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꽃에 관한 시모음 1)
이팝나무 꽃 /박인걸
이팝나무에
쌀밥을 퍼부었네.
얼마나 쌀이 흔하면
저리도 밥이 널렀으랴.
허리띠를 졸라매고
보릿고개 넘던 시절
맹물로 목을 적셔
허기를 달랬니라.
한 톨 쌀이 없어
퀭한 자식 눈을 보는
산골 어떤 아버지는
목 놓아 울었네라.
쌀이 남아도니
이팝 꽃도 흔하구나.
쌀 없던 그 시절엔
이팝 꽃도 없었는데
이팝나무 꽃 피었다 /김진경
1
촛불 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스럭부스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 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 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툭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슬픈 영혼의 이팝나무 쌀밥 꽃 /최명운
붉은 꽃 연분홍 꽃 노란 꽃 별별 꽃이 있다
수많은 꽃 색깔 중 제일 많은 꽃이
순백의 하얀 꽃이 아닐까
마음이 선하고 착한 사람보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고 한다
매화꽃이 하얗고
자두꽃이 희며
사과꽃 배꽃이 순수하리만큼 하얀색이다
조팝나무꽃이 하얗고
도롯가 가로수 이팝나무꽃이 하얗다
색이 다르다고 향기가 없는 것이 아니요
독특한 다양한 색이라 해서
탐탁지 않게 심중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오월에 피는 조팝나무 이팝나무꽃
솜털 구름보다 희며
꽃송이 사이로 초록색 무늬가 예술이다
끼리끼리 찧고 빻고 수다 떨며
하얀 꽃을 보고 있으면
그 어떤 스트레스도 사라지며
순수하리만큼 맑아진다
선조들은 이팝나무꽃이 뭉게구름처럼 피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했다
물푸레나뭇과 슬픈 전설을 가진 쌀밥 꽃
신록의 물결 속 순백의 영원한 사랑 꽃이었으면.
이팝나무 꽃 /소산 문재학
연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초여름
싱그러운 훈풍(薰風)에 실려 오는
보기만 해도 풍성한
하얀 미소의 눈부신 이밥(흰쌀밥)
색다른 감동을 주는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고향하늘을 밝히는 눈꽃이어라
그 옛날
이맘때쯤
무던히도 괴롭히던
춘궁기. 보릿고개의 고통이
구수한 향기에 살아나고
순박한 민초들의
풍흉(豐凶)을 점치는
애잔한 갈망이
송이송이 하얗게 묻어난다
이팝나무 꽃밥 /공광규
청계천이 밤새 별 이는 소리를 내더니
이팝나무 가지에 흰쌀 한 가마쯤 안쳐놓았어요
아침 햇살부터 저녁 햇살까지 며칠을 맛있게 끓여놓았으니
새와 별과 구름과 밥상에 둘러앉아
이팝나무 꽃밥을 나누어 먹으며 밥정이 들고 싶은 분
오월 이팝나무 꽃그늘 공양간으로 오세요
저 수북한 꽃밥을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연락처는 이팔팔에 이팔이팔
이팝나무 꽃 설움 /박종영
봄이 환하게 열리는 5월
쌀밥 같은 이팝나무 꽃,
