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불교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이 산중불교(山中佛敎)라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산 속에 숨어서 사람들을 멀리하는 불교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유수한 사찰들이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현상의 설명적 표현이다.(그러나 황룡사나 불국사는 절 이 아니라 제정 일치 시대에 현저하게 대중의 신앙 생활과는 유리된, 그리고 국가권력의 철통같은 비호속에서 이루어진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특수권력조직이며 오늘날의 제도로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청와대이며 중앙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왜 합천 가야산 촌구석에 그다지도 거대한 해인사가 있으며 왜 승주군 조계산 허리에 그다지도 거대한 송광사가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규모의 장대함과 거기에 들어간 인간 예술품의 에너지가 후대 조선왕조이 한양 한복판안의 궁궐의 규모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영락교회나 순복음교회가 산속에 들어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것이다. 고대 사찰규모의 장대함에 있어서 가장 반동적인 사실은 당대 그 사찰이 성립하고 있었던 場인, 민중의 삶의 현실이다. 당시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다. 주변은 모두 황량한 들판의 논밭뿐이며 그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나무 마루도 없이 땅을 파고 짚이엉을 얹은 매우 소략한 토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은 그 엄청난 건축물들을 보면서 그 건축물을 짓게 한 지배자의 어마어마한 권세와 그 영력에 벌벌 떨 뿐이었고 당대의 왕이 사는 건물이 사찰에 비하면 매우 소박할 정도였으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 과연 {원래 사찰은 중생의 교화를 사명으로 하고 있음으로 번창한 도시보다는 가까운 아름다운 자연속에 자리잡는다.} 라는 말로 받아 들여야하는 것이 옳을까?) 어찌되었건, 우리의 경우 대찰(大刹) 뿐만 아니라 군소 암자까지 산 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조선조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자연히 사찰이 산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 건국 초기의 불교
고려 시대에 전성의 극에 달하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 졌다. 건국 초부터 유교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계획적인 불교 정비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결코 사상적인 극복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유학 자체를 진흥하려는 적극적인 사상운동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인 경제적 세력을 몰수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자들의 열의에 찬 숭유정책( 崇儒政策 )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는 좀처럼 청산되지를 않아 때로 유교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고려말기에 있어서의 유교의 진흥운동은 불교 배척을 계기로 그 척불 운동이 정치적 또는 행정적인 방면의 주장에 의해서 힘을 얻었던 것이며 결코 순전한 학문적인 이론 투쟁과 같은 정신 운동의 소산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유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불교를 완전히 물리치고 사상과 행정의 여러면에 완전히 독점적인 지위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불교의 폐해가 지적되고 의론이 있을 적에는 민심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한도내에서 척불정책을 채용하려 했으나 그의 개인 생활이나 종교적 신앙 면에선 오직 한 사람의 불교도로서 일관했다.
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모시는등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태조때 부터 도첩제(도첩은 국가가 승려에게 그 신분을 인정해 주는 증명서인 동신에 군역의 면제증이기도 했다.)를 강화하여 실시하였다.
이렇듯 태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불교의 부패청산에 손을 대었지만 일부 유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불교의 근절이라는 것은 그로서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였다. 그것도 그런것이 삼국시대로부터의 불교는 국가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복되게 하여 주는 신앙으로서 여전히 대중에 대한 교화력을 유지하여 가고 있었고 특히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시된 수륙회(水陸會)(물이나 땅위에 음식을 던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회)만 보더라도 그의 유연성을 알 수 있다.
2. 억불정책 (1) - 태종과 세종
태종이 왕에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태종은 태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국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방침을 시종 견지하여 정책상으로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역(役)의 부담자인 민정(民丁)의 확보와 공천(公賤)의 보충이라는 인적 물적 국가 재원(財源)의 재확보를 위해 도징(道澄)과 설연(雪然)의 비행(사노간음사건)을 기회로 불교사원의 정리에 손을 대었다. 이리하여 사원의 재산을 동결시키고 사전(寺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남겨둘 공인사찰(公認寺刹)로 242사(寺)를 정하였고 여기에 상주(常住) 할 승려의 정원수도 책정하여 그 정원수에 따라 전지(田地)와 노비가 책정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지배층에서는 오히려 조세원을 확대할 수 있었고 환속당한 승려들과 사원의 노비들은 양인이 되어 부역과 조세의 부담을 져,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결국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이 남게 되었고 왕사. 국사 제도도 폐지 되었으며 능사(稜師)의 제도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종전의 11개의 불교 종단을 7개로 축소시킨 것은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억불보다 더한 훼불(毁佛)정책이 강행되었다. 태종 때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되었던 것이 세종 때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 하여 태종 때의 242寺 법정 사찰에서 36寺로 축소되어 선. 교 양종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수도의 경영을 위해 한때는 승려들을 노동에 참여하게 하여 노동력을 이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승려의 파계를 이유로 도성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 때 세종의 친형이 효령대군이 불교를 숭신하여 천태종 승려 행평(行平)에게 사사, 제자가 되어 노승의 사실(師室)에 귀의하고 승려들이 하는 모금운동에 참여하여 탑등의 사찰건립이나 중수에 사용할 기부금을 모았다. 세종이 이를 묵과해 준 까닭은 왕실에서 불교 신앙에 젖은 대비(大妃)를 비롯한 여성뿐만 아니라 궁녀들이 삭발하고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인 불교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집안의 복을 위해 재를 올리고,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 때에는 승려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민중들사이에서는 초파일 연등행사가 나라의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년 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감화 받은 세종은 점차 숭불의 왕으로 변신해 갔다.
말년에는 세종도 불교를 신봉하게 되어 석가불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하였고 우리글자 훈민정음으로 불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3. 세조의 불교 장려정책
조선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독실한 신자로 자처하며 불교를 중흥시켰다.
세조가 호법 사업을 편 이유는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는데 첫째,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일수도 있고 둘째, 그의 집권과정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야당격이었던 불교를 수용하는 측면 셋째, 정변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불교의 보호와 장려로서 수습하고자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불교 신자였던 세조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법화경, 선종영가집, 금강경, 반야심경등의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이 김수온(金守溫)과 승려들의 후원으로 귀중한 불교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세조는 금강반야경을 직접 썼으며 대규모의 왕실 원찰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세종때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재허용하는 등 많은 호법사업을 했다.
4. 억불정책 (2)
성종은 세조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훈구파(勳舊派)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교정치를 지향하고 사림파를 대거 등용 하였다. 성종의 즉위로 억불정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도첩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하는 것은 - 군역제도의 문란으로 국역을 기피하려는 수단으로 승(僧)이 된 양민이 많았다. - 민정(民丁)의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의 중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유신(儒臣)들은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도첩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불교 자체도 뿌리 뽑아 없애려는 급진적인 억불책을 서둘렀고 급기야 성종 23년에 도첩제 자체를 폐지(승려가 되려는 자의 길을 국가가 공적으로 말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시킨다.
성종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출가를 완전히 금했고 승려들을 환속시켜 절이 텅텅비는 사태가 곳곳에서 도출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마저도 극도로 위축되어 그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은 점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억불정책을 폈다. 그는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했으며 승과(僧科)도 폐지하였고, 선. 교 양종의 본사도 폐지 시켰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불교의 부패상에 대한 의식적인 조치보다는 단순히 성종의 불교 배척정책을 계승했던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다달았다. 그는 지난날의 사화(士禍)로 거세되었던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여 그들에 의한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불교는 더욱 억압 받게 되었다. 그는 승과를 합법적으로 폐지 시켜 선.교 양종의 종단 자체까지 그 존재가 무의미 해졌고 마침내 선명치 않은 無종파의 혼합적 현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히도 절과 승려는 계속 늘어났는데 - 봉건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등이 절(寺)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불교 억압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과 착취당한 민중들이 이해관계를 같이 하여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불교의 적극적인 반항이었다. 이에 대해 지배층에서는 유교의 이른바 [미풍양속]을 퍼뜨리고 [미신]을 타파하려는 명분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 지배이념을 지방까지 퍼뜨려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불교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민중의 불교적 공동체 생활조직인 향도(香徒)나 계를 말살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지배층의 억불책에 의해 끝내는 거의 말살되고 말았다.
