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묵 시인>>
<<임경묵 시인의 양력>>
* 1970년 경기 안양 출생, 천안에서 성장.
*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집 : 『체 게바라 치킨 집』,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 수주문학상 수상, 대산창작기금을 수혜.
<<임경묵 시인의 시>>
얼음 소녀*/임경묵
잉카의 조상이 그늘처럼 떠다니는 설산(雪山)에서 나는 날마다 조금씩 야위기로 했어요 더는 붙들 곳이 없다며 가슴을 더듬던 추위가 초경의 연한 꽃망울까지 얼어붙게 했죠 봉인된 돌무더기 안에서 오도독오도독 고드름 깨물며 숨바꼭질을 할래요 달빛에 얼어붙은 어둠은 언제나 나를 숨겨 주죠 콘도르 깃털 뼈로 만든 피리 소리가 들리나요 눈먼 바람이 배냇짓 하는 꽃씨를 업고 산정(山頂)에 오를 시간이에요 쉿, 큰 구름이 조막 구름을 뼈째 삼키고 은빛 눈꽃을 토하고 있어요 이곳에선 눈 내리고 그치는 일이 부질없다며 광대뼈를 드러내고 울음을 쏟아내는 눈사태 氏, 얼음 창문에 달라붙은 서리꽃 좀 치워줄래요 어깨를 늘어뜨린 어색한 포즈로 미끈하고 아릿한 맛의 꽃씨를 찾아야 겠어요 눈덩이 하나에 꽃씨 한 톨씩 꼭꼭 눌러 심고 저 팽팽한 빙하로 힘껏 던지면 만년설의 발성법을 익힌 빙하가 어쩔 줄 몰라 쿨룩대겠죠 박물관 한편에 서서 나를 읽고 있는 당신은 혹시 내가 던진 빛나는 꽃씨 중 하나인가요? 올해도 팜파스엔 옥수수가 풍년인가요?
* 아르헨티나 북서부 칠레 국경 지대 해발 6,700m 지역에서 발견된 소녀 미라.
해금(奚琴)을 읽다/임경묵
거추장스럽구나 발모가지 위의 것들
댕강 자르고
뿌랭이만 남은 오반죽(烏斑竹)
꽝꽝한 적막을 구부려
슬근슬근 목울대 당기는가
뿌연 어둠을 켜자
뜨거운 꽃잎이 허공에 흩날리네
숲에서 다람쥐눈물버섯을 찾다가
길 잃은 고라니 한 마리
고부라진 외길에 서서
헛헛한 종아리로 달빛을 헤집네
고라니 꼬랑지는 자꾸 안개를 뿌리쳐
산벚은 허리춤에서 꽃잎을 놓아주었네
외길은 길어지다가 한껏 멀어지고
봉분처럼 어두운 달의 뒤편엔
고불고불 아흔아홉 길도 들어 있다고
대숲에 기댄 늙은 안개가
마을로 내려가는 외길을 다독이는 밤
허공을 베어 먹은 활의 허리엔
지금쯤 설화가 무르익었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해시(海市)*/임경묵
폐사지 입구
천년 느티나무 아래 누워
수천수만 가지 사이로 산란하는 하늘을 본다
그 속에 장날 오후 시장 골목이 부레처럼 떠 있고
망국의 부족 같은 장발의 폭주족이
비밀스럽게 들락거리는
오토바이 불법 개조 수리점이 얼핏 보이고
부모도 저버리고
아내와 자식도 팽개치고
술에 취해
천지간을 건달바처럼 떠돌다가
어디 한뎃잠을 자다 죽었다는
서른여섯 막냇삼촌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 골목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오고 있다
천년 느티나무,
하늘과 맞닿아 숨기 좋은 곳
하늘과 맞닿아
머언 바다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가기 좋은 곳
저 나무 속에
막냇삼촌이 세운 망명정부가 있었구나
바람 불자
미로처럼 뻗은 가지마다
하늘 향해 일제히 부릉부릉 시동을 켜는
수천수만의 푸른 이파리들.
