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파랑 노랑 울긋불긋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쾅쾅대는 음악.하나같이 잘생기고 이쁜 젊은이들이 밀물처럼 밀려갔다 밀려오는 곳.여기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강남역이다.
내가 운영하는 평강한의원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오늘도 나는 밤늦게 사무실을 나서면서 내 젊은 시절과는 너무도 다른 이 거리의 젊은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충청도 산골 중에서도 빈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어가며 공부해야 했다.어머니의 날품팔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했을 정도로 가난했다.선친은 내가 세살 때 돌아가셔서 아무런 기억이 없다.내 성격은 소심했고 어른들이나 친구들 앞에선 늘 주눅들어 있었다.고교시절엔 교통사고로고 한쪽 다리를 다치기도 했고 예비고사에서조차 떨어질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대학 입시에서는 무려 7차례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어렵사리 개원한 한의원도 빚더미에 올라앉아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창시절보다 벌이가 시원찮았다.
이런 내 인생을 뒤돌아보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지금 나는 ‘청비환(淸鼻丸)’이라는 비염 치료제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한의사가 됐다.한의사에게 가장 ‘짭짤하다’는 보약짓는 일을 포기하고서도 전국 각지에서 쉴새없이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할 형편이다.매일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한다.
경기도 포천에 마련한 15만평의 평강식물원에는 1700종 이상의 꽃과 나무들이 잎을 피우고 있다.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동산을 재현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푼다.요즘엔 이 곳에 세계OM선교센터를 짓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도저히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게으른 종에게 이런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나 주위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성에 차지 않는다.
나는 강남 거리를 가득 메운 저 젊은이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물질적인 풍족함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다.오히려 안타까운 마음만 앞선다.내 인생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제대로 알릴 수만 있다면,저 젊은이들이 인생의 참된 목표를 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제 겨우 40대 중반인 젊은 나이의 내가 지난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쑥스럽다.그래도 내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 국민일보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증을 해본다.혹시라도 어린 날의 나처럼 세상에 기죽어 지내는 젊은이가 있다면,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아직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내 얘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길 기도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서도 전쟁 때의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다른 마을처럼 무슨무슨 ‘리’라는 이름도 없이 그냥 ‘농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동네 주민들은 대부분 북쪽에서 피란온 사람들로,땅을 일구면서 미군의 배급을 받아 사는 동네였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환용 ⑵] 6·25참전 아버지 부상 후유증 사망
6·25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전쟁중에 크게 다쳐 내가 3세때 돌아가셨다.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큰누나는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작은누나와 형도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나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게를 지고 다녔다.봄이면 떡갈나무 싹을 베어다 논에 퇴비를 줬고 풀을 베어다가 소를 먹였다.작은 밭농사였는데도 일은 끝이 없었다.학교를 갔다오면 할 일이 항상 쌓여있었다.여름방학동안 친구들은 나무 밑에 앉아 놀았지만 나는 고구마밭에서 김매기하느라 얼굴이 까맣게 탔다.친척 동생들이 내 얼굴을 보고는 “오빠 얼굴 깜둥이네”하고 놀릴 정도였다.여름이면 내 별명은 깜둥이가 됐다.
어린 시절엔 그런 일이 고생인 줄도 몰랐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지게를 지고 김매기하면서 길러진 끈기 때문에 나중에 재수할 때나 힘겨웠던 고학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정작 남의 집에 가서 일해야 했다.하루종일 일한 품삯은 60원.우리 식구는 그걸로 하루하루 연명했다.영어사전 한권이 500원 할 때였으니 얼마나 가난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던 이모네에서 소 한마리를 빌려줬다.어머니는 소 여물 먹일 구유를 이고 40리길을 걸어오셨다.지금도 그때 하도 고생을 해서 허리가 휘었다고 말씀하신다.
학교는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았다.학교 가고 오는 게 즐거웠다.봄이 되면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다.꺾어다 병에 꽃아 책상 대신 쓰던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동쪽에 있던 야트막한 동산 위로 태양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설레었다.남쪽으로는 멀리 큰 산이 보였는데 멋있었다.
지금은 그 아름답던 동산이 개발 때문에 다 없어져버렸다.내가 식물원을 세운 이유 중 하나는 어린 시절의 동산을 다시 만들어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서다.
어린 시절에 나는 개구쟁이였으면서도 공부를 잘했다.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논두렁이나 다리 아래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아이들을 놀래줘 개울에 풍덩 빠지게 하기도 했다.숨바꼭질을 하다가 우리집에 숨었는데 그만 잠들어버려 자정이 넘도록 아이들이 나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매게 만들기도 했다.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난다.
성적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계속 우등상을 탈 정도로 좋았다.6학년때는 학교 대표로 서산군에서 보는 시험에 참가했을 정도였다.형과 누나는 아무도 중학교를 못 갔지만 내가 가겠다고 하니 말리지 않았다.형과 누나들이 일을 하고 있어서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았기 때문이었다.내가 막내가 아니었으면 아마 중학교를 못 갔을 것이다.형이나 누나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중학교를 가면서부터 성격이 변했다.10리 밖에 있는 학교를 놔두고 산 넘고 물 건너 20리길을 가야 하는 학교로 배치됐는데 그 길에 나쁜 형들이 나타나 우릴 괴롭혔다.가까이 있는 학교로 전학을 시켜달라고 어머니를 졸랐다.어머니는 학교에 다녀오시더니 “전학을 하려면 전학비 3000원을 내야 한다더라”고 말씀하셨다.어머니의 하루 품삯 60원으로 살아가는 우리 형편으로는 전학을 포기할 밖에 없었다.학교도 맘에 들지 않고 날마다 20리길을 걸어서 오가는 것도 힘들었다.사춘기가 시작됐는지 이런저런 고민도 많아졌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환용 ⑶] 방화 누명·전학 거짓말 사이에 갈등
내 성격이 침울해진데는 몇 번의 사건이 있었다.