5. 문정대비(文定大妃)의 불교부흥
인종의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한 탓으로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문정대비가 섭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부흥의 기운이 감돌았다. 대비는 지나친 억불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불법적인 불교의 반항이 커짐을 알고 불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약간 부흥시켜 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불정책을 바꾸어서 6년(1551년)에는 중흥불사의 대임을 보우에게 맡기고 보우의 진언에 따라 양종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고, 도첩을 주어 봉은사를 선종으로, 봉선사를 교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과를 통해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등의 후대의 뛰어난 불교 지도자를 발굴했다.
명종때 활약한 보우(普雨)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과 아울러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을 주장했다. 유교와 불교는 국가 사회에 나타난 면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이치의 근본을 따지자면 서로 일치하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다같이 인간의 본심과 본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禪은 行의 철학이며 華嚴은 理의 철학이라고 하면서 선과 화엄의 융합을 꾀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친히 정사에 임하고, 보우를 탄핵하는 여론을 받아들여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그후 보우는 창살당하여 목숨을 잃었고, 그 다음 해에 양종의 승과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연산군 이전의 제도를 부활시켜 왕이 승하한 15년간은 조선불교의 중흥기라 할 수 있으며 보우의 업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6. 청허휴정(淸虛休靜)과 당시의 구국흥법(救國興法)
산간총림에 축소된 불교는 그 속에서 수도와 전법에 힘쓰면서 자활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문정대비의 승하 후 배불정책은 날로 심해 갔다.
그러던 중 조선 후기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계기로 의승군들이 왜적과의 싸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자, 선조는 조직적 역량이 있는 승려들을 전투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휴정과 유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휴정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33세에 승과에 급제했었고 임진왜란때 나라의 부름에 부응하여 73세의 노승으로 승군 오천여명을 이끌고 유정과 함께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실천으로 보여준 현실 참여 의식과 민중 구제의 사상은 [청허집]과 [선가귀감]등의 저술로 나타났고 억불로 쇠퇴의 극에 달하던 불교를 중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은 휴정과 마찬가지로 명종 때의 승과출신으로, 휴정을 도와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는 전란 후에도 민생문제와 국력회복에 관한 방침을 건의하였고, 사명집(四溟集)등의 저술을 남겼다.
휴정이나 유정은 당시 선종의 대표자의 지도자였다. 그들 둘다 승과에 합격하여 명리를 누릴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참선 수도의 길을 걸었다. 이는 이전의 선사들과 다르게 형식주의적, 계율주의의 속박과 지배이념과 신분을 뛰어넘어 자유인의 경지로서 사회참여와 실천에 앞장 선 것이라 할 수 있다.
7. 조선 말기의 불교
청허휴정과 유정 이후 중흥된 교단은 조계임제(曹溪臨濟)계통의 선종이었다. 그렇다고 선수(禪修)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교학연구에도 힘써 화엄대가(華嚴大家)가 많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조선불교에서 원효이래로 그를 뛰어 넘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의 불교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어수선한 정세와 맞물려 민중의 편에 서서 왕실에 저항하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있는 한가지 형태와,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배층의 불교 배척에도 불구하고 상류지향적 문화를 추구하면서 지배층에 아부하는 자들이 그것이다. 후자는 나중에 참선과 염불을 구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절의 사무와 제반 역입에 종사하는 사판승(事判僧)으로 나뉘어 교단의 명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억불 정책은 국가적 귀족적 불교를 소멸시키고 대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미륵 신앙이 민중과 밀착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末法 시대의 고통을 구제할 당대 불교로서의 미륵 하생을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깊숙히 침투하였다. 이러한 미륵 신앙은 조선의 임꺽정의 난,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홍경래의 난등의 민중 세력과 불교세력의 형태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줄곧 승려들이 입성금지의 법령에 묶여 있던 것이 일본승려의 상서(上書)에 의해 1895년 입성 금지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8. 근 대 불 교
1. 불교의 영향
근대 불교의 시기는 편의 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1895년)에서 8.15해방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서 입성해제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입성해제는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의 상서(上書)하에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이래 500여년산 줄곧 핍박받으며 입성금지가 되었던 승려들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노의 근본 목적은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고마워하기만 할 뿐 민족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日人의 손에 의해 풀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친일 불교는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이것뿐만 아니라 당시 한일합방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공격에서 사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불교와 제휴하거나 일본종파에 귀속하기도 했고, 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 이후 일본 승려와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고, 그들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신분도 높이고 사찰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불교종파에 자신들의 사찰을 예속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믿었다. 늦게나마 정부에서는 억불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체계를 계획하여, 1899년 서울 창신동에 원흥사( 도성 출입을 가능하게 해 준 日僧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회광이 설립.)를 세워 한국 불교의 종무소로 삼았다. 하지만, 원흥사는 원종 종무원과 함께 친일을 상징하며 한일 불교합방의 요람이 되었다. 원흥사에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여기에 모여 원종(圓宗) 종무원을 세워, 억불책 500여년만에 없어졌던 종명(宗名)을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되었던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손을 잡고 매불행위를 한 것에 대한 거센 반발로 광주 증심사를 중심으로 승려 대회를 열고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웠다. 하지만 1911년, 일본의 사찰령과 함께 이 두 종파마저 없어지게 된다.
교권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불교 임제종에 한국불교를 귀속시키고자 한 이회광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불교는 다른 불교와 같이 사회에 대한 자선사업이 없어 이 세상에서 환영 못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는 진흥하지 못할 것이니 한국 불교의 종명을 개종하고 사찰의 재산을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 불교를 일본에 귀속시켜 그 대가로 교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국 불교를 소생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사찰령은 승단의 좋은 옛 관습을 파괴했다. 특히 사찰의 주지 임명의 문제에 대해서 이다. 주지 임명 방법으로는 相承, 法類相續,招待 席의 3가지 였다. 불교가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지의 임무는 藷般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이 통례였고, 설사 주지직을 맡은 후에도 수행하는 스님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수행하도록 보살필까 하는 데 직무의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 사원의 지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사찰령에 의해 주지 권한이 상당히 비대해졌다.
이로 인해 주지는 그 자리를 고수하여, 더 나아가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 불교에 동화하거나 귀속하는 일을 획책했던 것이다. 사찰의 공의제도(公議制度)가 없어지고 주지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자 일반 승려와 주지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주지의 관심은 오직 총무부 -본산주지의 임무권자가 총무였다.-에 쏠려, 사찰 재산의 처리에 공정치 못했던 일이 허다했다.
어쨌든 사찰령으로 인한 지주 권한 비대에 대한 비판으로 젊은 승려 백여명이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 청년회를 창립하고 8개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 불교유신회가 사찰령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으나 이 모두 무산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령에 의해 불교 교단은 조선 불교 선.교 양종이라는 이름으로 일제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사로 나뉘어졌다. 이에 30본사 주지들이 임명되고, 주지들의 화합하에 각황사에 연합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본사 주지 권한과 세력의 확대로 좀 더 강력한 중앙 통치의 재구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政.敎분리의 혁신을 주장한 승려들이 각황사에서 중앙 교무원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앙통제기구로서의 모습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선명한 종명(宗名),종지(宗旨),종헌(宗憲)등의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1941년 태고사(현, 조계종)를 세워 31本山의 총 本山으로 삼고, 좀 더 강력한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역할을 하는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재정비하려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되었다.
