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문 시인과 단양
사진/글 김경식
남녘에 매화가 피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는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자유의 혼이 봄바람으로 다가오면, 그의 시는 가슴을 흔들고 이성적 분노로
하늘을 응시하게 만든다.
그는 조선시대 사화를 피해 숨어 들었던 처사의 처연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처사처럼 글을 읽거나 제자를 길러 후일을 도모한 사람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시대에 가슴으로 읽어야 하는 시를 남기고 홀연히 농사꾼이 되어 떠나갔기 때문이다.
단양 오지에서 독학으로 침술을 익히며 가난으로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침을 놓다가 끝내는 자신의 육체마저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귀했던 시인이란 직함조차 넝마로 버리고, 농부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침술사가 되었다.
그가 바로 신동문 (辛東問1927~1993)시인이다.
금년은 4,19혁명 50주년이다.
아무래도 그의 대표시를 읽어야 50년 전 4,19혁명의 함성이 살아올 것 같다.
단양 소금정공원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
이어서 서 남 북
거리마다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알 부릅쥔 채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
아! 신화같이
나타난 다비데(다윗) 군들
혼자서만
야망 태우는
목동이 아니었다.
열씩
백씩
천씩 만씩
어깨 맞잡고
팔짱 맞끼고
공동의 희망을
태양처럼 불태우는
아! 새로운 신화 같은
젊은 다비데(다윗) 군들
고리아테(골리앗) 아닌
거인
살인전제(殺人專制) 바리케이트
그 간악한 조직의 교두보
무차별 총구 앞에
빈 몸에 맨주먹
돌알로써 대결하는
아! 신화 같이
기이한 다비데(다윗) 군들
아!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다윗) 군들
내흔드는
깃발은
쓰러진 전우의
피묻은 옷자락
허영도 멋도 아닌
목숨의 대가를
절규로
내흔들며
아! 신화같이
승리할 다비데(다윗) 군들
누가 우는가
눈물 아닌 핏방울로
누가 우는가
역사가 우는가
세계가 우는가
신이 우는가
우리도
아! 신화같이
우리도
운다.
--신동문 시인 시 “아! 신화같이 다비데(다윗) 군(群)들” 부분
구단양전경
4,19 당시의 신문과 잡지의 활자를 달구며 뜨겁게 자유의 깃발을 들게 하였던 그 많던 시인들 중에 유독 그의 시를 생각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의 정직성과 희생적인 삶 때문일 것이다.
신동문 시인이 1960년 사상계 6월호에 게재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1백8행의 시에 주목한 이유다. <아! 신화같이 다비데(다윗) 군(群)들>이란 제목의 이 시를 다 옮길 수 없음이 안타깝다.
그러나 이 시는 4,19혁명 당시 총알이 발사되는 현장에서 쓴 시이므로 단 몇 행만 읽어도 전율이 흐른다. 이 시를 찬찬히 읽어 보아도 감동이 없다면, 아마 4,19혁명의 정의와 역사성을 모르거나,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고, 삶을 이기적이며 편하게 살아온 사람이리라.
자유의 고귀함과 역사적인 진실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잠시라도 생각한다면, 시의 투박한 언어들이 오히려 맥박처럼 가슴으로 전달되어 오기 때문이다. ‘4,19 한낮에’라는 부제를 단 신동문 시인의 대표작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은 4,19혁명의 꽃이다. 그가 지니고 살았던 문학의 총체적인 몸서리 같은 이성적인 분노와 선명하고 뜨거운 흔들림이 이 시에서 번득이기 때문이다.
당시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총칼과 탱크에 맨주먹과 돌멩이로 대결한 학생들을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에 비유한 은유적 상징성이 놀랍다.
경찰의 총알이 발사되고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가 하늘을 날아가는 현장에서 기자도 아닌 작가가 시를 쓰는 행위는 결코 쉽지 않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접근 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세상의 산소와 같은 존재이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으면 생물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세상의 산소를 만드는 일이 작가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이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작가들은 짠맛을 잃은 소금이다. 짜지 않은 소금은 소금이 아니듯 사회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작가는 존경받기는 힘들 것이다.
때로 산소대신 독가스를 만들어 위협하는 세력은 공포분위기를 만들어 민중들을 탄압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를 지닌 작가는 불의한 세력과 권력에 저항하는 글을 써야 한다. 이것이 작가정신이다.
