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사도 8,26-40
복 음 : 요한 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로마제국의 정치인인 세네카는
‘모든 바보의 한 가지 공통점은 항상 살아갈 준비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고,
프랑스 철학자인 몽테뉴는
‘나는 다른 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도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끊임없이 왼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명언을 읽으면서 얼마나 미루지 않고 지금 즉시 행동했는가를 떠올려 봅니다.
사실 미루지 않고 25년 가까이 해 온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글 쓰기입니다.
의무감을 느끼기 위해 매일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써왔습니다.
우연히 2,000년 초반에 썼던 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25년을 계속해서 쓰다 보니 지금 역시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25년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루지 않고 지금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더구나 행동해야 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미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루는 것은 지금 훌륭해질 수도 있는데,
굳이 내일 훌륭해지기로 마음먹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은 절대로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윤택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자기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주님의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했다고 해서 지금 특별한 무엇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는 지금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없는데, 굳이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나의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양식이라며,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나눠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어떤 형제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성당 나올 시간이 없습니다.
성당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주말에는 자기 취미 활동하느라 시간이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충분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지만, 자기 취미 활동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나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고 있나요?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중들은 그분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요한 6,4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살아있는 빵'이란 당신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살아있는 활동 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당신의 살', 곧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진 살’입니다.
먹혀서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그를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고,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는 ‘살’입니다.
이는 당신의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를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신비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단지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드높여지고 영광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탄하올 신비인지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인 것입니다.
사실 '먹다'(τρωγω, ‘씹다, 씹어서 부수다’)라는 동사는
인간이 음식을 씹을 때 사용하는 동사가 아니라,
초식동물이 풀을 먹을 때 ‘새싹을 입으로 뜯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초식동물이 풀을 씹을 때는 입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의 근육을 연계해 온몸이 함께 움직여 씹듯이, 말씀을 온몸으로 음미하며 먹는 것,
곧 삶으로 ‘실행’하는 것, ‘실행’으로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를르의 체사리우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들끓었듯이 구더기가 들끓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바로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요한 6,51)이라 하셨으니,
동시에 그 살을 먹은 우리 역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 주시오니,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제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살아있는 생명의 빵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속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그때 이미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응답을 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한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부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드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시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살아있는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고해성사는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시켜 주는 매우 훌륭한 방법입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모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별로 할 일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할 일이 많은 사람도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이 영성체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침 산책길에 신기한 현상을 봤습니다.
둥근 보름달이 서쪽 하늘에 환하게 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쪽 하늘에 여명이 생기면서 점차 밝아졌습니다.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이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마침내 태양이 붉게 떠오르자,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자연현상이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그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6월 24일입니다. 이는 절기상 하지입니다.
하지까지는 낮이 길어지지만, 하지가 지나면 낮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입니다. 절기상 동지입니다.
동지까지는 낮이 짧아지지만, 동지가 지나면서 낮은 점차 길어집니다.
둥근 달이 태양이 떠오르자, 자리를 양보했던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오시자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셨다고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달과 태양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태양이 주는 강렬한 힘도 좋지만, 달빛이 주는 은은한 감성도 좋습니다.
한국에서 천만 명이 넘게 보았다는 ‘파묘(破墓)’를 댈러스에서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월광에 물드는 신화가 생각났습니다.
어릴 때,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무당집 아들이 친구였습니다.
친구 집에 가면 굿을 하는 것을 보았고, 먹을 것도 많았습니다.
벌써 50년이 넘은 기억입니다.
친구 집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여름에도 시원한 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예전에는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풀이하였습니다.
길과 복은 청하고, 흉 화는 멀리하도록 굿판을 벌였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유교가 채워주지 못했던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는 굿판이었습니다.
태양과 달, 바위와 나무, 곰과 호랑이, 혼과 영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던 월광에 물들던 신화였습니다.
영화 파묘는 무당과 지관이 함께 어우러져 신명 나는 굿판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그 서사에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있고,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옹골찬 연기가 있습니다.
디지털과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태양에 바래진 역사와
월광에 물든 신화가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결국 남는 게 없습니다.
양파는 껍질을 벗기는 것보다 요리해서 음식의 재료로 쓰는 것입니다.
종교는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시작과 끝을 파악하는 것보다
지치고 힘든 우리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증명하고, 해석할 필요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사도와 공동체가 온몸으로 증언하고, 살아냈던 신앙의 신비입니다.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했던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직접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가 직접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만져봐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저는 어머니가 저를 낳은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낳으신 어머니를 믿습니다.
어머니의 젓을 먹었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2000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미 햇빛에 바래진 역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교회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모든 걸 버렸던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던 신앙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작은 물방울도 시간만 있으면 큰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길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능히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아드님은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죽음을 취하셨고, 죽음을 이기도록 돌아가셨다.
이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그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이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이 모이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명을 주신 말씀은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여야 할 것이다.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형제가 아침 식탁에서 특별한 숫자를 자주 셉니다.
“8,000!”“7,999!” 아직 남아있는 살아갈 날의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적으로 좋은 노력입니다.
남아있는 날수를 헤아리며, 죽음을 묵상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하기에
더욱 충만한 하루를 살고자 하는 짧은 피정입니다.
