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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축구선수 손흥민 아시아인 최초로 EPL 100골
손흥민은 영국 런던 토트넘핫스퍼스타디움에서 열린 브라이튼 호브&알비온과의 2022-23시즌 프리미어리그 30라운드에서 전반 10분 선제골을 성공시켜 프리미어리그 개인 통산 100호골에 성공했다. 손흥민이 페널티에어리어 왼쪽 외곽에서 오른발로 강하게 감아때린 슈팅은 골문 구석으로 들어갔다. 지난 2015년 9월 토트넘에 합류한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 260번째 경기에서 개인 통산 100호골에 성공했다. 토트넘은 손흥민의 통산 100호골과 함께 브라이튼 호브&알비온에 2-1 승리를 거뒀다.
이는 아시아 선수 사상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100호골을 달성한 것은 거대한 업적이자 역사의 일부'라고 언급했다.
2023년 블랙핑크 ‘셧 다운’ 뮤직비디오 유튜브 조회수 4억 회 돌파
블랙핑크 두번째 정규 앨범 타이틀곡 ‘셧 다운’과 멤버 로제의 솔로곡 ‘온 더 그라운드’ 댄스 영상이 유튜브에서 나란히 억대뷰를 돌파했다.
8일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블랙핑크 ‘셧 다운’ 뮤직비디오는 이날 오전 7시 24분께 유튜브 조회수 4억 회를 넘어섰다. 공개 약 204일 만에 통산 17번째로 4억뷰 영상 대열에 합류했다. ‘온 더 그라운드’ 댄스 영상 또한 7일 오후 10시 21분께 유튜브 조회수 1억 회를 달성했다. 2021년 3월 23일 공개된 지 약 2년 만이다. 팀 통산 40번째 억대뷰 콘텐츠다.
2022년 해경 헬기 제주 마라도 인근에서 추락 2명사망 1명실종
2022년 경남 하동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선사시대 '성혈'이 발견
2021년 이집트에서 약 3천400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 유적 발굴.
지금까지 발굴된 이집트 고대 도시 유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이곳은 룩소르 유적지 인근 모래 속에 고스란히 묻혀 있다가 빛을 봤다.
이집트의 저명 고고학자인 자히 하와스는 4월8일 남부 룩소르에서 고대 도시 유적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도시 유적은 고대 이집트 신왕국의 첫 번째 왕조인 18왕조의 9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BC 1386∼BC 1349 재위) 때 건립됐으며, 그의 아들인 아멘호테프 4세는 물론 12대 파라오인 투탕카멘(BC 1334∼BC 1325 재위) 재위 시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발굴팀은 추정하고 있다.
2019년 조양호 한진그룹(대한항공) 회장 별세
2015년 46년 만의 ‘오(五)둥이’ 탄생
아담(왼쪽)과 다니엘레 버스비 부부가 인큐베이터 안의 다섯 딸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를 돌보고 있다. 1915년 4월8일 미국에서 사상 최초로 다섯 딸 쌍둥이가 탄생했다 다섯 쌍둥이 출생은 세계적으로도 1969년 영국 런던에서 다섯 쌍둥이가 태어난 이래 46년 만에 처음이다. 이번에 한꺼번에 다섯 딸을 얻은 부모는 텍사스에 사는 아담과 다니엘레 버스비 부부. 이미 4세 딸을 둔 부부는 자식 6명을 모두 인공 수정으로 얻었다.
산모는 “한꺼번에 아이를 다섯이나 갖게 되다니 믿을 수 없다”면서 “하지만 일단 딸들을 보고 나니 그 아이들 없이는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태아 다섯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산모는 매일 4500㎉를 섭취해야 했다. 성인 남성이 하루에 섭취하는 열량(2500㎉)의 거의 두 배다.
다섯 쌍둥이는 임신 28주 만에 4분간의 제왕 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둘은 일란성, 셋은 이란성 쌍둥이다. 수술을 맡았던 텍사스여성병원은 “수술엔 어려움이 없었고, 아기들 체중이 1㎏이 채 되지 않아 인큐베이터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모두 건강하다”고 밝혔다.
