지 한 부 밖에는 만들지 못했다.
둘째는 뱀을 그리는 벽을 가진 천경자 화가다.
천경자(千鏡子, 1925-2015)는 불행한 사건들을 경험하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화가로서의 꿈을 실현한 사람이다. 천경자의 예술세계는 찬란한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빛깔을 보석처럼 가꾸어 갔기에 우리는 삶의 고통과 슬픔이 오히려 영혼의 불꽃을 태우는 땔감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 주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의 죽음이 안겨준 상처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게다가 갈수록 나빠지는 집안 형편과 남자와의 갈등은 그녀를 지치게 했다. 삶의 시련이 극에 달했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 생각한 천경자는 자신에게 몰아닥친 잔혹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한의 무게를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 놓았다.
고통이 극에 달해 고통 속에서 방황할 때 어떤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햇빛에 꽃 비늘을 반짝거리며 날쌔게 찔레꽃 사이로 사라지는 실뱀 두 마리였다.
그녀는 환상 속 이미지를 스케치하기 위해 뱀집을 찾았고 그곳에서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는 비단뱀과 잔뜩 독을 품고서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들을 보며 묘한 삶의 충동을 느꼈다. 뱀의 꿈틀거리는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징그럽고 무서운 뱀을 그림으로써 생을 갈구했고 그렇게 해서 수십 마리의 뱀들이 뒤틀린 창자처럼 뒤엉켜 있는 작품 <생태>가 탄생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생태>가 공식적으로 소개되자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전시회는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뱀 그림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더구나 젊은 여성작가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동안 한국 미술사에서 뱀이 등장한 그림은 고구려 벽화 <현무도>가 유일했다. 무려 14세기 만에 뱀이 회화의 대상으로 등장했으니 충격적인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미에 대한 관념을 재고해야 했다.
세 번째는 소를 그리는 벽을 가진 이중섭 화가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과수원 집 아들로 태어났다.
이중섭은 전쟁을 피해 원산에서 내려와 부산 부두에서 일했지만,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의 처가로 보낸 후 혼자 남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낭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이중섭은 자신의 처절한 삶의 갈등과 고뇌를 소라는 동물로 표현했다. 소는 이중섭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려온 테마였고, 목가적인 풍경 속의 소가 아니라 작가의 내면을 표출하는 분신이었다. 이중섭이 미친 듯이 돌진하는 <흰 소>를 그린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자화상으로 삼았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고향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평화롭게 지냈던 어린 시절을 동경했다.
이상과 현실이 대립을 이루며 생명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이중섭의 작품은 많은 공감을 얻고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삶에서 형성된 자신의 절실한 감정을 호소력이 있는 조형 언어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벽이 있다. 바로 석부(石附)의 벽이다. 언제 어디서건 길쭉한 입석을 보면 식물을 부착하고파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그래서 일찍이 풍란 석부작에 몰입했다.
돌에다 난을 먹여
태어난 너의 이름
돌과 난의 한통속에
넋을 잃은 나의 미소
어느 날 저승 가는 새
흰 향기로 떠서 난다.
짧은 잎 맑은 뿌리
안과 밖의 긴 내림새
해풍에 씻긴 눈금
세상 재는 벼랑이여
은밀한 우주의 내력
수반 위에 떨고 있다.
拙詩, ‘풍란 3-석부작에 부쳐’, 전문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된다 하지 않던가 석부의 벽은 끝내는 8미터에 이르는 대작의 거제 장가계 제작에 이르게 되었다.
◎약 속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은 자신과의 약속도 있고 타인과의 약속도 있다. 그 약속 중에는 지켜지는 약속도 있고 지켜지지 않은 약속도 있다. 대체로 지켜지지 않았기에 약속을 잘 지킨 사례는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계포일낙(季布一諾)은 ‘계포가 한 번 한 약속’이라는 뜻으로 초(楚)나라의 계포(季布)는 한 번 승낙한 일이면 꼭 실행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음에서 비롯하여, 틀림없이 승낙(承諾)함을 뜻한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초나라 계포는 어떤 일에든지 「좋다」하고 한 번 내뱉은 이상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천하를 걸고 싸울 때, 계포가 초나라의 대장(大將)이 되어 유방을 여러 차례 괴롭혔는데, 유방의 한(漢)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자가 그를 밀고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여 사면 시킨 뒤 벼슬까지 얻게 했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은 신의가 두터운 것을 가리키거나, 우직하여 융통성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생은 어떤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를 약속했으나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불었는데도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안은 채 죽었다.