한번은 한겨울에 우리집이 불에 타버렸다.한 친구가 우리 집 부엌에서 성냥을 가져다 우리집 앞 밭모퉁이에 불을 질렀다.겨울이면 흔히 볼 수 있는 볏짚 태우기 같은 일이었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 장작을 쌓아둔 곳으로 불이 옮겨붙었다.순식간에 우리집 지붕까지 번졌다.친구 녀석은 도망가버렸다.나는 급하게 달려가 방안을 열고 소리쳤다.
“불이야! 불, 불!”
누나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부엌에 있는 물을 퍼부었지만 동네 우물이 멀리 떨어져 있어 역부족이었다.때마침 나무하러 가셨다 돌아오던 어머니가 지게도 내팽개치고 달려오셨다.바지를 벗어던지면 불이 꺼진다는 이웃의 말에 어머니는 입고 계시던 고쟁이를 벗어 지붕위에 던졌다.지붕은 물론이고 서까래 일부까지 타버린 큰 불이었다.
졸지에 내가 방화범이 됐다.당시엔 억울했지만 친구녀석도 발뺌하는 바람에 내가 누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어머니는 날 야단치지 않으셨다.오히려 시래기죽 대신 쌀밥을 해주면서 더 잘해주셨다.나중에 커서 어머니에게 왜 그렇게 잘해줬냐고 여쭈니 “불 지른 사람을 야단치면 충격을 받아 정신이 이상해질까봐 그랬다”고 하셨다.내가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하니 웃기만 하셨다.
또 한번은 친구집에 가서 책 구경을 한 일이 있었다.우리집과 달리 큰 책장에 책이 많았다.이책 저책 꺼내보며 구경하는데 친구 아버지가 들어오셨다.그분은 우리를 보자마자 고함을 치셨다.
“누가 이렇게 책을 꺼내서 어질러 놨느냐.내게 한번 혼나볼래?”
당장이라도 우릴 내려칠 것처럼 보였다.내게 아버지가 안 계셔서 더 무섭게 느껴졌는지 모른다.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때부터 남자 어른들을 대하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난 왜 뭐든지 잘 되지 않는걸까.걸핏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하는 일마다 칭찬보다 야단을 맞는 것 같았다.신경쇠약에 열등감까지 겹쳐 성격은 점점 소심해졌고 말이 없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누나들이 내려와 나를 서울로 데려가 공부를 시키겠다고 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설레었다.하지만 전학을 가기 위해선 동사무소에 가서 거짓말을 해야 했다.가족이 모두 서울에 이사를 가는 것처럼 신고를 해야 했다.일단 가족 주소를 서울로 옮기긴 했는데 어머니와 형은 다시 서산으로 옮겨야 한다며 내게 동사무소에 가서 퇴거신고를 하라고 했다.
동사무소에 가니 직원이 나를 보고 “너 서울로 전학하려고 주소를 옮겼다가 이제 다시 퇴거하는거지!”하며 노려봤다.
식은 땀이 흘렀다.그 날 어떻게 누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없다.그대로 앓아누워버렸다.학교에서도 우리가 서울로 전학을 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을 알면 어떻게 하나 애가 탔다.어린 마음에 학교를 중퇴해버리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누나와 엄마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이런 모든 일이 겹쳐 하루하루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찾게 됐다.이모댁이 가까이에 있었는데 학교가 끝나면 자주 들렀다.그 이모가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길 나의 신앙 ―이환용 ⑷] 교회 고등부서 신앙의 기초 자리잡아
서울에서는 누나들도 이모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나도 학교가 끝나면 이모집에 자주 놀러가가기도 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이모를 따라 교회에 갔다.
그때가 아마 중3 가을이었던 것 같다.처음엔 이모를 따라 고척동에 있는 고척교회의 대예배에 참석했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고등부에 나갔다.
거기서 나는 유영모 전도사님(현재 일산 한소망교회 담임)을 만났다.유전도사님은 작은 키에 야무지면서도 유머가 넘쳐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때로는 우리에게 짜장면과 만두를 사주시면서 인생상담(?)도 해주셨다.마치 형처럼 느껴졌다.
웅변을 배우셨다는 유전도사님은 말씀도 잘하셨다.말씀속에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봄이면 같이 들에 나가 놀이도 하고 여학생과 남학생이 손을 잡고 포크댄스도 췄다.주일이면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침울했던 내 성격도 많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유전도사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중에 부활에 대한 설교가 아직도 기억난다.부활의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하시면서 성탄절 이상으로 중요한 날이라고 말씀하셨다.전도사님 덕분에 신앙의 기초를 차근차근 닦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전도사님은 늘 우리에게 ‘할 수 있다’‘담대하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전도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는 것 같았다.자연스럽게 ‘나도 전도사님처럼 활달하고 말도 잘할 수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전도사님이 웅변을 하셨다는 얘기가 떠올랐다.‘그래,나도 웅변을 하면 말도 잘하게되고 성격도 남자다워질 수 있겠지’.
마침 학교에 웅변반이 있었다.거기에 들어가 웅변을 배웠다.집에 오면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거울을 보며 웅변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배웠다.고등부 주최로 설교대회를 열었는데 거기서 장로님과 함께 가장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학교에서도 서울시 교육감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유도반에도 들어갔다.적극적인 성격을 기르고 싶어서였다.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변해가는 것 같았다.학급에서 부반장을 할 정도로 활달해졌다.