2013년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 뇌졸중으로 세상 떠남(88세)
2013년 개성공단 잠정폐쇄, 개성공단진출기업 123 북쪽 노동자 5만3천여명
2011년 북한, 현대 측에 준 금강산관광 독점권조항 효력취소 통보
2011년 해방 후 여성교육에 앞장· 세종대 설립자 주영하 박사 별세
함남 단천 출신인 그는 경신고와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고 연세대, 미국 애주사퍼시픽대, 대만 문화대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0년 그가 세운 경성인문학원은 해방 후 수도여자사범대로 발전했다. 수도여사대는 1979년 교명을 세종대로 바꾸면서 남녀 공학으로 변신했고 1987년 종합대로 승격했다.
주 박사는 세종대 학장과 대양학원 이사장 및 명예이사장을 지내면서 교육에서 소외당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이에 앞서 일제 강점기에는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한글 보급운동에 뛰어들어 국어순화추진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이사장과 도덕재무장운동(MRA) 이사장을 지냈다. 서울과 춘천에 세종호텔을 짓고, 세종대에 호텔경영학과를 만들어 호텔·관광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국민훈장 동백장과 무궁화장, 외솔상 및 독일문화훈장을 받았다.
2011년 한국 드라마계 전설, 신현택 삼화 네트웍스 회장 별세
“이 정도 암(癌)은 이겨낼 수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난 앞으로도 계속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니까.”
지난해 1월 병원에서 건강 진단을 받다가 폐암 3기 후반 판정을 받았던 신현택(66) 삼화네트웍스 회장은 되레 가족에게 당당하게 큰소리를 쳤다.
시청률 50%를 넘기며 국민 드라마로 통했던 ‘제빵왕 김탁구’, 가족 간 깊은 애정을 다뤄 세상을 훈훈하게 만들었던 ‘인생은 아름다워’ 등이 그의 지휘 아래 탄생했다. 폐암의 그늘 속에서도 그렇게 1년 3개월여를 불태우듯 살아왔던 그가 결국 8일 오전 9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보성고와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1970년 영화 제작사 신프로덕션을 설립해 비디오테이프 제작·유통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80년 삼화프로덕션을 세웠고 85년부터 본격적인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 30년 가까이 한국 드라마계의 ‘미다스의 손’ 으로 불리며 흑자 경영을 해왔다. 그가 만든 드라마는 ‘사랑이 뭐길래’ ‘엄마가 뿔났다’ ‘내 남자의 여자’ ‘목욕탕집 남자들’ ‘부모님 전상서’ ‘명성황후’ ‘애정의 조건’ ‘불꽃’ ‘며느리 전성시대’ 등 100여편에 달한다. 대부분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일부는 ‘시대의 상징’ 이라는 평가를 받은 명작이었다.
고인은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장, 대중문화예술산업총연합회장, 국제문화산업교류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2003년에는 대한바이애슬론연맹회장 자격으로 일본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에 선수단장으로 참여했다. 당시 현지에서 북한과의 막후 협상을 통해 남북한 선수 공동 입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스포츠계 인사들은 "고인이 북한 선수단 관계자들을 술자리에 초청, 자연스럽게 친목과 화합의 자리를 만들자 북측이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2009년 소말리아 해적, 미국 선원 20명 탄 선박 납치
미국 선원 20명이 승선한 미국 선적 컨테이너선이 2009년 4월 8일 소말리아 해상에서 해적들에 의해 납치됐다.
덴마크 해운사 AP 몰러-머스크는 이날 성명을 통해 “오늘 오전 5시(국제표준시 기준)께 컨테이너선 ’머스크 앨라배마’호가 해적들의 공격을 받고 납치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이 회사는 이어 “피랍 선박은 미국 자회사 머스크 라인의 소유로, 미국인 선원 20명이 승선해 있다”고 덧붙였다.
소말리아 해상에서 미국인 선원들이 탄 선박이 피랍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바레인에 주둔 중인 미 해군 제5함대도 이 컨테이너선이 소말리아 해적들의 거점 항구인 에일에서 남동쪽으로 240해리(약 445㎞) 떨어진 인도양 해상에서 납치됐다고 확인했다. 1만7천t급인 이 선박은 구호물자를 싣고 케냐 몸바사항을 향하다 해적들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밤 미국 선원들이 해적 4명과 싸워 이중 1명을 붙잡고, 나머지 3명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해적들이 컨테이너선을 떠나면서 선장 리처드 필립스를 인질로 잡아갔고, 이에 선원들이 구출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붙잡혀 있던 미국 컨테이너선 머스크 앨라배마호의 리처드 필립스(53) 선장이 억류 닷새만인 12일 극적으로 구출됐다.
