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악회 181차 산행] ♣ 봉화 <청량산>
▶ 2017년 10월 15일 (일요일)
* [산행 코스] ☞ 청량산탐방안내소[淸凉之門]→ 금강대→ 계단→ 전망대→ 계단→ 장인봉(청량산, 870m)→ 선학봉→ 하늘다리→ 안부→ 계단 자란봉→ 계단→ 안부→ 청량사→ [淸凉之門]→ 귀경
• [프롤로그] — 깊어가는 가을, 맑은 하늘을 마음에 담고 …
하늘이 높고 푸르다. 그래서 예부터 시월을 ‘상달’이라고 했다. 따뜻하고 맑은 햇살이 대지의 알곡을 익게 하니, 가을은 사람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한다. 자연이 그러하니 사람의 마음도 자연 쾌적하고 넉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가을은 풍성한 가절(佳節)이다. 그런데 자연의 계절은 이렇듯 넉넉하고 아름다운데, 나라의 실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유엔총회 연설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한' 한국의 촛불 혁명이야말로 유엔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예라고 단언했다. 또한 유엔의 정신은 '사람을 근본으로'하는 한국 새 정부의 슬로건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 혹시 촛불 광장에 있었던 해괴한 그림, 폭력적 구호, 인격 말살적 개그와 퍼포먼스 등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고개를 저었을 것 같다.
'촛불 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들과 그 시행 방법은 대부분 지극히 비평화, 비민주적이다. 최저임금의 반강제적 대폭 인상, 청천벽력 같은 탈원전(脫原電) 정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강요, 81만개 공무원 일자리 증설 등 '간 큰' 정책들이 국민과의 협의 과정 없이 일방적 공표 후 강행되어서 일반 국민에게는 폭압적으로 느껴진다. 수천 명의 제빵사를 정규 직원으로 고용하라는 명령은 파리바게뜨에 무시무시한 폭행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새 정부는 우리나라 경제를 파괴할 이런 강압적 시책들도 모두 '아름다운 평화'로 간주하는 것일까?‘
이 정부의 '평화'는 조지 오웰의 장편 <1984년>에 나오는 '평화'보다 한층 포괄적으로 반어법적인 어휘인 모양이다. — 서지문(고려대 영문과 명예교수) <뉴스로 책읽기> (2017.10.17) 에서
• [산으로 가는 길] — 알곡이 익어가는 황금빛 들판 …
오전 7시 45분, 능동[군자역]에서 출발했다. 이번 제181차 산행지는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소재하고 있는 <청량산>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맑은 하늘이 열린 아침, 남정균 회장, 호산아 고문·장병국 고문, 김의락 위원, 한영옥·장태임 부회장, 유형상 부대장, 박은배 총무, 오수정 감사를 비롯하여 전진국, 안상규, 강재훈 삼총사, 김숙이·정석희·황옥자·장현서 등 우정의 4인방, 그리고 늘 변함없는 참석하는 장영서·이명자·나천옥 님, 명랑한 조인규· 신수철 님, ‘이슬비’ 조희우 님과 손인자 님을 비롯한 농암의 지기 여러분, 김재철 님 내외분, ‘하회탈’의 고향 친구인 이경희·강완식 님 등이 참석했다. 오늘은 신수철, 오수정 님이 오랜만에 나오고, 특히 우리 산악회에 처음 오신 강완식 님, 그리고 남점식 님과 친구분 등 나오셔서 참 반가웠다. 이 가을 다같이 산을 지향하는 마음의 만남이다.
시월 들어 날씨도 연일 청명하여 오늘도 산행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군자역을 출발한 우리의 <금강버스>는 중부고속도로와 (곤지암) 제2영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중앙고속도로에 진입, ‘치악휴게소’에 도착하여 치악산의 신선한 아침 공기로 휴식을 취했다.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백두대간 죽령터널을 지나 풍기I.C에서 5번 국도에 내려 영주시 외곽에서 봉화로 가는 36번 국도를 타고 나아갔다. 봉화읍을 지나 918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봉성(면)을 경유하여 명호(면)에서 낙동강 상류의 물길을 만났다. 날씨는 청명하고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고 있었다. 알곡이 익어가는 황금빛 들녘이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명호에서 낙동강이 흐르는 굽이굽이 물길을 따라가는 35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북곡리에서 <청량교>를 건너 청량산 입구에 도착했다. (11:00)
• [경상북도 도립공원 청량산] — <낙동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일월산-청량산 지맥
우리가 오늘 산행하는 청량산(淸涼山)은 낙동정맥의 한 지맥에 속한 산이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정맥으로, 대관령을 지나온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으로 뻗어 내리는 중 태백시 북쪽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이다. 이 정맥은, 우리나라 전 국토의 근골(筋骨)을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 강원 태백산의 윗쪽 구봉산(九峰山)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와 백병산(白屛山, 1,259m)·백령산(白嶺山, 1,004m)·청송 주왕산(周王山, 907m)을 경유하여 영천의 운주산(雲住山, 806m)까지 높이 1,000m에 달하는 산줄기를 형성하고, 월성군 서면 아화리의 낮은 구릉을 넘어 다시 경상남도의 가지산(加智山)·취서산(鷲棲山, 1,059m)을 거쳐 부산의 금정산(金井山, 802m),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까지 이어져, 낙동강 동쪽 하구에서 그 맥을 다한다. 그 길이는 약 370㎞에 이른다.
