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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20 나도 언젠가 국민학교 동기회 갈 날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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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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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2일 일요일 초등학교 동기생 동기회 날이다.
장소는 전 초등학교 옆 ㅇㅇ 좀 큰 식당이다.
보통 오전10시경부터 모이기 시작해서 오후 5시경까지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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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회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번민을 계속하다가 가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그러자 시간이 되어가니, 지금 쯤 모이기 시작하겠지, 11시 30분 쯤 되니 회의를 하겠지, 12시가 되니 점심을 먹겠지, 1시 반경이 되니 쿵짝짝자 삐악삐악 노래부르기 시작하겠지 이런 저런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되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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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라도 가볼까 말까 하니 마누라는 가라고는 한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뭔가에 묶여있어서 가지를 않더라.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그만 마누라한테 라면이나 끓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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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9급들이 뜨는 바둑이나 두고 오후를 보냈다.
이래서 동기회 날 하루를 보냈는 것이다.
참으로 옹졸하고 불쌍한 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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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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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는 왜 동기회에 가기가 싫었나.
뚜렷한 이유도 없다. 그냥 가고 싶지가 않더라.
누가 오라는 사람도 없고, 같이 가자는 사람도 없고, 오지 않는다고 독촉하는 사람도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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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든 말았든 모임에 참여하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왠지 멀어지더라.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든지 1년에 한번인 모임에 참여하고 노래도 부르고 신명도 떨고 와야 인생살이가 되는데, 나는 이러하지 못한다.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참으로 불쌍한 인간!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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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 수 년 만에 동창회에 갔는데.
햇수도 모르겠다, 3년 전인가, 동기 회장이 전화가 왔다 “ㅇㅇ 아 동창회에 온너래이” 동창회장의 적극적인 권유로 동기회에 갔다, 그 후로 동기회장이 2번이나 바뀌였고, 올해는 새로 신임 동창회장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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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회에 가니까 좋더라.
하루 즐겁게 놀다가 온다.
모두다 나이가 들어 60고개를 넘은지 수년이지만 그래도 초등학교(초등) 시절이 생각나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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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용산국민(초등)학교 14회 동기회 잘된다.
용산초등학교 명은 龍角山 이름을 따서 角자를 삭제하고 그냥 용산국민학교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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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시에 약 200여명으로 알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6학년 1반 73번이였으니까. 모두 3개 반 이였는데, 대략 200여명으로 기억된다. 우리 기수 후는 계속 학생 수가 줄어들어 지금은 폐교가 되었다. 당시에 학생수가 900여명으로 기억하며 운동회 마다 부르는 노래가 900의 건아라고 했으니, 우리 기수 전후는 200여명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총동창회에서 14회가 학생 수가 가장 많다. 이것은 전국적인 현상이겠지만 55년생이 초등학교 다닐 때가 학생수가 가장 많은 해인 것 같다. 55년생은 54,53, 심지어 52년생들 하고 같이 공부를 했으니, 그리고 당시에 주민등록하고 실재 나이하고 많이 차이가 났으니까, 이유야 어찌되든지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가 생기고 가장 많은 학생수를 배출된 기수다. 다른 기수는 1개반, 또는 2개반이 전부 였는데 우린 3개 반이였으니, 용산 14회 전후 기수는 3개 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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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14회가 어느 정도 잘되는가 하면.
년 1회 정기총회에 통상 50~80명이 참석을 한다. 전 박종규 회장 시에 80여명이 왔다. 그 후는 50여명 선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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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생 길흉사에 보통 봉투가 80여개가 들어오고, 참석인원이 50여명은 된다.
55년생들 자녀들이 한창 결혼 시즌이라 거의 매주 결혼식 날 만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결혼식 날에는 우리끼리 즉 14회 동기끼리 별도의 식당을 정하여 예식장 부근에서 식사를 한다. 이러한 일이 최근 몇 년 동안 계속되다 보니 1년에 한 번하는 총 동기회는 더 잘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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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부분 동기들이 퇴직을 하고 시간이 많으니 동창회에 많이 나오더라.
나이가 드니 길흉사에나 가지 어디에 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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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14회 기수가 초등학교 총동창회장 전 조태환 2014~2015년, 현 총동창회장 박종규2016년~2017년 연속 4년 동안 14회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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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이가 드니까, 총동창회장이라는 그 높고 까마득한 위치가 우리들에게 오더라. 이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말해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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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총 동창회장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경제적 능력이다. 이것이 없으면 총동창회장을 시켜주지를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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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골지역이지만 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이라면 공식적으로 년간 1,000만원 써야 하고 비공식적으로 1,000만원을 써야 총동창회장 깜이 된다. 도합 2,000 ~ 3,000만원 정도는 써야 시골 초등학교 총 동창회장 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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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14회 기수 동기회장 깜은 년간 300만원 정도 투자할 수 있어야 동기 회장 깜이다. 세상은 돈으로 통한다. 이것을 부인도, 외면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동기회장이나 총동창회장이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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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기회 회장도 못했으니 총동창회 회장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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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기회에서 보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고.
왠지 만나고, 보고싶은 친구가 거의 없다. 하나 하나 검토해보니 만나고 보고 싶은 친구들 보다, 만나는 것이 거북한 친구들이 더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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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나고 싶은 친구.
