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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강릉 대형산불 발생
이날 산불은 오전 8시30분쯤 강릉시 난곡동 일대에서 강풍으로 나무가 전신주에 넘어지며 화재가 발생했다. 현장에는 순간 최대풍속 초속 30m의 강풍이 불어 헬기 투입 자체가 불가능해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 소방인력 2700여명 장비 400여대를 투입하였다.
오전 10시30분부로 소방청은 최고 대응 수위인 소방 대응 3단계, 전국 소방동원령 2호를 발령했다. 1명이 사망하고 주택 59채, 펜션 33채, 호텔 3채, 상가 3채, 휴양관 1채 등 건물 99채가 불에 탔다 산림피해는 379ha이다 경포동 주민 등 147가구 557명의 주민이 강릉 아레나와 사천중, 초당초교 경포동 주민센터 등으로 대피하였고 호텔 등에서 대피한 관광객 708명까지 더하면 대피 인원은 1260명에 이른다.
2023년 이탈리아 3일 간 난민 3000명 유입으로 바상사태 선포
2021년 배우 윤여정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2021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받음
2019년 수단 시민들의 반독재시위 4개월 만에 30년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75세) 축출
2019년 헌법재판소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낙태처벌조항 66년 만에 폐지
2018년 알제리서 최악의 군용기 추락 사고 250명 사망
2017년 세월호 인양 목포 신항에 거치
2016년 브라질 하원 호세프 대통령탄핵안 통과(342 대 135)
2010년 개신교 원로 조향록 목사 별세
1920년 함경남도 북청 출생인 조 목사는 1943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했으며, 함남 풍산읍교회 전도사와 서울 신사동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1954년 천막교회이던 서울 종로구 초동교회에 부임해 1976년까지 담임목사를 역임하면서 이 교회를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대표 교회 중 하나로 키웠다.
1970~71년 기장 총회장을 맡았고, 1976년부터 4년간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1976년 ‘생명의전화’ 운동을 벌여 20년간 이사장을 맡았으며, 1990년부터 일가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왔다.
2009년 태국, 반정부시위로 아세안+3 정상회의 취소
아피싯 웨차치와 태국 총리는 2009년 4월 11일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태국 파타야 및 인근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또한 태국정부 관계자는 이날 열릴 예정이었던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가 보안상의 이유로 취소했다.
탁신 친나왓 전 태국총리를 지지하는 단체인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이 이끄는 반정부 시위대 1000여명은 이날 오후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던 파타야 ‘로열 클리프’ 호텔에 유리문을 뚫고 침입해 컨벤션홀을 점령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로 태국에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됨에 따라 당초 일정을 하루 앞당겨 11일 오후 조기 귀국키로 했다.
이 대통령은 그러나 이날 중국 원자바오 총리와의 한중 정상 면담, 일본 아소 다로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에 이어 한·중·일 3개국 정상회의를 갖고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에 따른 후속 대책 등의 현안을 논의했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당초 오는 12일 오전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태국 반정부 시위로 하루 앞당겨 열렸다.
앞서 시위대는 이명박 대통령과 원자바오중국 총리가 묵고 있는 호텔과 정상회의장이 있는 호텔 등 2곳을 봉쇄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11일 오전 예정됐던 한·중·일 외교장관 조찬회담과 중국-아세안 정상회의, 한국-아세안 정상회의가 차례로 무산됐다.
2006년 일본 정부 “납북 메구미 남편은 78년 납북 김영남씨”
1977년 일본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 씨(납치 당시 13세)의 남편이 이듬해 전북 군산의 해수욕장에서 납북된 김영남 씨(납치 당시 16세)라는 유전자(DNA)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일본 외무성이 11일 발표했다.
일본 외무성은 김 씨와 메구미 씨의 딸로 알려진 김혜경 양(18세)의 머리카락과 한국에 살고 있는 김영남 씨 가족의 DNA를 검사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김 양의 머리카락은 2002년 9월 일본의 조사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 양에게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2000년대 초까지도 메구미 씨 납치 사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2002년에야 인정했다. 북한은 메구미 씨가 1986년 8월 ‘김철준’이라는 사람과 결혼해 이듬해 딸 ‘혜경’을 낳고 살다 1993년 3월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전했다. 2004년 일본 대표단은 김철준 씨를 만나 메구미 씨의 유골과 사진, 학생증 등을 전달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유전자 검사 결과 유골은 가짜로 판명됐다.