《사기(史記)》<소진열전(蘇秦列傳)>에 소진이 연나라 소왕(昭王)을 설득하면서 미생을 ‘신의 있는 사람의 본보기’로 들고 있다.
《장자(莊子)》<도척(盜跖)>에서는 ‘미생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신의에 얽매인 데서 오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尾生溺死, 信之患也).’ 여기서 미생 자신은 ‘융통성 없는 우직한 사람’을 말한다.
이 외에도 《전국책(戰國策)》《회남자(淮南子)》에서는 ‘미생의 신의는 차라리 상대방을 속여 순간의 위험을 피하고 후 일을 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미생’의 이야기는 《장자》《전국책》《사기》《회남자》 등 여러 전적에서 보이는데 모두 미생이 다리 밑에서 여자를 기다리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만 인용하고 있을 뿐 미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지 않아 미생의 신상이나 이 고사의 정확한 출전은 알 수 없다.
가요 ‘황성옛터’는 작곡가 전수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전수린은 어느 날 그의 고향인 개성에 들렸다.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의 달 밝은 밤,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만든 가락이 황성옛터다.
애수적인 멜로디로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 준 ‘황성옛터’의 가사 1절은 다음과 같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의 서울 단성사(團成社) 공연 때 여배우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막간 무대에 등장하여 이 노래를 부르자 객석에서는 재창을 외치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의 황성옛터는 음반이 5만 장이나 팔리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애리수는 여배우에서 가수로 환영받는 스타가 되어 전수린의 신곡을 계속 취입하게 되었다. 한참 인기 절정이었을 때 그녀는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의 사망설까지 돌았고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애리수가 종적을 감춘 데 대하여 사람들은 이난영, 전옥 등 새로운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 가수들에게 가요 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되고 창가 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반열에서 퇴조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짐에는 “약속”이라는 사연이 있었다.
그녀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그녀가 가수라는 이유로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음독자살 소동까지 벌렸지만 시댁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시아버지와 굳은 약속을 하고서야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 약속은 ‘가수’라는 사실을 숨기고 향후 가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룬 뒤 대중 곁에서 사라졌지만, 그녀의 노래는 조선총독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애리수는 결혼한 지 2년 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가수 활동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녀에게 제안했지만 이애리수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 비록 시아버지가 돌아 가셨지만 약속은 약속이라며 평생 2남 7녀의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98세 때인 2008년에야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고 이듬해 99세로 타계했다. 그녀의 자녀들마저도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얼추 4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주말마다 채란길에 나섰다. 정읍군 입암면 연월리 야산 중턱에서 땀에 저린 속옷을 벗어 짜면서 주말마다의 채란 행을 10년을 채우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이미 2년을 채웠으니 남은 햇수는 8년 이었다. 10년 세월 동안 내가 쓸 수 있는 휴일은 600일 정도였다. 일요일에다 공휴일, 거기다 연 월차 휴가까지 합치면 1년에 60일, 10년이면 600일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약속을 지키면서 그 과정들을 ‘월간 난과 생활’ 지에 독자적으로 「한국란 채집기」 코너를 마련하고 1986년부터 3년간 연재하였는가 하면 <난을 캐며 삶을 뒤척이며>라 題한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명품에 앗긴 세월
땅만 보고 누빈 산천
그 발자국 끈을 달면
몇 천리는 덮을 게다
이제사 민춘란 몇 촉
네가 낸 줄 알겠다.
拙詩, ‘새 촉을 바라보며’, 2/2
나는 그 10년 세월을 내 인생의 전성기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거의 못쓰게 된 육신이고 보니 ‘나도 한때는 잘 나갔다’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 ‘어떤 감투를 썼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정신으로 살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황성옛터’는 신중년 세대의 애창곡 중 하나란다. 황성옛터가 불려지는 한 이애리수의 ‘약속’은 빛을 더하리라 믿는다.
지키지 못한 약속 중 하나가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한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이 글을 아내가 볼까 두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