청량산(淸涼山)은 백두대간 구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백병산과 동고산을 경유하여 남하하다가, 영양군의 북쪽 수비면에서 일월산으로 분기한 덕산지맥의 끝에 솟은 봉우리이다. 결국 봉화군 명호면에서 낙동강 물길을 만나면서 지맥을 다한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선생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청량산은 낙동강을 만나 천인단애의 절벽을 이룬다. 김정호 선생은 신경준의 <산경표>(1750년)를 바탕으로 <대동여지도>(1850년)을 완성한 분이다. 우리나라 산세를 1대간(백두대간) 13정맥으로 한 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 [청량산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 청량지문, 퇴계 선생의 시비(詩碑)
‘淸涼之門’(청량지문)은 청량산(淸涼山)으로 들어가는 입구 있는 큰 문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탐방안내소’가 있고 그 옆에 아담한 퇴계 선생의 <시비공원(詩碑公園)>이 자리하고 있다. 시비공원의 제일 윗자리에 조선시대 대학자이신 퇴계 선생의 시비(詩碑)가 자리하고 있고, 그 시비의 앞과 좌우에 선생의 삶과 철학을 집약한 글이 적힌 ‘새김돌’이 안배되어 있다. 시비 앞에는 ‘思無邪’가 예쁜 원구를 반으로 깎은 그 위에 새겨져 있고, 시비 좌우에는 ‘毋自欺’과 ‘毋不敬’을 화강암 원주의 단면에 새겨놓았다. 시비의 전면과 후면에 세 편의 시(詩)가 새겨져 있는데, 전면에는 ‘讀書與遊山’(독서와 유산), 후면에는 ‘渡彌川望山’(도미천망산)과 ‘約與諸人遊淸涼山馬上作’(약여제인유청량산마상작) 두 편이다. 세 편의 시(詩)는 이 글의 뒤쪽 <에필로그>에서 소개할 것이다.
* [퇴계 이황 선생의 좌우명] — ‘思無邪(사무사)’ 그리고 ‘毋自欺’(무자기)와 ‘毋不敬’(무불경)
‘思無邪(사무사)’는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논어(論語)』위정(爲政) 편에서 공자가 말씀하셨다. “詩經(시경)에 나오는 시(詩)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 一言而蔽之曰 思無邪)고 했다. 이렇게 사무사(思無邪)는 논어에 나오는 말씀이다. 요즘에는 ‘욕심이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일컫는 말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일찍이 생전의 퇴계(退溪) 선생도 이 말을, 세상에 임하는 마음의 기조(基調)로 삼으셨다.
그리고 ‘毋自欺’(무자기)와 ‘毋不敬’(무불경)은 퇴계 선생의 평생의 좌우명(座右銘)이다. 그래서 그 말씀을 시비(詩碑)의 좌우에 배치했다. ‘毋不敬’(무불경)은 ‘매사에 공경스럽지 아니함이 없다’는 뜻이다. 오경(五經) 중의 하나인『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인데, 송나라 때 대학자인 정자(程子)는 이 ‘毋不敬’을 예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예기(禮記)』곡례(曲禮)에 이르기를 ‘사람이 몸을 수양함에는 언제나 공경(恭敬)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고, 용모는 늘 엄숙해야 하며, 말은 부드럽고 명확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덕(德)이 절로 쌓아져서,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라.(曲禮曰 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했다. ‘敬’은 퇴계 선생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요 생활철학이다.
‘毋自欺’(무자기)는 사서(四書)의 하나인『대학(大學)』에 나오는 ‘성의(誠意)’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른바 ‘자기의 뜻을 성실하게 한다(誠意)’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다.(毋自欺)’는 것이다.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성의(誠意)’는 수신(修身)의 시작이다.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란, 마음속으로는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야 한다고 여기고 있으나 마음이 발현하는 바는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 그래서 늘 신독(愼獨)하는 것이다.
* [퇴계 이황 선생과 청량산] — ‘청량산,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네’
조선시대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 ~ 1570년(선조 3)) 선생은 평생 여기 청량산(淸涼山)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청량산(淸涼山)에서 10여 킬로 떨어진 곳에 퇴계 선생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다. 선생은 생전 도산(陶山)에서 이곳 청량산까지 낙동강에 연해 있는 산길을 따라 수시로 오가며 명상을 하고 마음을 수양했다. 이곳의 정사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선생은 어린 시절 청량산에 있는 숙부 이우(李堣) 선생의 정사(精舍)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청량산(淸涼山)은 퇴계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정진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곳이었다. 지금도 퇴계 선생이 오가던 ‘퇴계 예던 길’을 걸을 수 있다. 청량산에는 퇴계 선생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다. 청량산을 예찬하는 시가 적힌 비(碑)가 ‘청량사’ 들어가는 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선생은 '청량산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고 노래했다.