일본 정부는 올해 초 메구미 씨의 남편 김철준 씨가 한국에서 납북된 김영남 씨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김 씨의 DNA 감정 자료를 요청했지만 북한은 거부했다.
2006년 신상옥 감독 별세
신상옥 감독은 1952년 영화 ‘악야(惡夜)’로 감독에 데뷔했으며 1953년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결혼했다.
1978년 홍콩에서 납북돼 1986년 북한을 탈출했고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평생을 영화계에 몸담아 왔다. 대표작으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상록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이 있다. 신씨는 최근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 통원치료를 받아왔다.
2004년 탤런트 이미경씨 암투병 끝에 사망
폐암으로 투병해 온 독신의 중견 여자 탤런트 이미경이 끝내 눈을 감았다. 향년 44세.
지난해 10월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서울 원자력병원 등에서 7차례에 이르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병마와 싸워왔던 이미경은 11일 오후 11시 서울 정릉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미경은 지난 7일 예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를 볼 정도로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11일 오후 9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한 끝에 오빠 이성진씨와 서울예전 대학동창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을 달리했다.
2004년 민족사관고등학교 조기졸업생 박원희양(17), 미국 10개 명문대 동시 합격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한 박원희양(17)이 2004년 4월 11일 미국의 명문대학 10곳에 동시 합격했다고 대전시교육청이 밝혔다. 박양은 또 지난해 10월 제2기 삼성 이건희 해외유학장학생으로 선발돼 연간 5만달러씩 4년간 장학금을 ‘예약’ 한 상태이다.
박양은 대전 전민중학교를 거쳐 지난 2월 민족사관고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조기 졸업했다. 박양은 또 미국 대학의 교양과정을 미리 고교에서 이수하는 11개 AP(Advanced Placement·대학 사전 학점 취득제) 과목에서 모두 5.0 만점을 받았다. 특히 박양은 해외 체류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미국 대학 진학 적성검사인 SATⅠ에서 1600점 만점에 1560점을 받았고, 미국 현지 학생들도 어렵다는 SAT II의 writing(논문) 과목에서 800점 만점을 받는 놀라운 실력을 과시했다.
박양은 고교 연극부장을 맡아 2003년 전국 영어연극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취미로 검도를 열심히 배우는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1남1녀 중 맏이인 박양은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해 불치병 치료제나 신약을 개발하고 노벨 과학상도 받고 싶다” 고 말했다.
2001년 국민은행-주택은행 합병 타결
1999년 다우다 말람 완케 소령, 니제르 대통령에 취임
니제르 대통령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대통령 경호대장 다우다 말람 완케 소령(49)이 1999년 4월 1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새 강자로 11일 등장한 완케 소령은 외부 세계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겸손하고 정직한 군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브라힘 바레 마이나사라 대통령은 수도 니아메의 공항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목격자들은 바레 대통령이 다오우다 말람 완케 소령 휘하의 대통령 경호부대원들로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아 사망했다고 전했다. 총격 과정에서 군인 3명, 민간인 1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완케 사령관은 9개월 뒤 자유 선거를 치르기까지 과도기 니제르 군정을 이끌 대통령 겸 `민족화해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군부는 대법원과 국회 해산, 헌정 중단, 지난 2월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1999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에 당선
1999년 인도, 핵탄두 탑재 중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아그니II 시험 발사
1997년 앙골라 내전 종식하고 22년 만에 단일거국정부 출범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15대 총선은 총유권자 3148만8294명 가운데 2011만8528명이 투표를 마쳐 63.9%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시도별로는 경북이 71.6%로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고, 인천이 60.1%로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정당별 의석수는 전체의석 299석(전국구 46석 포함) 가운데 신한국당 139석(전국구 18석), 국민회의 79석(전국구 13석), 자민련 50석(전국구 9석), 민주당 15석(전국구 6석)으로 집계됐다. 무소속 후보도 16명이 당선됐다. 전문가들은 15대 총선이 완승과 완패없는 선거였다고 평가했다.
철저한 지역분할구도 속에서 당초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크게 고전할 것이란 전망속에 출발했던 이번 총선은 신한국당이 일단 패배를 모면하고 원내 과반수에 근접하는 결과로 막을 내렸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상대적으로 답보상태에 그쳤고,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이런 가운데 분전했다.