*신기루
그 섬/임경묵
오리는 개들의 습격을 받아
목이 부러진 채 버드나무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함께 어울리던 수탉과 암탉 뜸부기
어둠 속에서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던 족제비조차
오리가 살던 버드나무를 맴돌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폭풍에 떠밀려
그 섬으로 날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오리는
그 섬의 유일한 오리였다
주민들은
누군가에게 그 섬의 길을 알려줄 때
오리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가라
오리가 사는 버드나무 아래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졌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가 그 섬의 유일한 오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섬에 하나뿐인 오리가 죽었으므로
그 섬은,
모가지 잔뜩 움츠리고
스스로 한 마리 오리가 되기로 했다
세계의 모든 바다에는
그 섬이 있고
오리가 있고
오리가 사는 버드나무가 있고
수탉과 암탉과 뜸부기와 족제비가 있고
개들이 있다.
* BBC News(2019.1.28.)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오리……’ 기사 변주.
꽃피는 스티로폼/임경묵
봄바람은 불고
벚꽃은 흩날리고
스티로폼 조각은 골목을 굴러간다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스티로폼 조각을 툭 치고
골목 속으로 사라진다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한 귀퉁이가
골목을 굴러간다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조각도
핑그르르 돌다가
다시 골목을 굴러간다
피자 배달을 마치고 골목을 나오던 오토바이가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스티로폼 조각을
정면으로 밟고 지나간다
스티로폼이 파삭 부서진다
그 속에서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이 무수히 태어난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오토바이 뒤를
좋다고 따라가는
흰 알갱이들……
봄바람은 불고
벚꽃은 흩날리고
스티로폼 흰 알갱이들이
일제히 과속방지턱을 뛰어넘어
골목 밖으로 굴러간다.
검은 앵무새/임경묵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노랑뺨초록앵무, 붉은귀앵무, 풀빛허리앵무, 푸른부채꼬리앵무, 검은부리오색앵무,
레인보우앵무, 잿빛목도리앵무, 청머리붉은날개앵무, 긴꼬리파랑가슴앵무도 있습니
다만…….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검은 앵무새의 섬에 가려면 발로 노 젓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바다 날씨라는 게 워
낙 종잡을 수가 없어서요. 무엇보다 꼼꼼히 바다를 저을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발로 노 젓는 사람을 만나려면 손으로 노 젓는 사람 배를 타야 합니다. 발로 노 젓는 사
람은 적도의 상어에게 두 팔을 주고부터 검은 앵무새가 그의 어깨에 앉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구요.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발로 노 젓는 사람과 손으로 노 젓는 사람은 은폐술이 뛰어나 평소에는 보일 듯 보이지
않죠. 손으로 노 젓는 사람만이 발로 노 젓는 사람을 부를 수 있습니다.
당신은 검은 앵무새입니까?
* 인도양 세이셸 군도의 프랄린(praslin island)에 검은 앵무새의 서식지가 있다.
푸드 트럭/임경묵
사내는 꽤 점잖은 편이다
매직펜으로 반듯하게 쓴 〈토스트+우유=2500원〉 피켓을 들고
트럭 옆에서
지나는 차들을 향해 공손하게 서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자가
트럭 안에서 식빵을 굽는다
외곽에 딸린 변전소 앞길은
공단 가는 지름길,
키다리 송전탑들이 고압적인 자세로
이곳을 지나는 차들과
전봇대에 대충 기댄 푸드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다
빗방을이 굵어졌다
사내는 왼손엔 피켓을
오른손엔 우산을 들고
식빵을 굽는 여자 옆에서 다시 마네킹처럼 서 있다
팬에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을 뒤집으며
여자는 가끔
목을 길게 빼고 도로를 내다본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밀린 주문은 없다.
고등어구이/임경묵
반으로 갈라 소금에 절여놓은 고등어를
팬에 굽는다
데칼코마니 같다
고등어 등에서 푸른 바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와
팬에 지글거린다
기름을 두르지 않았는데도
알맞게 소란하다
혼자 먹어도 좋고
함께 먹어도 좋은,
젊은 날의 어머니는
대설주의보가 내린 그해 겨울 아침에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오늘처럼 고등어를 굽고 있었어요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그때 왜 어머니는
푸른 고등어가 새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얼굴을 파묻고
울기만 했어요
새봄이 오기 전에 우린 또 어딘가로 이사를 해야 했단다
비릿한 탄내가 어머니의 부엌에 가득하다
가족이라는 그물에 걸려
일생을 퍼덕거리다가
비밀스러운 샘물이 다 말라버리고
푸른 등이
새까맣게 타버린 어머니를
젓가락으로 가르고, 뒤집고, 가시를 발라
그중 노릇노릇 구워진
슬픔 한 점
꺼내 먹는다
혼자 먹어도 좋고
함께 먹어도 좋은.