필립스 선장은 해적들이 배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선원들을 대신해 스스로 인질이 되기를 자처, 다른 선원들을 구함으로써 미국 언론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 오바마 대통령도 필립스 선장이 모든 미국인에게 귀감이 될 용기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
2004년 이라크 무장세력, 이라크 방문한 한국 목사 8명 억류, 5시간 만에 7명 석방-1명 탈출
선교행사 참석차 이라크를 방문한 한국인 목사 8명 중 7명이 8일 오전(이하 현지시각) 수니 삼각지대 라마디 지역에서 이라크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됐다가 다섯 시간여 만에 풀려났다.
앞서 외교통상부는 8일 밤 긴급 회견을 갖고 “한국복음총연합회 소속 허민영 목사 일행 8명이 7일 오후 10시 30분쯤 요르단 암만에서 이라크를 향해 출발, 고속도로를 통해 바그다드로 향하던 중 8일 오전 10시 30분쯤 바그다드에서 차량으로 1시간 30분쯤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곳에서 무장세력에게 납치돼 이 중 1명은 탈출하고 나머지 7명은 억류돼 있다” 고 밝혔다.
허 목사 등 7명을 납치한 무장세력은 허 목사 일행의 눈을 가린 채 다른 장소로 옮겨 여권 등을 확인하고 미군 스파이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풀어주었다. 무장세력은 허 목사 일행의 신원이 확인되자 음식과 음료수도 제공하며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바그다드까지 데려다 주었다.
납치됐다 풀려난 7명은 허 목사 외에 임영섭·홍광천·조종헌·이명숙·김필자·변경자씨 등이며, 납치를 모면해 탈출한 1명은 인천 성문교회 김상미 목사로, 바그다드에 도착한 직후 주 이라크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해 우리 정부가 납치 사실을 알게 됐다.
앞서 허 목사 일행은 6일 밤 요르단 주재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이라크로 들어가겠다” 고 밝혔으며, 임홍재 대사가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 고 만류했으나 이들은 “요르단 및 주변국을 여행하고 돌아가겠다” 며 전화를 끊었다고 요르단 대사관측은 밝혔다.
2004년 국내 유일의 기독교박물관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재개관
국내 유일의 기독교박물관인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2004년 4월 8일 문을 열었다. 숭실대 기독박물관은, 지난 1967년 숭실대 교수를 지낸 고 김양선 목사가 개인 컬렉션으로 수집했던 자료를 기증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러던 1997년 신축개관을 위해 문을 닫았다가 이날 지상 3층(전시실), 지하 2층(수장고)의 건물로 다시 태어난 것.
1층 전시실에는 한국 경주에서 출토된 십자가상이 전시됐고, 이승훈 신부가 정약용의 친형인 정약종에게 영세를 주면서 준 ‘영세명장(領洗名狀)’ 등 일반 박물관에서는 보기 힘든 자료들이 일반에 공개됐다. 그 밖에도 ‘제일강산(第一江山)’ 등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 3점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의 칼을 만들기 위한 거푸집, 빗살무늬토기, 청동거울과 혼천의(渾天儀), 그리고 1919년의 ‘3·1독립선언서’ 등이 전시됐는데 이들은 이 박물관이 자랑하는 소장품들로, 국보 231호인 ‘청동 잔무늬 거울’ 등 국보만 14점에 달했다.
이들 소장품의 대부분은 김양선 목사와 그 부인인 한필려 여사가 평생에 걸쳐 모아온 수집품을 기초로 구성됐다. 한 여사는 광복 직후 북한 지역 내 다섯 곳에 묻어둔 유물을 회수하기 위해 월북했다가 숨졌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이날 ‘한국기독교박물관’ 개관식에서는 한필려 여사의 생애와 연결시킨 작품으로 각색한 극작가 오태석의 작품 ‘자전거’를 공연하기도 했다.
