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충신 충헌공의 24세손이 되는 박장숙의 교훈적인 이야기로, 그 소재가 좀 특이하다. 화천면에 대대로 살아온 조상들의 성실하고 근면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박장숙은 어렵게 살았으나, 부지런하기로 마을에서 소문이 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의 아들에게 박장숙의 부지런한 모습을 자주 말하며 박장숙을 본받으라고 했다.
“우리 동네 장숙 어른을 봐라. 얼마나 부지런하니? 오늘 같이 이렇게 추운 날에도 거름을 준비하느라고 퇴비를 모으고 있는 것을 보아라.”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은 부지런하시기도 하지만 우리들을 보기만 하시면 얼굴을 험상궂게 해서 꾸중하세요.”
“너희들에게 꾸중을 한다고? 무슨 꾸중을?”“젊은 녀석들이 땀 흘려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놀기만 한대요.”
이처럼 박장숙은 게으르고 놀기만 하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불만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람들이 말이야. 빈둥빈둥 놀 생각만 하고 들에 나가서 무엇이라도 일을 해야지.”
마을 사람들은 박장숙을 칭찬하지만 박장숙은 마을 사람들에게 불만이 너무 많았다.
“나 한테 무엇을 얻으러 오거나 빌리러 오면 절대로 주지 않겠다. 사람들이 부지런해야 도와주지.”
먼동이 아직 채 뜨기도 전, 이른 새벽에 박장숙은 억새밭으로 소를 물고 왔다. 차가운 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린 억새풀 밭에 소 고비를 풀뿌리에 묶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박장숙이 숨을 내쉴 때마다 입에서 허연 입김이 훅훅 나왔다.
“어 춥구나. 이 억새풀을 베어서 단을 지어 소의 등에 싣고 가야지. 땔감이나 퇴비로 얼마나 좋은데.”
박장숙은 그 추위에서 낫을 빨리 빨리 놀려 억새풀을 베었다. 슥삭슥삭 억세풀들이 박장숙의 낫질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쓰러진 억새풀들이 박장숙의 손으로 한 동씩 묶여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박장숙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동산에 찬란한 태양이 서서히 그 빛으로 온누리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 햇살이 박장숙 이마를 비추자 이마의 땀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박장숙은 그 햇살을 보자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나 햇살을 보고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했다.
“오늘 하루도 저에게 부지런한 시간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박장숙은 억새풀 몇 동을 소의 등에 싣고 집으로 왔다. 마당 한 구석에 그 억새풀을 내려다놓았다. 억새풀 더미가 작은 집더미 만큼이나 솟았다. 그 억새풀 더미를 보고 박장숙의 입이 벌어졌다.
“올 겨울 땔감, 내년 봄에 퇴비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는 쇠시랑으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억새풀 더미를 헤치기 시작했다. 햇볕에 말려야 땔감으로 쓰기도 좋고 퇴비로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박장숙은 쇠시랑을 조심스럽게 놀렸다. 며칠 전에 쇠시랑으로 검불더미를 헤치다가 갑자기 그 속에서 커다란 뱀이 한 마리 나와서 혼이 났기 때문이다.
“조심해야지. 그저께처럼 뱀이 나오면 큰일 나지.”
박장숙은 눈을 부릅뜨고 손에 땀을 쥐고 검불더미를 한 겹식 넓은 마당에 퍼 날랐다.
그러다가 박장숙은 쇠시랑 끝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검불더미에서 쇠소리가 찰랑찰랑 거리며 소리가 났다. 그의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왠 쇠 소리가 나지?”
박장숙은 검불더미를 이리저리 헤치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뭐야? ”
박장숙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검불더미에서 엽전이 뭉치 채 쏟아져 나왔다. 그 엽전은 어머어마하게 많은 돈이었다. 그 돈이면 주변 마을에서 엄청난 부자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많은 돈을 보고 박장숙은 어떻게 할까를 망서렸다.
“어떻게 할까?”
