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불교
1. 왕실 호국불교
송악의 호족 세력이었던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정권을 세우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 시대는 시작된다. 건국기에 왕건은 동요하는 민심을 무마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일련의 회유 정책으로써 불교를 숭봉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즉위 원년(918)에, 신라 봉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연례행사로 치러졌던 왕실 주체의 호족불교 행사인 팔관회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조가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 [훈요십조]에 나타나듯이 - 훈요 십조의 제 1조에 우리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 . 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할 지어다. 하며 불교 숭봉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금할 지어다. 라고 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지배층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고려 왕권의 기만적 불교 통제 정책아래 소외되었고, 왕권의 비호 아래 날이 갈 수록 불교는 점점 썩기 시작했다.
불교의 부패는 광종 때 가장 혹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광종은 왕실의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호족 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선종을 버리고, 화엄종을 선택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시책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하고 특히 승과를 개설, 시행하였다. 한편 광종은 승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의 화엄학을 채택할 정도로 균여를 숭봉하였다. 그리고 균여 또한 화엄종의 남악파, 북악파의 갈등을 해소하여 통합된 지배이념으로써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전제 왕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은 [보현 십원가]를 보면 잘 나타나듯이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렸다. 이는 원효가 그의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린 것과 같이 균여에 의해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귀족 불교를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는 벗을 수 없다.
그러던 중 성종 때의 정치 사상가 최승로는 [시무책] 을 통해 왕권의 불교 비호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권력의 후광을 믿고 횡포를 부리던 귀족 불교 승려들을 규탄하였으며, 그 대신 현실주의적인 유교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성종은 그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으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
현종에 이르러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가 다시 부활되었고 황룡사9층탑을 재수리하고 고려대장경이 조판되었다. 이것은 당시 거란 침략에 맞서 호국불교 행사를 통해 국민단결을 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2. 천태종의 개창
화엄종은 신라 의상의 화엄종을 계승하여 고려 역대 왕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귀족 불교로 발전했다. 그리고 법상종은 유가종이라고도 하는데 대현(大賢)등의 신라 유가종을 계승한 것으로 왕권과 밀착하여 발전하였다. 화엄종과 법상종이 왕권과 결탁하여 위세를 떨치던 이 시기에 선종은 그에 비해 9산 선문으로 분열되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중반까지 중앙 집권화가 완성됨으로써 서서히 9산 선종도 왕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종과 선종이 서로 대립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권은 각 종파 불교의 융화와 통일된 지배이념을 요구하게 되었다.
문종의 왕자로서 11세기에 승려가 된 의천은 그러한 왕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것은 왕자를 츨가 시켜 승려 지도자로 앉힘으로써 불교 세력을 적당히 통합하고 왕권의 통제 아래 두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1085년 중국(송)에 건너가 새로운 통합의 지도이념으로 천태학을 배우고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그리고 화엄종과 법상종의 융화와 교종과 선종의 융화를 꾀하여 통일적 지배이념을 요구하는 왕권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원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중불교 보다는 철저한 왕실 불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이러한 왜곡된 반민중적 불교의 전통은 조선을 거쳐 해방 후에 거치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나라의 주체인 민중을 외면하고 현실에 등 돌리고 참선을 일삼는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3. 무신정권 아래에서의 불교
이 시기에 불교는 왕실만을 위해 존재하였고, 왕실에 의해 대표적인 착취자로 등장하면서, 왕실과 함께 타락했다. 특히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승려들과 함께 방탕하게 놀음과 잔치로 세월을 보내고, 사찰을 곳곳에 세워 향락 장소로 이용하곤 했다. 이러한 왕실의 부패와 함께 민생고가 날로 가중되어 가고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해 나가기 시작할 때 승려들은 약해진 왕권을 위해 무신정권에 항변하여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권력에 빌붙어 또 하나의 착취자로 군림해 오던 불교 대사찰들도 민중들의 새로운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신정권의 옹호를 받으며 선종은 성장해 나갔고, 선종은 선. 교의 대립을 지양하고 교종을 포용함으로써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지눌(知訥;1158-1210)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지눌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과 밀착 해 온 귀족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였다. 이 결사는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 유교, 도교에까지 문호를 개방하였고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온 불교의 자기 비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농민들이 지배자의 착취에 못 이겨 곳곳에서 봉기하고 지방하층의 승려까지 이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그가 결성한 결사는 도탄에 빠진 현실을 무시하고 오직 내적 수행의 길에만 정진하고자 하여, 현실 도피적인 지식층의 결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그러나 지눌은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청정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지향하였고, 무신정권에 자력이든 타력이든 이용되긴 했지만, 선교융합의 창조적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고려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지눌과 혜심에 의한 간화선(看話禪), 그 외에 지눌에 의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 節要幷入私記), 그리고 선(禪)문학을 집대성한 혜심의 선문염송(禪門念頌)은 불교강원의 교과목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불교의 주류가 선과 교를 병행하면서, `마음을 찾는 내적 수양에 치중하고, 사회 참여보다는 은둔 수도를 지향하는 것이 약간은 그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천태종의 요세(了世;1163-1245)는 지눌과 같은 시기에 백련결사를 결성하여 불교계 내부의 분열대립과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중앙 집권력에 결탁하지 않고 오직 지방민중의 기반 위에서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백련결사의 성장은 이내 지배계층의 눈에 띄어 요세(了世)도 말년에 중앙 지배 권력층의 회유책에 휘말려 끝내 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불교의 중요한 신앙결사로서 자리잡았고 불교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4. 민중불교 항쟁과 귀족불교
몽고의 침략에 대한 민중 불교의 항쟁으로, 충주성과 개경에서의 노비와 승려들의 항쟁이 있었고, 특히 승려 김윤후의 투쟁을 들 수 있다. 그는 명리와 계율을 뛰어 넘어 민중을 구제하는 민중 불교적 입장에 서서, 몽고침략군 철수에 앞장섰다. 그에 비해 이 시기의 귀족 불교는 대장경 조판과 호국기도등의 기복불사로 몽고 침략에 대처하였는데 이 때 새겨진 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 대장경 인 것이다.