何處無雲山 (하처무운산) 어느 곳인들 구름 낀 산이 없으랴만
淸涼更淸節 (청량갱청절) 청량산(淸涼山)이 더더욱 청절하다네!
亭中日延望 (정중일연망) 정자에서 매일 먼 곳을 바라보노라면
淸氣透人骨 (청기투인골)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다네!
* [오늘의 산행 들머리] — ‘청량지문(淸涼之門)’에서 오르는 가파른 길
오전 11시 13분, 퇴계시비 앞에서 전체 기념사진을 찍고 산행(山行)에 돌입했다. 예정(10:30)보다 좀 늦은 시각이었다. 오늘의 산행은 일반 등산객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금강대> 벼랑길을 택하여 정상에 오르기로 했다. 청량지문(淸涼之門) 바로 앞 탐방안내소 건너편에서 숲길로 접어들었다. 오늘 선두에는 민창우 대장이 대원을 향도(嚮導)를 하고 후미는 유형상 부대장이 수고하기로 했다. 청량산을 그 전체가 아주 오랜 옛날 해저(海底)가 돌출하여 융기한 암산이다. 그래서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어졌다. 가파른 길은 각진 나무를 박아 만든 계단이었다. 산행 처음부터 만나는 경사진 길이라 대원들은 모두 금방 거친 숨을 몰아쉰다. 선두 그룹은 쉬지 않고 길을 열어나갔다.
* [본격적인 철계단 길] — 삼부자송(三父子松) 이야기
첫 이정표가 나왔다. 산행들머리에서 0.3km를 올라온 지점이다. 잠시 숨을 고르는가 했더니 이제는 가파른 철계단이 앞을 가린다. 경사가 급한 산록에 탄탄하게 시설된 계단이다. 직선의 계단을 오르고 나서 이어지는 산길은, 절벽(絶壁)의 허리를 가로 질러가는 평탄한 길이다. 한 구비 돌아가니 특이한 장송(長松)이 길옆에 있었다. 한 뿌리에서 자란 소나무의 큰 밑둥치에 두 개의 작은 둥치가 자라난 소나무였다. 이름하여 ‘삼부자송(三父子松)’이란다. 해설판이 있다. …
삼부자송
‘청량산 장인봉 아래에 있는 금강암에 어떤 부부가 화전을 일구며 살고 있었다. 부부는 산비탈을 옥토로 바꾸면서 몇 해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일터로 가는 길목에 세 갈래로 뻗은 특이한 소나무를 발견하였다. 부부는 자식을 바라는 열망을 이 소나무에게 지극정성으로 빌었다. 그러던 중 몇 해 뒤에 마침내 ‘쌍둥이 아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부는 이 소나무를 ‘삼부자송(三父子松)’으로 명명하고 정월 보름과 칠월 백중[伯種]에는 정성스레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 [천인단애(千仞斷崖)의 계단 길] — ‘굽이치는 낙동강’의 절경
‘삼부자송’에서 산허리 한 구비를 돌아가서, 다시 오르막길의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철계단, 험악한 바위 절벽과 절벽 사이에 시설된 매우 가파른 계단이다. 계단을 오르다 바라보니, 수직으로 깎아지는 절벽에 단풍이 피어있고 그 뒤로 파란하늘에 하얀 구름이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포착한 맑은 풍경이었다. 그렇게 긴 계단을 오르고 나면 나무테크의 쉼터가 있어 잠시 숨을 돌린다. 내려다보니, 산 아래 펼쳐진 강산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길게 돌아가는 낙동강 물줄기와 35번 도로가 유연하고 아름다운 S자를 그리고 있다. 가히 절경(絶景)이었다.
그것도 잠시, 발길을 돌려서 바라보니 다시 앞을 가로막는 아득한 철계단, 그런데 이건 그냥 그대로 하늘로 직행하는 천국의 계단이었다. 대원들이 열을 지어 계단을 오른다. 너무 가팔라 사지(四肢)가 전율(戰慄)한다. 아찔한 계단이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계단 가장자리에 발이 걸리거나 실족하면 그대로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다리는 아프고 숨은 턱에 차오르는 하늘 길이었다.
* [천인단애(千仞斷崖)의 산허리 길] — ‘금강굴(金剛窟)’ 이야기
긴 계단을 오르고 나니, 천인단애(千仞斷崖) 절벽의 허리에 난 벼랑길이다. 비록 평탄하지만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낙화처럼 떨어질 법한 위태로운 벼랑길이다. 이런 길은 ‘토끼비리’라고 한다.(문경 진남교) 토끼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벼랑길을 그렇게 말한다. 사실 청량산 들어오기 전 마을에서 올려다보면 천인단애의 절벽에 가운데 풀띠를 두른 듯한 그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다. 참으로 아찔한 길목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안전시설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접근하지 못했던 산길이었다.