저도 작년 종합건강 검진 후에 기대 수명 몇 살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그래서 헤아려 보니, 남은 날은 이제 겨우 7000일 남짓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뜨뜨미지근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날 하루를 돌아보고 나면 참으로 기가 막힌 날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빈둥빈둥한 날입니다.
이제 남은 날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이걸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보다 더한 하루는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린 날입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좌충우돌 이웃들과 부딪치고,
나나 상대방이나 크게 상처 입은 마이너스의 날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주로 사랑을 만난 날입니다. 크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날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에 몸 바친 날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하루를 살아도 영양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것,
하루를 1년같이, 하루를 영원처럼 산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는 우리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
지상에서의 모든 순례 여정을 내려놓고 드디어 하느님을 뵙는
결정적 순간의 영원한 삶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내 헌신과 내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
우리는 순간적이나마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성체 순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합일하는
너무나 은혜롭고 행복한 순간, 결정적 구원을 미리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머나먼 훗날, 젊음이 지나가고,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인생의 9부 능선을 넘은 후에야 맛보기보다는, 지금부터 맛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원의 성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성체를 모신 우리가 이 지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을 동반자들과 나누며 만끽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은 곧 그리스도의 성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35-40절)과 오늘 복음(44-51절)을 함께 보면
바로 연결되지 않고 41-43절이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빠진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이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따하냐?’”
하시고는 44절의 말씀을 계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을 ‘군중’ 대신에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다시 한번 유다인들로부터
총체적인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생명의 빵’에 불신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 그 빵을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이다.(34절)
따라서 그들의 불신은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예수 자신에 있다.
예수 주위의 군중들은 거의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와 그의 부모를 모를 리가 없다.
동시에 이들은 ‘위로부터 난 적이 없기 때문에’(요한 3,3 참조)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말씀의 참뜻을 알 리가 없다.
하느님의 복음 앞에 인간의 태도는 늘 그렇듯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 하는 점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가문이나 출신, 혈연이나 학벌 등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해버리는 인간의 태도가 늘 걸림돌이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20년 이상 목수의 아들로서 두 손안에 쥐어진 연장을 통하여 땀 흘리며
하느님께 바쳐진 시간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들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自意識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神的 출처를 맑혀 유다인들의 ‘못마땅해하는 마음’을 채워주시기 보다는
이를 一蹴해 버리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배움을 받도록 권고하신다.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풀리지 않는 神祕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 행위와 하느님의 선택의 관계이다.
우리는 어제 복음을 통하여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와
‘그 사람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시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립하였다.
이 점을 예수께서는 다시금 강조하고 계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44절)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그 인간의 가까이 또는 內心에서 그를 불러주셔서
하느님 생명의 공동체로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움직여 주시면, 인간은 동시에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예수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결단인 동시에 하느님의 선택적 선물인 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45절)
일단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오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47절)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며(48절) 이 빵을 그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고 죽어간
그런 만나와 같은 빵이 아니라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다.(50-51절)
이 빵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요, 하느님의 거룩한 몸이요, 聖體인 것이다.
세상은 늘 자기들 방식대로 빵을 찾아왔다.
태초의 인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영원히 세상의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빵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모든 죽음은 결국 육체의 생명을 영위할 세상의 빵을 더 이상 못 먹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도 세상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선사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聖體인 것이다. 성체는 세상의 빵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를 받기 위해 우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나아가 이 성체는 ‘찾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생명의 빵
송영진 모세 신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44-51)
1)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구원을 받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요한 6,37).
따라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다.”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마지막 날의 다시 살아남’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당신이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요한 6,40).
2)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나에게 온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누구든지 ‘나에게만’ 와야 한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1코린 8,6).
만일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메시아(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뒤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3)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말씀은
이미 여러 번 강조된 말씀인데,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은,
“내가 곧 생명이다.” 라는 선언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계시’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고,
그 생명력은 당신에게서만 나온다는 선언이고 계시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만나’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양식이긴 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양식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나’를 언급하신 것은 사람들이 먼저
‘만나’를 언급하면서 ‘만나’처럼 평생 날마다 먹을 수 있는 빵을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날마다 배불리 먹는 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시는데,
이것은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만 믿음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47절)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과(50절)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말은(51절),
뜻은 같은데, 표현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이 내 몸 안에서 소화가 되고 흡수되어서
내 몸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온전히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엄마의 몸이 제공하는
생명력을 받아먹으면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주는 생명력을 태아가 받아먹는 것은,
엄마를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을,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은,
당신이 곧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을 먹는 일이,
또 예수님의 살을 먹는 일이 같은 일이고
큰 은총이라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의 뜻과 생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와 관련된 아름다운 예를 한 가지 소개합니다.
에티오피아의 관리로서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고관은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야 하였던 필리포스에게
“성령께서 ……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라고 지시하시는데,
이때 ‘바싹 다가서라’라고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콜라오’는
매우 가까이에서 마치 하나가 되는 것처럼 바짝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답답해하는 관리에게, 바로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알아듣다.’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고 그 현실을 굳게 믿음으로써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내재화하는 ‘구원적 앎’을 뜻합니다.
필리포스의 설명으로 구원적 앎을 얻게 된 관리는 기뻐하며 말합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그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면,
살아가는 데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으로 접근하지 않을 때 매우 심각한 오류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말씀을 정보와 지식으로만 접근하였기에
끝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성경 연구가 그저 이해되지 않는 고대의 문장을 붙들고 있는,
억지스럽거나 고단한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