신동문, 그는 고난의 시대에 산소를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십자가를 지고 떠난 작가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동문 시인을 모르며 살아 왔다. 또는 알면서도 잊으려 했는지 모른다.
고난의 시대와 모순과 절망의 세월들을 들추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봄이 오는 길목, 지금 나는 운명처럼 그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고 있다. 그 음습한 세월을 들추고 꺼내어 따사로운 햇살에 말리게 될 것이다.
그의 시는 4,19혁명 때에 잠시 빛을 보았다. 그 시절 4,19혁명의 그날 총소리가 들리는 경무대 가까운 곳 어디쯤에서 썼을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의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1960년대 중반에 그는 혁명의 주체가 정권을 잡지 못하고 군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싫었다. 군사정권에도 저항을 하였지만 반공과 경제를 지향하는 정부에 나약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미리 예비해 두었던 장소 단양 애곡리로 찾아 든다.
그가 마지막 18년 마지막 삶의 터전인 단양 애곡리 산골짝을 찾고 싶었던 것이 벌써 몇 년이던가. 이제야 그의 삶터를 찾아 떠나는 것이 부끄럽다.
절필하고 찾아 들었던 단양 애곡리의 삶터를 찾아가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는 이유였다.
1965년 그는 군사정권이 오래갈 것 같아 “잘못된 시대에 맞서 홍경래는 혁명을 일으켰는데, 잘못된 혁명정권 아래서 시나 쓰고 바둑이나 두고 있는 자신이 밉다”며, 시 <바둑과 홍경래>를 끝으로 절필한 문인이다.
신동문이 경영하던 농장
1965년부터 충북 단양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 기슭의 야산을 개간(과수원)하여 농사꾼이 되었다. 이때부터 10년 동안은 간혹 서울로 올라와 진보적인 잡지 일을 거들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는 독학으로 익힌 침술로 하루 평균 30여 명씩 18년 동안 약 10만 명에게 무료 봉사한 삶을 선택한다. 문학행위를 버리고 가난한 이를 위한 침술사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봉사로 '신(辛)바이처'라는 별명을 가진 신동문 시인은 1993년 유언에 따라 자신의
장기(臟器)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변하여 이런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고, 4,19혁명 50주년이 눈앞이다.
그의 삶과 문학을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의 시 ‘내 노동으로’를 읽고, 아직은 어둠이 자욱한 새벽에 집을 나선다. 일산의 자유로는 이미 차량의 이동이 분주하다. 한강을 보면서 달린다. 중부고속도로 호법에서 영동고속도로 강릉방향으로 진입하니 이제야 답사 기분이 난다.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바꿔 타고 왼쪽의 치악산을 바라보니 산 중턱부터는 구름이 흘러간다. 치악산은 구름에 휩싸이고 있지만, 높은 봉들은 보일 듯 말듯 멀어져 간다. 이곳에서 약 40분을 달려 중앙고속도로 북단양IC로 빠져 나오면, 매포읍으로 이어진 ‘적성로’이다.
매포읍 입구에서 평동로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이내 단양로와 만난다. 이 때 왼쪽으로 한일시멘트공장의 거대한 시설들을 만나면, 이곳이 정말 단양인가 하고 착각을 한다. 이 지역이 석회암지대임을 알게 되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이다. 아직은 사람들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먹고 사는데 있다. 당분간 이 지역 시멘트공장들은 단양의 지역 경제에 많은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장들이 아주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환경문제로 득보다 실이 많다고 하면 단양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양팔경의 절경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은 성신양회 앞에서 좌회전하여 삼봉로에 이르러서야 이곳이 도담삼봉 인근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도담삼봉이 마중을 나오듯 자신들의 몸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양의 산과 구름
단양지역은 남한강이 뱀처럼 휘감아 돌아간다. 그런대 강은 오히려 휘감아 돌아갈 때 안정적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강둑을 일직선으로 했는데, 물난리를 당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강물의 흐름이 빠르기 때문이다. 강은 자연조건을 거슬리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굽이쳐 흘러가야 오히려 안정적이다. 단양의 영역을 남한강은 몇 번을 굽이쳐 흐른다. 단양읍은 이런 흐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영월에서 흘러온 남한강은 영춘과 도담리를 거쳐 이곳 신단양의 대성산을 크게 휘감아 돌아 구단양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영춘에서 흘러온 남한강은 덕천교에서 우회전하여 도담지역에 닿는다. 이곳에 단양팔경의 2경인 도담삼봉과 석문이 있다.
