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23 상 강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리비아 과도정부 ‘리비아해방’ 공식선언 정육점에 전시된 카다피 주검 아들 무타심과 나란히…갈등 불씨 되나 카다피 부족·유족 “주검 인도” 요구 성명 과도정부는 23일 ‘리비아해방’ 공식선언 리비아 과도국가평의회(NTC·과도정부)는 23일 ‘리비아의 해방’을 공식 선언했다. ‘아랍의 봄’을 타고 민주화 시위가 시작된 지 8개월 만이다. 하지만 기쁨에 가득차야 할 이날의 한켠은,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사망 과정과 사후 처리를 놓고 일고 있는 ‘혐오’와 ‘의심’으로 점철됐다. ‘최후의 저항 거점’이었던 고향 시르트 인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카다피의 주검은 그 뒤 미스라타로 옮겨져 시장내 정육점 냉동고에 눕혀진 채 일반에 공개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원래 주검은 피칠갑을 한 모습으로 웃통이 벗겨진 채 공개됐다가 논란이 일자 담요에 덮힌 채로 얼굴만 볼 수 있게 조처됐다. 그의 넷째 아들 무타심의 주검도 그 옆에 놓여졌다. 보통 이슬람 국가에서 사망자는 24시간 이내에 염을 해서 매장된다. 미국이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뒤 곧바로 수장시킨 것은 이런 풍습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의 무덤이 알카에다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카다피의 주검은 사후 사흘이 넘도록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주검이 보관된 정육점 앞에는 구경꾼 수백명이 줄을 섰고, 휴대전화로 주검 사진을 찍으며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고 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은 전했다. 이런 ‘이례적’ 전시는 국민들에게 카다피의 죽음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과도정부 석유장관인 알리 타르후니는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는 것을 더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서 냉동고에 며칠동안 넣어두라고 말했다”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6~12살인 5명의 아들, 조카와 함께 주검을 보러온 무스타파 아라이비는 <아에프페> 통신에 “그가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실제로 보니 이제야 믿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이런 모습이 새로운 국가가 ‘공정함과 용서’라는 기반 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과도정부의 약속을 믿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가디언> 또한 리비아 혁명에 대한 전세계의 박수갈채가 혐오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카다피의 출신 부족과 유족은 이런 비윤리적인 처사에 반발하며 성명을 통해 주검 인도를 요구했다. 논란이 일자 일부 과도정부 관계자는 주검을 친척들에게 인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지만, 빈라덴처럼 비밀리에 수장시킬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카다피의 사망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유엔은 카다피 사망 경위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마무드 지브릴 과도정부 총리는 22일 <비비시>와의 인터뷰에서 “카다피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며 그를 생포해 법정에 세우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전 중 사망이 아니라 과도정부군의 누군가가 카다피에게 총을 쏜 정황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더불어 붙잡힌 뒤 담배를 피는 모습까지 찍힌 무타심이 갑자기 사망한 정황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한겨레 20111023 21:19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502083.html
- 공군 창군 60주년 (2009.4.3. 발행)
2009 - 공군 창군 60주년 기념식 개최 공군은 오늘 성남 서울공항에서 창군 원로와 6·25 참전 조종사, 지역 주민, 해외 참전 용사와 가족 등 2,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군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습니다.
- Postman Smurf
2008 - '스머프' 탄생 50주년 맞아 파란색 피부와 흰색 모자의 어린이 만화 주인공으로 유명한 '스머프'가 탄생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스머프 캐릭터의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벨기에 IMPS 그룹은 '스머프 딸기 케이크'를 재현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머프의 실제 생일인 오는 10월 23일까지 유럽 20개 도시에서 다양한 50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IMPS 그룹과 스머프의 작가 '피에르 컬리포드'의 가족들은 TV 시리즈를 다시 선보이고 영화도 제작할 계획이라며 유니세프 활동에도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지난 1992년 숨진 벨기에 만화가 피에르 컬리포드가 그린 스머프는 1960년대부터 만화책으로 등장해 지난 1981년 미국에서 텔레비전 만화시리즈로 제작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KBS 뉴스 2008-01-15 http://news.kbs.co.kr/news.php?kind=c&id=1493028
2006 - 헝가리 및 알제리 정부, 반기문 장관에게 훈장수여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오늘(10.23) 오후 헝가리 정부에서 수여한 “자유의 영웅 기념메달(Commemorative Medal of Hero of Freedom,17:00)”과 알제리정부의 “국가유공훈장(Medal of National Order of Merit,16:00)”을 헝가리 및 알제리 주한 대사를 통하여 외교통상부에서 전달받는다. (서울=뉴스와이어) 2006년 10월 23일 /외교통상부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퇴역한다 뉴욕 런던 구간을 두 시간만에 날아가는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가 오는 10월23일 비행을 마지막으로 퇴역한다. 1976년에 처음으로 취항한 음속 두 배의 이 여객기 개발에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10억 달러(현재 시가로는 약100억 달러)를 투자하였다. 현재 다섯 대가 날고 있는데 모두 박물관행이 될 것이다.
