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희망이 있어 행복한 사람들
2009년.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여전히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 같았다. 특히 실업, 가족해체, 자살, 불의의 사고, 온갖 질병 등…. 지난 한 해도 악재 속에서 좌절을 맛보았던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해 나가는 사람들도 사회 곳곳에는 존재한다. 2010년, 새해를 맞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팍팍하고 힘든 삶이지만 가족과 지인을 의지하면서 더 나은 내일을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봤다. 나아가 2010년에는 조금은 불편하고 어려운 현실에
놓인 이웃들에게도 웃음꽃이 가득 피어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중도장애로 은둔생활 10년 만에 새 삶 찾다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서 네일숍을 운영하는 남명미(50) 씨. 허리를 곧추 세우고 손톱 하나하나 정교하게 다듬고 있는 그의 상체와는 달리 책상 밑에 숨겨져 있는 그의 하체는 힘없이 휠체어에 실려져 있었다.남 씨는 다름 아닌 지체장애 1급의 척수장애인이다. 18년 전 추락사고로 경추 7번을 크게 다친 그는 전신이 마비됐고, 추후 끊임없는 재활치료로 그나마 상반신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사고가 난 지 18년이 지났지만 그가 사회에 다시 나온 것은 불과 8년여에 불과하다. 처음 사고가 난 후 10년 동안은 여느 중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을 해왔던 것. 그는“처음 사고가 났을 때는 나만 불행한 사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면서“그러다보니 10년 이라는 세월을 방에서 갇혀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며 지내왔다”고 회상했다. 그러다 지난 2001년쯤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더 이상은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남편과 이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혼을 위해서는 스스로가 자립해서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때부터 그는 군포시장애인복지관을 다니며 재활치료를 통해 꾸 준히 운동했다. 또 군포시 중도장애인 모임인‘수레마루’에 가입하면서 같은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적극적인 외부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는 수레마루에서 부회장역을 역임하고 있다. 그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재활을 위해 비즈공예부터 뜨개질, 배드민턴, 네일아트 등 닥치는 대로 배웠고, 복지관에서 마련해 준 공간에서 1년여간 네일아트를 선보이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남명미 씨는“홀로서기를 위해 바느질이며 뜨개질 등 안 해 본 것이 없다”며“처음에는 숟가락 하나 들힘조차 없었는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다보니 어느 순간 바늘도 집게 되고, 지금은 섬세한 네일아트까지 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 꼭 이루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어떤 두려움도 막힘도 없었다.
10년 동안 집안에 갇혀 지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미친 듯이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홀로서기 재활훈련…외부와 소통 시작
그가 도전을 거듭하고 사회에 정착하기까지는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남 씨는 “서른두 살에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된 딸을 보고 가슴아파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냐”며 “그렇지만 끝까지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주시고 항상 격려해주시는 모습에 용기를 냈고, 막상 세상에 나와 보니 좋은 사람이 너무 많아 또다시 숨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전했다. 특히 가족 친지들이 주변에 살면서 언제 어디서든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달려와 줘 안전망 하나는 확실히 갖춰두고 있다고 자랑이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지 8년째.‘ 손나들이’라는 네일숍을 연 지 횟수로 5년, 만으로는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가게를 오픈한 것도 어머니 건물 1층 상가가 비어 있어 큰 자본이 들지 않았기에 가능 했던 것. 그는“보증금은 고사하고 지금까지 월세 한 푼 내지도 않고 몇 년째 어머니한테 무임승차하고 있다”며“미안하고 송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또한
“항상 밝고 씩씩한 성격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이제 그의 네일가게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놀 수 있는‘동네 사랑방’이 됐다. 처음에는 휠체어에 탄 사람이 자리를 잡고 손톱 손질을 하겠다고 하니, 일반인이 들어왔다가 부담을 가지기도 했지만 한번 두 번 오다보니 단골이 됐고, 식구가 돼 버렸다. 특히‘손님은 왕’이라는 일반적인 가게의 개념과는 달리 여기서 손님은 절대 왕이 아니다.
물이든 커피든 먹고 싶은 사람이 스스로 가져다 먹어야하고, 가끔은 남씨의 몫까지 손님이 직접 챙겨줘야 한다.
하지만 누구하나 불만을 토로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네에서 은행업무를 대신 맡아 해주는 친구도 있고, 병원에 갈 때 도움을 주는 사람, 필요한 물건을 사다주는 사람 등 여러 사람에게 다방면의 도움을 받으며 가게를 운영해 나가고 있다. 남 씨는“손님은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러 와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우리 가게는 오히려 일하는 우리가 더 많은 것은
손님으로부터 받고 있다”며 미안 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불행하다는 자학은 금물, 기쁨 찾기부터”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일궈지는 일터라 항상 웃음이 가득하지만 경영실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월세를 어머니 네일케어로 대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료비 및 전기, 난방, 인건비 등 부대비용이 만만찮다. 특히 사업장의 경우 장애인에 대한 혜택이 전무 해 일반적인 사업장에서 내야하는 비용을 고스란히 내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가게에 비해 케어 가격이 비싼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단골손님이다 보니 재가격을 다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며, 계절을 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못하다는 것.
무엇보다 일반 네일 아티스트들과 비교했을 때 ‘장애’로 인해 작업의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때문에 보통 한 사람을 케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2시간 가량. 남씨 혼자 하루 꼬박 해봤자 5명, 같이 일하고 있는 한지희(33)씨까지 쉬지 않고 일해도 하루 10명 이상을 받을 수 없어 수입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는“비장애인의 경우에는 하루에 20~30명도 한다지만 장애인들은 오래 앉아 있으면 욕창도 생길 수 있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것이 사실”이라며“하지만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하고, 내년에는 좀 더 나아 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하루 하루가 행복하다”고 전했다.