그때부터 공부는 좀 소홀해졌다.중학교때까진 성격은 소극적이었어도 성적은 우등상을 줄곧 탈 만큼 좋았는데 고등학교에 와선 교회를 다니고 웅변반이니 유도반이니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성적이 쭉쭉 미끄러지기 시작했다.그래도 내 성격이 힘차게 변해가는 게 더 좋았다.
유전도사님도 그런 나를 사랑해주셨다.지금은 목사님이 되셔서 일산신도시에서 한소망교회를 개척해 맡고 계신다.개척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수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키신 열정적인 분이시다.몇년전 유목사님을 뵈었을 때 고등부 시절 얘기를 하니 목사님께서도 “그때가 내 목회에서 가장 보람되고 즐거운 때였다”고 회상하시면서 “그 고등부 학생들 중에서 여러명의 의사가 나왔다”며 기뻐하셨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한의원의 꿈을 갖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에는 지하철도 없어 버스는 늘 콩나물시루처럼 만원이었다.안내양이 사람을 태우고는 문을 닫지도 못하고 버스에 매달려 달리는 모습을 흔히 볼수 있었다.한번은 나도 버스문에 그렇게 매달렸다.버스가 정류장에 서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내렸다.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나는 그대로 넘어져 아스팔트에 무릎을 찧었다.내 위로 사람들이 쏟아졌다.나는 피투성이 무릎을 감싸쥐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버스회사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병원에 갔다.그 길로 수개월동안 입원해야 했다.퇴원한 뒤에도 목발을 짚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공부는 거의 포기상태였다.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지압에 관해 얘기했다.지압이 건강에 좋다는 얘기만 듣고 버스를 타고 가다 발견한 지압원에 가서 무조건 가르쳐달라고 떼를 썼다.노량진 근처에 있는 지압원이었는데 거기서 지압과 함께 침을 배웠다.처음으로 한방에 입문한 셈이다.그뒤 한의원에 가서도 배웠다.내가 아플 때면 직접 내 몸에 침도 놓고 친구들에게도 침을 놔가며 한방에 재미를 느꼈다.친구들 사이에서 ‘돌팔이’로 통하게 됐다.
그때까지 내 꿈은 국문학도가 되는 것이었는데 한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당시로선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다.고등학교에선 문과였는데 내신은 꼴찌였다.대입 본고사를 치르기 위한 예비고사에서도 불합격할 정도였다.
한의사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재수를 시작했다.이불만 하나 들고 노량진으로 갔다.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계속 학비를 달라고 할 수 없었다.주위 학생들에게 침을 놔주면서 용돈을 벌었다.단과 학원에 갔는데 중학교 친구가 거기서 칠판을 지우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학원 강사들에게 침을 놔주면서 무료로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독서실에서 먹고 자면서 ‘돌팔이 의사’ 생활을 하며 공부를 계속했다.진짜 한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노량진 주민들 사이에도 ‘학생 의사’로 통했다.낮에는 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이면 침을 놔주며 생활했다.
입시에서는 줄기차게 떨어졌다.회의가 들기도 했다.독서실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며 기도했다.
“하나님,정말 제가 한의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내신성적은 꼴찌등급이고 문과인데다 학비도 없습니다.어떡하면 좋습니까”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저 별들처럼 많은 환자들이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마음속에 기쁨이 솟았다.꼭 한의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요,하나님.최선을 다하겠습니다.약속을 믿겠습니다”
군대에 들어갈 때에도 영어사전을 들고 갔다.신병훈련소에서도 물통 대신 영어사전을 들고 다니며 남들이 담배 피울 때 영어단어를 외웠다.
배치받은 부대에서 침을 놓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번병 생활을 하게 됐다.아침이면 기독교방송에서 나오는 10분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드리고 낮에는 앉아서 공부할 수 있었다.군대에 있으면서도 휴가를 받아 시험을 치렀다.그렇게 노력해도 줄곧 낙방이었다.
제대를 한 뒤에 다시 노량진으로 갔다.학원도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침을 놔가며 공부를 계속했다.내가 필요하다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녔다.봉천동 달동네에서는 무릎까지 쌓인 눈에 빠지기도 했고 폭우가 쏟아지는 중에도 돌아다니며 치료했다.힘들 때면 옥상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보며 기도를 드렸다.
1985년 마침내 동국대 경주캠퍼스 한의대에 합격했다.7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8년만에 한의대생이 된 것이다.그 사이 고배를 마신 것이 무려 7번이었다.그 기쁨은 어디 비할 데가 없었다.
“하나님,드디어 제가 한의사가 될 수 있겠군요.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남들은 경주라고 하면 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유적지를 떠올리겠지만 나는 대학시절의 전투와도 같았던 생활이 먼저 생각난다.
재수하면서 7년간 노량진에서 지내다보니 제법 나를 찾는 단골손님도 있었다.그게 내 유일한 수입원이었는데 경주에서는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어쩔 수없이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와 침을 놨다.그 바쁜 한의대 생활 중에도 매주 서울에서 경주까지 왕복 10시간을 꼬박 투자해야 했다.남들은 일부러 놀러오는 경주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 흔한 MT 한번 갈 수 없었다.힘들었지만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포기할 수 없었다.나를 부르는 곳이면 아무리 먼 시골이라도 달려갔다.
나중엔 경주에서도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찾아왔다.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허름한 자취방 앞에서 서너명씩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집에 오면 환자들을 돌보느라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했다.재시험을 치를 때마나 내가 빠지는 날이 없었다.