[콩코드기 연혁] 1969.03.02 -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 성공 (프랑스) 1969.10.01 - 초음속 비행에 성공 1970.11.04 - 10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 1백55 km)의 굉속을 기록 1976.01.21 - 상업운항을 개시 1979 - 콩코드기 생산 중단 2000.07.25 -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 사고 (113명 사망) 2003.06.14 - 파리 에어쇼 개막-콩코드기 고별비행 2003.10.23 - 마지막 상업비행 (런던-뉴욕) 2003.10.24 - 마지막 상업비행(귀항비행)(뉴욕-런던) 2003.11.26 - 콩코드기 마지막 퇴역비행 (히드로공항-필턴비행장)
쑹메이링[宋美齡, 1897.3.5~2003.10.23] [역사속의 인물] '권력을 사랑한 여인' 쑹메이링 쑹아이링(宋靄齡) 칭링(慶齡) 메이링(美齡).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3자매로 모두 독특한 개성을 타고났고 개성만큼이나 인생행로도 다양했다. 엄청난 재력의 은행가와 결론한 아이링은 '돈을 사랑한 여인',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과 결혼한 칭링은 '중국을 사랑한 여인', 장제스(將介石) 총통의 부인이 된 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 불린다. 그 권력을 사랑한 메이링이 2003년 오늘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다. 향년 106세. 그녀는 총통의 부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동료로서 중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역량도 대단해 1936년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를 감금한 시안(西安)사변 때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단독 면담해 장제스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미국 웨슬리 대학을 나온 수재로, 중국과 서방의 문화 모두에 익숙해 양국 모두에서 인기가 있었다. 미국 방문 중 3만명의 인파를 모았으며 2차례나 타임지 표지 인물이 될 정도로 미국 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장제스와의 결혼은 두 언니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의 결과라는 시각도 있지만 어쨌든 장제스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그녀도 책임감 있게 장제스를 대했다고 한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0월 2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6119&yy=2009
2002 - 8th Conference of the Parties to the UN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UN, India, 23 Oct-1 Nov 2002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2000 - 노사정위원회 `주40시간 근무` 합의 노사정위원회가 2000년 10월 23일 김창성 경총 회장,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 김호진 노동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본회의를 열고 현행 주44시간인 법정근로시간을 빠른시간 내에 주40시간으로 단축하고, 업종과 기업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의 주5일 근무제에 대한 노사정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에따라 1989년 법정근로시간이 주44시간으로 단축된 이래 11년 만에 선진국 수준인 주40시간으로 단축되게 됐다. 그러나 노사정위는 주40시간 근무제도의 구체적인 시행시기와 휴일-휴가 제도 개선 등 핵심 쟁점사항은 추후 논의키로 했다. 노사정위는 또 근로자의 생활수준이 저하되지 않는 범위에서 휴가제도 등을 개선하고 정부에 학교수업 주5일제, 교육훈련 및 여가시설의 확충 등 사회적 정비방안을 마련토록 촉구했다. 노사정위는 이를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올해 내에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조선
이번 합의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개월을 끌어온 평화협상을 성공리에 매듭지었다. 양측은 협상과정에서 많은 양보를 이끌어냈다. 이스라엘은 정치범 750명을 석방하고 요르단강 서안 13%지역에서 향후 12주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군하고 팔레스타인은 헌장에 명시된 이스라엘 적대조항을 삭제하기로 약속했다. /조선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씨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30분쯤 인천 자신의 집에서 버스운전기사로 일하는 박기서씨에 의해 피살됐다. 범인 박기서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백범 선생을 존경했다. 지난 6월 백범 추모식 이후 살해를 계획했다. 후회는 안한다"고 밝혔다. 박기서씨는 1997년 11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던중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 제29차 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총회 기념, 1995.10.23 발행
제29차 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총회기념 발행일 : 1995. 10.23 요액인면 디자인 : 제29차 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총회기념 기념인면 디자인 : 총회마크와 올림픽경기장 조감도 액면 : 120원 디자이너 : 이혜옥 인쇄 및 색수 : 평판옵셋 5도 발행량 : 500,000장 공고 : 제157호(10.23) 관보 제13144호 전산분류번호 : 17008411 http://blog.daum.net/rohcs/15701878
남북통일 축구대회는 1990년 10월 11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남북한 축구대표팀이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한 축구대항전이다. 이 대회의 목적은 스포츠 교류를 통해 민족의 동질감을 회복하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이다. 1990년 제11회 베이징[北京 ]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던 중 남한의 장충식 선수단장과 북한의 김형진 선수단장이 9월 29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남북(북남)통일축구대회’를 갖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1956년 10월 23일 부다페스트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약 10만의 시민이 봉기한 반소(反蘇)·반공 운동이 있은 뒤 근로자당은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J.카다르를 당 제1서기로 선출하였다. 1964년에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1968년에는 경제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동구 공산권 중에서는 폭넓은 자유화 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소련의 체코 침공에 가담함으로써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197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당의 지도적 위치를 명시하였으나 1975년에는 과도한 경제자유화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리 포크가 해임되고 라자르가 임명되어 카다르-라자르 체제가 되었다.