한 구비 돌아나가 길가의 벼랑 밑에 깊지 않는 굴이 나왔다. ‘금강굴(金剛窟)’이다. 옛날 구도 정진을 하기 위해 찾아온 험산심처(險山深處)의 도량인 것이다. 이런 곳에 어떻게 올라왔을까. 저 설악산 비선대 위에도 원효대사가 수도하였다는 금강굴이 있다. 철계단이 아니면 올라갈 수 없는 천 길의 절벽의 중간에 있는 굴이다. 해설판이 있다.
‘금강굴(金剛窟)… 금강대 뒤편 장인봉(丈人峰) 서쪽 낙동강 위에 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 그윽하고 고요하여 수양할 수 있는 장소로 적격이다. 퇴계(退溪)의 수제자인 성재(省齋) 금난수(琴蘭秀)가 1566년 한 달 간 이 굴에서 공부한 바 있으며, 그 전에 정안(靜安)이라는 승려가 수도하며 머물렀다. 금강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구들장과 기와 조각이 남아있다.’ 성재 금난수가 오언절구(五言絶句)를 남겼다. 아득한 절벽의 동굴에 수도했던 선승(先僧)을 생각하면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았겠지. 결국 '도끼자루가 썩는 가을'이라고 말한 것은 시간을 초월한 선경에 들었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돌아갈 것도 잊어버렸다. 날이 저물면 어떤가? …
靜安今安在 (정안금안재) 정안(靜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庭戶餘行蹟 (정호여행적) 뜰 안에 행적만 남아있구나!
客到爛柯秋 (객도난가추) 도끼자루가 썩는 가을, 나그네 오니
忘歸日欲夕 (망귀일욕석) 돌아갈 길 잊고서 날이 저무네!
* [금강대(金剛臺) 절벽의 길목] — ‘여여송(如如松)’과 ‘할아버지-할머니 소나무’
길은 계속 천인단애(千仞斷崖)의 직벽의 옆구리를 따라 이어진다. 금강대(金剛臺) 절벽이다. 머리 위에는 바위 절벽이 쏟아지고 왼쪽에는 천길 벼랑이니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왼쪽 낭떠러지 쪽에는 철봉펜스로 안전시설을 해 놓았다. 무엇보다도 확연하게 시야가 열려, 굽이쳐 돌아가는 낙동강의 유장한 물줄기가 천하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이 유유하다. 우리는 지금 하늘의 한 모퉁이를 걷고 있는 것이다. 땀을 흘린 만큼 마음은 맑아지고 험난한 곳을 오를수록 아름다운 절경이 있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산이 그것을 몸으로 말해준다. 아아, 산은 청량산, 이래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퇴계 선생이 그토록 좋아하셨던 산이다.
벼랑 끝 난간에 한 그루 소나무가 독존하고 있다. ‘여여송(如如松)’이란다.… ‘낙동강 위 금강대 절벽에 곧게 서 있는 한 그로 소나무, 독야청청한 그 모습이『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변함없이 뿌리가 깊어 흔들림이 없다(如如不動)’는 말과 어울려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여송
조금 나아가면 ‘할아버지-할머니 소나무’도 있다. 한 그루는 크게 위로 뻗어간 거송(巨松)이고 한 그루는 그 밑에 다소곳이 서 있는 반송(盤松)이다. 이 명명(命名)을 두고 노자(老子)가 들으면 아마 유치하다고 조소하지 않았을까. 자연은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 것[自然]인데, 사람들은 무엇이든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노자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진리라고 하면 참된 진리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 붙이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라고 갈파했다. 물론 이 말은 노자의 심오한 철학을 대변하는 역설적 표현이지만, ‘참다운 진리’는 인위적인 언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言語)란 인간의 주관적 의식이 작용된 기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규정한 언어가 참된 본질을 제한하거나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언어(言語)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와는 차이가 있다.
할아버지-할머니 소나무
* [하늘로 올라가는 철계단] — 선홍빛 단풍 그러나 아직도 성성한 녹음의 숲길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철계단을 오른다. 산뜻하게 시설된 계단, 그 위의 절벽과 산기슭에 가을의 단풍(丹楓)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아직 철 이른 청량산은 여름의 녹음이 그대로인데 여기에서 가을을 느낀다. 노르스름하게 물든 맑은 빛이 그윽하다. 계단을 올라서니 선홍으로 물든 단풍나무가 빛을 발한다. 여성대원들이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셔터를 누르면서 한 말씀, “단풍이 곱기로 서니 저 여인들만큼 고울까!” 했더니 얼굴에 화사한 단풍빛깔의 웃음이 피어났다.