거기서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첫 월급을 봉투째 헌금할 정도로 신실한 여인이었다.외모도 경주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예뻤다.그런 아내를 한달에 4만원짜리 방에서 자취하고 있던 나에게 보내준 장인어른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본과 3학년부터 서울에서 수업을 받았다.아내도 90대1의 경쟁을 뚫고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다.본과 4학년이 되면서 한의사 국가고시 준비가 시작됐다.다른 친구들은 합숙을 하면서 공부했지만 결혼도 했고 환자도 돌봐야했던 나는 혼자서 시험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세수하는 것도 잊고 때로는 밥먹는 것도 건너뛰고 눈 뜨자마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공부했다.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하다가 날짜도 잊어버려 언제가 주일인지도 헷갈려 114에 전화를 걸어 물어본 적도 있다.
“오늘이 무슨 요일입니까”하고 물으니 안내원이 즉시 “오늘은 주일입니다.교회에 가세요”하는 것이었다.깜짝 놀랐다.마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감격스러웠다.
한번은 무더운 여름날 아내에게 토큰 2개를 달라고 했다.무작정 강남역으로 갔다.내가 시험에 통과해 한의사가 되면 이곳에 한의원을 열고 싶었다.뉴욕제과 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아이보리 색의 건물이 보였다.그 건물 2층에 만화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이 맘에 쏙 들었다.마음속으로 여기에 한의원을 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기도를 드리고 왔다.
마침내 국가고시일이 됐다.그동안 함께 기도했던 아내의 응원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겨울이었는데도 날씨가 화창했다.시험지를 받아보니 문제가 너무 쉽게 나왔다.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3교시중에서 2교시만 치르고 나서도 합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앞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평소 늘 장학금을 타던 학생이었다.어디 아픈가보다 생각했는데 옆자리에서 또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시험이 너무 어렵다며 모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의사 국가고시는 그전까지 해마다 98% 이상의 합격률을 기록했는데 그해는 50%도 되지 않았다.한의사고시 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그전까지 이론 중심이었던 문제가 그해에는 임상 위주로 나왔던 것이다.학교에서 공부만 한 학생들에겐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재수시절부터 환자들을 상대했던 내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4년 내내 장학금 받았던 학생도 떨어졌던 그해 한의사 국가고시에서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이제는 한의원을 차리는 것이 문제였다.우리 형편을 생각하면 노량진의 셋방에서 진료를 시작하는 것이 이치에 닿았지만 기도할수록 강남이 떠올랐다.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무작정 찾아가 봐뒀던 뉴욕제과 뒤 센터프라자의 그 사무실을 잊을수가 없었다.
다시 그곳으로 찾아가니 역시 만화영화 가게가 계속 영업을 하고 있었다.그날은 그냥 집으로 왔다가 다음날 근처 부동산을 찾아갔다.마침 사무실 하나가 방금 나온게 있다며 보러가자고 했다.따라가다보니 뉴욕제과 뒤편으로 가는 것이었다.신기하게도 센터프라자 2층의 그 만화영화 가게가 나와있다는 것이었다.나는 너무 놀라고 감격돼 어쩔줄을 몰랐다.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이 사무실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달려갔다.
내 전재산은 40만원이었다.아무리 털어도 그것 뿐이었다.계약일이 됐다.마침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 같이 가자고 부탁했다.생애 처음으로 내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이어서 그만큼 긴장됐다.
계약서를 쓰려는 순간 40만원을 내놓았다.지금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었다.상대방에서 버럭 화를 냈다.
“지금 코미디 하는 겁니까.수억짜리 사무실을 빌린다면서 계약금이 40만원이라니 나를 놀리는거요.”
동행했던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내가 돈이 있으니 우선 내 돈으로 계약합니다”하고는 선뜻 돈을 빌려줬다.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내가 기도했던 그 사무실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어쨌든 사무실을 마련했다.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마다 몸과 마음에 평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평강 한의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모자라는 돈은 은행에서 빌리고 약장도 사고 약탕기, 물리치료기 등등은 리스, 렌탈 등으로 마련했다.처음 사무실 문을 여는날 얼마나 기뻤는지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고교 때 교통사고가 아니었으면 한방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도저히 내밀 수 없는 성적을 가지고 한의대에 도전했다.고독했지만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버텼던 7년간의 재수 시절.모두가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건물 기둥을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건물을 내게 주십시오.주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틈만 나면 성경을 읽고 찾아오는 환자에게는 30분이건 1시간이건 전도했다.형편이 어려운 환자는 진료비를 싸게 받고 목회자들에겐 특별히 잘해드리려고 노력했다.위치가 좋아서 환자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월 결산을 하면 남는게 없었다.사무실을 시작할 때 워낙 빚을 많이 벌어들이는 족족 이자로 빠져나가버린 것이었다.학생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보다 벌이가 시원찮았다.아내도 “내 돈이나 갖다 쓰지마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그래도 나는 매일 기도하고 전도 생활을 하니 기쁘기만 했다.
어느날 낯선 사람이 한의원을 찾아왔다.자신을 KBS 방송국 프로듀서라고 소개했다.길을 가다가 들렀는데 ‘TV동의보감’이라는 한방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고 말했다.난 졸업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좋다고 했다.TV출연이라니,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나의 길 나의신앙―이환용 ⑻] 참느릅나무 뿌리로 비염치료제 개발
텔레비전 출연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달 계속됐다.학창시절의 웅변부 활동과 임상경험이 크게 도움이 됐다.그뒤 서울방송에서도 섭외가 들어왔고 케이블 텔레비전과 신문 잡지에도 여러번 출연하게 됐다.
이때 또 하나의 히트상품이 나왔다.‘청비환(淸鼻丸)’이 그것이다.