“이렇게 흙이 묻어 있고, 주변에 녹이 쓴 걸 보면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고 적어도 몇 십년 전 어느 부자나 상인이 몰래 감추어 두었던 것이지.”
“관청에 신고를 할까? 그게 바른 길이지.”
“아니지. 관청에 신고를 해도 어차피 주인을 찾을 수는 없지.”
박장숙은 검불더미에서 나온 많은 엽전을 품에 안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그는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이건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야. 나쁜 데 쓰지 않고 내가 잘 쓰면 좋을 거야.”
박장숙은 몇 보따리나 되는 많은 엽전을 들고 그 엽전을 숨겨둘 비밀스런 곳을 찾았다.
“그렇지 부엌 한 쪽에 큰 구덩이를 하나 파고 그 곳에다 엽전을 아무도 몰래 묻어 두어야지.”
다음날부터 박장숙은 그 돈을 조금씩 내어 마을의 논밭을 사 모았다. 물 빠짐이 좋고 농사짓기에 편리한 마을의 논밭을 사 모았다. 몇 년 사이에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집도 대궐처럼 짓고, 하인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박장숙의 부지런한 그 습성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박장숙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씩 했다.
“글쎄, 저렇게 하인도 많고 논밭도 많은 부자가 허름한 옷을 입고, 새벽같이 일어나 하인들을 깨워 들로 나가다니.”
“그렇게 말이야. 사람이 돈 쓸 줄을 몰라.”
그런 박장숙을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은근히 미워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그런 시기, 질투 그리고 핀잔이 있었지만 박장숙은 눈도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부지런해야 돼.”
박장숙의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한 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몇 사람만 모이면 박장숙의 험담을 늘어 놓았다.
“뭐야? 그 사람, 거만하게 언제 부자 되었다고 마을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안해.”
“부지런하면 무엇하나?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술도 한 잔 사고 그래야지.”
그런 어느 날, 마을에서 조금 살만한 사람이 박장숙의 집에 돈을 빌리러 갔다. 평소에 친구로 지내는 사이였다.
“이 사람아, 자네 집에 돈이 많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 저 건너 마을에서 논밭을 팔겠다는데 자네 돈을 좀 빌려주게”
그 말을 들은 박장숙은 한 마디로 냉정하게 거절했댜.
“이 사람아, 자네는 매일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더니, 그러지 말고 부지런히 일이나 하게.”
“예, 이 사람아, 그렇게 말하면 야박하지? 마을 사람들이 자네를 무어라고 그러는지 알고 있나?”
“뭐래도 좋아. 나가게 이 사람아, 내가 한가하게 자네와 이야기하고 놀 시간 없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분개해서 박장숙을 미워하며 마을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체도 하지 말고 고개를 돌리자했다.
하루는 이웃집의 할머니가 박장숙의 집을 찾아갔다. 그 할머니는 박장숙이 어릴 적부터 이웃집에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 박장숙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네 이 사람아, 우리 영감이 아파서 누워 있네. 약을 한 첩 지어야겠는데 돈이 있나?”
“그러세요. 돈을 빌린다는 말씀이네요. 여기 증서를 쓰시고 얼마가 필요한지 말씀하세요.”
그 말을 들은 이웃집 할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며 말도 하지 않고 박장숙의 집을 나와 버렸다.
할머니의 말이 온 마을에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일같이 안타까워했다. 더구나 박장숙을 미워하는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대단했다.
“세상에 그렇게 부자로 살면서 이웃집 할아버지가 중병에 앓아 누웠는데. 그렇게 냉정하게 물리치다니. 우리 마을에서 쫓아내야지.”
그러나, 박장숙은 그런 마을 사람들의 말에 눈도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혹시라도 쟁기, 달구지 그리고 괭이를 빌리러 와도 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고함을 쳐서 쫓아내다시피 했다
“이 사람들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그런 것도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고 농사를 짓다니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지.”
박장숙은 그 마을에서 어느 누구와도 친하게 지니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 집에 데리고 있는 하인들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장숙을 미워했다.