경사진 흙길 위에 박아놓은 나무계단을 치고 오른다. 능선 위에, 앞서 간 대원들이 후속대원을 기다리며 쉬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이 모두 단풍의 빛깔이다. 물을 마시고 간식을 나누었다. 얼마쯤 왔을까. 사실 산행 들머리에서 정상 장인봉까지는 2.8km인데, 가파른 계단 길이 계속되다 보니 더욱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달에 올랐던 월악산이 ‘철계단의 종합세트’라고 했는데, 이곳 청량산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아니 그보다 더 아찔하고 아득한 느낌이다.
청량산은 가을이 머뭇거리고 있다. 산록에는 여름의 활엽수가 아직도 초록의 빛이 바래지 않고 녹음이 성성하다. 숲속의 길, 이어지는 나무계단을 한참 오르고 나니, 다시 나타나는 바위 절벽, 가파르고 긴 철계단을 치고 오른다. 그리고 다시 가파른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청량산은 ‘하늘로 가는 길인 계단’을 타지 않으면 오를 수가 없다. 산의 형세로 볼 때 청량산은 정상 장인봉을 중심으로 산 전체가 돌출한 암봉이기 때문에 산길은 급격한 경사를 이룰 수밖에 없다. 계단(階段)은 산을 오르는데 우리를 지루하고 팍팍하게 하지만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시설이다.
* [하늘과 정상을 바라보는 전망대] — 맑은 햇살을 머금은 점심식사
오후 12시 36분, 그렇게 천신만고의 계단을 치고 오른 끝에 전망대에 올랐다. 교실 한 칸 보다 넓어 보이는 전망대(展望臺), 나무테크로 마루바닥을 깔고 그 가장 자리에 3단의 목봉으로 안전펜스를 만들어 놓았다. 하늘은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정결하고 거기 하얀 구름이 산뜻하게 떠 있었다. 동쪽으로는 우뚝한 장인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고 장인봉 옆으로 이어지는 기암의 연봉도 시야에 들어왔다. 북쪽으로는 봉화군의 첩첩산봉이 이어지고 멀리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선달산으로 이어지는 산너울이 실루엣처럼 시야게 들어왔다.
사방이 확 트인 너른 전망대, 따뜻하고 화사한 햇살이 내린다. 신선한 바람결이 이마를 스친다. 예정한 대로, 우리는 이곳 전망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각자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놓고 음식을 나누었다. 오늘 처음 오신 이경희 님과 강완식 님, 군자동에서 탑승하신 문점식 님과 그 친구분과 자리를 함께 했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으로 마음으로 나누었다. 따스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환하게 열린 하늘 아래에서 따스한 햇살과 함께 한 오찬이었다.
*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철계단] — 바위 절벽과 절벽 사이에 고도를 높이다
오후 1시 35분, 점심식사 후 오후의 산행(山行)에 돌입했다. 우람한 암봉(巖峰)으로 불쑥 솟아있는 청량산 정상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그 산봉의 주위는 절벽이다. 거기에도 역시 절벽 사이에 가파른 철 계단이 시설되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산 밑에 접근해 보니 예상대로였다. 가파르고 긴 계단,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철계단이 파란 하늘 속으로 뻗어 있다. 바위 절벽과 절벽 사이의 공간을 타고 오르는 계단은 정상(頂上)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절정의 오르막길이었다. 총 길이가 수십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거의 올라와서 뒤돌아보니 낙동강 물줄기가 휘돌아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리고 계단이 거의 다한 산록에 곱게 물든 단풍나무가 화사하게 안겨든다. 거기, 원색의 등산복을 입은 대원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는 정경이다. 산봉에 올랐다. 그런데 그곳이 정상이 아니었다. 다시 다소곳이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철계단을 치고 오른다. 계단, 계단, 철계단, 참 무지막지하게 치솟아 올라가는 정상(頂上)으로의 길이다.
* [청량산 정상, 장인봉(丈人峰)] — 천하 명필 김생의 글씨로 새긴 정상석 그리고 주세붕
오후 2시 05분, 정상에 막 올라서니 사방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지나온 금강대 산줄기가 내려다 보이고 우리가 머물렀던 전망대가 아주 작고 아득하게 보인다. 그 뒤로 굽이치는 낙동강의 물길이 장관이다. 산정에는 사람의 키만한 큰 정상석이 있는데, 거기에는 날렵한 흘림체로 쓴 ‘淸凉山 丈人峰 870m’의 글씨가 돋보인다.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子)하여 새긴 것이다. 그리고 정상석 뒷면에는 조선시대 유학자 주세붕(周世鵬) 선생의 오언율시 ‘登淸凉頂’(청량산 정상에 올라)가 새겨져 있다. 산정에 올라 그 감회를 읊은 시(詩)였다.
我登淸凉頂 兩手擎靑天 내 청량산 정상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자니
白日正臨頭 銀漢流耳邊 밝은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附視大瀛海 有悔何綿綿 아래로 구름바다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更思駕黃鶴 遊向三山巓 다시 황학(黃鶴)을 타고 신선의 세계로 가고 싶구나!