2004년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9.11` 조사위 공개증언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04년 4월 8일 9·11조사위원회에 출석,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전부터 알 카에다의 “위협과 중요성을 이해했다”면서, 사전 위협을 무시했다는 세간의 의혹을 정면 반박했다. 그녀는 다만 미국이 점증하는 위협에 대해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이날 증언에 나선 그녀는 “부시 정부의 첫 번째 주요 국가안보정책 지침은 러시아나 미사일방어, 이라크가 아니라 알 카에다의 제거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테러 위협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음을 인정했지만, 이것이 부시 정부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역대 정부의 공동 책임임을 시사했다.
2003년 ‘소녀역사’ 임정화 제14회 춘계여자역도경기대회서 총 6개의 한국신기록 달성
‘소녀 역사’ 임정화(16·대구서부공고)가 무더기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8일 올림픽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제14회 춘계여자역도경기대회 여고부 58㎏급에서 임정화는 인상·용상 합계에서 각각 2개씩 총 6개의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지난 2001년 전국중등부대회 이후 9개의 한국기록을 세운 임정화는 이로써 통산 한국신기록 15개를 기록하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전망을 밝게 했다.
임정화는 이날 인상 2차 시기에서 91㎏을 들어 자신이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들어올렸던 기존 한국기록(90.5㎏)을 가뿐하게 갈아치운 후, 3차 시기에서 바벨 무게를 2.5㎏ 늘려 두 번째 기록을 세웠다.
임은 용상 2·3차 시기에서 115.5㎏과 117.5㎏에 연속 성공하면서 역시 본인이 갖고 있던 종전 기록(115㎏)을 갈아치웠고, 합계에서도 210㎏(종전 205㎏·2002년 11월 작성)의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210㎏은 중국의 순타이유엔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237.5㎏)과는 거리가 멀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에 해당하며 금메달(222.5㎏)에는 12.5㎏이 모자라는 기록. 임정화를 지도하고 있는 전병관 코치는 “현재 세계 역도의 기록을 볼 때, 앞으로 5㎏을 늘리면 2004년 메달권에 진입한다”며 “임정화의 나이나 성장 속도를 고려하면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2002년 김동성,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첫 전관왕 수립
김동성(金東聖·22·동두천시청)이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남자부 첫 전관왕(6관왕)의 대기록을 세웠다.
김동성은 8일(한국시각)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대회 최종일경기서 남자개인 1000m, 3000m 및 5000m계주 등 3종목을 휩쓸며, 종합 랭킹포인트에서도 136점 만점을 받아 97년 이후 5년 만에 개인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2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할리우드 액션과 반칙으로 금메달을 빼앗아 간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도, 리자준(중국)도 없었다. 그렇기에 김동성에게 단순한 우승은 성에 차지 않았고, 김동성은 목표를 더욱 높게 잡았다. 남자부 사상 첫 전관왕. 75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창설된 이후 전관왕은 83년 도쿄대회 여자부 실비에 다이그리(캐나다)가 유일했다.
첫 종목은 1000m. 계속해서 1위로 예선을 통과하다 준결승서 2위로 골인해 잠깐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김동성은 결승에서 6바퀴를 남기고 선두에 나선 뒤 노련한 레이스로 안현수(신목고)와 에릭 베다르(캐나다)를 따돌리며 1위로 골인했다. 이어진 3000m에서도 김동성은 후배 안현수와 노련하게 레이스를 운영하면서 3위 파비오 카르타(이탈리아)를 1초 차이로 여유있게 따돌렸다.
전관왕의 최대고비는 마지막 종목인 5000m 계주였다. 올림픽 금메달 팀인 캐나다, 개인 종목에 불참했던 리자준이 계주 멤버로 합세한 중국과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세 바퀴를 남겨놓고 주자교대 미숙으로 선두인 캐나다와 간격이 많이 벌어져 김동성의 전관왕 꿈은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나 역시 챔피언이었다. 마지막 2바퀴를 남겨놓고 최종주자로 나선 김동성은 캐나다 마지막 주자의 피로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온 힘을 피니시라인까지 모두 털어놨다. 폭발적인 스퍼트로 마지막 피니시라인 근처에서 스케이트날을 힘껏 집어넣었다. 전광판에 찍힌 기록은 7분10초751. 2위 캐나다(7분10초756)와는 불과 0.005초 차이였다. 동료들과 환호성을 터뜨리며 트랙을 도는 김동성의 손에는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가 있었다.