노량진에서 재수할 때 나를 찾았던 환자 중에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분들이 많았다.잘사는 사람들은 큰 한의원이나 병원으로 갔지만 그분들은 면허도 없는 나같은 사람밖에 찾아올데가 없었다.나도 성심껏 치료해드렸지만 그분들도 나를 학생의사라고 부르시면서 귀여워해주셨다.
하루는 한복집 할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학생,이리 와 봐”
“할머니 허리가 또 편찮으세요? 너무 오래 앉아있지 마시래두요”
“그게 아니고 이거 좀 봐.”
할머니는 엄지손가락만한 나무껍질을 내밀었다.
“이게 코나무 껍질이야.옆집에 왜 진해에서 의사하는 아들 있잖아.그 애가 진해에서 이 나무를 구해줘서 그집 할머니가 다려먹었는데 콧병이 감쪽같이 나았대.나도 콧병으로 냄새를 못맡아 고생하잖아.오죽하면 밥 타는 냄새도 못 맡을라구.그 할머니가 내게 이걸 구해 다려 먹어보라고 줬는데 자네 이거 구할 수 있겠어?”
코나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엄지손가락만한 나무껍질을 들고 서울 경동약재시장을 헤맸다.알고 보니 그게 참느릅나무 뿌리였다.참느릅나무는 동의보감에도 콧병 치료의 특효약으로 나와 있었다.
수소문끝에 구해드렸더니 얼마 안 지나 할머니께서 독서실로 직접 찾아오셨다.
“30년동안 수술도 해보고 별짓을 다해봤던 콧병인데 그 나무껍질을 다려먹고 보름만에 다 나았어.너무 기뻐서 이렇게 찾아온거야”
그 할머니 성함은 유순희였다.
한의대 시절 그 참느릅나무 뿌리가 떠올랐다.이걸 한번 연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콧병환자만 오면 참느릅나무 뿌리를 권했다.효과가 좋을 때도 있었지만 모든 콧병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었다.여러 해 연구해 다양한 약재를 섞어 축농증과 알레르기 비염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어냈다.이걸 환자들이 먹기 편하게 알약으로 만든 게 청비환이었다.
내가 먼저 먹어봤다.재채기 콧물이 없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비염에 걸려 있던 큰아들에게도 먹였다.좋은 약은 위장에도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70알까지 한번에 줬는데도 아들은 잘 먹었다.아무 탈이 없었다.이것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언론에 소개되면서 청비환도 자연스럽게 알려졌다.처음엔 내가 7번이나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환자들이 알면 나를 돌팔이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콧병 치료에 특효한 참느릅나무를 소개하고 싶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화장실도 갈 틈이 없을 정도였다.
청비환 때문에 느낀 점이 많았다.어려운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을 성심껏 돌본 덕분에 참느릅나무를 알게 됐고 언론에도 알려지게 됐다.마치 흥부의 박씨와도 같았다.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 식약청에서 전화가 왔다.누군가 청비환이 불법으로 제조된 약품이라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환용 ⑼] ‘비염치료제’ 고소당했으나 무혐의
한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만들어줬다고 불법이라니.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법을 잘 모르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식약청에서 직원 2명이 나와 “제약회사도 아닌데 왜 알약을 만들어 파느냐”며 야단을 치고 갔다.그뒤 경찰에도 불려가 조사를 받고 결국 검찰까지 갔다.
노심초사하다보니 살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걱정하던 아내가 “교회의 같은 구역에 경찰의 높은 사람이 있다”며 명함을 주면서 연락해보라고 했다.그때서야 생각해보니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았던 사람 중에도 검찰의 높은 분들이 여럿 계셨다.그중에는 장관까지 지낸 분도 있었고 아들의 콧병을 치료하고 명함을 주고 간 부장검사도 있었다.그 부장검사의 얼굴이 기억났다.검찰에 조사받으러 가는 날 아침 부장검사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마침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고 사무실에 없었다.검찰청 내에서 신체검사를 받는다고 했다.
일찍 검찰청으로 가서 신체검사장을 찾았다.신체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이 하나님인데 내가 왜 부장검사 힘을 빌려서 해결하려고 하는거지?’.
부끄러웠다.검찰청 현관에서 혼자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려 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청비환을 만들도록 인도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그걸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도록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 지켜주십시오”
담대한 마음이 생겼다.부장검사를 찾지 않고 곧 바로 담당검사를 찾아갔다.청비환을 만들게 된 경위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한의사가 왜 한의사법 놔두고 약사법을 따라야 합니까.한의사는 한약을 끓여내든 알약을 만들든 환자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떡집하는 우리 형님도 쌀을 가지고 인절미를 만들든 꿀떡을 만들든 주인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다 듣고난 뒤 검사가 말했다.
“원장님,원장님 얘길 들으니 실력있고 훌륭한 한의사시네요.이건 누군가 원장님을 시기해서 고발한 사건입니다.원장님은 무혐의입니다”
뛸듯이 기쁜 마음으로 검찰청을 나왔다.나중에 검찰청의 한 직원이 우리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하는 말이 “무혐의로 결론이 났으니 이제 청비환은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 셈이 됐습니다. 공짜로 허가받은 것과 다름없지요”라고 말했다.전화위복이 된 것이다.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을 체험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늘 내게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축복해주셨다.