우두커니/임경묵
누이가 문밖에 우두커니 서 있다
뭐가 아쉬운지
어둠이 누이 몸을 칭칭 감고 있다
하늘나라에서도
누이는
새처럼 가벼워지지 못한 걸까
날개가 없다
낡은 소파 위에
태아처럼 웅크린 채 죽은 누이의 마지막을 생각하다가
울컥,
슬픔이 나를 통과했네
문밖에 서서
문안의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누이야
악착같이 달려들던 우울, 자꾸 미끄러지기만 했던 외길, 깊은 수렁 같았던 외로움 따위는 이젠 잊어야 해
누이가 눈사람처럼 녹고 있다
머리부터 천천히……
내일은
어린 조카 손을 잡고
외딴 숲 누이의 무덤에 꽃을 주러 가야겠네
누이는
누구보다 젊고 예뻐서.
개그맨 1/임경묵
119 구급대가 옥탑방에 도착했을 때 개그맨의 웃음은 경직이 진행되고 있었다. 침대에서 발견된 낡은 수첩에는 그가 심장에 장착하려던 웃음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웃음, 저자극성 웃음, 첫출발이 불안한 웃음, 초대받지 못한 웃음, 앞니 두 개가 쏙 빠진 웃음, 귀가 얇은 웃음, 속눈썹이 긴 웃음, 위급할 때 짠 하고 나타나는 웃음,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독재자의 웃음, 인체공학적인 웃음, 무중력 웃음, 가장자리가 어슴푸레한 웃음, 벼룩의 낯짝 같은 웃음, 쥐꼬리만 한 웃음,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웃음,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웃음, 딱 한번 웃기고 폭삭 늙어 버린 웃음, 격자무늬 패턴을 가진 웃음, 중요할 때 꼭 딸꾹질해 대는 웃음, 볼빨간 사춘기 웃음, 유통기한이 지난 웃음, 살균 효과가 있는 웃음, 비밀리에 웃음 치료를 받은 적 있는 웃음, 슬픔과 기쁨의 이종교배로 태어난 웃음…….
저녁의 태도/임경묵
섬섬한 애인 무릎에 저녁이 앉아 있다
한번 만져 봐도 돼?
눈 감고 가만히 저녁을 만져 본다
새벽이 올 때까지
애인 무릎에 앉아 있겠다는 저녁의 태도는
언제나 옳다
어둠은 수위를 높이고
골목으로,
골목으로 흘러가고
숲으로 돌아가던 새들은
투명한 방음벽에 부딪혀
저녁의 이마를 빗빛으로 물들이네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무릎부터 만지는 애는 네가 처음이야, 나를 정말 사랑하기는 하는 거니?
바람이 분다
이팝나무 가로수가 탬버린처럼 흔들린다
골목마다 사용할
하루치 어둠을 나눠 주고
피곤한 듯
애인의 무릎에 저녁이 앉아 있다.
도리뱅뱅/임경묵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 만나러
주말마다 천안 내려갈 때
아산만 방조제 지나 늘 만나던 버들집
도리뱅뱅을 잘한다는 그 집
어탕국수가 제법 맛있다는 그 집
아버지 퇴원하면 단둘이 한번 와보려고 꾹 참고 지나쳤던 그 집을
아버지 삼우제 지내고 들렀습니다
혼자 도리뱅뱅을 주문하고
혼자 도리뱅뱅을 먹었습니다
죽음의 주모자를 찾을 수 없게
입 꼭 다물고
사발통문처럼 누워있는 빙어들……
한 마리 한 마리 또옥 또옥 떼어먹었습니다
아버지 퇴원하면
어스름 저녁 어깨동무하고 비밀스럽게 오려고 했던 버드나무 아래 그 집에서
젊은 날 아버지처럼
맥주잔에 소주 반 병 따라 놓고
혼자만,
혼자만,
혼자만 도리뱅뱅을 먹었습니다
뜨거운 팬을 뱅글뱅글 돌려가며 먹었습니다.