그 나무 아래서
어설프게 입을 벌리고 서 있으면,
쌀밥 한 톨 떨어질까
구차한 생각으로 기다리던
그 해, 이른 들 찔레 몽글몽글 피던 날,
허기진 배 허리띠 졸라매었어도
흘러내리는 바짓가랑이 붙잡고
꽁보리밥이라도 고봉밥이면 어쩌랴 싶어
청보리 고개 내미는 이랑을
무작정 달리던 배고팠던 어린 시절,
이제 와 겹겹으로 쌓인 서러움 풀어헤치면
어느새 이슬 맺힌 눈물의 꽃,
하얀 추억의 이팝나무 꽃
이팝꽃 /김석규
어쩌려고 이러느냐 온 산 온 들에 허벅지게 피어나서
배 고픈 줄도 모르고 쌀자루마다 다 풀어 흩뿌리니
깊은 골짜기 그늘 속으로 산나물 뜯으러 갔던 사람들
보따리 보따리 머리 무겁도록 이고 내려올 때
누가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걸 보았다 하느냐
보리밭 사이로 만장도 하나 없이 지게에 얹혀 가는 날
뽀오야니 김 오르는 이밥 고봉으로 퍼담아서 줄 걸 그랬네
눈물로 다 젖은 치마자락 또 앞앞이 말 못하고
하늘에 가서도 목청 피 터지는 뻐꾸기가 되었나
산천초목 징그럽게도 푸르러 오고 무덕무덕 꽃은 피어나서
이팝나무 /김재덕
보리밥 설움이야
쌀밥이 대신할까
배곯은 설움을
안고 떠난 혼백인들
배불러지랴
이팝꽃 흐드러진 날
풍년가 울려 퍼지면
빛바랜 향연이 달래주리
이 꽃 지고 나면
뙤약볕 꽂힐 터,
서둘러 짙푸른 옷 갈아입는데
못다 핀 사랑 꽃은
언제쯤 피우려나
불러보는 임 그림자
송이송이 하얗게
날리며 운다
이팝나무꽃 /장옥관
다 늙은 이팝나무가 게워낸 흰빛은 질항아리가 숨겼다가 피워낸 소리의 씨앗 처럼 주름투성이 얼굴에서 터지는 햇빛의 파안대소 그러나 그늘에 들어 올려다보면 가는귀먹은 신음소리였구나 더운 입김 잃어버린 쉰 밥그릇이었구나 숭숭 터진 뱃살의 둥치에 허기를 들여놓은 이팝나무 들끓는 몸의 괴로움이 정수리에 백발을 얹어 놓았구나 등짝을 기어오르는 사념의 구더기 떼, 초파일의 연등처럼 켜든 녹음 위에 일만의 구더기들 검은 날개를 달고 있다 지웠다 썼다 온종일 구름의 녹야원 세우는 우듬지 위 누가 삼킨 숯불인가 늑골 아래 노을은 피를 머금고 있다
이팝나무 2. /수진 김선균
입하 지난 산골마을 하얗게
하얗게 풍년 꽃 피었을 적에
할머니 무릎에서 들었던
밤하늘에 반짝이는 이야기
보릿대 파랗게 고개 든 봄 날
노환에 시름겨운 어머니 간만에
흰 쌀밥 받아 마지막 웃음 짓고
아들 내외 이팝나무 꽃밥 고봉으로
퍼 담아다가 눈물로 삼켰다는
기나 긴 밤의 서글픈 이야기
희뿌연 달무리 그리며
귓가에 스치운다.
이팝나무 꽃도 피고 지는데 /정이산
언제부터 심었는지 잘 모르지만
초여름이 되면 산 중턱이나 길가에
하얀 눈꽃이 소복이 내린 것 같은
이팝나무 흰 꽃이 줄지어 피어 있다.
마을에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면
그 해는 풍년이 든다고 말하는데
초록 새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벚꽃보다 꽃향기가 매우 진하다.
小滿은 여름이 시작되는 때인데
벌써 한낮에 내리쬐는 햇빛을 보니
올해도 무덥고 찌는 듯한 열기로
가마솥더위를 예고하는 것 같다.
이팝나무 하얀 꽃들이 필 때에는
야릇한 냄새가 나는 밤꽃도 피어서
희누런 밤꽃이 계곡을 물들여서
오가는 길가에는 비릿한 향기뿐
봄꽃들도 어김없이 피었다가 지는데
부디 사라져라! 코로나 바이러스야!