도담삼봉은 문학과 이야기가 가장 많은 곳이다.
도담삼봉은 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195번지의 남한강 가운데 서 있다.
단양하면 '단양팔경'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단양팔경이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이 단양팔경이다. 단양팔경은 강상사경(江上四景)과 계상사경(溪上四景)으로 분류된다. 남한강에 있는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은 강상사경(江上四景)이다. 단양천과 남조천에 있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은 계상사경(溪上四景)이다.
도담삼봉
도담삼봉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과 관련한 흥미 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의 고향은 경북 영주였다. 어느 날 이 곳 도담을 지나다가 관상을 보는 이를 만난다. 그는 정운경에게 10년 후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들을 얻게 된다는 예언을 듣는다. 10년 후에 그는 천민 출신의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는다. 이름은 ‘길에서 전해들은 예언을 통해 얻은 자식’이라 하여 도전(道傳)이라고 짖는다.
부모의 인연을 닿게 하였던 장소가 이곳 삼봉이 보이는 곳이라 그는 호(號)를 삼봉(三峰)이라
지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정설은 그가 한양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년시절 그는 총명했다. 그에 관해 전설같은 이야기들은 민중들의 입을 통해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는 것이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이유다. 다음과 같은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이다.
도담삼봉은 본래 강원도 정선 땅에 있었다고 한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정도전 이전에 홍수로 떠내려 오다가 지금의 위치에서 멈추었다는 것이다.
이 삼봉이 홍수로 떠 내려와 지금의 도담에 멈추어 버린다. 이에 정선 사람들은 단양까지 흘러들어온 삼봉을 돌려달라고 한다. 단양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자 정선에서는 다시 삼봉의 세금을 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관가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는 것이다.
어린 정도전은 오히려 물길을 막아 홍수를 만든다고 삼봉을 정선이 가져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선사람들은 도담삼봉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은 정도전과 저 삼봉 바위들을 어떻게 하든 엮어보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이 고장 출신이라고 믿는 정도전을 위인화 시키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다.
우리네 조상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한 인간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도담삼봉에는 이름처럼 세 봉우리가 강위에 솟아 있다. 사람들은 이 봉우리 이름을 남편봉 ,처봉, 첩봉으로 부른다. 가운데 가장 높은 봉은 장군봉(남편봉)이다. 장군봉에는 삼도정 이라는 육각정자가 앉아 있다.
처음에는 정도전이 정자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정자는 채 20년이 되지 않은 정자이다. 이 장군봉(남편봉)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처봉과 첩봉이 서 있다.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이 속에는 우리네 삶의 사랑과 질투와 미움의 마음이 녹아 있다. 본처가 애를 낳지 못하자 남편은 첩을 얻는다. 첩은 이내 아이를 임신한다. 화가 난 본처는 남편봉을 등지고 앉는다. 결국 첩봉은 남편봉을 향하고 있고 처봉은 남편봉을 등지고 있다.
석문
다만 장군봉(남편봉)에 서 있는 정자가 정도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믿고 싶다. 정자가 있는 도담삼봉은 절경이다. 도담삼봉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며 강물처럼 흘러가는 이유는 문학과 그림 작품들도 한 몫 거둔다. 도담삼봉에 관해 한시가 100여 편 이상이고 그림도 많다. 한시를 쓴 작가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도담삼봉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화가는 단연 김홍도(1745-?)와 최북(1712~1786)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 시대였던 영조와 정조 때에 활동한 화가다.
김홍도는 연풍현감으로 근무할 때 이곳뿐만 아니라 단양의 다른 명승지도 탐방한다. 1796년 병진화첩에 단양팔경 중에 사인암, 옥순봉, 도담삼봉을 잊지 않고 그려 놓았다. 단양의 이 그림들은 그의 산수화 중 수작이다.
단원의 도담삼봉 그림 속에는 나루를 건너려고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삼봉은 다른 사물보다 크게 배치하였다. 원경은 도담삼봉에서 멀리 보이는 산을 그렸다. 당연히 그림을 보는 이들의 시선이 삼봉에 집중된다.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작게 그린 이유는 아마도 도담삼봉을 더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표현이다.