제1차 석유파동: 1973년 10월 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비화하여 19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 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에서 원유고시 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매월 원유생산을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함으로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73년 초 배럴당 2달러59센트였던 중동산 기준원유 값은 1년 만에 11달러65센트로 무려 4배 가까이 올랐다. 이는 석유수입국들에게 석유공황이라고 할 만한 사태를 초래했다. 세계경제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져 75년에는 서방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고 각국의 국제수지도 대폭적인 적자를 기록하였다.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OPEC는 국제석유자본(Oil Major)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http://www.issuenonsul.com/board/bbs.asp?tb=tdSisa&mode=view&num=343
한국과학기술연구소('66~'80)는 '과학기술 및 공업경제에 관한 시험, 연구 및 조사를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그 성과를 보급함으로써 산업기술개발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연혁] 1966. 01. 27 -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 02. 04 -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1966. 02. 10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재단법인 설립 1966. 10. 06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 1967. 04. 12 - 과학기술처 신설 1967. 04. 21 - 과학기술처 개청 1969. 10. 23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 1971. 02. 07 - 한국과학원(KAIST) 발족 1981. 01. 05 - 한국과학기술원 (KAIST) (한국과학원 +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아스완하이댐(Assuan High Dam)은 아스완 부근 나일강(江) 급류를 막아 건설한 세계 최대의 록필(rock-fill)댐이다. 1902년 영국인이 나일강의 홍수조절과 관개용수 확보를 위하여 아스완에 댐(Assuan Dam)을 만들었는데, 그 후 나세르(Jamal ‘Abd an-Naser, 1918~1970) 대통령이 댐의 상류 7km 지점에 새로이 하이댐 건설을 계획하였다. 1960년에 러시아의 기술 원조로 공사에 착수하였고 1971년에 완공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많은 문화 유적이 물속에 잠길 것에 대비하여 유네스코(UNESCO)가 중심이 되어 유적의 이전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 최대의 공사는 아부심벨신전(Abu Simbel Temple)의 이전이었다. 이 신전은 BC 13세기에 연안의 절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높이 20m, 절벽 속의 너비 60m였는데, 신전을 구성하는 바위(砂岩)를 톱질하여 20∼30 t의 블록으로 절단한 다음 저수지의 수면보다 높은 위치로 옮겼다. /naver
[역사속의 오늘] 파스테르나크 노벨상 수상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랑 속에서 펼쳐지는 한 인텔리의 비극적인 사랑에 관한 영화 '닥터 지바고'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이 원작이다. 혁명 때문에 사랑하는 라라와 갈라졌다 재회하려는 순간 심장마비로 쓰러진 의사 유리 지바고처럼 파스테르나크의 삶은 통한의 연속이었다. 그 중 1958년 10월 23일 노벨문학상 수상과 거부 선언은 가장 극적인 사례.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이 결성된 뒤 선언된 '사회주의 원칙'은 그를 침묵의 시간으로 몰아넣었다. 파스테르나크는 번역에만 몰두해 '파우스트'(1953) '셰익스피어 희곡집'(1953) 등의 명번역집을 저술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에야 나온 유일한 장편 '닥터 지바고'(1957)는 소련 내에서 발표되지 못했다. 대신 이탈리아에서 먼저 발표돼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겼다. 이 소식에 러시아 문단은 들끓었다. 소비에트 예술과 문학에 대한 모독이었기에 작가동맹은 그를 제명했다. 그를 국외로 추방하라는 탄핵운동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파스테르나크는 어쩔 수 없이 수상을 거부했다. '닥터 지바고'도 파스테르나크도 시대적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5년 10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663&yy=2005
[노벨상을 거부한 수상자들] 지금까지 노벨상을 가장 많이 거부한 나라는 어디일까? 1938년 쿤(Richard Kuhn, 1900∼1967)이 화학상, 1939년 부테난트(Adolf Fridrich Johann Butenandt, 1903∼1995)가 화학상, 1939년 도마크(Gerhard Johannes Paul Domagk, 1895∼1964)가 생리의학상을 거부했는데 이 세 사람은 모두 독일인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언론가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 1889∼1938)가 1935년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결과를 국제 사회에서 자신과 나치 독일을 탐탁치않게 여긴 증거로 생각해 그 후로 독일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은 세계인들이 자신과 나치독일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도마크의 경우엔 체포되어 수상을 거부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고, 그로부터 8년 후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에야 비로소 상장과 메달을 받아갈 수 있었다. 1958년 소련의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cich Pasternak, 1890∼1960)가 문학상을 이와 비슷한 이유로 거부했고, 1964년엔 프랑스의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가장 최근인 1973년 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 1911∼1990)가 평화상을 거부했다. 이중 레둑토가 가장 명확한 수상 거부 이유를 밝혔는데 그가 수상을 거부한 것은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 공동수상자로 선정되었던 헨리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납죽 받아간 것은 두고두고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http://windshoes.new21.org/bbs/zboard.php?id=bottlepost&page=1&sn1= &divpage=1&category=3&sn=off&ss=on&sc=on&select_arrange= headnum&desc=asc&no=100&PHPSESSID=9d0e07dd6bb70f2a86e67aee5203e796
1958 - 벨기에의 만화가 페요가 스머프 연재를 시작하다 [어제의 오늘]1958년 스머프 탄생 ㆍ만화 엑스트라로 시작…내년엔 3D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222129595
오늘의 역사 (10월 23일)[1956년]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이 일시적이나마 동구권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헝가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해 7월, 철권통치를 행사해온 라코시가 당 총서기로 물러나고 개혁주의자 임레 나지가 총리에 올랐다. 나지가 자유화정책을 펼쳐 국민의 지지를 모으자 라코시는 2년도 안돼 나지를 우익편향이라는 이유로 해임하고 시계추를 과거로 되돌렸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으로 동구권에 또 한번 희망이 싹트자 그해 6월 폴란드가 첫 반소(反蘇)봉기의 불을 지폈다. 불은 헝가리에까지 번져 10월 2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대규모 반소(反蘇)봉기가 일어났다. 소련군 철수, 나지 복귀, 자유선거 등을 요구하는 10만명의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한 것이 발단이었다. 공산당은 무마책으로 나지를 총리로 다시 앉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령 선포와 소련군을 끌어들였다. 시민·헝가리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헝가리 전역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펼치며 반소를 외치자 나지는 사태수습을 위해 일당독재 폐지와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30일에는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11월 1일 나지가 바르새바기구 탈퇴와 중립화를 선언하자 11월 4일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 다시 부다페스트를 유린했고 수만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헝가리는 다시 소련군 군홧발 아래 놓였다. 나지는 2년뒤 체포돼 처형됐다가 1989년, 31년 만에 복권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2_0346