‘丈人峰’ 글씨를 쓴 김생(金生, 711~790년)은 통일신라시대의 명필이다. 이곳 청량산(淸凉山) 경일봉 아래에 ‘김생굴(金生窟)’이 있다. 김생은 이 동굴 앞에 암자를 짓고 10여 년간 서예에 정진하여, 기암거봉으로 이루어진 청량산의 기개를 담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였다. 바로 ‘김생필법(金生筆法)’이다. 당시 왕희지체, 구양순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청량산의 힘찬 기운이 담긴 서법을 구사함으로써 가장 독특한 서풍(書風)을 이루었으며 이로서 해동서학의 종조가 되었다. 우리나라 서예사의 한 획을 긋게 되었다. 왕희지를 능가하는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추앙을 받는다. 강진의 ‘萬德山 白蓮寺’의 현판이 그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신재(慎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 소백산 아래 풍기 순흥에, 우리나에 주자학을 처음 받아들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 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사림(士林)의 중심기구인 서원(書院)은 사림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풍기군수로 온 이황(李滉)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아 공인된 교육기관이 되었다.
이 시(詩)는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이곳 청량산 정상(頂上)에 올라,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구름 위에 솟은 청량산 정상에서 하늘을 떠받들고 신선의 세계를 꿈꾸는 경천화선(敬天化仙) 풍류의 절창을 남긴 것이다. 청량산 정상에는 이렇듯 시(詩)의 향기가 흐르고 있다.
역광(逆光) 찰영
* [청량산의 명물(名物) ‘하늘다리’] —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의 협곡을 잇는 현수교
정상(頂上)에 오른 대원들이 그룹별로, 개인별로 등정의 기쁨을 사진에 담았다. 정상석 주변에는 여러 코스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이내 산행을 계속해 나갔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나무계단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가파르게 쏟아지는 철계단을 내려간다. 깊은 안부(鞍部)에 내려가니 이정표가 있다. 장인봉에서 0.3km 내려온 지점이다. 다시 가파른 철계단을 치고 올라 산봉(선학봉)을 넘어서니 그 유명한 ‘하늘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다리는 선학봉과 자란봉 사이의 안부 협곡을 잇는 현수교(懸垂橋)로, 그 높이와 규모가 멋진 장관을 이루는 명물(名物)이다. 아래에서 보면 아득히 하늘에 걸려 있는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원들이 그 명품 다리를 배경으로 삼삼오오 사진을 찍고 또 개인별로도 사진을 찍었다. 이제 약간 서쪽으로 기울어진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청량산, 다리를 건너 바라보는 풍광은 더욱 환상적이었다.
역광(逆光) 촬영
자란봉을 넘어 다시 철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오후 3시, 안부(鞍部) ‘뒷실고개’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철계단을 타고 올라 능선을 따라가면 연적봉-탁필봉을 경유하여 자소봉이 이른다. 연적봉과 탁필봉은 명필 김생(金生)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당초 우리의 계획은 자소봉에 마지막 포인트를 찍고 김생굴-응진암-입석대 가는 길로 잡았으나, 시간 관계상 뒷실고개에서 <청량사(淸涼寺)>로 바로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의 민 대장이 미리 말한 예정된 하산 완료시간이 오후 4시 30분이다. 청량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고 긴 나무계단이다. 하루의 피로가 누적된 대원들이라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하고 긴 나무계단을 한 단 한 단 내려왔다.
* [청량산의 유서 깊은 고찰 ‘청량사’] — 유리보전과 우아한 석탑이 있는 야단(野壇)
오후 3시 20분, <청량사(淸涼寺)>에 도착했다. 청량산(淸凉山)은 입석대나 건너편의 축용봉에서 보면 기암절벽이 연꽃처럼 피어 있는 산봉의 한 복판에 꽃술처럼 안겨있는 가람이다. 그래서 절의 뒤쪽에 솟은 암봉의 이름이 연화봉이다. 청량사(淸涼寺)는 663년(신라 문무왕 3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으며, 청량산 도립공원 내 연화봉 기슭 열두 암봉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암봉에는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울창하며,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청량사가 내청량이라면 응진전은 외청량이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본시 매우 큰 절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절은 ‘유리보전(琉璃寶典, 경북유형문화재 47)과 ’응진전(應眞殿)‘만 남은 채 피폐했었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는 뜻으로 공민왕이 친필로 쓴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 있는데, 지금은 금칠을 했다. 절이 있는 청량산에는 김생(金生)이 공부하던 김생굴과 공민왕당, 퇴계 이황이 즐겨 머물며 수학하던 정자 오산당이 있다.