이곳의 절경을 그린 화가 중에 최북이 있다. 그는 조선 후기 광기의 작가로 많이 알려 졌다.
최북(崔北1712~1786))은 스스로 이름을 칠칠(七七)이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자신의 이름 북(北)자의 앞 부수를 거꾸로 돌리면 칠칠(七七)이 된다. 이런 발상을 한 그는 역시 광기의 화가가 되어 전국을 떠돌며 그림을 그렸다. 호는 성재(星齋), 기암(箕庵), 거기재(居其齋), 삼기재(三奇齋), 호생관(毫生館)등 다양하게 사용했다.
조선 화가 최북의 도담삼봉
이중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주로 사용 했는데 이는 붓(毫: 붓호)을 가지고 평생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1747년(영조 23년)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들과 함께 일본을 여행했던 작가이다. 그의 삶은 특이한 행적으로 유명하다.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눈을 만들기도 했다. 밥을 먹는 대신 술로 삶을 지탱하였으며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여행하였다.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투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한시도 잘 지었으며 작품에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가 있다.
도담삼봉을 그린 최북은 일본을 다녀온 후인 1749년 원교 이광사(1705-1777)와 함께 단양을 여행한다. 이때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도 그렸다. 단구(丹丘)는 단양의 다른 이름이다. 그가 그린 그림 '도담'의 왼편에는 도보(道甫)가 쓴 그림의 해제가 있다. ‘도보’는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자이다. 원교 이광사는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수학하기도 했으며,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편액을 썼을 정도로 명필가이기도 하다.
최북의 삶은 매우 궁핍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선뜻 그림을 그려 주었지만, 양반이나 고관들에게는 함부로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다.
전국 명승지를 찾아가 그림을 그리며 경치에 심취하고, 술에 취하여 자신만의 예술 세계에 빠져 들었다. 세속의 욕심이 없는 광적이며 천재적인 예술적 기질을 타고한 이가 최북이다. 그런 그의 삶이 순탄할 리 없다.
그의 도담삼봉 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그가 그렸던 도담삼봉의 그림을 보면, 현재 우리가 도담삼봉 주차장에서 삼봉을 보는 모습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이광사가 쓴 도담의 해제를 해석 해 본다. “기사년 봄에 한벽루에서 글씨를 썼으며, 월성(경주) 최씨, 식(최북)과 더불어 놀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한벽루는 당시 청풍에 있던 누각이다. 지금은 청풍수몰지구 유적지로 옮겨 놓았다. 진경산수 기법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도담삼봉 주차장 높이보다 약 20쯤 높이에서 그려진 그림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최북과 김홍도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김홍도의 도담삼봉
내리던 비는 그치고 이제 한 무리의 물안개가 도담삼봉 위를 날아간다. 석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다. 그러나 올라가면서 도담삼봉 방향을 바라보면 환상이다. 석문은 구름다리 모양의 돌기둥으로 아래로 강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는 자연경관자원 중 동양 최대 규모다. 마고할미의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신기한 암석의 문이다. 이 문을 통해 본 광경은 신비하다. 오늘은 비가 내린 후라 물안개 같은 구름들이 산과 들을 날아 어디론지 떠나가고 있다.
도담삼봉에서 신단양은 지척이다. 삼봉에서 삼봉터널을 나오면 그 길이 삼봉로다.
10분 이내면 족히 신단양에 닿는다. 신단양은 대성산(307m)의 산록에 건설한 도시다. 1985년 구단양 수몰지구로 결정되자 구단양읍 사람들이 이곳으로 대부분 이주해 온 곳이다. 다른 읍에 비해 집들이 깔끔하고 번듯한 것은 이 때문이다. 동네 아래로는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휘돌아 흘러간다. 당연히 절경이다. 이곳에서 고수대교를 건너면 고수동굴이다.
내가 신단양에서 가고 싶은 곳은 소금정공원이다. 그곳에 신동문 시인의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소금정공원은 단양고등학교 담장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여 상진대교 방향으로 흐르는 남한강 위에 조성되어 있다. 공원은 넓지는 않았지만 좁고 길게 이어지고 강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건너편 대성산 기슭에는 대명콘도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소금정 근린공원은 신동문 시인이 간혹 찾았던 공간이라고 한다. 이곳에 그의 시비가 누워있다. 이런 자연석을 시비로 만들어 놓은 이들이 고맙고 대견하다.