공민왕에 이르러서도 불교 숭상 정책이 계속되는데, 초기에 보우(普愚1301-1382)를 왕사로 추대했다. 보우는 현재 선종의 종조로 받아들여지는 승려로서 당시 대립. 분열하고 있던 선종 각파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는 승직임명권을 차지하여 고려 불교 전체를 장악,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서 구산선(九山禪)을 통합하고 임제선 계승하였으며 많은 시와 노래를 제작했다. 그리고 보우도 당시의 정치와 불교의 개혁을 절감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5. 고려의 미륵신앙
고려의 미륵 신앙은 건국 초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왕실의 지원으로 미륵불이 많이 만들어 졌던 옛 후백제 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고려의 어수선한 정세와 함께 말세 의식과 관련되어 미륵불이 땅 속에서 솟아 나오기를 기원하는 하체 매몰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실적인 생활상 요구에 따른 신앙대상이 되었다. 득남(得男)을 기원하거나 자연 재해, 전쟁 따위의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등의 기원으로 밀교 신앙은 전개되었다. 그리고 운주골의 천불천탑은 아직 수수께끼적 요소가 많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륵 신앙을 배경으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민중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채상식,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1. 중세불교의 이해방향
“한국사에서 불교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실마리를 풀어간다는 것은 막막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면 정확한 답을 내리기란 대단히 힘들 수밖에 없다. 종래에 불교사를 이해하는 분위기는 크게 양분되어 있었고, 그 수준은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가령 불교학 방면에서는 불교라는 종교 그 자체에 매몰되다시피하여 대체로 불교를 옹호하려는 방향으로 치닫기 마련이었고, 반면에 역사학에서는 불교를 일반사의 범주에 넣지 않고 특수사로 취급하여 전근대사회, 그것도 고대사회에서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나 신앙으로서 가장 꽃을 피운 것으로서만 취급할 뿐 그 실체에 대한 정확한 접근을 기피해온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고서 불교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불교사는 크게 보면 사상사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불교사의 인식태도는 사상사의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종래에 사상사 연구를 표방하면서 발표된 글들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사상 그 자체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 또 하나는 사상을 일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 아래서 배태된 산물이나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양자의 경우 어느 한쪽의 입장만 극단적으로 고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상 여러 가지 문제점이나 한계가 지적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물론 심화된 사상체계와 세계관을 표방한 공시성·보편성·독창성을 갖는 사상을 과거에 존재한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사상사로서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역사의 무대(場)가 설정되어 역사인식의 문제가 전제될 때는 특정 사상이 어떻게 수용, 이해될 수 있었으며 또 역사발전의 방향에(실천면·운동면) 어떠한 성격을 지니면서 기여하였는가, 또 그 기능은 어떠하였는가라는 제측면이 사상(捨象)되면 사상사로서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가령 아무리 뛰어난 사상이나 사상가라고 하더라도 이를 수용,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이나 사회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역사의 장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대체로 사회적 여건이나 사회공통의 가치, 집단의 목적, 사회적 기능면을 중시하면서 그 기준을 인간들의 생활상과 연결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 자체를 사회의 산물로 인식하면서도 분비물로 표현할 정도로 몰가치적으로 가볍게 취급한다든가, 또는 특정 사상이나 신앙과 연결된 인간집단의 모습과 사회상을 역사상의 하나의 단면(부분)을 이룬다는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은 재고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향에서 지적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상의 오류는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여부는 차지하고라도 사상 그 자체를 역사구조의 하나의 단면으로만 파악하려는 태도이다. 적어도 사상은 역사상의 하나의 단면이면서 동시에 전체상이라는 명제를 간과한 것이다. 심지어 사상(신앙)과 관련된 인간집단을 추적한다고 표방하면서도 특정 신분계층만을 개별화시켜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에만 매몰되는 오류를 범하기 일쑤였다.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뚜렷한 대안을 갖기는 힘드나, 다만 방법론상 양자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이를 보완하는 선에서 사상사에 접근하고 또 사상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특정 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파악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어떠한 사회계층이 주도적으로 사상체계를 수용, 이해하고 자기의 것으로 응용·발전시켜 나갔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나 신앙이 전래되었을 때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치면서 그 사회에 정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래·수용하는 단계와 나름대로 해석·평가하는 단계, 그리고 재해석하여 자기의 것으로 응용하는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어떠한 내용이 특정 시기에 강조되고 유행하였는지, 또 사회전반의 발전과정 속에서 어떠한 기능과 작용을 하였는지, 아울러 새로운 사상이 정착되면서 기존의 사상과는 어떠한 상호 대응방식이 야기되었는지 등의 문제를 전체 역사상과 관련시켜서 유기적·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상 자체를 다루더라도 철학면(교리면)으로만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사상과 연계되어 있는 신앙이나 의례(의식), 이들을 신봉하고 따르는 각 계층의 존재양태라든가 사회발전의 문제까지도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특정 사상의 의미를 역사의 장에서 찾으려면, 사상은 전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면서 전체상을 투영할 수 있는, 즉 다른 구조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전제하에서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의 중세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향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때 무엇보다도 불교종파의 성립이 갖는 의미를 중시해야 할 것이다. 종파의 성립은 단순하게 종파 자체의 문제로만 한정시켜볼 성질은 아니다. 종파가 성립된다는 것은 일정한 역사발전의 단계를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전반의 문제를 해명하는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파성립의 단계를 말해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종파성립은 특정 사상이 교학면(哲學面, 體)·의식면(儀禮面, 相)·신앙면(實踐面, 用)에서 체계를 갖추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매체, 즉 사원(집회처)을 중심으로 조직적·체계적으로 행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사상이라고 할 때 세계성·보편성을 갖는 경우를 말하며, 종파성립의 산물로 조직된 승정체제(교단)의 확립을 무시해서도 안될 것이다. 