“세상에 이렇게 부자로 살면서 쌀 한 줌이 아까워서 벌벌 떠는 사람이 어디 있어?”
박장숙의 머릿속에는 부지런하게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놀거나 게으른 것은 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해에 커다란 흉년이 들었다.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거기다 질병까지 돌아 온 마을 사람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살 궁리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먹을 식량이 없었다. 산으로 들로 나가 풀뿌리를 캐어와 삶아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는 실정이었다. 배가 허기진 아이들은 눈이 희멀겋게 되기까지 했다.
드디어 마을 사람들은 박장숙에게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부지런한 게 최고라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이 꼴을 보고 제만 배불리 먹을 수 있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떼를 지어 박장숙의 집으로 몰려가세.”
“싫어. 나는 굶어 죽어도 가기 싫어.”
마을 사람들은 모이는 곳마다 배가 고파서 못살겠다는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럴수록 박장숙에 대한 미움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편, 박장숙의 집에도 흉년을 맞아 양식을 아끼고 돈을 아끼는 모습이 대단했다. 박장숙 자신도 아침에 죽을 먹었다. 주인이 그러니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인들의 불평도 대단했다.
“창고에 곡식이 얼마나 쌓여 있는데, 이렇게 아껴야하나?”
“그렇지, 우리가 이렇게 아침부터 죽을 먹고 어떻게 일을 하지.”
박장숙은 이런 하인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듣고도 모른 체 했다.
사람의 일이란 항상 자기가 착하고 부지런하면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착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박장숙의 큰아들 박수환이가 하루는 아버지를 찾아왔다.
평소에 아주 엄한 아버지라 큰아들 박수환이도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아버님, 지금 흉년이 들어 온 마을 사람들이 굶고 있습니다.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수환아, 이 아비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생각하며 두 가지를 더 생각하거라. 지금 저 사람들이 흉년에 고생을 죽도록 해봐야 평소에 절약하여 흉년을 대비하는 준비를 하는 거란다.”
“예, 아버님.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
“알겠다. 나도 마을의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우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매어질 것 같았다. 너의 말을 들으마. 네가 지휘해서 우리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곡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단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라. 누구에게 얼마를 나누어 주었는지도 적어 두어라.”
그 다음날, 큰아들 박수환은 마을 사람들을 마을의 넓은 마당에 모이도록 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겸손한 자세로 말했다.
“흉년이 들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벌써 저희가 이렇게 해야 하는데, 좀 늦은 것 같습니다. 저의 아버님께서 창고의 모든 곡식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리리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박수환의 마을 듣고, 그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시 후, 마을 사람들은 박장숙의 창고 앞에서 집안 식구 수에 따라 곡식을 골고루 나누어 받아가게 되었다. 그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벙글거렸고 박장숙을 칭찬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장숙에게 이런 푸근한 정이 있었나?”
“말 말게. 받아가기 미안하네. 우리는 시원한 나무 밑에서 이야기나 하고 놀 적에 장숙은 땀 흘려 이 곡식을 농사지었다네.”
마을 사람들은 박장숙이 섣불리 남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지 않았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박장숙의 그 부지런한 정신을 모두가 칭찬했다. 박장숙의 그 아름다운 정을 은혜로 갚고 싶었다.
“우리 이럴게 아니라. 장숙을 위하여 무언가 보답을 하세”
“그것 좋네. 어떻게 할까”
“장숙의 논밭에 나가서 일을 도와 주자.”
“아니 그보다도 장숙의 근로정신을 우리가 본 받고 그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마음을 담음 수 있는 그런 일이면 좋을 것 같애.”
“맞아. 우리가 혜혈비(惠血碑)를 세우자.”
“그것 좋네. 사실 우리가 받은 곡식은 장숙의 피와 같이 값진 것이야.”
마을 사람들은 박장숙의 그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을 양지쪽 좋은 곳에 혜혈비(惠血碑)를 세워주었다. 그 혜혈비는 오래토록 이 마을 사람들에게 근로정신을 알려주는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