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시가 되어 외 4편
이금한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다가
취기가 오르도록 마시다가
추억을 하나씩 꺼내어 물들어 간다
섭섭함과 원망어린 목소리가 눅눅해지다가
기쁘던 일 하나 별처럼 떠올라 환한 밤,
사랑은 언제나 어둡고 고요한 기억 속에 있었으니
시할머니 모시던 어린 며느리의 때늦은 한숨이
식탁을 맴돌다 가슴을 치고 나온다
그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리워지는 영원이므로
엊그제 쓴 할머니의 일상이 걸어 나와
우리들 귓가를 울리며 시를 낭독하는 것이다
낮은 목소리는 굽은 어깨에 업히고
잔잔한 침묵은 눈가에 맺혀 파도를 일렁인다
제대로 잡힌 무표정들이 목청을 메이면
끝내 정갈함은 궤도를 벗어나 버린다
그리움은 달팽이관을 비틀거리고
도드라진 울대는 마른 침을 삼키고 있다
침묵이 멈추는 시간
누구도 파고들지 못하는 빈 공간으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리를 잡는다
우리의 젊은 시간을 두고 먼 훗날에 기억되어
돌아가야 하는 표정으로 놓아버린 시간
미소가 가득 농밀해진다
그리움에 취하여 시가 되는 밤
도라지, 그 보라색 기억
비 개인 날 오후
한가한 길가 식당 입구에
절망의 꽃이 피었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순간의 빛은
물결치는 도라지 꽃이었다
사랑을 여의고 고향 발치에서
서성이는 누이와 그의 딸
긴 그림자는 보랏빛이었다
세월은 흘러갔어도
꽃들은 어디에서나 늘 피어나고
그 자리에서 영글고 있었다
뒷산에 가득 피어나던 도라지꽃이
도시의 어느 길가에서 피어난 것은
누구를 또 여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조바심인 것이다
도라지꽃 꽃망울이 터지는 순간
하늘은 온통 보랏빛이다
주위를 맴도는 그 절망의 세상에서
외로움이 씻기우고 있다
흐린 하늘 끝에서 도라지꽃이
또는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소멸은 아름다워
떠나간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한다
잊혀져가므로 아름다워지는 것이니
기억이 박제되기 전에 소멸되어야한다
빛으로 존재하고 밝아지는 것은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다시 사라질 것이니
모든 것이 떠나가 투명한 세상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은 암흑에서 빛으로 만날 것이니
사랑하였다면 침묵하라
바뀌어 가는 마음의 색을 대비하여
의미를 잃은 시간들은 잊어야한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니
남아있는 마지막 기억의 순간들
소멸함으로 순백으로
할머니의 계절
찬바람이 어깨를 감싸는 가을날
기억이 먼저 길을 내어 냉면집으로 간다
이층 창가에 면발처럼 햇살이 뭉쳐있는
할머니의 미소가 환하다
가을 늦게 세상에 오셨다가
가을 이르게 세상을 떠나가신 분
지난봄에는 된장찌개로 오시더니
올여름에는 장떡으로 오셨다가
냉면 면발로 다시 오신 계절은 가을이다
오이와 무김치 가지런히 올라간 냉면이거나
국수 삶아낸 그릇에 고추장 휘휘 풀어
잇몸이 입을 다 가리며 시원하다 크게 웃으시던
환한 대낮, 뜨거운 햇살에
냉면이 쏟아져 나오면
할머니의 계절은 순식간에 건조해진다
시원한 햇살 가락이 목에 메어
개성집 이층 계단은 그림자가 들고
창틀의 순간은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한다
잊혀진 묘역에서
잊혀짐은 결국 배려였다
미움이건 이별이건 증오나 배척까지도
사라지기 전에는 한자리에 머무른다
평택 내리 저수지의 수위가 높아지는 유월을 지나
뜨거운 햇살이 그대로 언덕에 남아있는
그 근원을 따라 묘역을 조성하였던 것은
하나의 능선으로 남으려 하였음일까
홍살문으로 보이는 벌판에는 산단 개발이 한창이다
기억은 언제나 본질을 두고 돌아서 온다
새로이 길을 내고 지형을 바꿔 개벽하는 것은
지나간 흔적을 하나라도 찾으려는 의지는 아닐까
기억의 오류 하나쯤 파내어 역설하려 함이다
언덕을 따라 작은 마을이 터를 지키며
온전한 이름을 기억하는 건 위안이었다
세월은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너는 언제나 무의미했고
지나갔다
기억의 순간에는 아득히
사라졌다
사랑과 추앙은 눈을 감으면
잊혀진 이름이다
역사의 한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이끼 낀 댓돌을 닦고 또 닦는다
하나의 생이 온전하게 살아나는 동안
들꽃을 흔드는 바람도 잠시 멈췄다가
불어가는 것이다
너의 이름을 기억하느라
사라지는 시간들
이금한ㅣ 2004년 《시사문단》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과 『관덕정 일기』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