또한 교학면·의식면·신앙면 등을 기반으로 한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가는 주체가 특정 계층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파성립은 특정 계층만의 독점(전유)의 산물이 아니라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할 때 종파의 성립이란 결국은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계층적으로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불교가 발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역사발전의 단계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사에서 어느 시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체로 신라통일기 전후에 나타나는 제양상을 살펴보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즉 교학·의식체계를 단순히 수용하는 단계에서 이해하고, 평가·재해석하는 단계로의 전환, 신앙을 왕실·귀족들만이 전유하는 단계에서 일반민들도 함께 공유하는 단계로의 전환, 또한 왕도(王都) 중심에서 지방사회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인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가 종파성립의 단초를 연 단계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종파성립은 통일전쟁기라는 당시 정치·경제·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종파성립의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지표를 들면 여러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불교대중화 문제라고 생각한다. 불교대중화 문제는 사회계층적인 측면과 지역성을 포괄한 개념으로서, 다음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두고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지배층이 그들의 권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民)을 파악하는 방식과 민에 대한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매개로 한 불교대중화의 이면에는 일반 민들이 성장함으로써 그들이 요구하는 신앙적 욕구를 지배층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단계와 현실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불교계의 전반적인 현황 즉 교학 체계의 양상, 신앙과 의식의 성격, 주도 승려층의 정치·사회적 성향 등도 유기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령 불교대중화 문제는 특정 몇몇 승려들의 활약상과 관련된 기념비적 소산으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원효의 경우, 그가 남긴 저술을 통해 알다시피 통일적인 교리체계를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대중화의 선봉에 서서 활약한 인물로서 그의 개인적인 위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 원효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거의 200여 년 전에 수용된 불교가 중국으로 유학했던 원광·자장·의상 등의 승려들이 귀국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교학불교로서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고, 한편으로 이러한 현상과 병행하여 불교대중화를 통해 일반 민들도 신앙을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한 혜공·혜숙·대안 등의 교화승들이 출현하고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학불교의 체계를 확립하는 문제와 불교대중화 문제는 별개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불교가 전래, 수용된 이래의 전반적인 발전양상과 유기적으로 관련된 현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대중화를 기반으로 한 종파불교 즉 중세불교가 성립되어 가는 시기는 언제일까. 대체로 신라 중고기의 진평왕대를 기점으로 하여 서서히 그 단초를 열어가기 시작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신라 중대에는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신인종(神印宗) 등의 종파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파불교가 더욱 세련되고 한 단계 성숙된 형태로서 그 빛을 발한 시기는 물론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종파불교의 성립단계를 중세불교로 인식할 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신라 하대에 전래, 수용된 선사상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세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종래에 불교학 방면의 연구자들은 선사상의 전래가 갖는 역사상의 의미를 그렇게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선사상이 변혁사상으로서 신라 말의 사회변동기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음을 밝힌 연구는 1970년대 이후 역사학 방면에서 이룩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미주 4]. 이는 나말려초를 고대에서 중세사회로의 전환기로 파악한 논의에 힘입어 거의 개설화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되는 바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선사상 자체를 변혁사상으로 파악한 점과 또 하나 이를 수용한 주체의 성격에 대한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선사상 수용의 주체를 지방호족과 6두품족으로 파악하면서 탈골품제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이 당시 사회변동을 주도하면서 수용·표방한 선사상은 변혁사상이라는 견해인데, 과연 지방호족·6두품족을 변혁주체로 또 선사상을 변혁사상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이 견해를 따른다면 이들과 일반 민들과의 관련은 어떠했으며, 또 선사상은 일반 민들의 신앙을 어떠한 방향에서 포용했을까.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필자가 몇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점은, 하나는 나말려초기를 사회변동기라고 전제할 때 선사상을 변혁사상의 주된 지표로 파악한 점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또한 선사상이라고 하더라도 전래·수용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성격이 달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한편으로 지방호족으로 불린 세력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범주로 취급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세력기반과 성격은 다양했으며, 따라서 그들이 각각 수용하고 신봉한 사상이나 신앙은 반드시 선사상만은 아니지 않았는가라는 의문 등과도 관련될 것이다.
또 하나는 나말려초기를 변동기로 파악하더라도 사회전반의 변혁을 수반할 정도로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의문은 1960년대 이후 일제시기에 식민지 역사학에서 제기되었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성과에 의해 왕조교체기를 사회전반의 변동기로 강조한 경향이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제기한 것이다. 가령 나말려초기는 호족·선사상, 여말선초기는 사대부·성리학수용이라는 등식으로 대비시킨 견해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결론적으로 말해 첫째, 신라 말의 사상사의 흐름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사상 일변도로만 파악하고 있는 현 학계에 대한 반성의 의미와, 둘째, 당시 선사상이 보수적인 교학불교의 경향에 의해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벌어진 사상적·신앙적 공백을 메워준 역할을 수행한 점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선사상과 기존 교학불교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파악하려는 견해에 대한 반성의 의미, 셋째, 사상 자체의 문제로만 한정짓는다면 선사상의 전래·수용이 가져다준 불교계의 파장은 컸다고 할 수 있으나 사상(교학·신앙·의례)의 사회적 기능면을 기준으로 할 때 선사상의 전래·수용에 따른 선종의 성립보다는 진평왕대 이후의 불교대중화를 단초로 하여 신라통일기에 종파불교가 수립되는 과정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 넷째, 선사상뿐 아니라 선사상과 함께 수용되었던 사상과 신앙 등의 선진문화가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과정에 끼친 영향 등을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기한 것이다.