1956년 10월 2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설립되었다. IAEA는 세계평화와 복지에 공헌하기 위한 원자력의 사용을 늘리고 기구의 원조가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정부 사이에 세워진 자치조직이다. 1956년 설립되었고 1957년 7월 29일부터 법령이 시행되었다. IAEA의 사업 내용은, 첫째, 원자력을 의약품·농업·저수(貯水)·공업 등 실생활에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둘째, 회의를 개최하거나 전문가를 양성하고 책을 출판하는 등 다각적인 조치로 원자력에 관한 과학기술정보의 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하며, 셋째, 개발도상국에 기술원조를 하며 방사능 보호시설을 만들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이밖에 원자력에 관한 제반 사항을 담당하며, 매년 모든 회원이 모이는 총회를 열어 예산과 사업을 결정한다. 이사회와 사무국에 의해 운영되는데, 이사회는 34개국의 대표들로 구성되며 협약된 법령을 집행하고, 사무국은 사무장과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업계획을 실행한다. 본부는 빈에 있다. /브리태니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는 1954년 10월 23일 창설되었으며 1955년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27차 국제펜클럽 세계연차대회에서 정회원국가로 가입하여 그해 7월에 인준 받았다. 우수한 국내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국제펜클럽을 통해 세계 각국에 소개함으로써 문학의 국제교류를 촉진하고, 아울러 문인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창립을 주도하였던 사람은 변영로(卞榮魯)·주요섭(朱耀燮)·모윤숙(毛允淑)·이헌구(李軒求)·김광섭(金珖燮)·이무영(李無影)·이하윤(異河潤)·피천득(皮千得) 등이고, 1954년 9월 15일 발기인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총회에서 초대위원장에 변영로, 부위원장에 모윤숙·김기진(金基鎭), 사무국장에 주요섭을 각각 선출하였다. 1957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최한 제29차 세계대회 때는 각국 대표 17명을 한국본부로 초청하였고, 같은 해 한국번역문학상 제도를 마련하여 해마다 출판된 우수 번역작품을 선정, 시상한다. 1961년 11월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영문소설집 《Collected Short Stories from Korea》를 발간하였고, 1962년부터 영문기관지 《The Korea P.E.N.》을 발행하는 한편, 아시아 작가회의를 서울특별시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1963년부터는 아시아 재단 후원으로 문학강습회를 시작하였고, 역시 이 재단의 후원을 받아 1965년 7월 한국본부 산하에 펜작가 기금위원회를 발족하여 창작·집필에만 전념하도록 문인들에게 생활보조비를 지급하고 있다. 1970년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국본부 주관으로 제37차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개최, 세계 33개국 157명의 외국 대표와 60여 명의 한국 대표가 모여 '동서문학의 해학'이라는 주제로 토의하였고, 아시아 번역국을 한국에 설치할 것을 의결함으로써 한국본부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1977년부터 한국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장르별로 한해 동안 우수작을 선정하여 한국펜문학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1985년 가을에는 계간지 《펜문학》을 창간하여 발간하고 있다. 임원에는 회장 1명, 부회장 3명, 이사, 감사, 고문 등이 있으며, 본부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다. /naver
1954 -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독일점령 종식 위한 파리협정 조인 서독의 주권회복 및 NATO의 가입을 승인 파리조약 [Treaties of Paris] (7) 1954년 10월 20∼23일 파리에서 조인된 독일(당시 서독)의 주권회복에 관한 제조약. 일반적으로 파리협정이라 부르며 14개국 외상회의에서 채택된 여러 협정을 말한다. 이 결과 서독의 주권회복이 인정되고 연합군의 점령상태가 종결되었으며, 서독은 북대서양조약에 가맹하였다. 또한 서유럽연합을 확대하여 서독과 이탈리아를 가입시켰으며, 서독은 이 기구에 의해서 군비를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은 유럽의 반소적(反蘇的)인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동서 양 진영의 국제적 대립을 격화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네이버
Paris Pacts, four international agreements signed in Paris on Oct. 23, 1954, to establish a new international status for West Germany.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West Germany had been occupied by Allied forces and lacked its own means of defense. By 1950 fear of possible Soviet aggression in Europe had convinced many that West Germany should be rearmed. However, the prospect of a rearmed and once again powerful Germany caused adverse reactions in France. http://www.infoplease.com/ce6/history/A0837651.html
1944 - 레이테 만 전투 발발
- Montgomery, D-Day, 50th Anniv.
- Erwin Rommel (자료 출처: philthema, cantona)
1942 - 몽고메리가 롬멜을 제압한 엘 알라메인 전투 1942년 10월 23일 북아프리카 이집트 서쪽에 위치한 알 알라메인에서 영국의 몽고메리가 `사막의 여우` 독일의 롬멜을 꺾고 2차대전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처칠이 "알 알라메인 이후 우리는 결코 패배의 맛을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이 전투는 중요했다. 2차대전 초기 북아프리카는 유럽의 주전투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히틀러의 서유럽 정복에 자극받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지중해를 `이탈리아의 호수`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면서 북아프리카도 2차대전의 주요 전장으로 부상했다. 1940년 9월 13일 무솔리니는 5개 사단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침공 3일 만에 70마일을 진격하는 등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이에 엉성한 이탈리아 군대는 영국군의 반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이 전투에서 3만1천명의 영국군에 13만명이 포로가 되었고 400여대의 전차 등 각종 무기를 빼앗겼다.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지원을 요청하자 `전술의 천재` 롬멜과 2개 기갑사단을 리비아에 파견했다. 대담하면서도 치밀한 롬멜은 적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가히 `사막의 여우`였다. 롬멜과 영국군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약 1천4백km마일에 이르는 서부사막에서 1년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1942년 6월 21일 롬멜이 마침내 영국군 저항의 상징인 토브루크를 함락시키고 국경을 넘어 이집트 내로 깊숙이 전진, 30일에는 알 알라메인 전방에 이르렀다. 처칠 수상은 현지 사령관을 몽고메리로 교체하면서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롬멜은 시간이 흐를수록 보급난에 시달리는 독일군이 더 불리해 질것으로 판단, 선제공격에 나섰다. 1942년 8월 31일 롬멜은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롬멜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던 몽고메리의 대역습에 독일군은 오히려 패배했고 철수해야 했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서둘러 추격하지 않고 공격할 때를 기다렸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판단한 몽고메리가 10월 23일 21시 40분, 공격명령을 내리자 약 9백문 이상의 포에서 불길이 솟았다. 예상치 않은 기습공격에 독일군은 당황했다. 게다가 롬멜이 신병치료차 독일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은 더했다. 롬멜이 급히 현지에 도착했으나 이미 사태는 영국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독일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튀지니까지 밀렸으나 알제리에 도착한 연합군에 협공을 당해 결국 1943년 5월, 항복했다. 