신동문 < 내 노동으로>시비
이곳에서 남한강은 역사와 사연들을 싣고 꿈결처럼 흘러가는 모습이 우듬지 사이로 보인다. 이 남한강 언덕의 소금정 근린공원은 신동문 시인의 시비가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의 대표작 ‘내 노동으로’ 마지막 3연이 새겨져 있다. 나는 마지막 연보다 앞 3연 더 좋은데, 이 시비를 세웠던 사람들은 마지막 부분을 선택한 것 같다.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신동문 시인의 시 ‘내 勞動으로’ 전문
신동문 시인 애곡리 집터
신동문 시인은 1927년 7월20일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아버지 김재한과 어머니 김대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건호’다. ‘東門’이란 이름은 그가 폐질환으로 충북 도립병원에 입원 해 있을 때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날마다 자신의 병상에서 내려다보면 시신(屍身)이 충북도립병원 동문을 통해 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처지를 연상하며 강렬한 죽음으로 떠나가는 이들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본명인 신건호란 이름을 버리고 시구문(屍柩問)인 동문(東門)을 평생 이름으로 삼는다. 나는 그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를 몇 날을 생각 해 보았다. 그가 죽어 떠나가는 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청주도립병원의 동문(東門)이 되고 싶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마지막 삶의 안식처였던 단양행은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삶의 안식과 봉사처로 삼았던 곳이다. 자신의 고향은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고향 마을 청원 문의면을 찾지 않고 단양을 향해 떠나는 이유이다. 그는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그 해 ‘풍선과 제3포복’을 출간했는데 이 시집은 그의 유일 시집이 된다. 이 무렵 그와 현실 참여적인 의지를 보인 시인이 신동엽 시인과 김수영 시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에게는 중요했지만 출판을 통한 독자들과의 교류를 중시하여 ‘새벽’ ‘사상계’ ‘신구문화사’ ‘민음사’ ‘창작과 비평사’에 근무하며 당시 진보 문학지의 토양을 개척한다. 김수영, 신동엽, 고은 시인,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진보적인 작가들이 그의 주변에 모인 것인 당연했다.
신동문 시인은 1964년 경향신문 특집부장으로 근무하며 '김삿갓 따라 강산천리'를 연재했다. 이 무렵 쌀값이 계속 오르자 어느 독자의 "북한에는 쌀이 남는다니 수입이라도 하자"는 투고를 신문에 게재한다. 이 기사가 화근이 되어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에 강압에 의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굽히지 않는다.
이런 고난의 길에서 피와 땀과 눈물로 얻은 시가 있다. 이 시는 그의 삶이 전형을 보여 준다. 그는 끝내 ‘내 노동으로’ 란 시를 끝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의 실천을 위해 단양으로 떠나게 된다.
신동문 시비
화강암 비문을 읽으며 시비를 세우고 수고한 사람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시비 건립의 주역은 강민 시인, 김종호 시인, 신기선 시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신동문 시인과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강민 시인은 1952년 마산공군병원에서 입원 동기로 처음 만난 사람이다. 신기선 시인은 애곡리 그의 처소를 찾아 왔다가 그 자신이 단양으로 거쳐를 옮겨와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 분들을 만나지 못하고 답사를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문인에게 붓과 펜을 뺏는 세상은 불행한 시대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속에는 굽이굽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옥에 갇히고 삼족이 멸했다. 일제시대에 당한 그 참혹한 자존심의 손상을 이 민족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국광복과 6.25, 그리고 4.19 혁명이 끝난 후에도 이 땅에는 글쓰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태백산맥을 썼던 소설가 조정래는 반공단체들에게 집단으로 고발을 당해 약 10년 넘게 검찰에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판결을 받지 않았던가. 그 세월은 그에게 절망과 죽음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3백 만권이 더 팔린 책의 지은이를 상대로 벌이는 이념과 분단의 전쟁으로 인한 원한과 분노는 50년이 되어도 풀리지 않았다. 이념의 갈등은 여전히 우리사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통일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런데 신동문 시인은 1960년 새벽 편집장 시절 민감한 이념 소설인 최인훈의 '광장'을 게재한다. 원고지 600장인 최인훈씨의 중편소설 이었다. 이 작품이 게재될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은 4,19혁명으로 잠시 자유화의 바람이 일렁이던 시절이었다. '새벽'지의 주간으로 있었던 신동문이 최인훈의 '광장'을 극적으로 게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시대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문예지도 아닌 곳에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게재한 것은 신동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으리라. 그는 통이 크고 배짱이 있어 겁이 없었다. ‘광장’은 해방전후사와 6,25로 이어지는 시대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다. 지금도 전쟁과 이념, 통일문제에는 단골로 거론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젊은 지성인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니 신동문 시인의 작품을 보는 예리함과 통찰력을 느끼게 한다.