2. 항일 불교운동
이 시점에서 조선 불교의 당면 과제는 두 가지로 분류시킬 수 있다. 즉 한일 합방의 현실에서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불교의 영향에 대해 조선 불교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와, 급변하는 사회정세 및 세계조류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 였다. 이를 둘러싸고 조선 불교는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고 일신의 영달과 안일를 위해 일제와 타협하는 매불적인 행위를 하는 반민족적 세력과, 소위 산중 불교의 맥락을 이어 은둔 생활을 일삼는 무기력한 보수 세력, 나머지 하나는 민중의 소통에 귀 기울이고 외세의 침입에 맞서 구국투쟁의 대열에 동참하는 세력으로 3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 불교의 사회 운동이 표면화하여 업적을 남긴 것은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청년 운동의 촉진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나타난 조선 불교의 선구자가 만해 한용운이었다. 그는 일제 침략기인 그 시점에서 유신을 외치면서 그의 혁신 이념을 알리고 실천했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적 현실을 발견하는 계기 역시 실천적 투쟁속에서 이루어 졌는데 그것이 바로 해인사 주지였던 친일파 승려 이회광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운동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회광은 불교 확장이라는 미명하에 일본 조동종과 결탁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종교의 분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만해는 여러 해 승려 대회를 열어 일본 불교와의 연합 획책을 규탄하여 결국 친일 흉계를 백지화 시켰다. 또한 그는 구국 독립 실현을 위해 지극히 인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불교의 근본이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면서도 총 종교적인 이념구현에 앞장섰다.
그야말로 조선 불교의 은둔주의와 몽매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열렬한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지눌과 원효의 사상과 전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인물이었다.
불교는 3.1운동과 신간회등의 항일 투쟁에 동참한다. 3.1운동의 민족대표의 자격으로 백용성,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참여하고 전국 사찰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민족 연합전선인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조선불교 청년회와 불교 여자 청년회의 회원들은 신간회와 그 자매 단체의 근우회에 각각 참여했다. 또한 비합법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참 고***
日帝下에서의 대처승
日帝의 침략은 이 땅의 불교에도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소위 內鮮一體라는 구호하에 한국 불교의 왜색화 경향이 노골화된 것이다. 일본 불교는 생활불교를 표방하면서, 승려의 결혼. 육식등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반면 한국 불교는 참담한 현실속에서도 청정한 율행(律行)을 생명처럼 지켜오고 있었다. 또 당시의 33本山을 중심으로 하여 스님들의 도쿄 유학이 시도된 적이 있다. 그때 한국에서 파견된 이들의 대부분은 대처승(帶妻僧)의 신분이 되어 되돌아 왔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야기된 이른바 비구 대처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5년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특별유시가 있었다. [왜색(倭色) 승려는 사찰에서 물러나라. ]는 내용이었다. 왜색 승려는 구체적으로 대처승을 가리킨 용어였다. 그 해 선학원에서는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 대회가 열렸다. 대통령의 유시내용 대로 전국의 사찰에서 대처승을 몰아 내기 위한 결의 대회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이들로는 曉峰(효봉), 金鳥(금조), 東山(동산), 靑潭(청담)등을 들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당시 비구의 숫자는 전국을 통틀어 200여명을 넘지 못했으리라는 추정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국 사찰 1천2백여개소를 관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성교단과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당시 태고종(지금의 조계종) 종무원 (지금의 총무원)에서는 중재안을 냈다. 즉 전국의 사찰을 궁극적으로는 비구승들에게 양도하지만 현재의 대처승들에게 그 당대만은 사찰 거주를 허용할 것, 비구승들의 수도처를 20여군데 지정하여 단독으로 수행에 전렴토록 할 것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찰을 비구 도량으로 선뜻 내 놓는 이가 없었다. 양측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 벌여 나갔다. 1960년의 불국사 난투극은 이 갈등의 절정이었다. 드디어 양자는 결별을 선언하고 비구승들은 통합 종단으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을 탄생시켰다.
한편, 대처 승단은 태고종으로 발족하게 된다. 이 때가 1962년 이였다. 이 와중에서 망실된 재산과 토지는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불교에 대한 정부 관권의 개입이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형태를 낳게 된다. 또 5.16 쿠데타 직후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서 불교계의 여러 종파들을 등록시킨 것도 문제였다. 비슷비슷한 종풍(宗風)을 내건 불교 단체들이 문공부에 등록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한국 불교에는 26개의 종파가 난립하게 된다. 조계종의 첫번째 수행 과업은 태고종이 소유하던 사찰들의 합법적인 접수였다. 정화라는 기치아래 거의 모든 사찰들이 조계종으로 등록하게 된다. 이 접수 과정에서 무자격한 승려들이 대거 조계종 안으로 스며든다. 이들은 수행이나 사회제도에는 관심이 없고 재산권의 이득만을 노리는 이들이 승복을 걸치게 된 것이다. 조계종단 안에서 폭력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오늘의 비극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악연(惡綠)이 뿌린 인과응보이다. 정화불사를 주도했던 청담(淸潭) 스님은 이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다음으로 조계종에 주어진 문제는 총무원의 재정적인 독립이었다. 분규에 따른 소송은 해당 사찰이 감당하는 것보다는 총무원이라는 대표성 있는 단체가 맡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총무원에는 자금 동원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각 본사를 통한 분담금 납부 제도가 실시된다. 특히 전국의 명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막대한 입장료 수입이 생겼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문화재 보수등을 위하여 지방 단체장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사찰의 운영에 쓰이게 된다. 이 이권을 둘러 싼 잡음들도 끊일 사이가 없었고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의 자리는 늘 단명(短命)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8년 동안 24명이 총무원장직을 거처 갔다. 평균 수명이 8개월 밖에 안되는 것이다. 본사 주지의 임면권을 총무원장이 장악하지만, 돈은 본사 주지가 쥐고 있기 때문에 이 마찰은 피할 길이 없다. 서의현 총무원장은 86년에 취임하였다. 그는 현대 조계종사에서 유일하게 임기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연임을 거쳐 3선까지 바라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재직한 8년은 아마 당분간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 듯 싶다.
9. 5,60년대 불교
1.정화운동(잘못 끼워진 단추)
1) 정화운동의 태동 - 1차 혁신운동
일제국주의의 대한(對韓)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왜색화와 총독부로의 종권이양책을 그 골자로 하였으며 이는 대처승의 육성과 사찰령의 실시로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조치를 통하여 일제국주의는 불교를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불교는 자율성이 말살되고 전통성이 거세되어 갔다. 사찰령은 주지전횡제도를 가능케 하였으며 주지임명권을 총독부가 지님으로써 종권을 완전 장악하는 수법이 관철되던 상황이 바로 해방직전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해방후 불교계의 과제는 식민잔재의 청산과 민족불교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친일매국, 보수파 타락승, 매교승의 제거와 교단의 정화, 또한 불교계에 뿌리 박혀 있는 일제 불교정책의 잔재청산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불교내의 반민족적, 반불교적 요소들은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전개된 것이 불교정화운동이었다. 불교정화운동은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어진 1차 혁신운동에서 그 태동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1차 불교혁신운동을 살펴보자. 제1차 불교혁신운동은 불교 혁신회,불교혁신동맹.불교여성 총동맹,혁명불교도연맹,선학원,불교청년회의 7개 단체가 모여 결성된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었는바 그들이 내세웠던 목표들은 네가지로 압축 요약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의 폐지
둘째, 불교의 대중화
셋째, 부패된 교단의 혁신
네째, 사찰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상 확립
이와 같은 1차 혁신운동의 주요 목표들을 살펴보면, 이 운동이 민족적 각성과 종교적 양심을 자기 출발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차 혁신운동은 ,불교혁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일조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파악해 내었다. 자연히 혁신운동은 주체적 실천으로 전개되었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러한 불교혁신운동이 전개되자 위협을 느낀 미군정과 보수, 어용 총무원은 불교내의 진보세력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을 가하였으며 불교혁신총연맹은 47년 11월 해산 당하고 만다. 관권의 탄압을 피해 혁신연맹의 중요인물 56명이 월북하게 됨으로써 1차 불교혁신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2) 정화운동의 왜곡및 변질 - 이승만의 정화유시
정치적 혼란과 6.25의 민족사적 비극은 불교계의 민족적 역할 모색의 미진한 기운마저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역사적 격변기에 불교계는 붓다 가르침의 전파와 그 실천이라는 대의를 역사공간에 실현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상처의 씨앗은 너무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었다. 일제가 한국불교에 뿌려놓은 씨앗은 ,대처승의 급속한 증가와 그로 인한 청정비구 승풍의 무너짐이라는 상처로 남았다. 상처의 생체기는 쉬이 아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당시 한국불교의 승려 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7000명이었는데 반해 비구승은 200여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구측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고양은 대처승의 추방으로 귀결되어지는 듯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무렵,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정권은 불현듯 정화유시를 내린다. 이것이 1차 정화유시였으며 그 내용은 처자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처승 추방유시나 다름없었다. 불교에 각별한 애정도 갖지 않고 있었던 독실한 크리스챤 대통령이 왜 하필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을까? 대통령은 크리스챤이었기에 당연히 불교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돌출한 사건이라고 여기면 될까? 아니면 의도된 정치적 계산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앞으로의 서술 속에서 명백해 지리라 본다. 계속해서 그 때의 정황을 살펴보자. 이후, 이승만은 3차례에 걸쳐 정화유시를 내리게 되고 불교계는 비구-대처의 확연한 대치선이 그어지게 된다. 이승만의 1차 유시이후, 대처승에 대한 비구승의 요구가 수행사찰 분배요구에서 종권인계로 비약했던 것이다.1차 혁신운동의 좌절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던 정화의 의지는 이승만의 정화유시를 도화선으로 하여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하였던 것이다.