신병치료를 위해 이미 독일로 피신한 롬멜은 3만명의 포로와 2만명의 전사자, 그리고 1만 개 이상의 포와 5백대의 전차 대부분을 빼앗기는 뼈아픈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조선 [역사속의 오늘]1942년 10월 23일, 엘 알라메인 전투 시작 1942년 10월 23일 21시 40분,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군의 포병대가 독일군 진지를 향해 일제히 포격을 시작합니다. 엘알라메인(El Alamein)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엘 알라메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남서쪽 100km 지점에 위치한 육상교통의 요지로 이집트와 리비아를 잇는 길목이었습니다. 2차대전 초기, 유럽 대륙과 떨어져 있던 북아프리카는 전쟁의 광풍에서 떨어져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승승장구에 자극을 받은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지중해를 이탈리아의 영토로 둘러 야심을 드러내면서 북아프리카는 2차 대전의 주요 전장으로 변합니다. 1940년 9월, 이탈리아군은 5개 사단의 병력으로 이집트를 전격 침공합니다. 침공 3일 만에 70마일을 전진하는 등 이탈리아군의 침공은 순조로워 보였지만, 이집트 주둔 영국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상황은 달라집니다. 불과 3만명이 조금 넘는 영국군에게 13만명의 이탈리아 침공군이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으며, 패주하는 이탈리아군은 자신들이 출발한 리비아조차 지켜내지 못할 위기에 몰립니다. 다급해진 뭇솔리니가 히틀러에게 구원을 청하자,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장군과 2개 기갑 사단을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급파합니다. ‘전술의 귀재’, ‘사막의 여우’로 불리는 롬멜장군의 등장이었습니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과 영국군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1천4백마일에 이르는 사막지대에서 1년이 넘는 격전을 벌입니다. 1942년 6월 21일, 마침내 롬멜장군의 독일군은 영국군의 ‘토부룩 요새’를 함락시키고, 6월30일에는 엘 알라메인까지 이르렀습니다. 수세에 몰린 영국은 8월 중순, 영국 제8군 사령관에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장군을 임명하고 일전을 준비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부하들을 다독거리면서 용의주도하게 반격을 준비하죠. 한편, 잠시의 숨고르기를 한 롬멜 장군은 전투가 길어질수록 보급 사정이 원활치 못한 독일군에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8월 31일 영국군에 대한 대공세에 나섭니다. (당시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한 달 동안 필요로 하는 보급물자는 3만톤 이었지만, 실제 보급된 것은 6천톤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접근로에 매설된 지뢰를 처리하는데 꼬박 하루를 소비하고, 알람 엘 할파 능선에서 몽고메리군의 매복에 걸린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49대의 전차를 잃고 퇴각하고 맙니다. 공격자에서 방어자로 입장이 바뀐 롬멜은 멜 알라메인을 사수하기로 마음먹고 독일군 방어 전면 60km에 폭 8km로 지뢰 50만발을 매설해 이른바 ‘악마의 뜰'을 만듭니다. 영국군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돌파하는 길밖엔 없었죠. 몽고메리는 주공을 북쪽의 가장 강력한 진지로 정하고 10월 23일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독일군은 전투 초기부터 불운이 겹칩니다. 영국군의 포격으로 통신시설들이 타격을 입은데가, 마침 신병치료차 독일로 귀국한 롬멜 장군 대리로 사령관직을 수행하던 시투메 대장이 전사하는 바람에 아프리카군단의 지휘계통은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한편, 지뢰밭을 통과하던 영국군도 예상 밖의 큰 타격을 입습니다. 지뢰 사이에 묻어둔 대형 폭탄들이 폭발해 한꺼번에 1개 소대의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는 참사가 속출했습니다. 선두에 섰던 장교들이 모두 전사하는 대대들도 생겨났죠. 엘 알라메인 전 지역이 아비규환으로 변한 가운데 공격하는 영국군이나 방어하는 독일군,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작전 개시 이틀 만에 영국군은 사상자 6천명, 전차 130대를 잃는 큰 피해를 입습니다. 몽고메리의 참모들은 그에게 작전중지를 건의하지만 몽고메리 장군은 단호했습니다. 보급부족에 시달리는 독일군을 밀어 붙이는 데는 물량 공세가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아직도 사용가능한 전차들이 900대나 있다. 그것들은 소모품이다” 10월 26일, 영연방군의 오스트레일리아 제 9사단이 북쪽에서 독일군의 지뢰밭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전날,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급거 귀환한 롬멜 장군은 예비로 남겨두었던 90경기갑사단을 투입하고, 방어선 남쪽의 제21기갑사단에 북쪽으로 향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는 이 명령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쪽으로 투입한 기갑사단들을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보낼 연료가 없었던 것이죠. 롬멜이 예비 병력을 방어선 북쪽으로 이동시킨 사실을 간파한 몽고메리는 북쪽의 주공을 현재 위치에서 8km남쪽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경계선으로 이동시킵니다. 곧 강철과 강철이 맞붙고, 피로 피를 씻어 내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집니다. 독일군의 대전차포는 진격해 들어오는 영국군 전차들을 차례로 격파했지만, 전투가 끝날 무렵 독일군의 전차는 30대 남짓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3만3천명, 기갑전력과 포병은 90%가 괴멸상태였습니다. 11월 2일, 롬멜장군은 전선을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휘하 부대에 후퇴명령을 내립니다. 영국군의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사상자 1만5천명에 전선 돌파의 핵심이었던 기갑부대의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이름만 남은 사단도 여럿이었을 정도니까요. 후퇴를 하면서도 롬멜 장군은 잔존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샬롬파 할파야 고개 매복전에서는 추격해 오는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죠. 그러나 11월 8일, 최초의 미군이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는 등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롬멜 장군은 더 이상 아프리카 군단의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면적인 철수를 지시합니다. 윈스턴 처칠 수상이 “우리는 엘 알라메인의 승리 이후, 두 번 다시 패배를 맛본 일이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이 전투는 2차 대전의 분수령을 마련한 중요한 싸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곰PD의전쟁이야기 2007/10/22 22:00 capa1954
1940 - 브라질의 축구선수 펠레(Pelé) 출생 펠레 [Pelé: (Edison Arantes do Nascimento) 1940.10.23~ ] 펠레는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 축구선수이다. 그는 그 시대에 가장 유명한 선수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들인 축구선수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스치멘토이다. 그는 1958, 1962, 1970년에 브라질 대표팀을 월드 컵 우승 팀으로 이끌었으며, 3번에 걸친 승리로 브라질은 우승 컵인 줄리메 컵을 영구히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키 177.9㎝, 몸무게 75.6㎏의 보통체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을 차는 힘과 정확성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1974년 은퇴를 선언했다가 1975년 뉴욕 코스모스 팀과 입단계약을 맺고 1977년 코스모스 팀을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 수위 팀으로 이끌어놓은 뒤 은퇴했다. 1978년 국제평화상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금세기의 운동선수로 선정되었다. 운동선수로서의 화려한 경력 외에도 그는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한 몇 편의 자서전을 출간했으며, 여러 편의 기록영화에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77년 <펠레 Pelé>의 영화음악과 여러 뮤지컬 음악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브라질의 영웅일 뿐 아니라 전세계 축구 팬들의 우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열광은 모든 것이다. 그것은 기타 줄처럼 팽팽하게 조여져 크게 진동한다."