내가 우리 한의원이 있는 건물의 기둥을 붙잡고 기도했다고 앞에 얘길 했는데 하나님께선 경기도 포천에 15만평이라는 넓은 땅의 식물원을 허락해주셨다.외환 위기 직후인 99년부터 땅을 마련하기 시작해 지금은 2005년 식물원 개장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식물원 부지는 무려 30여명의 땅주인에게서 사들였다.그중 식물원 한가운데에 500여평의 땅이 있었는데 이 땅은 아무리 주인을 찾아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수소문끝에 땅주인을 찾아가니 “며칠 전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그 자리에 묘를 써야겠다”는 거였다.그들은 풍수지리를 보는 지관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나는 다른 곳으로 옮겨주면 내가 가지고 있던 10만평의 땅 중에서 500평의 배까지 줄 수 있다고 부탁했다.그러나 지관은 “이 땅이 아니면 안된다”며 식물원 가운데 있는그 땅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곳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질 땅입니다.여기에 묘를 쓰면 식물원을 만들기 힘들어집니다.주님,이 사람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 산의 다른 곳에 묘를 쓰게 해주십시오”
눈을 뜨니 포클레인이 오고 있었다.포클레인 앞으로 달려가 길을 막았다.땅주인집 사람들이 나를 에워쌓다.마치 나를 때리기라도 할 태세였다.식은 땀이 흘렀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그런데 그때 묫자리에 앉아있던 지관이 슬며시 일어서더니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이었다.지관이 가는 곳으로 좇아가 “이쪽도 우리 산이니 어醍瑩?골라서 쓰세요”라며 그들을 달랬다.지관은 식물원의 한쪽을 둘러보더니 “여기도 괜찮다”고 말하며 포클레인을 그곳으로 불렀다.그곳 땅 1000평을 묫자리 500평과 맞바꿨다.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곳 식물원에 한국 토종 식물을 종류대로 길러 보존할 생각이다.어릴 적 뛰놀던 앞동산처럼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산과 나무,풀들을 세계에 자랑하고 싶다.
이런 뜻을 이해하고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다.약용식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경희대 안덕균 교수님을 식물원에 초대해 보여드렸더니 우리 식물원의 자문위원을 해주시겠다고 하셨다.중앙대 안영희 교수님,경희대 최호영 교수님,농업진흥청 성낙술 박사님 등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이 조언을 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있다.
사실 식물원은 아직도 수난중이다.국민일보에 처음 내 간증이 연재된 날이었다.식물원에서 전화가 왔다.인근 군부대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는데 식물원이 법을 어겼다며 법대로 조치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는 것이었다.
옛날 화전민들이 농사짓던 땅에 연못을 만들고 꽃을 심어놓은 일이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아침고요수목원의 한상경 교수님이 생각났다.한교수님도 화전민이 쓰던 땅에 수목원을 일궜는데 형질변경이라는 이유로 법정을 드나들어야 했다.
우리나라에 외국처럼 식물원이나 공원이 흔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 까다로운 법적용에도 그 이유가 있다.얼마 전 헌정 사상 처음으로 식물원법이 만들어졌다.우리는 정식 허가를 받기 위해 식물원허가를 신청했는데 처벌하겠다는 엄포만 돌아온 것이었다.식물원을 조성하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고,조성해 놓으면 법을 어겼다고 처벌을 받게 된다면 누가 감히 식물원을 만들고 공원을 만들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간증거리를 주시기 위해 이런 시련을 겪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청비환이 처음 나왔을 때 얘기다.전에 얘기했듯이 언론을 통해 청비환이 알려지면서 한의원을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빚을 갚고도 남을 만큼 많은 축복을 받았다.
연말에 소득신고를 하면서 내가 돈을 번 만큼 정직하게 신고를 했다.그랬더니 세무서에서 연락이 왔다.왜 이렇게 갑자기 소득이 늘었냐며 세무조사라도 받을 생각이냐고 따지는 것이었다.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이러면 주변의 다른 병·의원들이 곤란하다는 세무서의 답변은 은근히 소득을 줄여서 신고하라는 말로 들렸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환용 ⑾] 소득신고 잘했다고 ‘성실납세자 상’
그럴 만도 했다.그전까지 빚에 허덕여 세금을 매길 만한 소득도 제대로 없었던 조그만 한의원이 갑자기 적잖은 금액을 벌어들였다고 하니 내가 세무서 직원이라도 의아해했을 것이다.
세무서로선 그전까지 소득을 줄여 신고해 세금을 떼먹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을 것이다.주변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병·의원으로부터 ‘강남에서 평강한의원만 돈을 다 벌어가냐’며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고민스러웠다.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한의원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인데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차라리 소득을 줄여서 신고하면 세금도 덜 내고 주변으로부터 아무런 오해도 받지 않을 텐데.
세무서에서는 이대로라면 국세청에 보고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십중팔구 세무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설명해줬다.세무조사를 받는 게 두렵지는 않았지만 부담스러웠다.행여나 내가 잘못한 게 있지나 않을까 걱정됐고 괜히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유로 소득을 줄여서 신고할 수는 없었다.무엇보다 신앙 양심상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출석하고 있는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께선 늘 성도들에게 작은 예수가 되라고 말씀하신다.제자훈련과 다락방 모임을 통해서도 늘 그런 도전을 받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또 내가 참여하고 있는 실업인선교회의 성경공부 모임을 여러 해 인도하고 계신 김동호 목사님께서는 사업의 중요한 목적이 직원들에게 월급 주고 나라에 세금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세무조사를 각오하고 소득신고 금액을 줄이지 않기로 했다.내 결심을 알리자 세무서에서는 “며칠 있으면 국세청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애타는 마음으로 전화를 기다렸다.과연 얼마 뒤 국세청에서 연락이 왔다.
“평강한의원 원장님이십니까?”
“예,제가 이환용입니다”
“여기는 국세청인데요,원장님 이번에 소득을 많이 신고하셨더군요”
침을 꼴깍 삼키려 해도 침이 나오지 않았다.