1995년 대종교 총전교 안호상씨와 종무원장 김선적씨,북한의 어천절 행사와 단군릉 방문을 목적으로 불법 입국
1991년 언론인 몽향 최석채 사망
`대쪽 성격의 평생 논객`(동아일보), `독재에도 꺽이지 않는 직필`(세계일보), `언론창달에 평생 바친 대기자`(서울신문), `시유영합 않고 정론 지킨 대쪽 논객`(조선일보)... 1991년 4월 11일 몽향이 서거했을 때 주요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의 제목들이다. 몽향은 대쪽, 논객, 직필, 대기자, 정론 등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한 가지라도 갖고 싶은 칭송의 어휘들을 한 몸에 가졌다. 그는 평생을 논객으로 살아온 언론계의 큰 별이었다.
몽향은 1942년 일본 중앙대 재학중 ‘법제’ 라는 잡지의 기자로 일한 것이 인연이 돼 해방 후인 1946년 경북신문 편집부국장으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그후 대구 매일신문 주필, 경향신문 편집국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주필을 지냈고 1966년부터 1977년까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3대 회장직을 맡는 등 언론계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정론-직필의 자세를 견지해왔던 그는 1955년 9월 대구 매일신문에 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는 사설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등 두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1년 유엔안보리서 걸프전 종전 공식 선언
1985년 알바니아 최초의 공산주의자 국가원수인 에베르 호자 사망
그는(Enver Hoxha)1908년 10월 16일 알바니아 기로카스터르에서 태어나 반대자들에게 즉결처분을 자행한 극단적인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는1930년∼1936년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귀국 후 교사로 있으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41년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한 뒤, 알바니아 공산당 창립에 이바지하여 1943년부터 당서기장, 알바니아 총리,외무장관등을 역임하다가 1954년부터 노동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알바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보호를 받는 공산공화국이 되었다. 이런 보호에 분개한 그는 스탈린과 티토 사이의 적개심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결별했다.
1960년부터 알바니아와 소련의 관계가 나빠지자 구소련에서는 그를 완고한 교조주의자(敎條主義者), 개인숭배의 찬미자라 하여 압력을 가하였으나, 약소국인 알바니아의 자력갱생을 위한 영웅으로서 온 국민의 경애를 받았다. 반면에 그는 중국과는 경제적,정치적인 이유(모스크바를 자극하는 수단)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 동맹관계도 중국의 미국 관계개선을 위한 `3개의 세계`이론으로 인해 오래가지는 못했다.
1983년 채문식 국회의장 피선
1983년 목동 신시가지 개발 계획 발표
1982년 전북 남원군 아영면 고분서 가야시대의 철제갑옷 등 27점 발굴
1981년 제11대 국회 개원. 입법의회 폐회
1981년 정래혁 국회의장 피선
1980년 한국, 미국 항공기의 중공 이원권 제한 해제
1979년 우간다의 이디 아민 정권 붕괴
1977년 장기영 전 부총리 사망
1975년 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 4월 11일 한국민속박물관이 문공부장관을 비롯한 문화계 학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됐다.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이 경복궁안에 마련한 민속박물관은 생업실, 공예실, 식생활실, 주거실, 복식실, 신앙의례실 등 8개 상설전시실을 갖추고 전통적인 민속자료를 수집, 전시하며 생활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는데 중심역할을 하게 됐다.
민속박물관은 민속자료 5천6점을 중앙홀과 8개 전시실에 나누어 진열했다. 전시자료는 대부분 조선왕조시대 후기 18,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치는 유물들이었다. 이 박물관은 3억2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2년 만에 세워졌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민속박물관이 설치된 것은 해방 후 이루어진 민족박물관이었으나 6.25동란으로 문을 닫은 뒤 수장품은 경주박물관 창고에 사장되고 말았다. 이때 개관한 민속박물관은 지난 1966년에 문화재관리국이 소규모의 한국민속관을 열었던 것을 박물관규모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박물관의 전시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5시까지였다.