3) 정화운동에서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의 변질
불교 내의 비민족적, 비불교적인 일제의 모순들을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한 정화운동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자 한국불교의 과제였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던 정화운동은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거니와 6.25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때 단행되었던 것이 이승만의 1차 정화유시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불교세력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정화운동의 계기점으로 포착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서술을 통하여 밝혀질 것이지만 이것은 역사의 잘 못 끼워진 단추가 되어 버렸다. 첫번째 단추를 잘 못 끼워 버리면 우리는 끝까지 잘 못 끼워버리는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의 정화유시및 정권개입이라는 계기점에서 출발한 정화운동은 한국현대불교사를 왜곡되고 뒤틀리게 만든, 그래서 잘 못 끼워진 단추의 구실을 하여 버린 것이다.
4) 비구 - 대처의 종권분규
이승만의 유시가 있은 1개월 후인 1954년 6월 24일, 대처승들에게 눌려 지내던 열세의 비구승들이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모여 대처승 추방결의를 하였다. 이로써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정화라는 순수동기가 대의명분으로 전락해 버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비구-대처 싸움의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비구측의 대처승 추방결의를 종권도전으로 인식한 대처승 중심의 기성교단은 1954년 7월, 1945년에 제정되었던 조선불교 교헌을 불교 조계종 종헌으로 바꾸고 종단 대표직명을 다시 교정(敎正)에서 종정(宗正)으로 환원시켜 만암스님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계속해서 비구측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전국비구승대회(1954.8.24 와 9.27)를 열고 대처승측에 자진 환속과 종권 이양을 요구했으며 그 해 10월 9일에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를 강제 접수하고 사찰간판을 조계사(曹溪寺)로 바꾸어 걸었다. 대처측은 11월 23일 조계사 탈환을 시도하였으며 조계사 접수를 둘러 싼 공방은 1년동안 계속되었다. 그 해 비구측은 4차례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여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하였다. 불교정화가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 왜곡되면서 종권쟁탈을 위해 정권에 의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1955년 8월 11일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종단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조선불교는 두개의 총무원으로 갈라졌으며, 비구-대처의 대립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종단이 비구, 대처로 두 조각이 나자 대처측은 조계사 승려대회(1955.8.11)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1955.8.15),법적투쟁을 시작했다. 이 소송제기는 계속해서 맞소송을 불러 일으키며 불교내 문제를 법정으로 번져 놓게 했으며 이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정권과의 공생관계를 노리는 종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0 여개월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결은 대처승측의 승소판결로 끝났고(1956.6.15) 서울 고법항소에서도 공소기각이 되어 대처승의 승소였다.(1957.6.15) 서울 민사 지방법원에서 패소한 비구측은 패소의 원인을 집행부의 능력부족이라 판단내리고 청담 총무원장을 인책 퇴진시켰다.(1956.10.27) 그 후 비구 내분으로 인해 총무원장은 단명하였으며 끊임없는 종권불안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1960년에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정부의 비호를 받은 비구측에 밀려 대부분의 사찰에서 물러가고 대처측은 조계사 탈환을 시도했으나(1960.4.27) 실패로 돌아갔으며 5월 3일 석가탄신일 기념행사 후 다시 비구승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구측은 불법에 대처승 없다 (1960.11.19)는 구호를 내걸고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이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불교정화 대책위를 구성하고 승려대회를 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오판할 경우 순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1월 24일 대법원이 서울고법에서 내린 대처측 패소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판결을 내리자 비구, 비구니 500여명이 대법원에 난입, 집단시위를 벌였으며 6명이 할복을 기도하였다. 검찰을 대법원 난입과 관련하여 비구승 24명을 구속, 기소하였다.(1960.12.21)
1960년 한 해가 저물고 대법원 난동을 몰고 왔던 상기(上記)의 소송은 1961년 3월 대법원이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비구측의 승소로 결론 지어졌다. 그러나 전국 사찰 쟁탈전은 오히려 더욱 가속화되어 아침마다 주지가 바뀌는 사태가 속출하고 이런 사태들은 곧장 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종헌 쟁탈전이 지루하게도 이어질 무렵, 5.16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2차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1961.11.9 , 12.9)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양측에 제시하나 거부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였는 바 그것은 불교계의 분규를 조속히 종속하고 대동단결하여 불교자체의 융성과 민족문화의 향상에 힘쓰라. 정부는 불교재건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여론에 따라 이를 시정하려고 했으나 거두지 못하였음은 유감된 일 분쟁관계자들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을 모색하라.
이와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 는 요지를 담고 있었다.(1962.1.13)
박정희의 담화가 있은 며칠 후 비구-대처 양측 대표들은 문교부에서 주선한 불교재건위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1962.1.18) 1월 22일 양측 대표들은 중앙공보관에서 문교부장관 참석하에 재건위 결성식을 가지고 1월 31일 제 4차 회의에서 통합종단을 구성키 위한 불교재건 비상 종회 회칙을 확정하고 종회의원을 선임한 후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새 종단(비구. 대처 통합종단)의 명칭을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하고 교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하는 등 종명, 종지 등에 완전히 합의하고 2월 28일 종헌을 제정했다. 비상종회에서 승려 자격문제에 대처승 기득권 문제는 문교부의 해석에 따른다는 단서에 대해 대처측이 반발했으나 표결결과 가(可)-15 , 부(否)-14 , 무효-1 로 패배했다. 비구측은 3월 6일 대처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재 종헌을 제정, 21일 공포하였다. 5.16쿠테타 후 비구. 대처 분규수습을 위해 구성된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제 8차 회의에서 출가독신 수행자만을 승려로 인정할 것을 의결하고 제 9차 회의에서는 종정에 이효봉스님을,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을 추대하는 등 새 종단 구성에 착수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조계사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비구. 대처 통합종단인 조계종의 출범이 선포되었다. 이어 4월 14일 문교부에 정식 등록함으로써 비구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대처의 지루했던 종권분규는 일단락 되었다. 한때 대처측이 비구측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조계종 종헌 무효확인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1962.10.4) 새로운 분규를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정부당국에 의한 대처측 반발 강력 억제 입장으로 사그라 들었다. 이 후 대처측은 대처측 제30회 중앙종회(1968.11.18)에서 통합종단 백지화를 선언하고 대처측 제9차 전국 대의원회의 (1970.4.16)에서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써 비구-대처는 각각의 종단을 가지게 되었다.