용산 14회 동기 중에 단 한사람도 없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하고 생각하고픈 친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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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되었나. 노사연이 바램 노래 가사와 같이 삶의 무게에 눌려 살고 있으니 친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고,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갔다는 것이다. 모두가 기억 속에 아물 아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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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에 혹시 동창회에 올까, 기대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서울에 사는 명숙이였는데 2016년 3월경에 서울 결혼식에 갔더니 서울 사는 초등학교 동기가 3명 나왔는데 여기에 섞여 있었다. 혼주와는 시골동네 옆집에 살았고 서울에도 동기회가 있으니 서로 연락이 되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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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시집가고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었는데, 서울 예식장에서 만나보니 옛날의 그 얼굴은 없어지고 초라해졌다고 해야 하나. 옛날의 환상은 없고, 가엽다고 표현해야 할까. 나이가 들어 갈수록 부티가 나야 하는데 나의 눈에 비친 모습은 서울에 사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으로 보이더라. 초등학교 얼굴은 기억에 없고, 고교시절에 토요일에 대구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청도 남성현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벚꽃이 화창하게 피어 있었는데 벚꽃 나무 아래 서있는 모습밖에 없었다. 당시 교복이 동복이였는데, 검정색 교복에 하얀 칼라였다. 완전히 꿈 많은 여고생이 화사한 벚꽃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이다. 당시에 필자는 대구에 있는 똥통高 學生이였는데, 당시 우리 또래는 여자들은 80%가 국졸이 한계였는데 대구까지 유학 간, 그것도 대구경북통합전에 최고명문여고생들은 전설 속에 있는 女高生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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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속의 여고생은 나와 혼주와는 초등학교 동기이고, 같은 시골 동네에 살았는데 집이 조금 떨어져서 그런지 나와는 소곱장난하면서 자란 기억이 도무지 없다, 그러나 혼주와는 같은 골목에 살았으니까 서로가 잘 알았겠지, 혼주와 나는 당숙질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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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설속에서 자란 여고생이 손주 손녀를 보았는 할머니가 되어 서울 예식장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계산해보니 고교 후 45여년 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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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학생이 내게 하는 말이 인터넷에 내가 올리는 글을 보았는 모양인데, “니가하는 말에 논박은 하여야 하겠는데,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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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서울에 와서 그것도 초등학교 여자동기가 촌놈이 쓰는 글을 어떻게 찾아 들어와 읽었는지 놀랄 뿐이다. 나의 국민학교 동기중에도 촌놈이 쓰는 글을 읽는 독자가 있구나 생각하니, 또 한 번 놀랄 뿐 이였다. 그래서 답변으로 “말라고 읽노, 순 잡글인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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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숙이가 이번 동기회에 올 것인가 기대되어지더라. 전화번호를 알면 올 것인가 아닌가 물어 볼 것인데, 번호도 모르고, 억지로 알려고는 할 필요가 없고, 이 동기 남편은 부산에 근무하다가 은행에 고위직으로 서울에 올라 온지가 10수년이 되었고 연봉이 1억이 넘는 우리 촌사람하고는 같은 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여자동기 부친은 대구사범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지금 나이가 아마 85세 정도 인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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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나기 싫은 친구, 껄끄로운 친구들.
내가 촌에 사니까 대도시로 진출하지 못하고 농촌에 사는 초등학교 동기친구가 많이 있다. 그러니 자연스래이 자주 만난다. 같이 촌에 살다가 보니 틀어지는 경우도 있더라. 이게 살아가는 인생살인가 모르지만 동기 친구들은 내게는 너무 힘이 든다. 오히려 동기생이고 같은 지역 꼴짜기 출신이 아니라면 맘이 편하겠는데, 살아 보니 좋은 친구는 찾아보기가 어렵고 거리가 멀어지는 친구들 밖에 없더라. 인정은 있지만, 이 인정이 삶에 도움이 안되고 불편하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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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너절한 사연을 다 말할 수는 없고,
2015년도에 대구에 살다가 귀향해서 농사짓고 잇는 동기가 농약사러 왔는데, 내가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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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ㅇ아 동기들 겁난데이, 나는 참 동기들이 어렵다, 내가 아무리 잘해주려 해도 돌아서더라, 그를 리가 있나, 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무슨 소리하노, /
이 동기 역시 2015년도에 농약거래하고, 2016년도는 농약사러 오지 않았고, 2016년 말에 농약대금을 지급하더라. 시골에 살다보니 상부상조라는 것은 자기가 필요할 때 상부상조이지 자기에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상부상조라는 것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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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간단히 들면.
A는 복숭아 탄저병을 농약해라 우기면서 농약값 안주고,
B는 밤나무에 제초제하고 10m넘는 나무가 약해라 주장하면서 농약값 안주고,
C는 감 조기 수확한다고 너무 일찍 사용하다가 낙과되었다고 농약값 안주고,
D는 부도로 농약값 안주고, D는 나와 S씨에게 연대보증을 해주고 D와S 모두가 부도로 내가 연대보증금액 전액을 지급하고, D는 양심가책도 없더라.
E는 동기회 찬조금 문제로 틀어져 멀어졌고,
K 경우는 말하기도 싫고, 영원히 보지 않아야 할 사람이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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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사는 동기들 학력이 국졸 70%이고 중졸이 30% 정도인데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옳은 것이다. 또 똥고집이 얼마나 센지 도무지 옳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이들에게 과학을 말해 봤자 과학이 뭔지 통하지가 않는다.
농업은 과학이다, 이러한 논리는 이들에게 안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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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에 사는 동기들은 모두가 잘 산다.
농약값을 이 핑게 저 핑게 되고 안주는 자들이 더 잘산다.
이들은 1년에 해외여행을 몇 번씩이나 갔다 온다. 나와 마누라는 제주도 여행도 함께 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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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
초등학교 동기회에 가지 않으니 맘이 편치 않다.
이런 곳에까지 밀려 살아야 하나.
인생살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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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도 찬조금을 팍팍내고,
미친 듯이 온몸을 흔들고 신나게 노는 날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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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이날은 꿈같은 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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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17.
초등 동기회도 못간 kimsunbee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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