2001년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서양화가 장발 별세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재미 서양화가 우석 장발씨가 2001년 4월 8일 미국 피츠버그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장씨는 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장면씨의 친동생이다. 1920년대 일본 동경미술학교와 미국 컬럼비아대에 유학한 장씨는 1946년 서울대 미대를 설립, 1961년까지 학장을 역임했으며, 장면 정권 실각 후 미국에서 생활했다.
그는 15년간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국내에 서구식 미술교육을 정착시킨 교육자로 평가받는다. 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명동성당의 `14인의 사도상` 등 천주교 미술의 토대를 닦은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서울대 미대 학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서양미술사`를 강의하면서 꼬장꼬장한 선비적 측면과 함께 학생들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보살핀 자상한 가장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2001년 미국 화성 탐사선 오디세이 발사
미 항공우주국(NASA)의 화성탐사선 오디세이(Odyssey)가 2001년 4월 8일 오전 0시 2분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발사체 델타 로켓에 실린 오디세이는 30분 만에 지구 궤도를 이탈, 화성까지 4억6000만km에 이르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오디세이는 6개월여 뒤 화성 상공 400km 궤도에 진입, 2년반 동안 화성의 암석에서 수소·이산화탄소 등 물의 흔적을 수색했다. 발사후의 가장 큰 고비는 10월 24일의 화성궤도 진입이었다. 앞서 1999년 발사된 두 우주선은 화성 탐사에 실패했다. 화성기후탐사위성(MCO)은 통제소의 조종 실수로 화성 근처에서 산산조각이 났으며, 두 달 뒤 띄운 화성폴라랜더(MPL)호는 엔진 작동 결함으로 실종됐다.
NASA는 오디세이가 전송한 지표 자료의 분석이 끝나는 2007년에 발사될 화성 착륙선은 사상 최초로 2011년 화성의 흙을 채취해 돌아오게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공상과학소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이름을 딴 오디세이 프로젝트에는 2억9700만달러가 소요됐다.
1995년 한국형 원자로 울진3호기 설치
한국형 경수로인 울진 원전 3호기의 원자로가 1995년 4월 8일 경북 울진군 북면 부구리 건설현장에 설치됐다. 울진 3호기는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한국 표준형 원자로로 1백만㎾급 가압경수로형(PWR)이다.
울진 3호기는 한국중공업과 원자력 연구소, 한국전력기술이 각각 원자로, 터빈설비공급, 원자로 계통설계 및 종합설계부문에서 주계약자로 참여하고 미국의 컨버스천 엔지니어링(CE), 제너럴 일렉트릭(GE)등이 하도급 업체로 참여해 국내 원전사상 처음으로 성능보증의 책임을 국내업체들이 맡게되는 등 국내업체가 시공한 첫 원전이다.
한전관계자들은 한국형 경수로가 한국인의 체형과 운전관행 국내산업기술과의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북한에 제공될 경우 남북관계개선 차원뿐만이 아니라 복제건설에 의한 건설비 절감, 한글사용으로 인한 제작 용이, 기자재 부품의 호환성, 지리적 인접으로 인한 시공유리 등의 기술적 이점을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95년 한국-니카라과, 비자면제협정 체결
1994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총리 사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일본 총리가 1994년 4월 8일 오후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이날 임시 각의를 소집 해 "사가와 규빈사로부터 1억엔을 빌린 과정과 장인 명의의 일본전신전화(NTT) 주식 매입문제로 국회가 예산심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며 "정치자금 운영에 있어서 새로운 법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됐고 정치공백에도 책임이 있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38년 만의 정권교체와 자민당1당 지배의 종식, 그리고 사상 최고의 지지율과 압도적인 인기라는 날개를 가지고 비행해 온 비 자민 정권의 첫 내각. 그러기에 글라이더 내각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역사적인 내각이 개인적 스캔들이라는 난류에 휩싸여 드디어 추락한 것이다. 호소카와는 자민당을 야당으로 내몬 기폭제였던 정치개혁 관련 법안들의 처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집권 8개월 동안 한 몫을 한 총리로 평가됐다.