“원장님,정직하게 신고해주셔서 고맙습니다.이번에 성실납세자로 선발돼 상을 받게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마음 속으로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왔다.세무조사는커녕 성실납세자로 상을 받게 되다니.하나님의 뜻이 또 한번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나는 국세청에서 상을 받은 것이 자랑스럽다.
충청도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입시에서도 7번이나 떨어졌던 나 같은 사람이 세금을 성실하게 많이 냈다고 국세청장에게 상까지 받다니.
하나님을 알게 된 후 스스로 담대한 마음을 기를 수 있는 용기를 얻었고,교통사고를 통해 한의학을 접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결코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나는 사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밖에서 놀고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내가 사춘기 시절 신경증으로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교회를 찾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줄 알고 그냥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환용 ⑿] 제자훈련 받고 ‘사랑의 진실’ 깨달아
앞에서 얘기했듯이 내 신앙의 기초를 닦아주신 분은 유영모 목사님이셨다.군에 있을 때는 아침마다 라디오를 통해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제대한 뒤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지금 출석하고 있는 곳은 사랑의 교회인데 담임이신 옥한흠 목사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신지 모른다.그래서 교회 이름도 사랑의 교회인가 보다.사랑의 교회에는 제자훈련이라는 평신도 훈련 과정이 있다.여기에 참여해서 받은 은혜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나의 퇴근시간은 밤 10시다.아침에 출근해 점심은 한의원에서 먹고 늦도록 일일이 전화를 받으면서 상담해주다보면 그렇게 시간이 간다.국민일보에서 실리는 글은 퇴근한 뒤 새벽까지 쓰거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 쓴다.나는 컴맹이라서 손으로 일일이 쓰는데 워낙 악필이다.기자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신기하다.
이렇게 바쁜 생활의 연속인데 어느날 옥한흠 목사님께서 한의원까지 직접 찾아오셨다.
“이집사,바쁠수록 영적인 건강이 필요한거야.제자훈련 받아봐”
사실 제자훈련은 나보다 아내가 먼저 받았다.제자훈련은 엄청나게 많은 숙제를 내주는 것으로 악명높다.아내도 밤새워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고 성경말씀을 외울 때는 말도 못 붙이게 했다.그런 아내를 보면서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제자훈련을 받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어른이나 아이나 숙제를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옥목사님께서 제자훈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려 했다.
옥목사님은 “올해부터는 숙제를 많이 줄여서 가만히 앉아있어도 될 정도”라며 “평일에 바쁘면 주일 오후 제자훈련반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숙제가 줄어들었다는 말에 제자훈련을 안받겠다는 결심이 수그러들었다.
우리 제자훈련반은 장관익 목사님이 인도하셨다.편안한 인상에 멋있게 생기셔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그런데 막상 훈련에 들어가니 생각과 달랐다.
제자훈련의 표어가 “훈련중에는 아프지도 말고 죽지도 말자”였다.지각하면 벌금이고 숙제는 아내가 받을 때와 똑같이 많은 것 같았다.이제는 내가 저녁마다 숙제하느라 아내와 대화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상한 것은 그런 고된 과정인데도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생활도 여유있게 변하는 것이었다.숙제를 하면 할수록 기쁨이 넘치고 숙제가 기다려질 정도였다.
제자훈련은 작은 예수가 되자는 훈련이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듯이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우선 아내에게 잘해야 했다.아내에게 편지쓰기,설거지하기,아내 발씻어주기 같은 훈련을 열심히 했다.
나는 원래 아내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가장이었다.내가 한마디하면 아내가 꼼짝 못해야 했고 모든 잘못은 아내 때문이라고 책임을 미루는 스타일이었다.오죽 하면 내가 조금만 기분이 나빠 보여도 아내가 “‘나 때문이야?”하고 먼저 물어올 정도였다.
그런 내가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많이 변했다.설거지를 도와주면서 “우리 아내 최고야.사랑해”하고 말하니 아내가 “당신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라고 반문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매일 기도해주게 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됐다.
[나의 길 나의 신앙―이환용 ⒀] 포천 식물원에 OM선교센터 설립 기도
떨어지는 낙엽은 아름답다
시드는 꽃은 더욱 아름답다
썩는 열매는 가장 아름답다
낙엽이 떨어지므로
나무는 겨울을 살아지낼 수 있고
꽃이 시들므로
수많은 열매가 맺힌다
열매가 땅에 떨어져 썩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므로
나는 떨어지는 낙엽을 좋아한다
나는 시드는 꽃을 더욱 좋아한다
나는 썩는 열매를 가장 좋아한다
제자훈련 당시 내가 쓴 시다.하나님께서 내게 많은 축복을 주셨다고 국민일보 독자들에게 자랑을 했는데 나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마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제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이런 교훈은 식물원을 통해 배운 것이다.
식물원을 세우겠다는 결심은 고향 서산을 떠나온 뒤 늘 내 마음 속에 간직해온 꿈이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식물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30여명의 땅주인과 일일이 만나 계약하는 데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식물원을 조성하기 시작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사무실도 지었다.지금은 1700여종이나 되는 식물을 확보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식물원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도 97년만에 처음이라는 가뭄이 찾아왔다.그런데 그 혹독한 가뭄 속에서도 유독 우리 식물원 부지쪽에만 몇차례 소낙비가 내렸다.다른 곳은 안 내렸는데 식물원쪽에만 내린 것이다.