1975년 다형 김현승 시인 사망 -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
1972년 이란서 대지진으로 4천명 사망
1972년 치안국,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재건 등 획책한 고정간첩 9명 검거발표
치안국은 통일혁명당 재건을 목적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간첩단의 핵심인물 9명을 검거했다고 1972년 4월 11일 발표했다.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의 활동이 외부세계로 드러난 것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의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의 진상발표에 의해서였다. 이 조직은 북한노동당의 실질적인 대남 지하당 조직으로서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수도권 장악과 요인 암살 및 정부 전복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158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에는 문화인, 종교인, 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간첩단은 1969년 1월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상의 간첩죄, 내란음모죄 등이 적용돼 핵심인물인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 5명은 사형, 신광현 등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21명은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70년 미(美) 아폴로 13호 우주 발사 후 사고
1970년 태평양 한복판 하와이에서 화산 폭발
1970년 경남은행 개점
1969년 마샬 그린 미국 국무부차관보 내한
1968년 미(美)존슨 대통령- 민권 법안 서명
1967년 아시아생산성기구(APO) 제8차 이사회 서울서 개최
1960년 마산상고생 김주열 시체로 발견돼-마산서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 가열
1959년 장훈 일본 프로야구 데뷔 첫 안타·홈런
1959년 4월 10일 일본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이날, 나니와(浪華)상고를 갓 졸업하고 프로야구단 도에이(東映)에 입단한 6번 타자 장훈(張勳) 선수가 타석에 섰다. 고교 시절 왕정치와 고교야구계를 양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지만 프로야구는 역시 달랐다. 상대 투수가 던진 공은 3개뿐, 3구 3진을 당한 것이다. 더구나 수비에서도 외야플라이를 머리 위로 넘기는 결정적인 실수까지 범했다. 교체. 그날 밤 장훈은 2군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초조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4월 11일의 상대 투수는 전년도 성적 14승4패라는 발군의 성적을 기록한 한큐(返急)의 아키모토. 프로야구 데뷔 두 번째 타석에 나선 장훈의 눈에 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좌중간 2루타, 데뷔 첫 안타였고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인 3085안타의 시작이었다. 다음 타석은 우측담장을 넘기는 홈런, 역시 23년간 기록했던 504개 홈런의 첫 출발이었다. 데뷔 첫 해 장훈은 신인왕을 수상했다. 1982년 41세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7차례 ‘수위타자’ 를 기록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일본 프로야구의 대기록으로 남아 있다.
1959년 한국 유네스코(UNESCO)회관 명동서 기공
1953년 한국전쟁 상이 포로 교환협정
1952년 미국 항공기 추락 52명 사망
1951년 트루먼, 맥아더를 유엔군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1951년 4월 11일 백악관 기자회견을 통해 맥아더 유엔군최고사령관을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 중장을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해임 이유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맥아더 원수가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미국과 유엔의 방침을 전면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에 관한 대통령과 맥아더의 불일치는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마틴 하원공화당 원내총무가 "일본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켜야 한다"는 맥아더 원수의 편지를 의회에서 공개하자 이에 트루먼 대통령이 격노해 이날 해임에까지 이른 것이다.
맥아더 원수는 트루먼 대통령의 이같은 결정에 애석해하며 일본을 떠나 고국인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국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지만, 4월19일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후 군력(軍歷)에 이별을 고해야했다.
1948년 이란, 아제르바이잔에 계엄령 선포
1939년 영화사의 큰 별 클라크 케이블의 결혼
1933년 시인 고은 출생
1929년 자원조사법 공포(12.1 시행)
1919년 독립지사 29명 국호 ‘대한민국’ 표결로 제정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외국인 거주지) 진선푸루(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에 독립지사 29명이 모여들었다. 최초의 민의기관인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설립이 결정된 역사적인 자리, 국호(國號)도 함께 논의됐다. 독립지사들은 모임의 이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다음 날인 1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다.
신석우가 제안한 ‘대한민국’은 채택을 둘러싸고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며 여운형이 반대했지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며 신석우가 맞받아쳤다. '대한'은 1897년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면서 처음 불리기 시작했지만 한일합병 후 일제에 의해 사라졌었다. 결국 표결에 부쳐졌고 다수결로 ‘대한민국’이 정식 국호로 채택됐다. 신석우는 8년 후인 1927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다.
국가라는 실체가 없어 이름만 존재했던 대한민국이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은 것은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되고나서였다. 그해 5월 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의장이 '대한민국'을 국호로 언급함에 따라 '대한민국'이 국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지만 공식적으로는 7월 1일 제헌국회 제21차 회의에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이 심의에 올라 확정됐다.