다음은 중세불교의 중요한 지표로 이해한 불교대중화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불교대중화는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일반 민들의 성장을 전제로 한 봉건지배층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봉건지배층이 서서히 보수화됨으로써 종파불교는 이미 성장한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보수화된다는 것은 특정한 지배계층과 집단이 장악하고 있는 종파가 지방토호층이나 피지배계층인 일반 민의 신앙과 별개로 떨어져나간다는 것이다. 이는 민의 입장을 수용하지 못하는 단계이며, 서울과 지방사회, 지배층과 일반 민과의 간격이 벌어지는 단계이다. 이러한 단계에 접어들면 새로운 사조,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여 새로운 단계로 묶어주는, 그럼으로써 다시 합(合)의 형태로 돌아가고, 합(合)의 형태에서 다시 보수화되어가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변화해나가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설명한다면 가령 신라 말·고려 중기·고려 말의 불교가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발전의 방향에 발맞추어 새로운 사조인 선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또 불교계 자체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운동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불교가 스스로 자기모순을 치유할 수 있는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잃어버렸을 때인 고려 말에는 불교의 역할이 성리학(주자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신라 말에 진골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은 역사발전의 방향을 몰각하고 대단히 사치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불교 수용 이후의 산물인 석탑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7세기 말∼8세기 초의 대표적인 탑으로서 경주 감은사지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규모도 크고 균형미도 갖추고 있다. 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석가탑처럼 정형미과 균형미를 갖춘 탑으로 발달되다가, 9∼10세기가 되면 탑신에다가 팔부신중(八部神衆)을 넣는 등 화려한 조각 일색의 탑으로 변화해간다. 바로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탑의 변화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불교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한 가지 든다면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 고려의 왕실, 권문귀족들이 금은으로 화려하게 불경을 베끼고 또 여러 형태의 관음보살상을 주조한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보수화된 자기집단의 이익만을 고수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민들의 신앙은 교리적으로 체계가 없이 신비화되었고 원래의 신앙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져갔던 것이다. 불교계 자체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성공했을 때에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극대화되었지만, 극복하려는 노력이 미진했거나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때에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를 염두에 두고 한국 중세불교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몇 가지 주목되는 바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교사의 한 단면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러 현상 속에서, 즉 전체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불교사를 특수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일반사의 범주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입장에서 불교사를 인식할 때 구체적인 지표는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그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표를 가지고 각 시대별·인물별로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어떤 각도에서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실천하고 있었는가를 정리해간다면 불교의 모습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잡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고려 전기 불교계의 재편과 추이
신라 하대에는 정치·사회적 변동과 관련하여 사상적 측면, 특히 불교 방면에서도 그 전환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신라 중대 이래로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신앙적인 측면까지도 포괄하면서 왕실과 진골귀족층에 의해 체제이념으로 받아들여진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신인종(神印宗) 등 교종 계통의 종파세력이 8∼9세기에 사상적으로 차츰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고, 또한 그 사회적 기반을 상실함에 따라 불교대중화 과정에서 피지배층에까지 확산된미타·미륵신앙 등의 정토신앙(淨土信仰)이 특정 종파와의 관련없이 지방사회의 토착세력과 농민·천민층을 중심으로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신앙결사(信仰結社)라든가 향도조직(香徒組織), 그리고 지방토호층이 주축이 되어 조성한 미륵불(彌勒佛)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신라 하대의 불교계의 변동양상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벌어진 사회적 간격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며, 이로 인해 야기된 사상적·신앙적 공백을 새로운 사조로서 전래된 선사상이 메워주었던 것이다. 선사상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신라왕실의 왕권강화책과 관련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지만, 신라 말에는 차츰 지방호족이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게 되자, 선사상은 이들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심지어 선사상에 바탕한 일부 선문(禪門)은 그들이 소재하고 있던 지방사회를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장악함으로써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할 정도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가 성립된 이후 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상적 측면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개편대상은 지방호족과 결합하고 있었던 선문세력이었다.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불교를 대단히 숭상하여 각 종파의 승려들과 긴밀하게 접촉하였으며, 특히 선종 승려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후삼국의 통일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건국 이후에도 왕권강화를 위하여 개경의 10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사원을 건립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불교정책은 훈요10조로 나타나고 있지만 난립된 교단을 정비하고 조직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불교 교단에 대한 정비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왕은 광종이다. 그는 승과(僧科)와 승계(僧階)제도를 마련하고, 국가에서 승려와 교단을 일체 관리하는 기관으로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였다. 또한 광종은 왕권강화를 시도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개편작업을 추진하였는데, 선종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면서, 선교일치론과 선정일치론(禪淨一致論)을 표방한 연수(延壽)의 법안종(法眼宗)을 중국에서 받아들였다. 당시 광종이 정토신앙을 선사상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한 연수의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점은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일반 민을 기반으로 하여 왕권체계를 확립하려는 정치·사회적인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 중대 이래로 확고한 기반을 유지해온 교종에 대해서도 화엄종의 균여(均如)를 발탁하여 후삼국 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균여가 신라 중대 이래의 화엄종과 법상종간의 대립을 ‘성상융화’(性相融會)라는 각도에서 극복함으로써 왕실에 대한 이념적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으며 아울러 실천신앙을 통해 왕실과 기층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까지도 수행하려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광종대에 천태학(天台學) 승려인 체관(諦觀)과 의통(義通) 등이 고려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천태종이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고려불교의 전반적인 수준이 당시 중국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경종대의 반동정치에 의한 탄압과 성종이 최승로(崔承老)를 등용한 이후에는 유학이 집권적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불교가 가졌던 체제이념으로서의 기능은 축소되고, 그 결과 각 종파별·신앙별로 특정 집단만을 대변하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11세기 이후 현종·문종대를 지나면서 집권적 귀족사회의 골격을 갖추고 차츰 문벌귀족층이 형성됨에 따라 불교계도 이들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정은 문벌귀족들이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원당을 건립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사원 자체를 장악한다든가, 심지어 그들의 자제들을 대대로 출가시켜 교단 자체를 움직일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른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문벌귀족과 결탁되어 있던 대표적인 교단은 화엄·법상종으로서 불교계의 중심교단이었다. 이들 세력은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무리하게 각종 교단의 장악을 시도하면서 불교계 전반의 부패를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 이들과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대다수의 농민·천민층은 특정 종파와는 괴리된 채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지방의 소규모 사원을 중심으로 한 조탑(造塔)·주종(鑄鐘)에 참여하기도 하고 팔관회·연등회 등과 같은 정토신앙과 전통신앙이 결합하고 있는 형태의 신앙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들에 의해 조성된 유물로서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자료가 남아 있는 예는 예천 개심사(開心寺)와 약목 정도사(淨兜寺) 석탑, 거제 북사(北寺)의 종을 들 수 있다. 