제비꽃과 내 그림자/임경묵
달빛이나 쫴 주려고 데리고 나온 내 그림자가
우체통 옆 제비꽃에 귓속말을 건넵니다
제비꽃은
사는 곳이 열 군데도 넘는다지
그린빌라 101동 화단에, 천냥 국숫집 문 앞에, 낙원교회 담벼락에, 주인아줌마가 폭 쏟아버린
화분 흙 속에, 등산로 입구 풀벌레 울음소리 옆에, 그리고 내 옥탑방 오르는 첫 계단……
그중 대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고
나와 내 그림자처럼 달빛을 쬐는 제비꽃은
이제 셋이나 넷
직업소개소와 편의점이 마주 보는 골목 입구
언제나 가르랑대며
나를 마중하던 가로등 아래 서면
나도, 내 그림자도
문득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는데
제비꽃 그림자는
우체통에 기대앉아
제비꽃 피울 생각만 하는군요
한 번도 내 생활을 간섭한 적 없는 내 그림자가
오늘은 내가 끄적이다 구겨버린
입사지원서를 가져와
제비꽃에 건넵니다
제비꽃은 그걸 제비꽃 그림자에 건네고, 제비꽃 그림자는 우체통 그림자에, 우체통은
그림자는 그걸 우체통에 건네고요
이런 그림자놀이를 상상하며 자꾸 걷다 보면 나와 말라깽이 내 그림자가 세계의 제비
꽃을 다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지구는 둥그니까요
무연고 그림자의 은신처인 이 골목에서
제비꽃과 제비꽃 그림자
우체통과 우체통 그림자
가로등과 가로등 그림자
나와 내 그림자 위에 달빛 한 줌 흩뿌리면
제비꽃 설탕 절임처럼 달콤한 토요일 밤이 될 것 같아
보랏빛 제비꽃을 피우지 않아도
오늘만은
제비꽃을
제비꽃이라 불러봅니다
그런데,
제비꽃이 가져간 수취인 불명 내 입사지원서는
언제쯤 나에게 반송될까요?
우산 수리 전문가/임경묵
등굣길에 비가 온다는
우산 수리 전문가의 예언이 적중했다
그가 우산을 건네자
끝말잇기를 하듯 빗방울이 떨어진다
엊그제 비를 맞으며 나와 함께 등굣길을 나섰던 우산 한 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나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거하고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우산의 팔구십 퍼센트가 나를 위해 쓰였다
한 번은 다저녁에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퍼부었는데
당황한 우산 수리 전문가가
빗속을 뚫고
학교까지 나를 찾아와 불쑥 우산을 건넸다
비 맞고 다니지 말아라
돌이켜보니,
배후에 우산 수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우울한 세계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우산 수리 전문가가 툇마루에 앉아
구름의 방향과 색깔을 살피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새로 수리할 우산을 펼쳐 빙글빙글 돌린다
작년보다 잔고장이 더 많아진 그가 우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올 확률은
팔구십 퍼센트.
페르시안/임경묵
페르시안,
팬지꽃 같은 얼굴로
피아노 위 지구본을 바라본다
취침 등 아래
유리질 눈동자가 푸르게 점안(點眼) 된다
아리아인의 땅 페르시아가
금빛 노을을 흘린다
사막이 한 뼘이나 넓어졌는데
사막여우는 다 어디로 갔지
모래 언덕에 묻어 둔 별똥별의 주검 따위는 이제 잊기로 했나
검은 차도르의 순례자와
보랏빛 엉겅퀴가
보이지 않는군
어깨를 한껏 낮추고 살금살금 다가가
앞발로 지구본을 툭 친다
쇠락한 지구가
비로소 자전한다
말라붙은 카스피해에 흰 수염이 스친다
피 얼룩과 실밥이 엉겨 붙은 거세된 수컷을 핥으며
갸릉갸릉 목울대를 울리는
페르시안,
헬륨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나의 지구에
하 번 더
키스를 부탁해
내가 질끈 눈을 감아줄게.
* 고양이의 한 품종.
우산 수리 전문가/임경묵
등굣길에 비가 온다는
우산 수리 전문가의 예언이 적중했다
그가 우산을 건네자
끝말잇기를 하듯 빗방울이 떨어진다
엊그제 비를 맞으며 나와 함께 등굣길을 나섰던 우산 한 개가
아 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거하고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우산의 팔구십 퍼센트가 나를 위해 쓰였다
한 번은 다 저녁에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퍼부었는데
당황한 우산 수리 전문가가
빗속을 뚫고
학교까지 나를 찾아와 불쑥 우산을 건넸다
비 맞고 다니지 말아라
돌이켜보니,
배후에 우산 수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우울한 세계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우산 수리 전문가가 툇마루에 앉아
구름의 방향과 색깔을 살피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새로 수리할 우산을 펼쳐 빙글빙글 돌린다
작년보다 잔 고장이 더 많아진 그가 우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올 확률은
팔구십 퍼센트.