- 펠레
오늘의 역사 (10월 23일)[1936년] 한강 인도교(한강대교)는 개통후 지금까지 3번의 도교식(渡橋式) 즉 개통식을 가졌다. 첫 도교식은 다리가 처음 놓인 1917년 10월 7일에 있었다. 개통과 함께 장안의 명물로 자리잡았으나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많아 골칫거리였다. 파출소를 설치하고 난간에 “잠깐만 참아”라는 뜻의 ‘일촌대기(一寸待機)’라는 팻말을 붙이면서까지 자살방지에 부심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2_0339
1910 - 시암(타이)의 국왕 출랄롱코른(Chulalongkorn) 사망 출랄롱코른(라마 5세) [Chulalongkorn, 1853.9.20~1910.10.23] Phrachunlachomklao라고도 함. 시호는 Rama Ⅴ. 시암(타이)의 왕. 재위기간 동안 시암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았으며 장기적 안목의 개혁을 단행했다. 몽쿠트 왕의 9번째 아들이었지만 왕비에게서 태어난 첫번째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1868년 10월 부왕이 죽었을 때 출랄롱코른은 겨우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이가 어렸으므로 솜데트 차오 프라야 시 수리야우옹이 섭정했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조정업무를 살피고, 1871년에는 영국령 말라야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1871~72년에는 말라야·미얀마·인도를 여행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준비를 했다. 1873년 11월 대관식을 치른 뒤 야망에 찬 많은 개혁을 시행했다. 우선 노예제를 폐지하고 사법·재정 제도를 개선했으며 왕이 임명한 자들로 입법위원회를 구성했다. 그의 개혁들은 서양식 모델을 따라 진행되었고 그는 이것이 시암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문에 보수파의 반대를 초래했으며, 1875년초에는 정치적인 위기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구세대의 저항에 밀려 그후 10년간은 이렇다 할 개혁정책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능력있고 믿을 만한 관리들을 모아 이들의 도움으로 1880년대 중반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시암의 행정체제를 면밀히 검토할 수 있었다. 1892년에는 서양식으로 지방행정·국방·외무·사법·교육·공공사업 등을 전담하는 12부서를 창설함으로써 대대적인 개혁작업을 추진했다. 이렇게 하여 자의적인 행정관행을 억제했으며, 변경지방의 자치권을 빼앗았고, 법률에 기반을 둔 통치를 실시했다. 그리고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고 국민개병제를 실시해 근대적 타이 시민권의 기초를 세워놓았다. 출랄롱코른이 내정개혁을 실시한 이유는 2가지인데 하나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며, 또하나는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주위 국가들의 운명을 보면서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시암은 '문명국가'라는 사실을 제국주의 열강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암이 무사할 수는 없었다. 1892년 프랑스는 시암에 전쟁을 걸어왔으며, 시암은 1907년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라오스와 캄보디아 서부에 대한 권리를 양도해야만 했다. 1909년에는 말레이족이 대다수인 4개의 속주 켈란탄·트렝가누·케다·페를리스를 대영제국에 넘겨주어야 했으며, 영국의 치외법권도 인정해야 했다. 영국에 양도한 이러한 권리는 이후 20년 뒤에 반환되었다. 출랄롱코른은 서양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서양 세력들간에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시암이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동등하게 대우받도록 노력했다. 1897, 1907년 유럽 여행중 서양 군주들은 그에게 왕의 예우를 해주었다. 타이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출랄롱코른은 1910년에 죽고 아들인 바지라부드에게 근대적인 독립왕국인 시암을 남겨주었다. /브리태니커
리엘 [Riel, Louis, 1844.10.23(22)~1885.11.16] 캐나다 서부 메티스(특히 프랑스인과 인디언들의 혼혈인)의 지도자. 그는 몬트리올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미국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잠시 서기로 일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869년 캐나다 서부 허드슨스베이사의 영토권을 캐나다 자치령으로 이전하려는 정책이 실시되고 영어사용 거주자가 유입될 가능성이 커지자 메티스들의 경계심이 높아졌다. 이에 리엘이 지도력을 발휘하여 캐나다 측량사의 작업을 저지했으며 총독 대리인인 윌리엄 맥두걸이 레드 강 유역으로 들어오려던 것을 막았다 (→ 리엘 반란). 이들은 허드슨사의 본사가 있던 개리 요새(지금의 위니펙)를 점령하고 리엘을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 캐나다와 협상을 했다. 1870년 캐나다 의회는 매니토바 법안을 통과시킨 뒤 매니토바 주를 수립하고 폭도들을 사면할 것을 결의했다. 그동안 리엘의 정부는 군법회의를 열고 영어사용권의 캐나다인들을 처형함으로써 그들을 자극했다. 그결과f 폭도사면은 취소되고 리엘 무리에 대한 군사행동이 취해졌다. 1870년 8월 개리 요새가 함락되고 반란은 종결되었으며 리엘은 도망쳤다. 1년 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다른 캐나다인들과 힘을 합쳐 미국 페니언 단원(아일랜드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가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격려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1873년 리엘은 캐나다 자치령의 의회 의원으로 오타와에서 선서까지 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의회에서 추방되었으나 곧 다시 선출되었다. 