5) 정화운동의 실패와 그 폐해
이승만의 유시를 계기로 50년대 이후 진행된 정화운동의 양상은 (불교혁신운동 당시의 진보적 정신은 흐려져 버리고)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 왜곡되어 나타났으며 그 전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① 정부수뇌(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시와 담화로 시작되어 문교부가 개입하여 적극 중재를 시도
② 양측대표가 일단 화합해서 통합문제를 의논하다가 승려의 자격문제와 이에 따른 이해 관계로 대립
③ 결국 문화부는 대처측의 완전 동의 없는 비구측의 통합종단 구성을 인정
④ 대처승은 다시 이탈해서 법정에서 통합종단의 불법성(不法性)을 호소
⑤ 1차에서 대처승 승소, 2차에서 비구승 승소 등 법정판결의 번복을 계속
⑥ 그 방법에 있어 단식, 데모, 할복, 법원난입, 유혈난투 등의 수단을 동원
⑦ 문교당국은 물론 법원마저도 불교정화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살펴보았던 것처럼 불교정화운동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일제잔재의 청산과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왜곡, 변질되어 전개되고 내부의 자율적, 자주적 정화운동은 말살되어 버렸다.
그 폐단을 살펴보면,
① 한국불교계에 제도적 규제와 계속적인 분쟁을 야기시켰으며
② 분쟁해결을 관권과의 결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악습을 조장하였고
③ 이로 인해 한국불교를 소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켜 버렸다. 또한 분규과정에서 사찰재산의 유실과 임의적 처분,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함으로 인해
④ 불교발전의 족쇄를 채우게 하는 불교재산관리법(현재,전통사찰보존법으로 명칭만 변경되어 있을 뿐이다.)이라는 악법을 제정케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안 내내 모순과 질곡으로 몰아 넣는 원인
⑤ 종단과 승려의 자질 저하
⑥ 종단의 분열과 종파의 분열 등의 폐해를 안겨다 주었다.
안타깝게도 비구-대처분규는 비구 종단내의 분규로 이어진다. 이제 비구 종단내의 분규를 살펴보자.
10. 7, 80 연대 불교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분규
50년대 정화운동에서부터 잘 못 끼워진 단추는 통합종단이 들어 선 이후에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불교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비구-대처 분쟁을 통해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조계종 내의 종권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계종 분규의 전체적 양상은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과 종단의 행정을 책임지는 총무원장과의 대립으로 일관된다. 명목상 종권을 대표하는 종정과 실질적으로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간의 반목은 종단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 사찰별 문중,법맥의 대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분규는 청담스님계와 경산스님계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분규는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종권분규를 이 양자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1) 60년대 말 - 70년대 초까지의 조계종 내분
통합종단 조계종은 종정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대처측)을 선출함으로써 그 출범을 알렸다.(1962.4.11)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대처측 임석진 총무원장 이하 집행부는 취임 5개월만에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 의원의 구성비율(비구 32 : 대처 8)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원 사임했다.(1962.9.10) 이로써 통합종단의 초대 총무원장은 그 해 12월 30일자로 퇴진하게 되고 비구측은 바로 당일 대처측의 김법룡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고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신속성을 발휘했다. 김법룡 충무원장은 계속되는 비구-대처의 알력 속에서도 3년 3개월이라는 조계종 사상 최장수의 재임기간을 채우고 66년 4월 물러갔으며 김법룡스님의 후임으로 비구측의 손경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66.4.12) 이로써 그 동안 - 외형적으로나마 - 균형을 이루어 오던 비구-대처의 균형은 무너지고 조계종의 실권은 완전히 비구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조계종의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손경산 스님은 통합종단 조계종에 가담한 대처측 화동파(和同派)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 온건론을 유지하였다. 이에 반해 초대 종정인 이청담스님은 곪은 손가락은 절단해 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잦은 의견대립을 보이면서 청담-경산 이라는 새로운 대립구도를 서서히 표면화시키기 사작하였다. 조계종 14회 중앙종회(1966.11.30)는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으로 이청담스님을 재추대하게 되고 종정-총무원장의 잦은 의견대립은 문중,파벌의식이 개입됨으로써 종권다툼의 양상으로 번질 기운을 안으로 삭이고 있었다. 급기야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종회에서는 이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여기서 당시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이 동국대학교 재단을 운영함에 있어서 종단이 4천여만원의 빚을 지게 된데 대한 규탄이 있었고 청담스님은 경산스님의 사퇴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산스님이 이에 불응하자 청담스님은 사표를 던졌으며 이에 경산스님도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해인사 종회를 계기로 청담,경산 두 거두가 종권의 정당에서 물러가자 조계종은 제3대 종정에 윤고암스님을, 총무원장에 박기종스님을 선출하였다.(1967.8.9)
1969년 8월 12일 한동안 조계종권에 멀어져 있던 청담스님이 불교정화 이념과 제반 불사가 부진함을 참회하여 대한불교 조계종을 탈퇴한다. 고 하여 조계종 탈퇴선언을 함으로서 조계종단은 다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청담스님의 조계종 탈퇴선언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에 의해 자신의 불교유신재건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총무원장과의 불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탈퇴선언이 있은 지 10여일이 지난 후 (1969.8.23) 청담스님의 탈퇴선언에 자극을 받은 선학원(청담스님 지지파)측은 9월 1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청담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측과 총무원측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지점이었다. 청담스님탈퇴의 책임 문제에 대한 선학원측의 강력한 공세를 받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은 사퇴할 뜻을 밝혔다(1969.8.26) 이처럼 청담스님 탈퇴선언으로 본격화 된 종단분규는 청담스님측과 경산스님측의 총무원 실권장악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이어 9월 1일 개최된 제21회 비상종회는 선학원측의 최월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츨하였으나(1969.9.13) 봉은사 땅 매각사건으로 10개월만에 물러나게 된다. 최월산 총무원장 후임으로 다시 청담스님이 선출되어 청담 총무원장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1970.7.22)
새롭게 구성된 청담 집행부는 총무원장 외유중에 김경우 총무부장이 관악산 염주암을 임의로 매각해 버림으로 인해 집단사퇴하게 되고 청담 총무원장만이 임시중앙종회(1971.7.27)에서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5일 청담스님이 갑자기 입적함으로써 조계종 내분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담스님의 입적 후 그 후임을 놓고 조계종단은 다시 파란이 이는 듯 하였으나 비교적 파벌색이 적은 강석주 스님을 후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고(1971.11.23) 강석주 집행부는 청담스님 입적 열흘 후인 11월 25일 출범하게 되었다. 강원장은 재임 1여년만인 1973년 1월 25일 손경산 총무원장에게 종권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2) 70년대부터 80년대 까지의 종권분규
봉은사 염불암 땅 매각사건으로 총무원 집행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때 손원장은 젊은 승려들의 옹립을 받으며 등장했다. (1973.1.25) 그러나 손원장 집행부는 73년 5월 윤고암 종정의 사회국장 해임 거부를 발단으로 종정 권한 문제를 둘러싼 종권다툼을 시작했다. 윤종정이 물러나고(1974.7) 문중배경도 없고 대처측 출신이라 종권을 전혀 넘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파벌색이 없는 이서옹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됨으로써(1974.8.3) 지루한 종권다툼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서옹 종정은 예상을 뒤엎고 종정 친정체제를 주장하면서 종단 실무를 관장하겠다고 나서게 되고 이에 손경산 집행부는 정면 도전했다. 이 종정과 손 원장의 종권다툼은 종정취임 두달만인 1975년 9월 30일 손 원장의 구속사태를 빚었다. 손 원장은 경기도 양주 대성암 토지 매각 대금을 다른 항목에 전용해 썼다는 유용 혐의로 조계종 사상 현직 원장이 구속되는 충격적인 첫 사례를 남겼다. 손 원장의 구속사태로 새 총무원장에 송서암스님이 선출되었다.(1975.10.6) 그러나 종권안정 여망과는 달리 송서암 집행부는 종단 행정 경륜의 일천함으로 혼미를 거듭하였고 이어 박기종 스님(1975.12.5 - 1976.10.4) - 고경덕 스님 (1976.10.4 - 1976.12.3) - 김자운 스님(1976.12.3 - 1977.3.23)등이 차례로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물러나게 됨으로 종권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김자운 집행부에 이어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가 새로 구성되었다.(1977.7.23)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는 서옹 종정측으로서 실무친정의 근거지가 되고 이에 반기를 든 종회 중심의 재야세력은 김혜정 집행부에 강경히 맞섰다.