물론 지방의 대사원을 중심으로 많은 농민층과 부곡민들이 긴박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런 경우 이들이 예속된 사원과는 달리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이 보수적인 경향을 띠면서 당시 불교계를 장악했을 때, 왕자 출신인 의천(義天, 1055∼1101년)이 출현하여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에 대한 자각, 나아가 고려왕실의 가장 암적인 존재인 문벌체제에 대하여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의천이 활약한 당시의 왕실과 문벌세력, 또 문벌 상호간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은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단적으로 의천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승려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숙종연간의 천태종 개창을 단순하게 새로운 종파가 하나 탄생한 것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여진정벌을 둘러싼 왕실의 입장이라든가, 여진정벌을 명분으로 하여 문벌이 장악한 각 사원이 언제든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승군(僧軍)·수원승도(隨院僧徒) 등을 공적인 군사조직인 항마군(降魔軍)으로 개편한 조처와 함께 이해한다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의천이 왕권강화에 부응하여 보인 일련의 노력은 광범위한 경전의 섭렵을 통한 속장경의 조판과 천태종의 개창으로 나타났으며, 내적으로는 원효의 계승을 자처하고, 대외적으로는 송에 유학하여 흡수한 다양한 불교를 통해서 이념적 기반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의천은 기존의 보수적 성향을 띤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면서 불교통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그의 출신종파였던 화엄종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의천의 개혁방안은 본질적으로 문벌체제와 동일한 기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와 불교계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의 방향으로 안목을 돌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사회의 불교현실과 기층사회의 신앙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가지지 못한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당시의 사원들이 귀족의 원당으로서 재산도피나 정권싸움의 수단이 되었던 불교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는 정신세계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귀족불교를 끌어내려 대중화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비록 의천의 불교통합의 노력이 일시적으로 왕권을 바탕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사후 문벌체제가 강화되는 추세에 따라 각 종파의 분립, 대립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던 점은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해준다. 심지어 의천의 문도들조차도 균여 이래의 기존 화엄종과 맥락을 달리하는 계통과 천태종 계통으로 분리되기도 하였다
화엄종·천태종 외에 이 당시 가장 대표적인 교단세력은 개경 현화사(玄化寺)를 본찰로 한 법상종세력이었다. 법상종은 현종년간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크게 번성하였으나 뒤에 경원 이씨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즉 이자연(李子淵)의 아들인 덕소(德素)가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법상종 교단을 장악한 것이라든가,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인 의장(義莊)이 현화사 교단의 유력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벌귀족과 결탁된 12세기의 불교사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정에서 와해된 선종 계통은[미주 22]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학일(學一, 1052∼1144년)과 사굴산문에서 탄연(坦然, 1070∼1159년), 지인(之印, 1102∼58년) 등과 또 거사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년), 윤언이(尹彦 , ?∼1149년), 권적(權適, 1094∼1146년) 등이 출현하여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들 중 이자현이 청평산에 들어가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선법(禪法)을 선양한 사실은[미주 23] 차츰 선종의 세력이 부각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학일은 의천이 송에 유학하여 귀국한 뒤 천태종을 개창할 때 이에 참여하기를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절함으로써 선종 나름의 독자성을 지키려 하였다. 또 그는 1122년(인종 즉위년)에 왕사가 되고 1129년(인종 7) 이후에 운문사에 은퇴하여 이곳에 모여든 많은 승려들을 가르친 인물이다. 학일이 말년까지 운문사에 주석한 사실은 물론 운문사 일대가 고려 초 이래로 가지산문과 관련된 지역이지만 가지산문의 중심지가 경상도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지역이 가지산문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13세기 초반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야기되었던 대대적인 농민항쟁이 무신정권의 불교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미주 24]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일연(一然)의 출현과도 관련되어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준다.
이와 같이 고려 중기에도 선사상이 부흥되고 또한 서서히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기반을 재정비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사회구조의 보수적인 추세 속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당시 거사들의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점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되고 있지만[미주 25], 무신란 이후 수선사 계통의 선종이 부각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 이후 선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 요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방사회와 기층사회의 요구에 부응한 현상일까. 당시 사회에서 농장이 서서히 구축되는 현상과 이에 따라 농민층이 몰락하고 유이민이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이러한 측면도 어느 정도 관련이 되겠지만 중요한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하나는 중국의 북송대에 이르러 선사상이 크게 발전한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며, 또 하나는 당시의 문벌귀족체제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 정치일선에서 밀려난 문신관료들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반감이나 회의적인 성향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12세기에 접어들면서 북방 여진족이 금이라는 강대한 세력으로 결집되어 무력적으로 압력을 가해오는 국제정세 속에 북송으로서는 고려와의 연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문화적·사상적으로 선사상과 성리학이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한 사상계 조류가 고려에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가령 북송대 임제종(臨濟宗) 계통의 승려 계환(戒環)이 주석한 『능엄경』(楞嚴經)이 고려에 전해져 성행한 예라든가[미주 26], 예종대에 활약한 선승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의 경우를[미주 27] 통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선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 사정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12세기 후반의 무신란 이후 불교계가 재편될 때 선종계가 부각되고, 수선사 계통이 중심교단으로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2세기 전반기에 선사상이 유행하게 된 저변에는 의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문벌체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성은 당시 선사상에 심취한 부류들의 은둔적이고 개별분산적인 성향과 일반 민들이 신봉하고 있던 정토신앙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태도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는 12세기 말, 13세기 초반에 결성되는 신앙결사의 단계에 가서야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생각한다.
3. 고려 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
신앙결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결집체로서 불교가 수용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 내용상·성격상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기에나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4세기 말에 동진의 혜원(慧遠, 334∼416년)이 중심이 되어 백련사를 결성한 것을 신앙결사의 시초로 본다. 따라서 이후 혜원의 백련결사를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의 신앙결사로 파악하여 이의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관념적인 단계에 머문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비해 사회계층적으로 일반 민들을 포용하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거나, 아니면 일반 민들이 주체가 되었던 예는 드물었다.
신앙결사는 종파불교 성립 이후에 전 사회계층이 신앙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지역적으로 지방사회에까지 불교가 확산되어가는 추세에 따라, 지방사회의 토호세력, 독서층과 그 이하의 신분층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일종의 신앙공동체까지도 넓은 의미의 신앙결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8∼9세기 이래 종파불교 성립의 산물로서 불교대중화가 계층적으로, 지역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주로 지방의 소규모 사원을 주근거지로 하여 결성된 향도조직은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향도조직은 단순한 신앙공동체에서 출발하였으나 지방사회의 지역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신앙결사는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거나 아니면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신앙공동체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양면적인 양태는 서로 괴리된 채 공존하기도 하지만 사회변혁기에는 변증법적으로 합일되어 운동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역사상의 개념으로 신앙결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결사는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결사와 결사운동은 엄밀히 말한다면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개념이다.
