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 라이벌
2023.3.1
오늘 2개월에 걸친 마늘 마지막 출하를 했습니다.
그 동안 출하를 도와 준 특송회사 직원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작업했던 창고를 청소하고,
봄 경작을 위한 검질을 매고
정원 과실나무에 거름을 주고 풀을 뽑아야 합니다.
아울러 이 달 중순부터 시작하는 3차 성지순례 계획도 짜고
부활성가연습과 테너파트 연습도 해야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라이벌을 마무리 정리하면서 사순기간 카페 포스팅도 줄일 생각입니다.
대학교 다닐 때 라이벌은 개인이 아니고 학교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농촌출신 학생들이 많았고 촌스러웠다.
하지만 우직하고 정의감이 넘쳤다.
학교앞 술집도 막걸리를 많이 팔았고 선구자를 즐겨 부르곤 했다.
1학년때는 유신체제 출범으로 위수령과 긴급조치가 실행되었지만
데모를 많이 했다. 재미도 있었고 낭만적? 이기도 했다.
학교정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공방을 벌였다.
전경들은 정문을 뚫고 나오려하는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았고
조금(50여 미터) 행진을 하면 신종무기인 페퍼포그를 발사해서 놀라기도 했다.
페퍼포그는 영어로 후추인 pepper와 안개를 발사하는 차량인 fogger란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다.
교내로 최루탄을 쏘아대면 눈물 콧물이 앞을 가려 눈을 잘 뜰 수가 없다.
이 때 여학생들은 물을 양동이로 들고와 씻어주고 수건으로 닦아주기도 했다.
우리는 전경을 향해 돌멩이나 보도블럭을 깨서 던졌다.
교문을 밀고 나갈 때는 맨앞에 체육과 학생들과 운동부 학생들이
농구대를 밀고 나가면 그 뒤를 우리가 따라서 정문을 뚫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무장한 군인들이 교내로 들어와 진을 쳤다.
그리고는 공부하고 있는 도서실까지 침입해 연행해갔다.
그 이후 데모대는 힘을 잃고 말았다.
우리의 라이벌 학교는 신촌에 있었다.
그 학생들은 세련되었고 가정도 부유했고 서울출신이 많았다.
당연히 여대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학교주변에는 막걸리 집도 있었지만 맥주집이 더 많았다.
평소에는 서로 라이벌 의식을 별로 갖고 있지 않았지만
가을에 열리는 정기전에서 비로서 라이벌 의식이 분출되었다.
한정된 경기장 좌석때문에 정기전 한 달전부터 응원연습을 했다.
대운동장에서 하루 몇 시간씩 연습하고 참석증을 받았는데
내 기억으로 7장을 받아야 정기전 경기에 갈 수 있었다.
졸업생에게도 좌석을 일정부분 배정하고,
거의 모든 학생이 정기전 참가를 원하기에
입장권을 얻기위해 무엇보다 우선하여 연습에 참가했다.
정기전에 가보면 라이벌 학교에 여학생이 많아서
소프라노 소리의 응원이 우리의 응원을 뚫고 잘 들렸다.
치열한 응원전을 할 때는 상대학교를 약올리는 말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골 가마귀, **골 고양이 하는 식이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승패와 관계없이 친선의 노래를 부르면 우정을 다진다.
친선의 노래
오랜 역사 빛난 전통 사학의 쌍벽이다.
어둠 속에 횃불 들고 겨레 앞길 밝힐 때와
밝아오는 광장에 한데 얼려 춤출 때
언제나 그 대열에 어깨걸고 앞장서는
우리들은 미더운 영원한 동지다.
우리 오늘 만난 것은 얼마나 기쁘냐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 다음 문제다.
그리고 시내로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며 졸업한 선배들을 만나고
술집으로 가서 젊음을 만끽하고 낭만을 즐긴다.
일부 선배들은 퇴근 후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응원을 끝내고 들어오는 후배들에게 술값을 지불해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시절 영원한 라이벌 학교가 있었다는 것이
나에겐 행복한 추억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생의 중요한 포인트인
회사선택을 선정하는데 작용할 줄이야~
학창시절 막걸리를 주로 마셔서 '막걸리 찬가'라는 노래도 있듯이,
막걸리를 마시며 대학 문화에 물들었었다.
그러나 취업시에는 맥주를 마시고 싶어 맥주회사를 지원한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막걸리 찬가도 부르지 않고 마시지도 않겠지만~
졸업생 모임에서 부르는 추억의 노래 막걸리 찬가
물론 두산그룹을 지원했지만 1지망 회사로 오비맥주를 지원했다.
당시는 무역회사들이 인기가 있어 두산산업을 1지망 한 지원자도 많았다.
그렇게 원하던 맥주회사에 입사해
지점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정말 많은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주야로 맥주를 마시면서 나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잊고 지냈다.
50세를 앞두고 비로소 나의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생의 좌절감의 광야시절을 보내고 매일 미사 참례할 당시,
심용섭 신부님의 교육분과장 권유를 받아들인 후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듣지는 못했지만 나의 내면에서 들여왔던 목소리~
그것은 신입사원 시절 모 과장님이 나를 보더니
교편을 잡든지 목회자가 어울린다고 하며
회사 잘못 들어왔으니 빨리 직업을 바꾸라고 한 말이다.
당시는 서운한 마음에 무시했지만,
퇴직 후 그 과장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버트 푸르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늦게나마 내 길을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나온 맥주회사에서의 생활도 나름 의미가 있었다.
라이벌 학교로 유명한 대학이 영국에도 있다.
1829년에 시작된 옥스포드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조정경기(The Boat Race)다.
회사 동료들과 유럽산업시찰 겸 여행갔을 때,
사장님으로부터 오비광장에 이은 새로운 맥주업태 개발을 위해
영국의 펍(Pub)을 조사해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런던에서 관광을 하고 일행은 파리를 거쳐 로마로 가고
나만 홀로 런던에 남아 로마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때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옥스포드 대학가에도 갔었다.
옥스포드에 가서 학생에게 옥스포스 대학이 어딘지를 묻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이곳이 옥스포드 대학이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옥스포드 대학이 우리나라 종합대학처럼 된 줄 알았는데
가보니 40여개의 college가 모여있는 지역이었다.
캠퍼스도 없이 건물만 있는 대학(college)도 많았고, 캠퍼스가 있어도 아주 작았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면 모두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정말 무식했던 시절이다.
아무튼 200년 가까이 선의의 라이벌을 이루며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는
영국에서 아니 전세계에서 유명한 대학으로 성장했다.
나의 인생라이벌을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퇴직할 때까지 치열하게 경쟁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부, 권력,명예, 인정, 칭찬, 자존심 뭐 그런것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고 삶의 목표였다.
요즘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자주 낭송한다.
정열적인 젊음의 인생을 살다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선 누님같이
인생을 조용히 회고하며 익어가는 모습~
이제야 깨닫는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운명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인양 외면하면서 살아왔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대명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나의 생활도 변했다.
불완전한 인간이 경쟁상대가 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이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이벌 상대를 선택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
완전하신 주님(예수님)을 닮고 물들어가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
은혜로운 사순절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참으로 알뜰하게 간직 하신
추억 한 페이지
오늘도 행복 하셔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