종권다툼의 양상은 종회측의 이 종정 불신임안 통과(1977.10.7), 종정직 해임 확인 청구소송(1977.11.9), 이 종정의 종회 해산 명령(1977.11.11)의 공방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종회측은 해인사 종회후 채벽암 스님을 종정 직무대행으로 추대하고 서울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내달게 되었다.(1978.3.10) 마침내 조계종단이 조계사 총무원(종정)측과 개운사 총무원(종회중심의 재야)측으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으로 양분된 조계종의 내분은 80년에 들어서면서 재판 판결과 승단 지지도가 개운사측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대립구도 탈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협상에 임한 결과 분규종식을 위한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하게 되었다.(1980.3.30) 합의에 따라 제 6대 종회의원 선거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으며(1980.4.17) 새로 구성된 제 6대 의원의 표대결로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과 종회의 정.부의장을 선출하였는데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하였다(1980.4.26 - 4.27) 이에 조계사측이 반발하여 종정추대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의 출범이라는 성과를 얻은 당시 상황은 3년동안 계속된 조계사,개운사 만의 종권분규를 완전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조계종단은 법적인 통일만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 종정 추대에 실패한 종회가 다시 5월 7일 종회를 열어 종정추대를 재시도했으나 총무원장, 종회 정.부의장 등을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한 것에 반발한 조계사측이 다시 송월주 총무원장의 자격미달을 들고 나와 당선 무효를 주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양측의 공식 대회는 두절되고 와해 상태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5월 13일 개운사측이 조계사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면서 양 조계종단은 다시 내분상태로 되돌아 가게 되었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사찰 당국은 조계종단이 더 이상 자체 정화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무력으로 조계종단을 정화하려 했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불교 1600년 사상 가장 치욕적인 10.27법난이었던 것이다.
조계종은 1980년 11월 8일 정화중흥회의를 발족시켜 법통을 잇고 이어 종헌을 개정하고 이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이성수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81.1.7) 조계종 정화중흥회의가 총무원 중심제의 종헌을 탄생시킴으로써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는 여러 형식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총무원장은 본,말사 주지 임명에 개입하면서 파벌,문중의식을 확대,재생산해 내고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 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로써 81년 이후 1년동안 4번이나 총무원장이 교체되는 난맥상(성수 > 초우 > 법전 > 진경)을 노출하였다. 1982년 4월 6일 총무원장으로 새롭게 선출된 황진경 스님 역시 - 10.27법난이후 실력파로 부상해 있었던지라 종권불 안정을 종식시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 당시 동맹관계에 있던 서의현 종회의장으로부터 종권도전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1983년 8월 6일 신흥사 주지 교체 인사를 둘러싸고 전대미문의 승려살인 사건을 유발하였다. 이에 황원장은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다.(1983.9.3) 이에 앞서 원로스님들은 봉은사에서 원로회의를 열어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흥사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총무원 집행부와 종회의원 모두를 사퇴시키고 총무원과 종회를 해산키로 결의하였다.(1983.8.27)
1983년 9월 5일에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고 여기에서 비상종단운영회의설치가 결의되었다. 신흥사 사태수습을 명분으로 출범한 비상종단은 김서운 총무원장을 내세우고 평화적 종권 인수인계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서울 봉은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걸었다. 비상종단은 그 동안 소장승려와 불교사회문화연구소에서 꾸준히 준비해 온 개혁안을 토대로 개혁작업을 실행해 나갔다. 비상종단의 개혁작업은 혁신적이고 구체적이었으나 종단 내의 보수기득세력과 권력의 공작에 의해 좌초되고 말았다. 즉 1984년 8월 1일 재야측이 이성철 종정의 지지를 받으면서 소집한 전국승려대회가 만장일치로 비상종단을 불신임하고 오녹원 총무원장을 선출하였고 2일에는 총무원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11. 90년대 불교
90년대초 불교
3) 88년 봉은사 분규
1988년, 서의현 총무원장과 봉은사 주지였던 변밀운 스님간의 종권다툼으로 인해 봉은사 분규가 발생했다. 당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들의 종권다툼은 폭력적 물리력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를 당선시킴으로써 그 이후 종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노태우 당선기원법회를 열었던 것이다. 87년 대선 이후 정권이양 이후 종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서의현 체제에 반기를 든 세력들이 밀운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총무원 체제를 꾸리면서 분규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등에 업고 중앙승가대 발전을 담보로 하여 학인스님들을 전면에 내세워 폭력으로 봉은사를 접수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접수의 성공으로 봉은사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4) 91년 종정 선출을 둘러싼 분규
한편, 1991년 2월로서 임기가 만료된 성철스님의 후임을 놓고 성철스님의 연임을 주장하는 범어문중과 원산스님의 추대를 주장하는 덕숭문중간의 대립으로 새로운 분규가 시작되었다. 8년 종헌 개정시 종정선출권한이 원로회의에 있는가 종회에 있는가를 놓고 대립하던 양 세력이 각기 비상수습대책위와 전국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조직을 꾸리면서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의현 총무원장이 범어문중에 가담하게 되고 이에 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반 서의현세력이 결집하면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각각의 총무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반대측 역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는 뿌리깊은 문중, 파벌의식이 초래한 한국불교의 또 하나의 뒤틀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5) 종단분규의 원인과 그 해결
이상에서 본 고는 한국현대불교사를 다루면서 청산해야 할 역사를 조명해 보았다.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국불교는 종권다툼의 각축장화 되었고 그것은 끊임없는 종단분규, 종권불안으로 이어졌음을 살펴보았다. 과히 현대한국불교사는 종단분규사라는 명제를 실감할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종단분규의 양상을 좀 정리하고 넘어가자. 종단분규는 주로 3가지 유형으로 표출되었다. 즉 주지임명에 관한 분규, 총무원장 선출 혹은 정통성에 관한 분규, 종정선출 혹은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분규가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단분규의 원인은 무엇일까? 종단분규의 원인을 묻는 한 설문조사에서 스님들은 ① 일부 기득권 스님들의 종권욕, 이권다툼(65.5%) ② 불교사상의 혼란과 수행정진의지 부족(20.6%) ③ 종단제도의 미흡과 운영의 불합리(8.1%) ④ 정치권력의 불교계 이간책(5.6%) 등의 순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위 4개항은 불자들의 의식문제에서부터 교육, 수행, 포교 등 제도개혁의 문제 나아가 종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온존케 하는 악법제도, 정권에의 예속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요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 -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의 요인을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요인이라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종단분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종단분규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 정화운동이다. 정화운동의 폐해가 현재의 종단분규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화운동 역시 다른 원인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바로 일제 잔재의 온존이며 일제 잔재의 온존은 일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정책의 일환이었던 사찰령의 온존을 의미한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여러 전통을 파괴하면서 한국불교 모순의 원인으로서 작용하여 모순을 확대, 재생산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사찰령은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구분하고 본,말사 주지의 임명을 총독부가 담당케 함으로써 불교를 식민지적 지배하에 놓이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임명되는 주지에게 권한을 극대화시켜 줌으로서 주지 전횡제도를 가능케 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후부터 총독부의 역할을 총무원이 대신하고 있고 총무원은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지전횡제도와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제도적 악법이 현대불교사를 규정한 종단분규의 원인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단분규의 또 하나의 원인은 정권의 재창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종단분규의 씨를 뿌리고 개입하기도 하는 역대 정권의 기만성이다. 이승만 정권의 정화유시로부터 10.27법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5, 6 공화국 下에서의 정권과 총무원과의 관계는 이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91년 이후 종단분규의 한 양상으로 나타난 종정선출을 둘러싼 종권다툼은 문중간의 파벌의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기 문중하에 보다 많은 사찰을 운영하기 위하여 문중들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자기 문중하에서 배출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실제 초탈해야 할 재산권과 인사권의 확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중간의 파벌의식은 종단분규의 한 원인으로서 충분히 작용해 왔던 것이다.