그의 체구는 호리호리하고 얼굴은 희고 맑았지만 의지와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첫사랑(김재숙)의 여인이 6,25 전쟁 중에 숙명여대 기숙사에서 있다고 믿고 그녀를 찾아 한강을 맨 몸으로 헤엄쳐 건너기도 했다. 공군 사병시절에는 직업 권투선수 출신의 거구의 미군을 눕히기도 했던 호기 있던 젊은이였다.
단양 소금정공원에는 옥소 권섭 선생의 흉상과 시비가 서 있다. 그러나 권섭 선생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권섭(權燮 1671~1759) 선생은 서울에서 출생하였지만 단양에 묻힌 조선 후기의 시인이다.
본관이 안동이며, 호는 ‘옥소(玉所)’이다. 숙종 때 세자책봉 문제로 송시열이 사망하자 상소를 올려 신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전국을 유람하는 시인이었으며 한시와 가사 시조에 능하여 567 수의 한시를 지어 유고 ‘옥소고’ 13권이 전한다. 이 시비(詩碑)에는 단양이 작품의 무대가 된 단구도중(丹丘途中)과 구담(龜潭)이란 그의 시조 두 편이 고어로 새겨져 있어 현대어로 수정된 것으로 옮겨 본다.
권섭 선생 시비와 흉상
단구도중(丹丘途中)
영동영남(嶺東嶺南) 실컷 돌고
필마(匹馬)를 재쳐 몰아
령 넘어 다아
우화교(羽化橋) 건너치니
세우중(細雨中) 마상잔몽(馬上殘夢)에
춘흥겨워 하노라
구담(龜潭)
구곡(九曲)은 어드메오
일각(一閣)이 그 뉘러니
조대단엽(釣臺丹葉)이
고금(古今)에 풍치(風致)로다
저기 저 별유동천(別有洞天)이
천만세(千萬世)인가 하노라
신단양에서 구단양으로 출발한다. 소금정공원 앞의 도로 이름은 ‘삼봉로’다. 정도전 선생을 기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단양관광호텔을 지나면 이내 상진대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는 거의 360도를 우회전해야 한다. 상진대교를 건너 단양역과 단성역을 지나 달리다 보면 삼거리에 닿는다, 직진하면 대강면 쪽 단양IC방향이다.
신단양에서 구단양으로 난 길은 오른쪽으로 남한강이 함께 흘러간다.
신단양에서 구단양까지는 승용차로 약 15분을 달리는 거리이다. 구단양은 퇴락한 가운데 아랫도리는 물에 잠기고 중간은 수몰지구가 되어 있다.
남한강변의 마을
구단양은 AD 550년 무렵 신라 진흥왕이 건설한 고대 도시다. 그 당시 진흥왕의 나이는 불과 17세 소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수몰된 구단양에 비해 그 시대 쌓았던 적성산성은 아직도 구단양에서 만나는 세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적성산성은 성재산에 쌓은 둘레가 923m의 산성이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의 요지였다. 1979년 5월 이 산성에서 발견된 ‘단양 적성비(赤城碑)’가 국보 198호로 지정된다.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 당시의 상황을 고증할 수 있는 타임캡술의 성격을 가진 비석이다.
적성비에는 430자 속에는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웠던 이사부라는 직위와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과 같은 이름들이 비문에 새겨져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구단양은 남한강, 죽령천, 선암계곡물의 세 방향의 물길이 삼각형의 꼭지점에 세워진 동네다.
나의 아버지 고향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청풍이다. 그러나 구단양에서는 작은아버지가 살았던 마을이다. 1972년 대홍수로 구단양이 물에 잠겨 재재소를 운영하던 작은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고 대구로 이사를 해야 했다. 불어난 남한강 물에 두 곳의 하천의 물길이 단양읍을 덮쳤기 때문이다. 결국 구단양은 수몰지구가 되어 물로 망한 도시가 되었다.
