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눈 속의 바다」라는 가곡이 있다.
울산에서 활동한 최종두(崔鍾斗) 작시에 우덕상(禹德相) 작곡의 힘찬 노래다.
“고래 고기 두어 쟁반 쐬주 몇 잔…
시와 인생 자유가 살아 튀는 장생포… 은비늘 번쩍이는 그대 눈 속의 바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장생포 앞바다에 고래 떼가 출몰하는 것 같아 가슴이 뛴다.
고래는 인간에게 꿈과 이상을 선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래를 잘 알지 못한다.
푸른 바다 위를 치솟는 고래를 사진이나 영상으로 접했을 뿐 실물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고래에도 종류가 많다. 통상 몸길이가 4m 이상이면 고래라 부르고, 그 이하면 돌고래다.
길이 30m, 몸무게 190t짜리 대왕고래부터 1m 안팎의 쇠돌고래까지 80여 종이 산다.
고래를 먹는 오르카(범고래), 적도에서 남극까지 여행하는 험프백(흑등고래),
카나리아처럼 노래하는 벨루가(흰돌고래)도 있다.
우리 바다엔 돌고래류 13종 등 34 종이 분포한다. 맛으로는 밍크고래가 좋다.
시중에 많이 나도는 돌고래 고기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요즘 고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울산시는 고래 테마도시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장생포에 ‘고래잡이 옛 모습 전시관’,
대왕암 주변에 ‘고래생태 체험장’을 짓는다.
2009년부터는 관경선(觀鯨船)을 운항하며 고래 떼 구경을 상품화했다.
이 고장 출신 신격호(辛格浩) 롯데 회장이 내놓은 기부금 일부로 고래상을 세우며,
고래를 소재로 문화 콘텐츠도 제작한다.
울산시는 고래가 도시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성장한 도시는 공해에 찌든 잿빛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환경 개선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에서 수영대회를 열 정도가 됐다.
전국 최대 규모의 도심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허전해 찾아낸 컨셉트가 고래도시다.
울산과 고래의 관계는 각별하다.
지리로는 장생포라는 항구가 살아 있고, 시간으로는 반구대(盤龜臺) 암각화(국보 285호)라는 선사 유적으로
연결돼 있다.
장생포는 고래잡이가 시작된 근대 이후부터 개체 보호를 위해 중단된 1986년까지 한국 포경업의 거점이었다.
고래박물관과 고래연구소도 있다.
지금도 어망에 잘못 걸린(혹은 걸린 것으로 위장된) 고래가 이곳에서 유통된다.
장생포의 뿌리는 반구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전에는 장생포의 파도가 반구대 암벽을 때렸을 것이니,
그 기나긴 물길을 헤집던 고래 떼의 유영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암각화다.
부산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국도 중간쯤에 반구대 가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언덕 너머 1km 남짓 지나면 범상치 않은 경관과 마주친다.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신라 화랑이 무예를 닦고, 귀양 간 정몽주(鄭夢周)가 귀를 씻던 곳이다.
연화산(蓮花山)에서 뻗어 나와 겹을 이룬 봉우리들이 그야말로 연꽃이다.
주변의 기운 또한 예사롭지 않다. 민가의 개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한 바퀴 돌아 다시 개의 귓전을 때리니,
개는 더욱 높이 짖어대며 하루 종일 산 속의 제 친구와 논다.
상류로 이동하면 우리 고향 두동면으로 이어지고
반구대에 앞서 1970년 12월에 발견된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이 나온다.
반구대는 어린 시절에 수차례 소풍을 갔고, 각석 주변 하천은 친구들과 여름철 천렵과 야영을 즐기던 곳이다.
반구대가 외부에 노출된 것은 1971년 성탄절 전날이다.
동국대 문명대(文明大) 교수가 이끄는 불적조사단이 하천을 따라 마애불을 찾고 있었다.
겨울철 갈수기여서 수심은 얕았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던 조사단은
폭 10m, 높이 3m의 수직 바위 면에서 이상한 무늬를 찾아냈다.
꼬물꼬물 낙서 수준이 아니라 새기거나 갈아서 만든 바위그림이었다.
선사시대 암각화! 한국 최초의 기록문화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여기에는 고래 9종 58점을 비롯해 동물과 인물 그림, 선단을 지어 고래를 잡는 어로 장면 등 296점이 새겨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 가운데 작살 맞고 있는 고래는 세계에서 유일해 문화재적 가치가 아주 높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인 연구 결과 신석기 시대의 암각화로 밝혀졌고 곧 국보 285호로 지정됐으며,
한국미술의 시원(始源)으로 국사 교과서에 수록됐다.
이 암각화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본래 지상에 노출돼 있다가 1965년 울산지역 식수와 공업용수 공급을 위해 사연댐을 축조한 이후 일 년에 칠팔 개월 동안
수중에 잠기게 된 것이다. 물살과 이끼에 시달리다 보니 원형이 망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다 연구자들이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한다며 쇠솔을 쓰고 먹방망이를 두드리니
그림 속 동물들이 비명을 질렀으리라.
한 대학박물관은 모형을 뜬다며 바위 표면에 왁스를 칠했고
또다른 대학의 연구소가 풍화상태를 파악한답시고 슈미트 해머라는 쇠망치로 백여든아홉 곳을 두들기기도 했다.
어이없는 문화재 수난이다. 갈수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게 과연 한국 최고의 문화재인가 싶을 만큼 흉측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고래도시’ 울산은 물속의 암각화를 외면하고 있다.
물론 울산시가 막무가내로 문화재를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상류의 수로를 옆으로 빼는 방법으로 암각화를 살리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거대 구조물이 들어서게 돼 주변 경관을 해치는 것은 불문가지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울산시 예산은 대전시보다 많으며, 해마다 예산 증가율은 전국 최고에 이른다.
마음만 먹으면 식수도 해결하고 국보도 살리는 길이 왜 없겠나.
고래의 전설이 담긴 유적을 물속에 둔 채 ‘고래도시’를 외칠 수 있을까.
고래고기 안주 삼아 「그대 눈 속의 바다」를 부를 수는 있을까.
울산시가 국보를 잃은 뒤 땅을 칠 만큼 우매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졸부도시’로 욕먹기 전에 암각화를 살리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처럼 고래고래 고함치는 것은 나도 그쪽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 울산 두동 출신이기 때문이다.
<두동초 44회 졸업 손수호님 약력>
- 두동초 44회 졸업. 두광중과 울산고를 거쳐 경희대 법학과와 동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졸업(언론학박사)
- 1984년 경향신문 기자로 출발, 국민일보 문화부장, 부국장, 논설위원 등 28년간 언론사 근무
- 현재 인덕대학교 방송영상미디어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글진흥원 원장, 언론중재위원회
서울8중재부 중재위원,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부회장,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으로 활동
- 국무총리 소속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위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이사,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 부이사장, 노근리평화상 심사위원 등 역임
- 이달의 기자상, 한국출판학술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 저서로 ‘책을 만나러 가는 길’ ‘문화의 풍경’ ‘도시의 표정’(이상 열화당) 등
첫댓글 본 카페 "감나무 글방"에
그외 많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답니다.
네! 게재된 좋은 글 많이 읽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