종단분규의 원인이 이러할진대 그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그 해결방안은 개혁일 수밖에 없다. 오직 새로 태어남으로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신(維新)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의 어머니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과거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파괴해 버릴 때만이 유신과 개혁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의 방향을 살펴보면 ① 정권으로부터의 자주를 획득해야 하며 (불교의 자주화) ②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 주지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제도적 개혁) ③ 한국불교 모순의 책임자는 불자 대중 자신이라는 의식으로 전환해야 하며 (의식개혁) ④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정립해야 하며 (사상의 혁신) ⑤ 청정, 화합의 승풍을 진작시켜야 (승풍진작,인물개혁) 하는 것으로 압축될 것이다.
3.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
누누이 강조하는 바 한국불교의 모순은 한국의 민족모순이 불교적으로 전이된 것이다. 현대사에 있어서 한반도의 민족모순은 일제국주의와 미국의 뿌리깊은 식민정책에 의해 그 골은 깊고 넓어만 갔다.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문화정책에도 일관되게 흐르며 문화정책은 종교정책을 포함시킨다. 제국주의적 문화침탈에 의해 민족종교인 불교의 모순은 극도로 심화되어 왔다. 그 모순들의 현실태로서의 종권분규를 앞에서 다루었다. 이제 그 모순의 또 다른 현실태인 탄압과 훼불을 개략해 보려한다.
탄압은 주로 자체 정화능력의 결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계산에 의해 개입하면서 불교의 정치권력에 대한 예속성,의존성 심화를 조장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만의 정화유시와 10.27법난이다. 뿐만 아니라 탄압은 민족세력화, 진보세력화의 조짐을 보일때 정권은 철퇴를 가함으로서 민족,민중의식 고양의 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원각사 법당 난입사건, 각종 집회방해로 나타난다. 훼불은 ① 제반정책에 있어서 소외시키는 유형 ② 기독교 편향의 사회,문화 속에서 왜곡,변질 시키는 유형 ③ 군 내의 불교탄압 유형 ④ 이교도들에 의한 불교비방, 훼불유형 등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은 근본적으로 불자 대중의 각성을 바탕으로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혁신, 민족문화의 고양을 통해 극복되어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중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 중흥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90년대 불교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과 그 전개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 - 서의현 반대투쟁
종단개혁투쟁은 서의현 반대투쟁을 그 촉발지점으로 하여 개혁회의의 출범과 해체, 개혁종단의 출범, 개혁종단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을 포괄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단개혁투쟁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종단개혁투쟁의 촉발지점으로 작용하였던 서의현 반대투쟁을 살펴본다. 1994년의 벽두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유용에 대한 국방부 특검단의 수사발표(1994.1.27)가 있은 다음 날 조기현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및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 되었다. 이를 전후로 하여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과 관련하여 각종 소문이 나돌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당 정대철의원이 상무대 비자금 조성의혹문제를 폭로하였다. 폭로의 내용인 즉,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던 청우종합건설대표 조기현이 상무대 이전사업의 대금으로 받은 금액중 223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이 중 80억원을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80억원은 서의현을 통해 대선시기에 김영삼후보쪽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상무대 비리사건은 ①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② 여전히 불교계 종단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있으며 정치권력 역시 종단권력과의 모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 났으며 ③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부패,비리 기득권 세력의 제거가 필연적이며 ④ 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인하여 불교의 개혁이 필연적이라는 불자대중의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한편 서의현은 상무대 비리사건이 자신의 차기 종권장악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라 예상하고는 이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고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3월 18일에 차기 총무원장선거를 3월 30일 개최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같은 불교개혁을 꾸준히 모색해 온 종단개혁세력은 이와 같은 서의현의 불법적이고 도발적인 3월 30일 종회개최설에 반대하여 하나로 세력화 되는 바, 그 세력화의 결과가 바로 범승가 종단개혁 추진회(범.종.추)의 결성(1994.3.23)이었던 것이다.
상무대 비리사건과 3월 30일 종회개최발표는 범종추를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점이 된 범종추는 3월 26일부터 구종법회를 이끌어 나아갔으며 이에 앞서 3월 25일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동국대 불교학생회 학생들이 농성에 돌입하였다. 종단개혁의 열기는 승,속을 불문하고 불자대중의 가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것이다. 3월 28일에는 종단개혁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지며 서원장 3선음모 결사반대를 결의하고 상무대 80억 비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이후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서의현 총무원장은 조직 폭력배 300여명을 사주하여 총무원에서의 농성스님및 재가불자들을 습격하였으며 경찰들은 농성자들을 강제연행하기에 이르렀고 종단개혁세력은 이 날의 강재연행,폭력을 3.29법난으로 규정하고 불교개혁을 가로막는 정치권력과의 일대격전도 불사할 것을 선언하였다.
3.29법난 당시 범종추 소속스님들 뿐만 아니라 대불련 소속법우들 역시 (대.경지부에서도 30여명이 참가하였다.)강제연행,폭행을 당하면서 불교자주, 불교개혁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비호를 받은 서의현 세력은 3월 30일 제 112회 임시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서의현의 3선을 결의하였다. 바로 다음 날 재가불자들의 조직적이고 한층 더 강력한 투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이 창립을 선언하고(1994.3.31) 범종추와 함께 종단개혁완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몇번의 양심선언이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 이에 맞서 서의현 세력의 강제로 추측되는 서암스님의 승려대회 중지교시가 발표(1994.4.9) 되는 등 혼미를 거듭하면서 결국에는 4.10 전국승려대회 개최로 이어졌다. 전국승려대회에서는 ① 서암종정 불신임 결의 ② 서의현 원장 공직박탈 결의 ③ 개혁회의 출범선언 ④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스님 선출 등이 이루어졌고 곧 이어 총무원 접수를 시도했으나 경찰은 다시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스님및 재가불자들을 강제연행하였다. 이에 원로스님 6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4월 11일 원로회의는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개혁회의는 3.29, 4.10법난을 책임지고 김영삼 정부 퇴진, 최형우 내무장관 구속을 촉구하였다. 4월 13일에는 공권력이 철수하였고 개혁회의는 총무원을 접수하였으며 이어 새벽 5시에는 서의현 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조계사에서는 1만여명의 대중이 참가하여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였고 개혁회의 현판식이 이루어졌다. 원로회의는 4월 10일의 전국승려대회의 결정을 추인함으로써 서의현 반대투쟁은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2) 종단개혁투쟁의 전개 - 개혁회의의 출범과 개혁작업
개혁회의는 ① 불교의 근본정신 회복및 승단 위계질서 확립 ② 교단의 자주성 확립 및 불교관련 악법폐지 ③ 교단의 민주적 운영과 재산공개 ④ 여법한 주지인사 실시 및 무분별한 불사 지양 ⑤ 파벌적 문중의식 타파 및 승가 후생복지 증대 ⑥ 승가교육제도 정립 ⑦ 의식,법복,의제 정비 및 통일 ⑧ 포교활성화 및 사회복지사업 추진 ⑨ 재가불자 종단 참여모색 ⑩ 인권,환경 등 사회역할 증대 등 10가지 공약을 제시하면서 출범하였다.(1994.4.13)
개혁회의의 출범은 개혁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의현 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개혁의 토대를 일정부분 이루어 놓았으며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몰락 그 자체가 불교개혁의 완수일 수 없을 뿐더러 서의현 반대투쟁의 승리 이후에도 여전히 보수기득권세력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종권에 도전하는가 하면 일부는 시기를 노리며 잠복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불교개혁은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서의현 반대투쟁을 촉발로 전개 된 불교개혁투쟁은 종단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1600년 동안 축적되어온 모순의 총체적 해체와 그를 통한 한국불교중흥이라는 불자대중의 염원을 실현시키는 일련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되어야한다. 그러하기에 개혁은 총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총체성은 제도개혁, 인적 청산 ,의식개혁 등 모든 개혁의 내용과 대상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임무를 자기 임무로 설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개혁회의였고 개혁의 총체성은 개혁회의의 임무임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개혁회의는 출범 이후 6월말까지 ① 개혁회의의 존립근거를 마련해 줄 개혁회의법 마련 ② 월하스님을 종정으로 추대 ③ 훼종조사 특별위원회를 열어서 기간의 부패승려에 대한 조사와 사찰에 대한 감사실시 ④ 대체 권력체계에 대한 법안 마련과 공청회 개최 ⑤ 재적 본사별 승적 재정비 ⑥ 법난 책임을 물어 김영삼 대통령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장관의 해임요구 운동 전개 ⑦ 동화사,은해사,선본사,보문사 등의 기존의 반개혁세력이 잔존하고 있는 사찰에 대한 직할사찰 운영 등의 일들을 해 왔었다.