1985년 ‘충주다목적댐’으로 아름답고 역사 깊은 청풍 고을도 물에 잠긴다. 단양읍이 물에 잠기기 직전인 1985년 구단양에서 사촌동생의 결혼식 때에 가서 보았던 단양의 민심은 흉흉했다. 1988년 여름 할머니의 고향 청풍 한버들과 아버지의 고향 계산리 일대는 모두 바다 같은 호수가 되어 있었다. 조상들이 수백년을 살아 왔던 마을들이 모두 물에 잠겨 버렸다는 생각에 몇 날 동안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물며 태어나 자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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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도시 단양은 새롭게 자기 정체성을 찾으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소백산 해맞이 눈꽃축제, 소백산 철쭉꽃 축제(5월), 마늘축제(7월), 온달문화축제(10월) 등이 단양이 대표적으로 표방하는 대외적인 행사들이다. 그러나 단양은 역시 단양8경이다.
도담삼봉 구담봉 옥순봉 선암계곡의 사인암과 3선암과 온달산성 적성산성 각종 동굴들이 단양의 볼거리다. 그러나 이런 절경을 찾아 들었던 역사 인물들의 처소와 전설, 문학작품들이 없었다면, 단양의 경치들은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정도전, 우탁, 이색, 이황, 이이, 김창협 단원 김홍도 최북, 이광사등이 단양의 절경에 찾아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동문 시인은 절경을 찾아 이곳으로 온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은둔하기 위해 단양 애곡리에 삶의 터전을 삶았다.
구단양 단양대교를 건너 애곡리로 가는 강길은 아름다웠다. 오른편 절벽 아래로 흘러가는 남한강 유역은 선사유적지다. 애곡리에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양개선사유적전시관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길 건너 신동문 시인이 살던 집터를 찾아 나선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과수원 길에는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개를 사육하는 곳에서 나는 악취였다. 1993년 신동문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이곳의 관리는 엉망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누군가 이곳을 아름다운 장소로 만들었다면, 이렇듯 신동문 시인이 잊혀진 시인이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신동문 시인 자신은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난 사람이다. 자신의 장기는 병원에 기증하고 육신은 화장하여 저기 흐르는 남한강과 자신이 살던 이 터 어딘가에 뿌리라는 유언을 하지 않았던가.
결국 충북 단양의 애곡리 산기슭은 그가 서울을 떠나 가난한 농민들과 더불어 18년 동안 삶의 터전을 삼았던 곳이다.
그는 지금 그곳에 없고, 단지 그가 개간한 과수원과 폐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혹 그곳을 찾는 이가 있다면 정의롭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던 그의 숭고한 생애를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애절한 그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처음에 이곳에서 침술을 익히기 위해 자신의 몸에 침으로 찌르며 익혔다. 단양을 비롯한 제천 등지에서도 병 고침을 위해 왔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의료보험이 없던 그 시절 가난한 이들에게 병원은 그나마 있던 재산을 모두 날리는 곳이었다. 병원의 건물들이 새로 지어지고 높아지며 의사들이 부자가 될 때, 병 든 가족이 있는 농촌 마을에서는 논과 밭도 모자라 소를 팔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동문은 자신들의 구세주였다. 침술을 받고 돈을 주려고 해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미안하고 미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이들이 농장의 일을 거들어 주는 것도 부담으로 느끼던 그였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삶은 이런 것이리라.
상대를 위해 스스로를 모두 내어 놓는 일, 그리고 기꺼이 상대를 위해 자신의 온 몸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삶의 실천이야 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리라.
그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침술을 배워 무료 의술을 베풀었다. 시적인 정신의 노동을 접고 농사꾼으로 의술로 육체적인 삶의 길을 선택한 질척이는 과수원 길을 걷는다. 그가 평소 시에서 보여 주었던 실천적인 삶의 현장을 이제야 밟아 본다.
자신의 시 ‘노동으로’ 처럼 육체노동을 통해서 그는 노동의 신성함을 인식했다. 침을 통한 의술을 통해서 그는 인간 육체의 신비함과 존엄성을 깨닫는다. 아무리 허약한 몸일지라도 혈(穴)을 가지고 있기에 침을 통해 혈의 문을 열어 보았기 때문이다. 이곳 애곡리에서 그는 병든 자의 혈(穴)을 열어 악한 피와 기를 몸의 외부로 추방시켰다.