신앙결사운동 조직화과정의 특징은 중앙집중적인 교단체제에 대해 개별적·독자적인 형태로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또 그 주도세력 및 구성원은 주로 신앙상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자발적·개인적 차원에서 참여했으며, 대체로 지방의 중간신분층과 독서층, 그 이하의 신분층의 참여와 후원으로 결성되고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
앞에서 신앙결사라고 할 때는 사회변혁운동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개념으로서 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지칭한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한다면 12세기 후반의 무신란을 기점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과 관련하여 기존의 보수적인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전개된 수선사(修禪社)·백련사(白蓮社) 등의 신앙결사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엄밀히 말해 신앙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운동의 차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왕실과 귀족에 의해 지원되던 결사라는 형식의 신앙활동과 지방사회의 토호층에 의해 주도되던 향도조직에 의한 신앙활동은 서로 괴리된 채 공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신라 하대에 성행하던 화엄 계통의 결사라든가, 고려 인종대에 지리산에서 행해진 법상종 계통의 수정사 등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8∼9세기 이래로 지방사회에서 소규모의 사원을 중심으로 조탑·주종·불상건립 등의 신앙활동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경우 대체로 미륵신앙과 미타신앙이 주요 신앙형태였다.
그러면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신앙결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다양하게 전개된 신앙결사를 들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눌(知訥, 1158∼1210년)이 개창한 것으로, 뒤에 수선사로 사액되었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갖고 출발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서 지방불교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이들의 성격을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 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었다. 그 뒤 지눌은 창평의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 지리산 상무주암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선에 힘썼다. 특히 거조사에서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1190년(명종 20)에 반포함으로써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그 근거지를 옮겼으며, 몇 년 뒤인 1204년 최충헌정권의 불교계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 고려왕실에 의해 사액을 받아 정혜결사의 명칭을 수선사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수선사는 1196년 최충헌이 등장한 이후 당시 무신세력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시 불교 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받게 되고 크게 성장한 단계는 1219년 최우(崔瑀)가 등장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최우가 수선사를 크게 부각시킨 이유는 수선사가 당시 사회에서 기존의 여타 종파에 비해 크게 호응을 받아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최우정권은 그들의 세력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 불교계에 대한 개편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지눌과 그를 계승한 혜심(慧諶)의 수선사를 택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당시 사회에서 수선사가 서서히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게 된 사상적인 측면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지눌이나 혜심은 불교의 궁극적 세계관을 선사상에서 찾았는데, 이들은 12세기 이래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선사상을 단순히 답습하고 계승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하게 종합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당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변동기에 처한 독서층에게 참신한 사상체계로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둘째, 수선사는 당시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다시 말하면 대다수 민중들의 신앙이 정토신앙임을 인식하고서 이를 수용하는 불교관을 표방했기 때문에[미주 29] 참담한 현실 속에 피폐되어 있던 지방사회 일반 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종래의 학계에서 간과한 내용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염불인유경』(念佛因由經)이 발견됨에 따라 이 자료가 지눌의 저서는 아닐지라도 지눌 계통의 정토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논의는 주목된다[미주 30]. 그리고 혜심은 그의 대표적 편저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나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등을 기준으로 하면 간화선의 최고봉에 도달한 선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그가 남긴 단편적인 자료로서 「금강반야바라밀경찬」(金剛般若波羅蜜經贊)과 「금강반야바라밀경 발문」(金剛般若波羅蜜經 跋文)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금강경』(金剛經)을 수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신이와 영험을 강조한다든가, 또한 정통 선사상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법화경보문품』(法華經普門品), 『화엄경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 『범서대장신주』(梵書大藏神呪) 등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혜심은 선사상만을 견지하였다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실천공덕신앙과 밀교적인 요소도 포용하는 탄력성을 가진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사상적인 내용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수선사가 독서층과 지방사회의 향리층, 일반 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선사가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 민들의 지원을 받던 결성 초기의 단계에서 차츰 독서층의 지지를 받게 됨에 따라 사원의 규모도 확대되고, 나아가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이들의 의도와도 맞아떨어져 최우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전 불교교단을 통괄하는 위치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백련사는 천태종 승려인 요세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인데, 요세는 1174년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하였으며, 1185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지눌과 마찬가지로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둔 요세는 1198년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처음으로 백련결사로서의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에 의해 수선에 대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로부터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것은 1208년 봄에 영암의 약사암에 거주할 때이다. 이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천태묘해(天台妙解)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지적한 120병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연수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에서 지적한 120가지의 수행상의 제약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요세는 수선 이전의 천태교관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이러한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한 실천방향을 수참(修懺 : 참회법)과 미타정토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법화경』(法華經)에 바탕한 천태지자의 『천태지관』(天台止觀),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와 지례(智禮)의 『관무량수경묘종초』(觀無量壽經妙宗 )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계기로 하여 요세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세력인 최표(崔彪)·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지원에 따라 약사암에서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백련사는 결성 초기에는 지방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하던 일반 민들을 주요 단월(檀越)로 하였으나, 1220년대에는 주로 인근 지역의 지방관의 배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뒤 1230∼40년대에는 최우를 중심으로 하여 최우와 밀착된 중앙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수선사와는 달리 1230년대 이후에 와서야 최우정권이 백련사의 단월로 부각된[미주 31]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당시 몽고군의 침입과 관련하여 백련사가 강력한 대몽항전을 표방한 것에서 어떤 계기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은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2.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13세기 전후 불교계의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주도세력의 출신성분이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이라는 점이다. 이는 13세기 전후 시기가 고려 불교사의 전환기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령 지눌과 요세의 경우, 각각 황해도 서흥군의 독서층과 경상도 합천의 호장층 출신으로서 불교계를 주도한 인물들인데, 이는 이전의 문벌귀족이나 왕족출신이 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부각되던 단계와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의 자제들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눌과 요세를 계승한 다음 세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주목되는 인물들은 수선사의 2세 주법인 혜심(1178∼1234년)과 백련사의 2세인 천인(天因, 1205∼48년)과 4세인 천책(天 , 1206∼?) 