남 씨는 또“중도장애인의 경우 처음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안으로 숨으려고 하고, 해보지도 않고 도움부터 요청하려고 하지만 무엇이든 희망을 갖고 먼저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며“불행하다고 자학하기 시작하면 진취적일 수 없고 이익도 없다”고 했다. 이어“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찾고 할 일을 찾기 시작하면 어떤 고난도 못이길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백혈병도 이겨낸 21세 소녀의 희망이야기
경기도 김포에 사는 최보람(21)씨의 하루 일과는 엄마의 가게 청소부터 시작된다. 평택대학교 방송연예과 3학년인 최 씨가 방학을 맞아 한가한 오전 시간에 엄마의 가게 일을 돕기로 한 것. 그리고 오후가 되면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영등포로 나온다. 커피숍 아르바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고 좋아하는 최 씨는 세달 전부터 이 곳 커피숍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좋아하는 커피도 만들 수 있지만 엄마의 경제적인 사정을 고려해서 자신의 용돈은 스스로 벌어서 써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여느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며, 학교생활을 하는 보람씨. 그가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 줄은 그 어느 누구도 몰랐다. 어느 누군가는 이를 ‘기적’이라고까지 한다고. 최 씨는 11년 전인 초등학교 4학년 때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을 진단받고 생사의 귀로에 선 적이 있다. 손발에 핏기가 없고 감기증상이 오래 돼 가볍게 생각하고 찾은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해 볼 것을 권유했던 것. 곧장 서울의 큰 병원을 찾은 그는 조직 정밀 검사를 통해 ‘급성림프루성백혈병’을 진단받았다.
최 씨는“그때는 어리기도 했고 특별히 아픈 곳이 없어 심각한 병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 후 항암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병이 얼마 전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본 아이들의 병과 같다는 것을 알았고, ‘난 저런 병 안 걸릴 거야’라고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났단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희귀병에 가족들은 모두 당황했고, 당시 래미콘 운전을 하던 아버지는 자신의 병원비를 위해 밤낮주야로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병원비 벌이에 나섰다. 엄마는 최 씨의 병수발을 위해 병원에 거의 매달려 있다 시피하는 통에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언니에게 뺏긴 채 지내왔다.
최 씨는“동생이 7살 때니까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굉장히 필요했던 시긴데 나 때문에 어린 시절을 부모님의 관심 밖에서 자랐다”며“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부모님의 관심이 나에게 더 쏠리는 듯하면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면 동생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3년 6개월, 웃음으로 치유하다
백혈병을 진단 받은 그는 곧바로 입원 수속을 하고 백혈병 치료를 위해 당분간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연락을 했다. 다행히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희귀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학교장의 배려로 교내에서 모금운동이 진행됐고, 지역신문에도 소개되면서 얼마가 들어가게 될지 모르는 병원비에 일부 보탬이 됐다.
모금 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최 씨는 1차 치료에 들어갔다. 그는 꼬박 한 달 동안 진행된 1차 치료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단다. 그는“골수검사에 척수검사,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등 생전 해보지도 못한 다양한 시술을 한꺼번에 하니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너무 고통스러웠다”며 “이후 거의 한달 간격으로 13차 진료까지 하다보니 나중에는 치료에도 요령이 생기더라”고 웃어 보였다.
겨우 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지만 아픈 와중에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부끄러워 엄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고, 엄마와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애써 웃어 보였던 것. 그는“엄마가 티는 안냈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더라”며“내 몸이 아픈 것 보다 경제적으로 힘든게 더 힘들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특히 무균실 치료는 답답하기도 하지만 비용 또한 만만찮아 무균실에 들어갈 때면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고.
꼬박 3년 6개월을 입퇴원을 반복하며 진료를 받던 그에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다. 백혈구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완치가 됐다는 의사선생님의 통보. 백혈병이라 하면 대게가 골수이식을 하던지 자가 골수이식 수술을 해야 쾌유가 되며, 이 또한 재발률도 높다. 하지만, 최 씨의 경우 오로지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만으로 완쾌에 이른 것.그는“의사선생님도 그렇고 간호사 언니들도 기적이라고 하더라”며“아마도 수술 없이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만으로 완쾌된 첫 번째 케이스였을 것” 이라고 했다.
기적같이 얻은 생명, 꿈 이루기 위해 최선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내성적인 성격이라 나서는 법도 튀는 법도 없던 그였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아프다는 것을 티내지 않기 위해서 더 활발하게 행동 해 오던 습관들로 인해 성격이 외향적으로 바뀌기도 했다.그의 엄마 또한 병치레를 하고 있 는 딸을 위해 음식을 하는 습관을 들이다 한식, 양식, 일식, 복어 조리사 등의 자격증을 다량 취득하는 수확을 얻기도 했다. 최 씨도 엄마의 영향으로 중학교 때 한식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 최 씨는 자신의 꿈인‘PD’가 되기 위해 평택대학으로 편입, 학업에 매진중이다. “내가 기획하고 찍고 편집해서 나오는 결과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그 것을 보며 즐거워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흥분 된다”며“육체적으로 힘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부모님도 걱정이 크시지만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있다. 빨리 졸업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고 밝혔다.
그는 마지막으로“기적이라는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며“희귀병으로 고통받고 사는 많은 사람들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것일 뿐 그 순간이 되면 기적은 꼭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