하모니카를 불어 주세요/임경묵
아버지가 툇마루에 한갓지게 앉아
하모니카를 붑니다
입술이 하모니카에 잘 미끄러지게 침을 쭈욱 바르면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두 손으로 하모니카를 포옥 감싸고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풍잣 풍잣
리듬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풍자자 풍잣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풍잣 풍잣
아버지 태어난 곳은 연기군 남면 양화리 66번지
행정수도가 들어선다고
집도, 집터도, 뒷간도, 뒷간 옆 돼지우리도,
뒤란도, 뒤란의 정구지밭도, 장독대도,
장독대 옆 고욤나무도 다 사라지고
주소만 홀로 남아
세종시 연기면 세종리 66번지
옛적 강경의 새우젓 배가
부여에서 백마강과 반갑게 손잡고
공주, 연기로 거슬러오다가
장남 평야 끄트머리
앵청이나루와 만나던 곳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풍자자 풍잣
아버지, 보청기 하러 내일 대전에 갈 거예요
오늘은 일찍 주무셔
마루 모서리에 하모니카를 탁탁 털어 구멍에 고인 침을 빼고
가래 한 번 칵 뱉고
다시 하모니카를 부시는 아버지
풍잣풍잣
밤깊은-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곳없는-나도 섰--다
풍자자 풍잣
비 와요, 주무셔요
족제비 영혼 꺼내기/임경묵
청명(淸明) 지난 무논에 안개가 짙어진다
안개는 무논을 박차고
홰를 치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기센데
죽은 족제비 한 마리가
무논을 천천히 부풀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랜 육식의 습관을 버리겠다는
일종의 침례
족제비는 건너편 숲에서 나고 자라서
몸뚱어리가 무논을 빠져나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뾰족한 주둥이를 처박은 채
첫물과 끝물이 만나는
점액질의 물꼬를 천천히 벌리고 있다
궁지에 몰린 그의 영혼은
이제 무논을 가볍게 빠져나와
어두운 회랑같은 긴 도랑을 가로질러
물 첨벙 달아나도 좋으리라
어엿하게 자란 영혼은
다시 물안개나 천둥의 질료가 될 테지만
죽은 족제비는 꼬리를 물속에 완전히 담그고
무논을 떠돌며
초식의 시간을 가질 모양이다
무논은 이제부터 물꼬를 최대한 오므리고
죽은 족제비를 꼬리부터 조금씩 녹여 먹을 모양이다
곡우(穀雨) 무렵까지
육식의 습관을 지닐 모양이다
질경이의 꿈/임경묵
질경이도 꽃을 피우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정상에서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심지어 개불알꽃까지 질세라 덜렁덜렁
망태를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아웅대며 서둘 필요는 없거든요
밟힐 때마다 새파랗게 살아남아
가끔 뿌리까지 헹궈주는 바람을 끼고
소백산 허리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저를 보신 적이 있잖아요
실직한 당신의 낡은 등산화 밑에서도
이렇게 구겨진 날을 밀어 올리잖아요
혹시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후회되세요
흔적도 없이 지워드릴 수도 있거든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팍팍하고 힘들면
부담없이 제 발목쟁이를 또옥 따서
풀싸움이나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세요
길 잃어 막막한 당신이 뿌리 채 뽑아서
하늘 높이 제기차기를 해도 그만이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가진 그늘은
씨방처럼 부푼 땀방울들을 말리기엔
너무 키가 작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발목쟁이를 드린다는 거예요
대신에 당신의 캄캄한 어깨를 껴안고
하산하던 씨앗 한 톨이
고개 묻고 돌아가는 당신의 뒤안길 혹은
보도블록 틈에 질긴 뿌리를 부리고 서서
언젠가 당신의 지친 발목쟁이에
입 맞출 수 있다면
저는 밟혀도 정말이지 괜찮거든요
이젠 당신도 다시 한 번
울먹이는 희망을 돌볼 시간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