본전 유리보전 앞에는 오래된 장대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널찍한 나무테크 야단(野壇)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단의 끝에 세련된 5층석탑과 부처님을 모셔놓았다. 근래 이곳에서 그윽한 ‘산사음악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다. 올해도 오는 10월 21일 토요일 ‘청량산산사음악회’가 열린다는 프랜카드라 걸려있었다. 법당인 유리보전에서 내려다보는 장엄노송과 오층석탑이 어우러진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오후] — ‘범종루(梵鐘樓)’와 산사의 찻집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본전에서 돌계단을 내려오면 2층 다락으로 되어 있는 범종루(梵鐘樓)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산사(山寺)의 찻집이 있는데 고요한 정취가 고단을 심신(心身)을 따뜻하게 해준다. 산사의 전통찻집의 이름은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인데, 청량사 주지 지현 스님의 시(詩)의 제목에서 따왔다.
비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연기 가늘게 피어오르는
청량사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청명한 가을 오후의 햇살이 산사의 찻집에 내리고 있다
* [무사 하산(下山) 그리고 다시 ‘퇴계 시비공원’] — 퇴계 선생의 시(詩)를 음미하며…
오후 4시 30분, 모든 대원들이 하산(下山)을 완료했다. 청량지문 앞, <퇴계시비>가 있는 소공원 앞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타고 온 차가 고장이 나서 운행이 불가하여, 회사에 연락을 하여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시간의 여유가 생겼으므로, 대원들은 <시비공원> 아래쪽에 있는 ‘족탕’에서 발을 씻으면서 피로를 풀었다. 맑은 물이 콸콸 흘러들어와 아래로 빠져 나가도록 되어 있어서 청정한 물이 가득하여 오늘 산행의 피로를 푸는데 아주 적격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아침에 이곳에서 제대로 읽지 못했던 퇴계 선생의 시를 찬찬히 읽어 보았다. 평생 학문에 정진하는 군자가 산(山)을 통하여 사유하는 그 고매한 인격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조용히 시를 읽으며 오늘 우리들 ‘청량산 산행’을 마감한다. 먼저 시비 전면에 있는 ‘讀書如遊山’(책을 읽은 것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네)이다.
讀書人說遊山似 사람들은 말하기를 글 읽기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지만
今見遊山似讀書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 공력(工力)을 다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淺深得處摠由渠 깊고 얕음 아는 것, 모두 도랑으로부터 말미암네!
坐看雲起因知妙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바라보며 묘리를 알게 되고
行道源頭時覺初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을 깨닫네!
絶頂高尋勉公等 절정(絶頂)을 찾아가는 것,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老衰中輟愧深余 노쇠하여 중로(中路)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선생은, 산을 오르는 것이 학문을 하는 것과 같다고 전제하고[頭聯] 산이나 학문이나 있는 힘을 다하여 공력(工力)을 다하게 되면 스스로 내려올 줄 안다고 했다. 고절한 학문을 이루게 되면 스스로 겸손(謙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 내려와 졸졸졸 흘러가는 도랑물을 보면서 그 깊고 얕음을 알듯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다.[頷聯] 고개 들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하늘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지상의 발길, 즉 현실 속에서 그 삶의 근원이 되는 시작을 깨닫는 것이다.[頸聯] 그런데 산의 정상(頂上)에 오르지 못하고 중로(中路)에서 그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尾聯] 당신이 이루지 못한 학문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성인의 도(道)를 이루는 것은 후학(後學)에게 당부하고 있다. 겸손이시다. 고절한 경지에서도 제자들을 믿고 공경하는 마음, 당신 스스로 겸손하신 것이다.
학문과 자연, 천지만물의 이치와 일상적인 삶의 근원을 사유하며, 고절한 학문을 위해 공력을 다하는 것은 산의 정상을 오르기 위해 뜨거운 땀을 흘리는 것과 같다. 퇴계 선생이 지니신 평생의 좌우명이 ‘毋不敬’(무불경)이다. 공경(恭敬)하는 마음은 곧 겸손함으로 드러난다. 당시 <도산서당>에 공부하러 오는 제자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선생은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꼭 문밖까지 나가서 정중하게 배웅했다는 일화가 있다. 공경하는 마음이 지극하신 것이다.
오늘 하늘로 올라가는 아득한 계단에서 공력(工力)의 땀을 흘리고 청량산 절정에서 하늘과 만나고 온 우리들이다. 우리 대원들의 그 지극한 공력이 참 아름답다. 참에, 우리도 퇴계 선생의 시상을 우리들 마음에 담아본다. 높이 오를수록 더욱 겸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配慮)하고 공경(恭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의 삶도 무척 넉넉하고 행복할 것이다. 학문을 연구하는 것[讀書]과 산을 오르는 것[遊山]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시비의 뒷면에는 칠언절구로 된 시 두 편이 새겨져 있다. 먼저 ‘渡彌川望山’(미천을 건너며 산을 바라보다)이다.