등을 들 수 있다. 혜심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이며, 그의 부는 향공진사였다. 1201년(희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그의 모친 배씨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1202년 지눌의 제자로 입문하였다. 이러한 혜심의 경우에서도 그가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인의 속성은 박씨이며 충남 연산 출신인데, 1221년(고종 8) 17세 때 진사과(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 고예시(考藝試)에 제일로 뽑혔으나 그 뒤 예부시를 포기하고, 1228년에는 동사생 허적, 진사로 뽑혔던 신극정과 더불어 요세에게 입문하였다. 이 사실로 보아 천인도 혜심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천책의 경우에서도 동일한 출신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천책은 바로 천인과 함께 요세에게 입문한 진사 신극정이다. 그는 경북 상주 관내의 산양현(지금의 문경군)에서 출생했으며, 이 지역의 토호세력인 신씨 가문 출신으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그 뒤 예부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어 관로에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포기하고 1228년 23세 때에 요세의 제자로 입문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의 자제들이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거 불교계에 투신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일반화된 현상으로 추측되며, 고려시대를 통해 볼 때 이 시기에만 보이는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벌체제하에서 귀족적·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또 무신체제하에서 부용(附庸)적인 성격을 지닌 유학에 대한 회의와 반발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역설적으로 이들 유학자들이 수선사와 백련사 등의 결사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면에는 사상적으로 당시의 유학의 분위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상체계를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에서 표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구체적인 사상내용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피할 생각이지만 굳이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가장 선진성을 지닌 사상을 표방한 인물들이 바로 지눌과 요세를 비롯한 결사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신앙결사를 지원한 단월의 출신을 살펴보면 비록 수선사가 최우 집정기 이후에 가서 최씨정권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이들 결사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는 결사의 주도세력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토호층과 독서층이 중심이었다. 백련사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층인 최씨가의 지원에 의해 강진의 만덕산에 결사를 결성하였으며, 수선사의 경우도 결성 초기에는 인근 지역의 향리와 지방의 민들이 주요한 단월이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문벌귀족이나 왕실에 의해 독점되던 사상계의 주도권을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 나아가 일반 민들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하게 된 것은 13세기 전후에 야기되었던 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신앙결사운동은 13세기 중반의 대몽항전기를 거쳐 원지배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조하였다. 수선사는 최충헌 집정 말기부터 시작하여 최우 집정기에 이르러 불교계를 주도하는 대사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당시 수선사를 주도한 인물은 혜심이었다. 혜심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어 수선사 제4·5세인 혼원(混元)과 천영(天英) 단계에는 절정에 이르렀다가, 최씨정권이 몰락한 1258년 이후에는 가지산문의 일연 계통이 부각됨으로써 서서히 퇴조하였다[미주 33].
백련사도 요세 이후 천인, 천책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원지배기인 1284년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인 묘련사가 건립됨으로써 백련사의 사상적인 전통이 변질되었다[미주 34]. 백련사 출신인 경의(景宜)와 무외(無畏)가 묘련사에 참여한 것을 볼 때 백련사의 본래적인 성격이 변질·해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묘련사를 뒤에 원지배기에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조인규(趙仁規) 가문이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장악하였으며, 나아가 조씨 가문은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천태종 교권까지도 좌우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원지배기의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자각·반성운동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 계승되지 못하고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신앙결사가 우리 역사상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존속한 시기는 13세기 전후에 걸친 몇십 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수선사 계통의 지눌·혜심과 백련사 계통의 요세·천인·천책 등이었다. 12세기 이래로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 일반 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가던 잠재적인 저력이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세기 전후에 실천적인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러한 결사운동이 남긴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결사를 주도한 몇몇 명승(名僧)의 노력도 중시해야겠지만 이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의 변화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3세기의 고려사회가 처해 있던 대내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아울러 30여 년간에 걸친 이민족과의 항전을 치러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인 지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느 한쪽에만 경도되기 쉬운 현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사상이든 출가인들의 본분이지만,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양자는 관념적인 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수레의 양바퀴처럼 함께 하면서 실천의 장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결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결사를 운동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다 보면 철학면(교리면)의 발전은 경시하기 쉬운데,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13세기 전반에 수선사가 간행한 선적(禪籍)을 보면 단순히 중국의 저술을 다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종합·정리한 것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백련사도 천태·법화계통의 불서를 절요(節要)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철학을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결사 단계에 구축한 이러한 철학면의 발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철학의 자기화(自己化)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또한 13세기에 몽고와의 항전을 치르면서도 대장경을 주조한 사상적인 맥락과도 통하는 것이다. 당시 대장경 주조는 다각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면에서 일정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4. 고려 말의 불교계 동향
13세기 초반의 신앙결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향의 불교계는 대내외적으로 대몽항전기를 거치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원지배기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편의 결과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하나는 원지배기라는 정치·사회적 현실 속에 타협하고 온존하려는 경향, 다른 하나는 13세기 전후에 이룩한 신앙결사 계통을 계승하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경향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수선사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부각된 가지산문(迦智山門), 백련사(白蓮社)의 성격을 변질시키면서 그 계승을 표방한 묘련사 계통, 또 주로 원에 사경승(寫經僧)을 파견함으로써 부각된 법상종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무신란 이후의 최씨집정기에 수선사·백련사 계통의 인물들이 대부분 국사·왕사로 책봉 또는 추증된 것에 비해 충렬왕대 이후에는 대체로 가지산문, 묘련사 계통, 유가업(법상종) 출신들이 국사·왕사로 책봉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묘련사를 중심으로 한 경의(景宜)·정오(丁午)·의선(義璇) 등 백련사 계통의 출신 인물들은 요세·천인·천책·무기(無寄)로 이어지는 본래 결사의 경향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즉 이들이 비록 백련사 계통에서 출발한 승려라고 하나 왕실과 원황실의 원찰로 건립된 묘련사와 관련을 맺었다는 점, 또 묘련사는 뒤에 원지배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조인규 가문에서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점, 또한 조씨 가문에서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만의사·청계사 등의 원찰까지도 확보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나아가 천태종 교권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측면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13세기 전반에 신앙결사에 의해 기존의 보수적인 불교계의 모순을 척결하고자 했던 시도는 무너지고, 불교계는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을 아우르지 못하는 단계로 후퇴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수적인 교단운영에 부응하여 각 사원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종교외적인 기능만을 극대화하는 온상으로 변모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불교계 내부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게 된 것이 결국 주자성리학이었다.