의원들은 먼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부터 심의에 들어갔다. 국호명칭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이 ‘대한민국’이란 명칭에 이의를 제기했다. 결국 거수 표결에 들어가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 반대 2명으로 새 나라 새 역사를 열어나갈 신생국가 이름이 확정됐다.
1905년 헝가리 시인 요제프 출생
1902년 엔리코 카루소, 최초로 호텔서 음반 녹음
1902년 4월 11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그랜드호텔 306호실. 마이크가 아직 발명되지 않은 시절, 테너가수 엔리코 카루소가 객실 안에 설치된 집음(集音)나팔 앞에 섰다.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 등 10곡의 아리아가 강하면서도 서정적인 목소리로 녹음되면서 세계최초의 음반녹음이 2시간 만에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이 자리가 마련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날의 녹음을 진행한 영국의 그라모폰사(社)가 처음엔 카루소의 음반녹음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라모폰사의 녹음책임자 가이스버그가 밀라노 스칼라좌에서 카루소의 노래를 듣고 본사에 카루소의 음반녹음을 타진했지만, 본사는 카루소가 아직 런던과 뉴욕의 큰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는 젊은 가수라는 이유를 들어 레코딩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가이스버그가 본사의 이런 지시를 무시하고 녹음을 강행한 것이다.
카루소가 녹음 대가로 받은 금액은 100파운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불티나게 팔린 음반 덕에 그라모폰사는 1만5000파운드나 되는 이익을 냈다. 카루소도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게 돼 이때부터 1921년 48세로 숨질 때까지 무려 607회에 달하는 오페라에 출연, ‘황금의 테너’라는 격찬을 받았다.
1904년 2월 카루소를 전속계약한 빅터사도 카루소 음반으로 세계 음반시장을 석권, 카루소에게 100만 달러 이상의 로열티를 지급했다. 카루소의 음반 성공은 축음기 보급에도 기여해 1901년 7,570에 불과했던 생산량이 1906년에는 10배가 넘는 8만 8,000여 해로 늘어났다.(빅터사 통계)
1899년 스페인, 미-서전쟁 종전으로 식민지 필리핀을 미국에 양도
1869년 노르웨이의 조각가 바겔란 출생 - 오슬로의 프로고네르 공원의 분수광장으로 유명
1862년 별의 시선속도를 분광학적으로 측정한 미국의 천문학자 윌리암 캠벨 출생
1814년 나폴레옹 퇴위
1713년 지브롤터,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영국 식민지에 편입
1713년 4월 11일 프랑스-스페인과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스페인령 지브롤터가 영국 식민지에 편입됐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남단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향하고 있는 작은 반도로, 높이 425m의 바위산 ‘지브롤터 바위’가 깍아지른 듯 서있다. 면적이 5.8만 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바위산이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과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바짝 붙어있어 역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 중요시되어온 온 지역이다.
이 반도가 영국의 손에 들어간 것은 1704년이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에 참가한 영국 해군이 이 근처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지브롤터에 영국 국기를 처음으로 꽂은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유트레히트 조약을 통해 점령을 공식화했다. 스페인은 이 지역을 빼앗긴 이후 지금까지 줄곧 영국에 영토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영국의 반응은 늘 냉담했다.
스페인은 이 지역이 면세지대라는 특성으로 밀수와 마약거래, 돈세탁이 성행해 스페인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며 줄곧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1964년에는 유엔 식민지위원회에 영토 반환요구를 제출한 바 있고, 1969년과 1981년에는 국경을 폐쇄, 현지 주민과 영국의 불만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1964년 지브롤터에 부분자치를 허용했고, 지브롤터 주민들은 1967년 9월 10일, 자체 투표를 통해 계속 영국령에 남겠다는 의사를 재확인함으로써 스페인을 당혹케 하고 있다. 1969년부터는 지브롤터 정부가 대부분 내정에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영국의 상주 병력과 스페인계를 포함해 3만1천명이 살고 있다.
1713년 독일 오펠사 자동차 시속 238km 기록 수립
1510년(조선 중종 5) 삼포왜란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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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년 최선(崔詵) 등, 자치통감(資治通鑑) 수교·조인
593년 일본, 성덕태자(聖德太子)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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