曲折婁渡淸淸灘 (곡절누도청청탄) 굽이굽이 맑은 물 여러 번 건너니
突兀始見高高山 (돌올시견고고산) 우뚝 솟은 높은 산이 비로소 보이네
淸淸高高隱復見 (청청고고은부견) 맑은 여울 높은 산 숨었다 다시 나타나
無窮變態供吟鞍 (무궁변태공음안) 끝없이 바뀌는 모습이 시상을 북돋우네
도산(陶山)에서 이곳 청량산(淸凉山)까지 오는 길은 여러 번 강물을 건너야 한다. 그 길이 지금도 ‘퇴계 명상길’로 남아있다. 그리하여 ‘맑고 맑은 여울(淸淸灘)’을 여러 번 건너고 나면 마주하는 청량산은 ‘우뚝 솟은(突兀)’ ‘높고 높은 산(高高山)’이다. 그 청량산을 바라보며 솟아나는 시흥(詩興)을 읊조린 것이다. 다음은 나란히 새겨 놓은 ‘約與諸人遊淸涼山馬上作’(여러 벗과 청량산에 노닐기를 언약하고 말 위에서 읊다)이다. 거기에 담긴 시상이 딱, 오늘 우리의 마음이다!!
居山猶恨未山深 (거산유한미산심) 산에 살아도 산이 깊지 못함을 아쉬워하다가
蓐食凌晨去更尋 (욕식능신거갱심) 이른 새벽밥 먹고 떠나서 다시 찾아오니
滿目群峰迎我喜 (만목군봉영아희) 눈에 가득한 뭇 봉우리가 나를 맞아 기뻐하며
騰雲作態助淸吟 (등운작태조청음) 두둥실 구름모양 지어 맑은 시상(詩想)을 돕네
청량지문(淸凉之門)으로 들어가는 다리 <청량교>를 나오다
* [에필로그] —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인간이 인간을 충심으로 공경하는 …
오늘은, 저 멀리 물 맑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경상북도 봉화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을 다녀왔다. 하늘로 우뚝 솟은 암봉들이 절묘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 천혜의 절경 청량산은 그 산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예로부터 그 청정한 기운이 힘차게 솟아나는 명승지로 이름이 나 있다. 그래서 일찍이 고절한 선현들이 이곳을 찾아와 학문에 정진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터전으로 삼았다. 통일신라시대의 명필 김생(金生)은 이곳에 은거하면서 해동 최고의 서법(書法)을 완성하여 서성(書聖)에 올랐다. 조선시대의 학덕의 정치를 하면서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주세붕(周世鵬) 선생은, 풍기군수로 있을 때 청량산 찾아와 그 산정에 올라 신선(神仙)의 기품을 노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退溪) 선생은 청량산의 맑은 정기로 심신을 도야하여 동방의 성자(聖者)가 되셨다. 특히 퇴계 선생은 이 청량산을 사랑하여, 일상 속에서 수시로 청량산을 오가며 명상을 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인격을 고양하였다. 그러므로 청량산은 퇴계 선생의 정신사의 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뚝한 암봉의 병풍 속에 자리잡은 고찰 청량사 또한 불심이 깊은 연꽃도량이다. …
오늘 우리는 그 유서 깊은 청량산을 온몸으로 안고 뜨거운 땀을 흘렸다. 그리하여 창량산의 정결한 기운과 선현들의 높은 경지와 풍류를 가슴에 담아왔다. 심신(心身)이 한결 청정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인간이 인간을 충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특히 온통 거짓과 허위의식이 판을 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걱정하며 아프게 산을 넘었다. 참된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삶, 그것이 바로 행복한 세상이 되는 길이다. 각자의 생각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살길이다. 그래서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씀하셨다. 우리 동인(同人)의 군자 이기동(李基東) 선생의 <한마음> 철학까지 모두 일이관지(一以貫之)로 통한다.
* [귀경 ; 칼국수 만찬] —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청량산에 대체버스가 도착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을 내려와 <시비공원>에서 1시간 30분을 기다린 후였다. 청량산에서 서울까지, 티맵(T-map)의 도움을 받아, 막히지 않은 길을 찾아 쾌주(快走)할 수 있었다. 저녁 9시 20분,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 일요일 오후의 귀경길,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서울에 당도한 것이다. … 그런데 오늘, 상경의 버스 안에서 명랑한 조인규 님이 ‘주체할 수 없는 우정을 어찌할 수 없다’며 기분 좋게 저녁을 산다고 했다. 늘 우리들이 단골로 찾는 구의동 <민속집>이다. 무사히 산행을 마친 대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구수하고 따끈한 칼국수를 함께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마음과 몸이 넉넉한 시간이었다.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조인규 님의 정성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
<끝>
첫댓글 전에 워낭소리란 영화를 보고 나서 청량사를 참 가보고 싶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갔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에 반했었지요.
그 다음에 교촌에서 주먹밥 만들어서 하늘다리 건너 자리잡고
맛난 주먹밥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날 송재는 여동생에 대한
아픈 추억을 얘기했고 만촌은 뒤로 넘어갈뻔 한 아슬아슬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도 그 다리 넘었었지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