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淸明
청명은 음력 3월에 드는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로 청명(淸明)이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을 지닌 말이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15도에 있을 때이다.
청명은 보통 한식과 겹치거나(6년에 한번씩) 하루 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매일반"이라 했다.
청명이 되면 비로소 봄밭갈이를 한다.
천수답이나 물이 부족한 논에서는 봄철 논물 가두기를 한다.
논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물이 부족한 모내기때 요긴하게 쓰자는 것인데,
가두어 둔 물은 대부분 봄가뭄에 마르기 마련이다.
논물 가두기는 이론적으로 그럴듯했으나 농민들의 호응은 얻지 못했다.
예부터 "한식날 논물은 비상보다 더 독하다."고 했다.
농가에서는 논물을 가두어 두면 지력이 소진되고, 논갈이에 지장이 있어 이를 기피해 왔다.
그러나 관(官)에서는 이를 모른 채 일방적으로 "봄철 논물 가두기 강력 추진"하는 바람에 논물 가두기는 농민을 무시한 전시행정의 표본이 되었다.
현재는 저수지의 확충, 농업 용수의 개발, 양수기의 보급 등으로 논물 가두기는 사라졌다
청명 때는 삐삐, 또는 삘기라 부르는 띠(牙)의 어린 순이 돋는데 군것질거리가 없던 농가의 아이들이 다투어 뽑아 먹기도 했다.
청명·한식때가 되면 특히 바람이 심한데, 이때 불이나기 쉬우므로 한식날은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밥을 그냥 먹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청명 15일 동안을 5일씩 3후(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오동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하고, 중후(中候)에는 들쥐 대신 종달새가 나타나며, 말후(末候)에는 무지개가
처음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청명조(淸明條)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치며, 임금은 이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그리고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한다.
수령들은 한식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이라고 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는 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한식조(寒食條)에 기록하고, 청명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다.
청명과 한식은 흔히 같은 날이 되기 때문에 뒤섞이는 경우가 많아 오늘날 민간에서도 뚜렷한 구분 없이 전해지고 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 된다.
청명이 되면 비로소 봄밭갈이를 한다.
청명은 농사력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하나로 날씨와 관련된 속신이 많다.
청명이나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좋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점친다.
바닷가에서는 청명과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어종이 많아져서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하여 날씨가 좋기를 기대한다.
반면에 이날 바람이 불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파도가 세게 치면 물고기가 흔하고, 날씨가 맑아도 물밑에서 파도가 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경남 사천에서는 청명날의 날씨가 좀 어두워야 그 해 농작물(農作物)에 풍년(豊年)이 들고, 너무 맑으면 농사(農事)에 시원치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청명에 나무를 심는데, 특히 ‘내 나무’라 하여 아이가 혼인할 때 농을 만들어줄 재목감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날 성묘(省墓)를 가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청명이나 한식은 지상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擇日)을 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고 믿는다.
또 이날은 손이 없기 때문에 묘자리 고치기, 비석 세우기, 집 고치기를 비롯해 아무 일이나 해도 좋다고 한다.
청명이란 말 그대로 날씨가 좋은 날이고, 날씨가 좋아야 봄에 막 시작하는 농사일이나 고기잡이 같은 생업 활동을 하기에도 수월하다.
이러한 일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겨우내 미루어두었던 것들이다.
북한에서는2012년부터 4월 4일을 청명절로 공휴일로 하였다.
이는 식목일을 공휴일로 한 맥락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천도교가 이날 쉬기 때문이다.
최제우가 경신년(1860년) 한식에 동학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만에서도 휴일이다.
단, 대만의 어린이날은 4월 4일인데, 해에 따라서 어린이날과 청명이 겹치는 경우가 있다.
이 해는 4월 3일도 휴일로 한다.
단 4월 4일이 목요일이면 3일이 아닌 5일을 휴일로 하여 연휴를 만든다.
청명절 이야기
춘추시기에 진(晋)나라의 공자 중이(重耳)는 박해를 피하여 국외로 망명생활을 할 때 먹을것이 없어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처한적이 있었는데 이때 그를 수행한 개자추(介子推)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몰래 자기의 허벅지살을 한덩어리 도려내여 국을 끓였다.
중이는 그것을 먹고 서서히 정신을 회복하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먹은 고기가 개자추의 허벅지살임을 알고는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19년후 중이는 진나라의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진문공(晋文公)이다.
진문공은 즉위한 후에 지난날 망명길에 올랐을 때 자기를 수행했던 공신들에게 대대적인 포상을 하였지만 유독 개자추만 포상에서 제외되였다.
많은 사람들은 개자추에게 불공평하다고 하면서 왕에게 직접 포상을 건의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개자추는 신하들의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조용히 행장을 꾸려서 면산으로 가서 은거하였다.
진문공은 그 소식을 들은 후 대단히 부끄러워하며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개자추의 집을 찾아갔지만 개자추는 이미 집을 떠나 면산에 은거한 뒤였다.
다시 진문공은 그를 찾아 면산으로 갔지만 면산은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사람을 찾아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이때 어떤 사람이 진문공에게 꾀를 하나 고해 바쳤다.
즉 면산의 삼면에서 불을 놓아 개자추를 밖으로 나오게 하자는것이었다.
이를 허락한 진문공은 면산에 불을 놓게 했지만 개자추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꺼진 후에 사람들은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은 개자추가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모습을 본 진문공은 통곡을 하였다.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입관하려 할 때 나무동굴속에 혈서가 있었다.
그 혈서에는 이렇게 쓰여져있었다.
《살을 왕께 바쳐 충성을 다한 것은 왕께서 항상 청명하시길 바랬기때문이다.》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진문공은 그 날을 《한식절(寒食節)》로 제정하고 사람들에게 불을 피우는것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게 했다.
그 이듬해에 진문공은 신하들과 함께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다가 그 버드나무가 다시 소생한것을 보았다.
이에 그 버드나무에 《청명류》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천하에 알리고 한식절 뒤날을 청명절로 제정하였다.
한식과 청명은 하루를 사이에 두고있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항상 한식절의 행사를 다음날인 청명절까지 이어서 하곤 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한식절과 청명절을 하나로 생각하게 되였다.
현대 중국에서는 청명절이 한식절을 대신하고있다.
그리고 개자추에게 제사지내고 그를 추도하던 풍습이 지금은 청명절에 성묘를 하는 풍습으로 바뀌였다.
따라서 현대 중국인들은 매년 4월 5일을 전후한 청명절을 주로 성묘일로 삼고있다.
이 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조상이나 혁명렬사의 묘지 앞이나 기념비앞에서 성묘와 헌화를 하고 애도를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