이팝나무꽃 필 무렵 /장성우
입하에 가까워지고
줄지어 흐드러지게 피어서
혼자서 이팝나무 간직한 사랑은
은밀한 내 사랑 이팝나무 꽃이라네요
여름 길목에서 변신한 꽃
입하에 피는 꽃 이팝 꽃이 되었다는데
지독한 보릿고개
허기에 지친 애환 서린 꽃
쌀밥 풍년을 기다리는 서민의 심정
이팝 하얀 꽃 구름 일렁이고
눈이 온 것 같다는 찬사의 거리에
녹색 잎사귀 하아얀 이팝꽃 나라 꽃
오월 계절 따라 이팝나무 초록마을 거리
이팝나무 길을 가다 /박정남
이팝나무가 초록 잎사귀 위에
하얀 쌀밥을 파실파실 피워
날아갈 듯 깔아 놓았다
하얀 쌀밥이 바람에 날아간다.
식탁 위에 수저만 얹어놓고 아침 일찍
앞산 순환 도로로 차를 얹는 사람들의 얼굴이
사이드 미러에 연신 비치며 따라가서
한 숟가락 떠먹는다.
이팝나무꽃이 사람들의 입에서
또 한 무더기 피어나며
창 밖으로 튀어나온다.
스스로 꽃의 빛깔 연분홍 욕망을 거세한
흰 꽃들이 초록 잎사귀 위에 올라가
떠먹는 밥을 보고, 차안에 앉아 핸들을 돌리면서
하품을 하는 입 속으로 가득가득 들어오는 밥들,
순결한 흰밥은 하늘에 있고
이팝나무 위, 둥둥 떠가는 구름을 타고
제사밥처럼 소복소복 담겨 부풀어오르는 것이
어미들 가슴 속에
기어코 이팝나무꽃을 불질러놓았다.
그 섬의 이팝나무 /김선태
쌀 한 톨 나지 않는 서해 어느 섬마을엔 늙은 이팝나무가 한 그루 있지요. 오백여 년 전 쌀밥에 한이 맺힌 이 마을 조상들이 심었다는 나무입니다. 평생 입으로는 먹기 힘드니 눈으로라도 양껏 대신하라는 조상들의 유산인 셈이지요. 대대로 얼마나 많은 후손들이 이 나무 밑에서 침을 꼴딱거리며 주린 배를 달랬겠습니까. 해마다 오월 중순이면 이 마을 한복판엔 어김없이 거대한 쌀밥 한 그릇이 고봉으로 차려집니다. 멀리서보면 흰 뭉게구름 같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수천 그릇의 쌀밥이 주렁주렁 열려 있으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냄새가 사방팔방 퍼질 때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풍어제를 지냅니다. 이쯤이면 온갖 새들은 물론이고 동네 개나 닭들 하다못해 개미 같은 미물마저도 떨어진 밥풀을 주워 먹으러 모여드니 이 얼마나 풍요로운 자연의 한 마당 큰 잔치입니까. 대낮이면 흰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식혀주고 밤이면 환하게 불을 밝혀 뱃사람들의 등대 구실까지도 한다니 이만하면 조상들의 음덕치고는 참 미덥고 보배로운 것이 아닐는지요.
이팝나무 꽃 /박인걸
이밥이 나무위에 쏟아졌다.
난 그 시절 이밥이 먹고 싶어 군침을 삼켰다.
쌀독에는 쌀이 없었고
뒤주에는 보리쌀도 없었다.
배고픈 아이는 강냉이밥이 싫어도
주먹만 한 눈물을 흘리면서
신 김치와 함께 억센 밥을 삼켰다.
생일에 한 번, 설에 한 번,
재수가 좋은 해에는 조상의 제삿날
이밥 한 그릇 게 눈 감추듯 했다.
비타민 결핍증에 걸린 아이들은
누런 콧물이 고름처럼 흐르고
찔레꽃처럼 버짐이 얼굴로 번졌다.
구균감염 부스럼 병이 온 몸으로 퍼져도
페니실린이 없던 그 시대는
덧난 상처를 싸매지 못한 채
아기무덤에 묻히던 날
통곡하던 어미는 대낮에도 캄캄했다.
이팝나무 꽃만큼이나 쌀밥이 지천인데
그 때 그 아픈 기억은
아직도 명치끝에 붙어서 나를 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