1993년 F16 전투기 야간비행 중 추락
충북 중원군 동량면 화암리 충주댐 부근 상공에서 1993년 4월 8일 오후 8시30분쯤 야간비행 훈련중이던 F16전투기 1대가 인근 야산에 추락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조종사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산 중턱에 불이 나 2㏊ 정도를 태우고 2시간 만에 꺼졌다.
추락한 F16 전투기는 한국 공군의 보유 기종 가운데 최신형일 뿐만 아니라 차세대 전투기사업(KFP) 기종으로 미국 제너럴 다이내믹스사가 1974년 개발한 이래 여러차례 엔진, 날개 부분 등의 기체 결함이 발견돼 비행금지조처가 취해진 적이 있었다. 사고원인은 조종사가 비행 중 방향감각을 상실한 비행착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1989년 연극인 이해랑 사망
원로연극인 이해랑씨가 1989년 4월 8일 급환으로 별세했다. 며칠후 개막할 셰익스피어의 고전극 ‘햄릿’의 연출을 맡아 연습장으로 향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파란굴곡의 연극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배우와 연출가로 연극인생을 살다간 이씨는 1940년 일본대 예술과를 졸업, 동경학생 예술좌에서 활동했으며 광복직후 극예술협회창립 동인, 신협 대표를 거쳐 중앙극립극장장, 5대에 걸친 예총 회장을 역임했다.
8~9대 국회의원으로 잠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빼고는 동국대 교수, 예술원 회장으로 연극 일선에 나서 수많은 연출작품을 남겼다. 연극인으로는 드물게 여유있고 화려한 길을 걸어온 이씨였지만, 일제 말에는 옥고도 치렀고 광복 후에는 좌익의 소용돌이를 겪는 등 신극사만큼이나 파란의 인생노정도 겪은 노익장이었다. 반세기 내내 그는 정통 리얼리즘 연극을 고수해 온 극단의 지주였으며, 순수연기자로 연극계에 투신하여 연출 및 예술행정가로 소임을 다해온 천부적 연극인이었다.
1984년 한국. 브루나이 정상회담
1983년 소련 영국외교관 등 2명 추방
1983년 마마로니 솔로몬군도국 수상 내한
1982년 서울 현저동 지하철 공사장 붕괴참사 - 사망10명 부상 42명
1982년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최기식 신부 구속
1980년 첫 국산 구축함 `울산호` 진수식
1979년 단국대, 충북 청원군서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비문인 고구려 장수왕 척경비 발견
1975년 긴급조치 7호 선포. 고려대학교에 휴교령
1974년 미국 야구선수 행크 아론 715홈런 달성, 베이브 루스가 세운 홈런 714개 갱신
1973년 프랑스 화가 피카소 사망
스페인 태생의 프랑스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1973년 4월 8일에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 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중에 한 사람이었던 그는 미술사에 있어서 큐비즘 즉, 입체주의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는 14세 때 스페인의 수도 바르셀로나로 이주,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르누아르, 툴루즈로트렉, 뭉크의 화법에 매료됐으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 1897년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바르셀로나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예술도시 파리에 입성, 이듬해에 다시 방문하여 몽마르트를 중심으로 자유분방한 작품활동을 하던 보헤미안무리에 합류하기도 했다.