1875년 2월에는 공식적으로 5년간 법적 권리를 박탈당했다. 1877~78년 정신병을 앓고 난 뒤 1879~84년까지 몬태나에서 살았으며 1883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거기서 그는 공화당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내 메티스를 조직하는 데 노력했다. 1884년 서스캐처원의 메티스들은 캐나다 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토지권을 옹호해 달라고 리엘에게 요구했다. 처음에는 합법적으로 일을 진행했으나 1885년 3월 그는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뒤이어 봉기를 일으켰으나 캐나다 정부에 의해 격퇴된 뒤 그는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은 퀘벡과 온타리오에서 인종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민족주의 운동의 시작을 예고했다. /브리태니커
- 'Peasant Woman'
라이블(Leibl, Wilhelm, 1844.10.23~1900.12.4] 쾰른 출생.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1869년 파리로 이주했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이듬해 뮌헨으로 돌아와 1873년 이후 바이에른의 시골에서 살았다. 파리에서 G.쿠르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그것을 다시 그의 독특한 사실적 수법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19세기 독일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농민으로 지냈고, 정확한 묘사력과 날카로운 관조력으로 농민생활을 충실하게 그렸다. 초상화가로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주요작품에 《아버지상(像)》《마을의 정치가》《교회의 세 여인》《담배 피우는 농부(農婦)》《밀렵자(密獵者)》 등이 있다. /naver
라루스 [Larousse, Pierre-Athanase, 1817.10.23~1875.1.3] 투시 출생. 베르사유사범학교를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잠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나, 1837년 파리에 와 《사학론적(辭學論的) 기초문법 Grammaire elementaire lexicologique》(1849)을 저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라루스백과사전 및 사전 편찬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문법분석제요 Traite complet d’analyse grammaticale》 《19세기 세계대백과사전 Grand Dictionnaire universel du XIXe siecle》(15권, 1866~1876) 등이 있다. /naver
라이히하르트 [Leichhardt, (Friedrich Wilhelm) Ludwig, 1813.10.23~1848.4.4] 오스트레일리아 초기의 국가영웅·탐험가·박물학자(博物學者). 그가 의문 속에 실종되자 거의 1세기 동안이나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베를린과(1831, 1834~36) 괴팅겐에서(1833) 대학을 다니는 동안 철학에서 자연과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이때 영국 출신의 학생 윌리엄 니콜슨을 만나 1837년 그와 함께 영국으로 갔다. 이 둘은 런던에 있는 왕립외과대학, 대영박물관, 파리 식물원에서 의학과 박물학을 공부하는 등 저마다 연구를 계속해나갔으며 영국·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에서 야외 연구를 하기도 했다. 1841년 니콜슨은 라이히하르트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경비를 대주었다. 1842년 라이히하르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내륙을 탐험할 목적으로 시드니에 상륙했다. 1842~44년 헌터 강 계곡에서 야외 연구를 하며 식물 및 암석 채집물을 정리하고 지질학 기록을 만드는 한편 강의도 했다. 그는 식민 사무소에 공식적인 육로탐험을 신청했는데 채 허가가 나기도 전에 성급하게 공공 기부금으로 나름대로 탐험을 추진했다. 1844년 8월 동료 6명과 함께 시드니를 출발했다. 10월에는 4명의 단원을 추가한 뒤 포트에싱턴으로 건너가기 위해 달링다운스의 최선단(最先端) 기지를 출발했다. 탐험 도중에 2명은 되돌아가고 1명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 살해되었으나, 나머지 대원들은 1845년 12월 포트에싱턴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탐험대가 모두 죽었다고 판단한 뒤 단념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시드니로 돌아오자 크게 놀라 반가워하며 환영했다. 탐험대는 정부로부터 1,000파운드의 격려금을 받았고, 여러 사람들에게서 1,500파운드가 넘는 기부금을 받았다. 1847년 라이히하르트의 탐험일지가 간행되었다. 8명의 대원이 참여한 2번째 탐험은 1846년 12월 달링다운스를 출발해 서쪽 해안을 따라 남쪽 스완 강 정착지까지 갈 목적이었다. 그러나 식량을 나를 동물들을 잃어버리고 대원들이 열병을 앓게 되자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1847년 6월 일행은 다시 탐험을 떠났으나 역시 중간에 돌아왔다. 라이히하르트는 6명으로 탐험대를 재조직해 1848년 3월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그가 4월 4일에 지금의 로마 마을 근처의 기지에서 마지막 편지를 쓰고 떠난 뒤 이 일행의 소식은 끊겼다. 라이히하르트 자신은 이 탐험이 2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이들을 찾기 위해 1852년에 시작된 수색작업은 그뒤로도 계속되었으며 원주민들과 함께 사는 백인들이 있다는 소문에 따라 1930년대에는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 수색작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오지(奧地)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나중에 세워진 백인 정착지들은 이러한 정보 덕을 크게 보았다. 라이히하르트의 탐험으로 정착에 알맞은 방대한 땅과 중요한 여러 강들이 발견되었으며 초기 오스트레일리아 지도가 작성되었다. 그의 초기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47년 파리 지질학회 상과 런던의 왕립 지질학회에서 주는 후원자 메달이 수여되었다. 또 프로이센 정부로부터는 군복무 기피죄를 용서받았으며 그가 남긴 과학저서와 강의 기록이 많은 나라에서 출판되었다. 그에 대한 전설을 기초로 패드릭 화이트는 소설 〈바스 Vass〉(1957)를 썼고, 1941년에 A. H. 치점은 그의 전기(傳記)를 펴냈다. 치점의 전기는 1955년 개정되어 〈미지의 여행 Strange Journey〉(1973)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968년 그의 편지를 모은 책(3권)이 나왔다. /브리태니커