돌이 필요할 때면 산에서 좋은 돌이 나왔고,자갈이 필요했을 때에는 마침 공사중이던 옆마을에서 무료로 자갈을 구할 수 있었다.모래가 필요했을 때에도 100여t의 모래를 트럭운송비만 주고 구할 수 있었으며,진흙이 필요할 때에는 식물원 땅에서 일반 진흙보다 훨씬 좋은 진흙이 나왔다.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꼭 때에 맞게 주시니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식물원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은 인공적으로 꾸며도 그렇게 되기 어려울 정도로 멋지고 잘생겼다.노루 산토끼 꿩 청솔모 다람쥐 등 동물들까지 자연 그대로 살고 있다.소나무 산벚나무 박달나무 등을 있는 그대로 살리고 전국에서 구한 약초들을 심어 가꾸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약효가 뛰어난 식물들이 많다.발에 밟힐 만큼 흔한 질경이조차도 약초로 쓰일 정도다.나는 우리 나라의 약욕식물들을 식물원에 모두 모아 보존하고 아껴서 우리 약초가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날이 올 수 있도록 기도드리고 있다.
도시의 아스팔트 속에서 삭막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식물원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
식물원 안에 OM선교센터를 세우는 것도 요즘 나의 기도 제목이다.선교사님들은 안식년을 맞아도 쉴 만한 공간이 별로 없다.식물원 안에 선교센터가 세워지면 세계의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 한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이루실 생각을 하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감사할 뿐이다.주님, 밀알처럼 썩게 하소서.
[나의 길 나의 신앙―이환용 (14·끝)] 한의사로 인도하신 주님 은혜에 감사
한의원을 개업한 뒤 텔레비전 출연도 많이 했지만 나는 대학원에 가서 더 공부를 하고 싶었다.침보다는 각종 약초를 연구하는 본초학에 매력을 느꼈다.
사실 그동안 몇군대 대학원에 지원하기도 했는데 대부분 떨어졌다.나는 시험에서 떨어지는데 워낙 익숙한 사람이어서 별로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마침 원주 상지대 석사과정에 지원을 했는데 시험을 친 11명이 모두 붙었다.석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경희대 박사과정에도 들어갔다.
아내는 “제자훈련을 잘 받았다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기뻐하면서도 “박사과정보다 다락방이 더 중요하니 다락방 모임에 빠지지 말고 다닐 각오가 돼 있으면 박사과정을 밟으라”며 엄포를 놓았다.다락방은 사랑의교회 구역모임 명칭이다.
박사과정은 마침 농업진흥청과 연계한 본초학 과정이어서 식물원을 준비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교수님들께서도 이런 사실을 아시고 내게 “나라가 할 일이고 우리가 해야할 일인데 이원장이 혼자 하고 있다”며 “그 결심을 평생 변치 말고 간직하라”고 말씀해주신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면허도 없는 돌팔이 의사 노릇을 하던 재수생이 한의사가 된 것만해도 감사한데 이제 박사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OM선교회와 창조과학회 얘기를 전하고 싶다.
OM선교회는 선교사 훈련과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세계적인 선교기관으로 둘로스호라는 유명한 선교선을 운영하고 있다.옥한흠 목사님을 통해 OM선교회를 소개받았는데 국제총재인 조지 버워 선교사가 지구본을 들고 열성적으로 설교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내가 식물원에 선교센터를 짓고자 마음먹은 것도 OM선교회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지원하고 싶어서다.
식물원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느낀다.창조과학회는 자연 속에 드러난 창조의 역사를 증거하는 토종 기독학술단체다.세계적인 학자들이 학문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나에게 도전을 준다.창조과학회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허락해주신 갖가지 신비한 약초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간증이 나가는 동안 많은 분들께서 연락을 해오셨다.독자들의 전화가 폭주해 한의원으로 통화가 제대로 안될 정도였다.이렇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을줄은 생각도 못했다.일일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게 죄송하다.
사실 처음 국민일보에서 간증을 하자고 제의해 왔을 때 부끄러운게 너무 많아 도저히 못하겠다고 사양을 했었다.그런데 장모님께서 “그건 널 자랑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는거다.하나님을 바라보고 써라.내가 기도해주마”하고 말씀해주셔서 용기를 얻었다.
어려운 환경을 두고 고민만 하고 있으면 해결책이 없지만 기도하면 문가 해결되고 이를 영양분으로 삼아 믿음이 더 성장한다.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시편 말씀 그대로다.
만약 내가 부잣집에 태어났다면 이토록 감사하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가장 나약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밑바닥에 있던 나를 택하시고 훈련시키시고 오늘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문지기로 영원히 남고싶다.
출저:국민일보
첫댓글 동준님도 이환용원장님처럼 훌륭한 한의사가 되겠죠?ㅎ 기대할께요
'ㅅ'!.. 감사합니다
좋은 아침에 감동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싱아님 새벽을 여는자 세상을 열 것이다..!
배울점이 참 많네요^^감동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빅마마님 읽어보시면 좋을것같단 생각을 했는데... 어렸을 적 이환용원장님도 정말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왔거든요.. 감사합니다! 포천에 평강식물원이 있어요 기회가 되시면 방문해보세요 저는 군시절에 외출때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그 날 갈비도 뜯고...ㅋㅋㅋ
와아,,입이 안 다물어져요 . ^^
^0^ <=이렇게요?
너무 멋진 글입니다. 노래까지 잔잔해서 눈물 날려고 그래 ㅜ
ㅜ_ㅜ!
우와 멋진글이예요 꿈은 절대 포기하지말자 ^^
패가소스님 댓글에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감사합니다
하늘은 항상 꿈쟁이들의 편이라는 말이 인상깊네요^,^
라 손리사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 말 가슴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대단하신분이네요 스크랩 하고 싶어요 ㅜㅜ 어쨌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ㅠ 인간승리네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결국 최후에 웃는 사람이 되었네요. 의지가 대단하시고.. 뭔가 고무되는데..어떻게 해야할지 ㅋㅋ
무언가 시작하실 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