개혁회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불자대중과 국민들에게 보여 줌으로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종단의 출범을 머리 속에 그려보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혁회의는 1차부터 마지막까지 공개회의의 원칙을 지켰으며 방청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방청하게 한 것이며 법제화의 과정에서 각종 공청회의 개최를 통하여 불자대중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열린마당을 통하여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 그리고 개혁회의의 진행과정을 개혁회의 뉴스, 불교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 공개하여 의견을 수렴한 것 등은 분명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개혁회의는 산하에 법난 대책위를 설치하여 법난에 대한 대 정권 규탄투쟁을 멈추지 않으며 불교 자주화의 당위를 지속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개혁회의의 개혁작업들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개혁회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등의 비아냥을 받아야 했으며 이는 잠복해 있던 보수세력의 결집이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개혁작업이 중도에서 표류하게 된 원인들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며 그것은 개혁완수를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개혁표류의 원인은 종단개혁투쟁에 참여했던 진보세력이 종권을 얻어내면서 변절을 시작했고 재가불자들의 고립이 결국 대중이 아닌 소수세력에 의한 종단 운영을 유도하였으며 진정한 개혁에 대한 의식결여 등등의 개혁회의의 자체적인 원인과 외부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나 세부적인 평가들은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경위들을 먼저 살펴보자.
개혁회의가 다각도로 개혁을 추진하긴 하였으나 개혁의 구체적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반개혁세력은 자신들의 복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혁회의가 반개혁세력이 온존하며 그들의 물적토대가 되고 있는 사찰을 직영사찰로 하여 새로운 주지를 발령한 것에 대해 반개혁세력이 집단적인 소송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다 우여곡절 끝에 개혁회의에서 통과된 종헌이 (1994.8.11) 원로회의에 의해서 인준이 보류(1994.8.23)되면서 위기감은 고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범하면서 기존 종회를 끌어안기 위해서 기존 종회의원 39명을 포함함으로 인해서 내부적 진통에 시달리던 개혁회의가 외부적 도전까지도 받는 상황에서 원로회의의 개혁회의 입안 종헌에 대한 인준거부는 개혁회의의 입지를 위축시킨 결과로 작용하였다.
3) 개혁종단의 출범
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결정적 위기를 맞은 개혁회의는 9월 1일 개최된 원로회의가 제안한 내용을 9월 3일 , 제 8차 개혁회의의 본회의를 개최하여 수용함으로 인해 위기를 일정부분 벗어나게 되었다. 이어 9월 27일에는 제 9차 개혁회의의 본회의가 개최되어 개정종헌이 심의, 의결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원로회의에 의해 개정종헌이 인준되고 개혁회의 의장은 개정종헌을 선포하였다. 새 종헌 ,종법에 의해 11월 7일에는 11대 중앙종회의원 55인이 각 교구별로 직접 선출되고 8일에는 직능별 중앙종회의원이 직능선출위에서 선출되었으며 11월 14일에는 각 교구별로 총무원장 선거인단 240명이 선출되었다. 이어 11월 21일에는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319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새로운 총무원장이 선출(월주스님)되었고, 개혁회의의 뒤를 이어 개혁작업을 수행해 나갈 개혁종단이 출범하였다.
2. 종단개혁투쟁의 성과와 한계
서의현 반대투쟁으로 촉발되어 개혁회의의 출범에서부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개혁종단의 출범에까지 이르는 종단개혁투쟁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과정에서 많은 한계와 오류들을 드러내었다. 이제 그 성과와 오류, 한계를 명확히 짚어냄으로서 여전히 미완인 개혁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서의현 반대투쟁이 촉발될 당시 국민대중뿐만 아니라 일부 불교대중들의 눈에도 종단개혁투쟁은 새로운 종권다툼의 모습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그들의 눈에 서의현 반대투쟁에 결집한 세력들(보수, 기득권이나 진보를 막론하고)은 곱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았던 것은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였으며 미리 개혁을 모색한 개혁, 진보세력들의 주도면밀함으로 인해 획득되어진 명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의현 반대투쟁은 서의현 독재체제의 해체라는 직접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었으며 개혁회의를 출범시킴으로서 개혁의 지속적 추진을 가능케 했다. 개혁회의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의 추진은 ① 제도개혁을 일정부분 이루어 냄으로서 이후 종단운영의 여하에 따라 제도개혁의 큰 틀을 만들 수 있는 시안을 마련하였다는 점 ② 불자대중의 불교개혁에 대한 염원과 열의가 가히 폭발적이었음을 확인했다는 점 ③ 불자대중의 개혁에 관한 관심과 염원은 향후 불교중흥의 인적토대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점 ④ 개혁과정에서 개혁은 불교의 자주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확인함으로서 불자대중의 정치적 각성이 이루어졌다는 점 ⑤ 개혁과정에서 개혁적, 진보적 승려들이 종단 내로 대거 진출함으로서 개혁세력의 원내 교두보를 확보함은 물론, 전체 승가의 세력재편이 진보적으로 이룰 소지를 제공한 점 등의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혁회의가 개혁작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몇몇 오류와 한계점을 드러냈는 바, ① 개혁 초기 주도세력이 분열함으로서 제도개혁의 불완전(총무원장 직선제 관철 실패)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진전에 차질을 가져다 주었으며 개혁회의가 또 다른 이해관계에 의한 집단으로 오인 받기도 했다는 점 ② 구종회의원 39명을 개혁회의에 끌어안은 것은 끝끝내 개혁회의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일정부분 개혁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내줘야 했던 점 ③ 개혁세력의 물적토대의 부족 ④ 불교개혁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된 것은 불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대중의 종단운영참여를 배제했던 점(재가대중과 비구니 스님들의 배제는 앞으로 개혁회의의 한계로 집중적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⑤ 그로 인하여 출가비구대중들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던 점등이 바로 그것이다.
12. 90년대말 불교와 2000년대의 비전
90년대는 94년을 기점으로 전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미 1983년에 ‘비상종단’을 통해 한번 제기된 바 있는 ‘개혁’이 종단의 첨예한 화두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의현 원장의 3선 연임 시도를 계기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공권력의 일방적 편들기를 이겨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단의 민주화, 자주화 등 4대 과제를 제시하고 제도 정비를 통해 총무원장을 선출한 후 평화적으로 종권을 이양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이라는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쉬지 않았고,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여의도 불교문화센터 등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권 소외세력의 불만은 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모였던 반대 세력중 일부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조계사 폭력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점거측은 종정의 교시를 무기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중앙종회와 집행부측은 승려대회를 통해 종정을 불신임하고 선거일정을 진행하였고 사태는 1개월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점거세력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분쟁에는 종정 권한 강화를 도모하는 측, 종권 소외 세력의 종권확보 기도, 멸빈, 제적 등 중징계자의 사면요구, 총무원 권한 약화를 바라는 일부 본사의 움직임 등 다양한 세력이 얽혀 사태를 극한까지 몰고갔다. 99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한국불교근대사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들어온 불교는 많은 혼란과 번창을 반복하면서, 근세를 맞이하게 된 불교계는 1988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그 대안으로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되면서 어느 정도 관권의 예속으로부터 자립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해 12월 말에는 10/27법란에 대한 국무총리의 사과를 받아 내게 되는데 이는 사회의 민주화 바람과 불교계 내부의 응집된 대응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의 참혹한 배불정책과 일제치하에서의 사찰령이 이 땅의 불교를 말살하려는 시도였다면 1954년5월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이승만의 유시로 점화된 소위 불교정화정책의 회오리는 다시 한번 관권이 불교계를 유린하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되었고, 그 여파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는 1988년까지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불교계가 자립의 분수령을 이루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된 직후인 1989년부터 1997년 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논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