1805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Stifter, Adalbert) 출생 슈티프터 [Stifter, Adalbert, 1805.10.23~1868.1.28] 오스트리아 베멘(현 체코슬로바키아)의 산간 도시 오버플란 출생. 삼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6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오스트리아의 크렘스뮌스터에 있는 수도원 부속학교를 거쳐 빈대학 법과에 들어갔으나, 법률보다는 자연과학에 관심을 더 기울였다. 그가 작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35세경이었는데, 그는 사실주의 시대에서 괴테의 전통을 계승한 독특한 이상주의를 전개하였으며, 20세기 초에 재평가를 받고부터 고전적 작가로서 더욱 중시되었다. 1848년 혁명 후 빈에서 린츠로 옮겨 장학관이 되었다. 그가 빈 시절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습작집 Studien》(6권, 1844∼1850)에 들어 있는 《교목의 숲》 《홀아비》 《브리기타》 등을 꼽을 수 있다. 장학관의 격무 속에서도 꾸준히 창작에 힘을 쏟았으며, 한때 3월혁명(1848)의 실패로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원인을 미숙한 인간성에서 찾았고, 교양이야말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과로하여 간장병으로 죽었는데, 일설에는 면도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도 있다. 단편집 《여러 가지 돌 Bunte Steine》(1853)과 괴테의 교양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장편 《늦여름 Der Nachsommer》(1857)은 독일 교양소설의 대표작이다. 이 밖에 역사소설 《비티코 Witiko》(1865∼1867)도 있다. /naver
로르칭 [Lortzing, (Gustav) Albert, 1801.10.23~1851.1.21] 베를린 출생. 체계적인 음악교육은 받지 못하였으나 극장생할을 통해 오페라에 정통하여, 배우 ·가수 ·지휘자로서 활약하는 한편 작곡도 하였다. 특히 1833년에는 라이프치히 오페라극장의 제1테너가수가 되었고, 1843년에는 그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의 오페라는 제재의 선택, 각본의 구성, 효과적인 장면 등에서 남다른 면을 찾아볼 수 있고 음악적으로도 밝고 즐거운 데에 특징이 있다. 대표작은 《2명의 사냥꾼》(1837) 《러시아 황제와 목수》(1837) 《밀렵자》(1842) 《분디네》(1845) 《칼 대장질》(1846) 등을 들 수 있다. /naver
1752 - 프랑스의 요리사, 통조림의 시조 니콜라 아페르(Appert, Nicolas) 출생 아페르 [Appert, Nicolas François, 1752.10.23(1749.11.17)~1841.6.3] [오늘의 경제소사/10월23일] 아페르 나폴레옹 자신이 쫄쫄 굶다 겨우 생환한 적도 있다. 쿠데타로 1800년 집권한 나폴레옹이 가장 먼저 내건 포고문 중 하나가 음식물 저장방법에 대한 현상 공모였다. 수많은 과학자와 식당업자들이 응모했지만 대상을 차지한 주인공은 니콜라스 아페르(Nicolas Appert). 샴페인병 제조업자였다. 1752년 10월23일, 파리 근교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페르는 어려서부터 제과점 견습공으로 일하며 음식물 염장보관과 양조를 배우며 자랐다. 소규모 양조업으로 독립한 후 독자적으로 식품의 장기보관을 모색하던 중 나폴레옹의 현상공모을 보고 연구에 박차를 가해 병조림을 발명해냈다. 주둥이가 큰 병 속에 익힌 음식물을 넣은 후 공기를 빼내고 촛농과 코르크마개로 밀봉하는 병조림으로 아페르는 현상금 1만2,000프랑을 받아 대량 생산 공장을 세웠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병조림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한 이후 나폴레옹군이 거둔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점. 대신 병조림은 라이벌인 영국으로 건너가 통조림으로 발전한다. 강철을 거쳐 주석 통조림이 나오면서 인류는 식품의 장기보관 고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가장 반긴 것은 뱃사람들이었다. 통조림이 본격적으로 퍼진 것은 미국 남북전쟁. 연간 1,000만캔씩 뿌려졌다. 요즘도 전세계에서 소비되는 연간 1,000억개 통조림 중 약 20%는 미국에서 제작된다. 아페르의 병조림은 통조림에 자리를 내줬지만 최근에는 가정에서도 손쉽고 깨끗하게 제작이 가능한 웰빙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6/10/22 17:39
가브리엘 [Gabriel, Jacques-Ange, 1698.10.23~1782.1.4] 조부 J.가브리엘은 왕실건축가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부친과 그가 대를 이어 왕실건축가가 되었다. 수법은 고대 및 그리스도교건축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로코코 양식(로코코 미술)을 벗어나, 프랑스 신고전주의 건축의 선구자가 되었다. 퐁텐블로 ·베르사유 ·마를리 ·루브르 등의 궁전들을 개축하였으며,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1749∼53) 및 그 관련 건축물의 조영(造營)은 특히 유명하다. 이 밖에 오텔 크리용(Hotel Crillon), 샤토 뒤 프티 트리아농(Chateau du Petit Trianon) 등도 유명하다. /naver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