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중구 보수동에 자리잡은 책방골목은 한국에 딱 하나 남은 헌책방 골목이다. 서울 청계천, 인천 배다리 등에도 헌책방 골목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거나 규모가 매우 작아 국내에서 ‘책방골목’이라 부를 만한 곳은 보수동이 유일하다. 이곳의 출발은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 온 손정린씨 부부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 만화 등을 이 골목에서 팔면서다. 하지만 골목은 지난해에만 서점 9곳이 폐업하는 등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다며 동주여고 학생들이 시집을 펴냈다.
수북이 쌓인 먼지 틈으로
외로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책
여기저기 여행하며
누군가의 라면받침이,
누군가의 아끼는 책이 되었다가,
돌고 돌아 이제는 외로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책
어쩌면 헌책이 아니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한정판이 아닐까
-<그 책> 임지나
가치를 알아보기 힘든 헌책을, 갖고 싶은 ‘한정판’으로 해석한 이 글은 부산 동주여고 1학년 임지나양이 쓴 ‘그 책’이라는 시다. 작품이 담긴 시집은 지난해 말 나온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이하 <와보시집>). 임양을 비롯한 동주여고 학생들과 부산 시민들이 한국에 딱 하나 남은 헌책방 골목인 보수동 책방골목을 주제로 쓴 시 200여편을 묶었다. 편집은 이 학교 도시재생 동아리 ‘예그리나’ 학생들과 <읽어보시집>, <평범히 살고 싶어 열심히 살고 있다> 등을 낸 최대호 시인이 맡았다.
시작은 지난해 5월, 부산 중구청의 ‘보수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이었다. 책방골목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동주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김성일(34) 교사가 우연히 이 사업을 알게 됐다. 평소 도시재생에 관심이 많았고, 나고 자란 곳이 보수동 바로 옆 동네인 동대신동이라 중·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찾던 곳이 책방골목이었다. 책방골목이 위기라는 얘기를 들어오던 터라, 대부분 보수동 인근에 사는 동주여고 학생들과 함께 사업을 해보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인 임지나양과 이런 얘기를 나눴고, 교내 방송으로 도시재생에 관심 있는 학생 8명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게 예그리나다. 공모사업에도 무리 없이 선정됐다.
시집에 실린 시는 모두 손글씨고, 군데군데 삽화도 담겨 있다. 이는 물론 표지까지 모두 동주여고 학생들 솜씨다. 특히 사람들이 보내준 시를 손글씨로 옮기는 일은, 예그리나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정성을 기울였다. 이 가운데 시 100편가량을 필사한 1학년 김연경양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위해 시를 쓰는 일이라고 하면,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참가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책방골목 상황이 이렇다는 걸 알려주니 2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라며 큰 성과를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랑 얘기하면서 이곳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나눠본 게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다. <와보시집>에 실린 ‘헌책’(이연수)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와인은
숙성된 걸 고르고
미술품은
예전 작품을 선호하고
LP판은
갈수록 희소해지는데
왜 책은 새 책만 찾아?
추억과 역사와 출판문화의 흐름이 담긴 헌책, 그 헌책을 품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재생’시키려면 풀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