청색이 주조를 이룬 소위 청색시대를 거쳐 도색시대로 색채가 변화되면서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었다. 1907년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세상에 내놓음과 동시에 브라크와 두터운 교우을 나누면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힘써 분석적 입체파, 종합적 입체파를 완성했다. 세계2차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조국 스페인에 있던 피카소는 독일군의 파리 침입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정전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기에 심취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1971년 거제대교 준공
1971년 서독경찰, 한국대사관의 노무관, 유성근 일가족 실종 발표
1970년 경기 파주 금촌 거주 농민이 은신중인 무장간첩 3명을 발견하고 신고, 군·경 합동작전 으로 전원 사살.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서울시가 와우산 중턱에 건설한 시민아파트인 와우아파트가 1970년 4월8일 오전 6시 40분경 무너졌다
이 사고로 입주자와 작업 인부 등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붕괴된 아파트가 아래에 있던 판자촌을 덮쳐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붕괴 원인은 건설허가를 따내기 위해 쓴 뇌물로 인해 공사자재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였다
시공은 무면허 업체가 시공되었다
철근 70개를 넣어야 하는 기둥에 고작 5개의 철근을 넣었다
그 결과 준공 4개월만에 붕괴라는 참사를 빚었다
이는 시공사의 기초공사 허술, 감독기관의 대책과 불도져식의 행정 탓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시장은 사퇴하고 말았다
1967년 공군 수송기 서울에 추락
1966년 인도 남부의 최대의 가뭄
1966년 브레즈네프 당 서기장 취임
1965년 중앙정보부 경향신문의 이향백 체육부장을 간첩혐의로 구속 발표
1964년 무인우주선 제미니1호 발사
1964년 미국 우주선 타이탄 2호 무인으로 궤도 진입 성공
1964년 대학생에게 배달된 괴 소포사건
1963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군정 연장 국민투표 보류 성명
1963년 워커힐 개관
1962년 프랑스 국민투표
1961년 1961년 대만, 불기 2505년 맞아 석가탄신 기념식 거행
1958년 참전 16개국 중국에 통한각서 전달
1953년 메이저컴퍼니사 에드먼트 오브리언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세계 최초의 3차원 영화인 ‘맨 인 더 다크(Man in the Dark)’를 미국 뉴욕의 글로브 극장에서 상영했다.
1953년 유엔(UN) 총회 서유럽 군축안 채택
1950년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 니진스키 사망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 바슬라프 니진스키는 두 번 죽었다. 세속적인 생명은 1950년 4월 8일에 끊겼지만 예술가로서의 생명은 1919년부터 사실상 멈춰 있었다. 정신병원이 그의 안식처가 됐기 때문이다.
‘발레사(史)의 전설’ 니진스키는 어려서는 ‘발레의 신동’이었고 성장해서는 ‘발레의 신’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 ‘중력의 법칙’을 비웃는 듯한 도약, 그의 등장은 고전발레와 현대발레의 분기점이었다.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라는 20세기 최고의 공연기획가를 만나면서 찬란한 발레리노의 꽃을 피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파국도 맞았다. 둘을 이어준 것은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단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였다. 1909년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의 파리 첫 공연에 합류한다. 열광하는 관객들로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공연이 회를 거듭할수록 니진스키는 파리 예술계의 명사(名士)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다. 그의 무용에 넋이 나간 조각가 로댕은 그가 춤추는 모습을 3점의 조각으로 남겼고, 시인 장 콕토는 공연 포스터와 팸플릿을 직접 디자인했다. 1912년에는 직접 안무까지 맡아 ‘목신(牧神)의 오후’를 무대에 올렸으나 고전무용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1913년 5월에는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제전’ 안무를 맡아 폭동에 가까운 객석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개인사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스승이자 동성애 연인 디아길레프와 헤어져 여성 무용수와 결혼한 것이다. 질투에 불탄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발레단에서 쫓아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니진스키는 결국 정신질환의 나락으로 떨어져 무용가로서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1947년 킨제이 성(性) 연구소 설립
1935년 `뉴욕타임스` 발행인 옥스 사망
1931년 스웨덴의 시인 카를펠트 사망 - 1931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19년 강계 학살사건 발생
1911년 프랑스 산문가 에밀 시오랑 출생
1911년 천주교 한국교구, 서울.대구의 두교구로 승격. (조선대목구, 서울대목구로 개칭, 대구대목구가 분리, 설정)
1905년 독립운동가 조명하 출생
1904년 영국.프랑스협정 성립. 영국의 대 이집트 권익. 프랑스의 대 모로코 권익을 상호 승인
1899년 서울시내 전화 개통
1896년 정치가 우양 허정 출생
1895년 노르웨이 탐험가 난센 북극 정복
1895년 덕수궁에 최초로 전등 사용
1888년 북한의 조류학자 원홍구 출생
1861년 안전 엘리베이터를 발명한 오티스 사망
1861년 손병희 선생 출생
1835년 독일의 언어학자··교육개혁가 훔볼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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