원지배기하에서 대표적인 교단세력은 가지산문이었다. 가지산문이 부각된 경위는 13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한 일연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일연은 정치적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는 1258∼70년대의 과도기에 불교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는 1258년의 왕정복고에 참여한 주체세력에 의해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가지산문의 등장배경과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연(1206∼89년)은 1219년 설악산 진전사의 대웅장로(大雄長老)의 제자가 됨으로써 가지산문에 입문하였는데, 이후의 생애는 다음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경상도 현풍의 비슬산의 여러 사원에서 머물던 시기(1227∼48년), 둘째, 정안(鄭晏)의 초청에 의해 남해 정림사에 머물기도 하고, 또 지리산 길상암에 거주하던 시기(1249∼60년), 셋째, 원종의 명에 의해 강화도의 선월사에서 주석한 이후 경상도 지역의 오어사·인홍사·운해사·용천사에서 주석하던 시기(1261∼76년), 넷째, 충렬왕의 명에 의해 운문사에서 주석하다가 연이어 국존(國尊)에 책봉되었으며 그 뒤 입적한 말년까지의 시기(1277∼89년)로 나눌 수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다음의 몇 가지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일연은 최씨집정기·대몽항전기에는 경상도 지역의 여러 사원에서 잠적, 은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2세기 초에 학일이 말년을 운문사에서 보내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한 가지산문이 무신란 이후, 특히 최충헌 집정기에 ‘운문’(雲門), ‘운문적’(雲門賊)으로 불린 농민항쟁으로 인하여 그 세력이 위축된 것과 관련지어 파악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정안의 초청에 의해 정림사에서 주석한 것을 계기로 하여 대장경 조판에도 참여하였으며, 특히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갖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일연은 수선사의 2세인 혜심의 『선문염송』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수선사의 3세인 몽여(夢如)와는 직접 교류를 통해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씨정권 몰락 후 1261년 원종에 의해 강화도 선원사(禪源社)에 초청되었을 때 민지(閔漬)의 표현대로 ‘요사목우화상’(遙嗣牧牛和尙), 즉 ‘멀리 목우화상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라고 하여 수선사의 계승자로 자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일연이 원종에 의해 선원사에 초청된 이후, 원종을 중심으로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력의 배려에 힘입어 경상도 지역의 여러 사원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때 일연은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선·교종의 명승을 모아 대장낙성회를 주관한다든가, 1274년에는 비슬산 인홍사를 충렬왕의 사액에 의해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하고, 또 같은 해에 비슬산 용천사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삼는 등 일련의 활약을 통해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던 것이다. 넷째, 일연은 1277년 충렬왕의 명에 따라 운문사에 주석하고, 그 뒤 1281년 6월 충렬왕이 동정군(東征軍)의 격려차 경주에 왔을 때, 행재소에 부름을 받게 됨에 따라 승려로서는 화려한 승직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수선사를 이끌어가던 충지(沖止, 1226∼92년)는 일연과는 달리 왕의 부름도 거절한 채 여러 사찰을 순력하면서 당시 동정군 준비를 위해 압박받는 민중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일련의 시를 남길 정도로 대조적인 길을 걸었다. 이러한 충지와 비교할 때 일연이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회의 제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왕실로 진출했다고 보기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신중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일연의 말년 행적을 비추어볼 때 그가 소속된 가지산문은 이전 시기에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수선사와 백련사에 대신하여 원지배기에 등장한 불교계의 주요세력으로 파악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1283년 국존이 된 이후 일연은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로 하여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그를 중심으로 가지산문이 선종계, 나아가서 전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본래 일연의 문도는 아니었지만 일연의 문도로 영입된 청분(淸 )의 사례에서도 일연 중심의 가지산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청분은 바로 혼구(混丘)인데, 일연을 계승하여 가지산문을 주도하였으며, 뒤에 일연의 『삼국유사』를 간행하면서 몇 개의 주를 보충한 무극(無極)이다.
이와 같이 일연이 국존으로 책봉됨에 따라 부각된 가지산문은 원지배기에 보수세력의 지원에 의해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일시적으로 묘련사 계통과 교권 장악을 위해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고려 말에는 태고보우(太古普愚)·나옹혜근(懶翁慧勤) 등이 출현할 정도로 불교계의 중심세력으로 존속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 보우가 중국으로부터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면서 한때 불교계의 통합을 시도했던 기반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원지배기의 가지산문을 중심한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려사회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보수적 경향의 세력에 의해 불교계가 장악되고 있을 때, 이들과 대항하면서 당시 사회가 대내외적으로 안고 있는 모순과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일련의 인물들이 출현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서 백련사 계통의 사상적 경향을 계승한 운묵무기(雲默無寄)를 들 수 있다. 무기는 14세기 초반기에 활약한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그의 뚜렷한 행적은 알 길이 없으나, 단지 그가 남긴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통해서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무기는 이 저술에서 당시 사회를 말법시대로 인식하고 원지배기의 참담한 현실 속에 처해 있던 대다수 일반 민들에게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함으로써 실천신앙으로의 정토신앙을 제시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권문들과 원당이라는 명목하에 정치적·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보수적인 경향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이들의 일반 민들에 대한 자각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불교계에 대항한 진보적인 세력들의 노력은 참담한 현실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일반 민들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으나 나름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들이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문제를 철학면(세계관)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못하고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신앙적인 측면과 공덕신앙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한계성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제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과 그 추진세력의 결집이 불교계 자체에서 구축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특히 14세기의 화엄종에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이 신앙형태도 차츰 신비적인 영험과 공덕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화엄종의 승려인 체원(體元)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특히 체원이 간행을 주선하면서 스스로 발문을 지은 일종의 위경(僞經)인 『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의 성격을 검토하면 당시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경향은 천태종의 요원(了圓)이 찬술한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이라든가, 또 당시 왕실과 권문귀족에 의해 제작된 많은 수의 사경·불화류, 심지어 미륵하생신앙에 바탕한 매향신앙(埋香信仰)이 해안이나 도서 지역에서 유행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밀교 계통으로서 신비적인 성격이 강한 원의 라마불교의 말폐적 영향임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이는 바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던 단면을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원지배기의 불교사를 보수적인 경향과 이를 비판하는 진보적 세력으로 대별해 보았다. 그렇지만 원지배라는 현실 속에서 불교계의 핵심적인 교단세력은 보수적인 경향으로 일관하였고, 단지 이에 대응하여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각에서 시도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향까지도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신앙적 측면만을 강조한 결과, 사회사상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 단계에 이룩하였던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대는 등의 사회경제적 모순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불교계가 사회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감에 따라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이 획득한 사상계의 주도권을 주자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성리학이 고려 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사회적·사상적 기반은 이미 무신란 이후의 불교계에 의해서 그 토양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기치로 내세운 신진 사대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로써 최소한 여말선초에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약 1세기 후에는 명실상부한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