그의 성격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죽음의 길이라도 옳은 길이면 죽을 줄 알면서 그 길을 들어섰다. 결국 그의 문학이 반골이요 저항시인이란 별칭이 붙은 것은 이런 성격에도 기인한다. 그는 주로 농막(단칸방과 부엌)에서 생활했다. 침술방(3칸 방)에는 멀리에서 온 환자들을 재워주었다.
그는 침술도 시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한 사람이었다. 병이 든 사람에게 침을 놓아 치료 된 것을 확인 할 때면 자신이 쓴 시를 써서 독자들이 칭송하는 것 보다 몇 갑절의 기쁨을 느낀 사람이었다. 그가 마지막 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침술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이다.
신동문 시인의 문학 활동은 겨우 10여년 남짓이다. 유신시대에는 긴급조치란 무서운 법이 있었다. 1975년 긴급조치 당시 백낙청 씨가 유학을 가며 맡긴 이영희 선생이 쓴 ‘월남전’이란 기사를 창작과 비평사에 게재하여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그나마 간헐적으로 서울을 드나들며 작품 활동과 잡지 만드는 일은 이 사건으로 끝이 난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 기슭의 오지에서 죽는 날까지 살기로 결심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의 삶은 극적이다. 그의 2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고향 문의를 떠나 청주시 석교동 52번지로 이사한다. 유년시절 그는 병약했다. 초등학교도 졸업할 수 없을 정도의 건강상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정신력이 대단했다. 서울의 휘문고보에도 다니고 일본의 항공병학교도 유학하기도 한다.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을 하였지만 입학금을 내지 못해 다니지 못한 수재였다. 결국 그는 수영으로 체육특기생의 길을 찾는다. 경희대(신흥대)에 입학하고 수영 국가선수로 발탁되어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무리한 연습을 하다가 늑막염으로 출천을 하지 못한다.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공군에 자원입대한다. 3년을 복무하면서 그가 얻은 것은 한 편의 시 “풍선기”였다. 이 시는 그의 등단작이며, 연작시이다. 그는 공군비행장에 근무하며 푸르른 하늘을 보고 넓은 활주로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 했다. 굉음을 내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비행기의 대열과 살벌한 전쟁통에도 외로웠고 지탱할 푸르른 하늘을 보면 자유의 그리움이 넘실거렸다. 그의 연작시는 이런 그의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리라.
이제 700년 전에 절경에 찾아 들어 후학과 문학을 즐기는 이의 삶을 찾아 떠난다.
선암계곡
사인암의 우탁 선생이다. 사인암에 가는 길에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을 답사했다.
하선암(下仙岩)은 구단양에서 4km 지점에 있는 선암계곡의 하류에 위치한다. 유년 시절에 이곳에서 물장난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곳이 더 넓고 바위도 더 우람했는데 지금 다가서니 왜소하다. 그러나 옛 모습이 아련하게 살아온다. 그 여름 그 먼 길을 걸어오며 목이 마르면 계곡물을 그냥 마셨다.
하선암은 선암계곡의 첫 명승지인데 불암(佛岩)이라고 부른다. 사인암이란 이름을 지었던 임제광이 하선암이란 이름을 지었다.
수십 명이 둘러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넓은 바위 아래로는 수량 많은 물이 소리를 지르며 흘러가고 있다.
우탁 (禹倬,1263~1342)은 고려 후기의 유학자며 문인이다.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에서 태어났으니 이 고장 출신이다. 본관도 단양이며, 호도 백운(白雲), 단암(丹巖)이다. 별명은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 부른다.
우탁은 고려시대 사인(舍人)과 감찰규정(監察糾正)이란 벼슬을 하였다. 감찰규정직에 있을 때 130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간통한 것을 알고
이를 비판한 후에 벼슬을 버렸다.
사인암에 있는 우탁 선생 유허비
숙창원비는 자신의 아버지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충숙왕이 그의 비범한 성격에 감동 받아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을 해독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이를 후진에게 역학(易學)에 통달하였으며 그를 선향하는 역동서원이 1696년(숙종 22년) 안동군 월곡면 송천동에 세워졌다. 사인암은 깎아 지른 듯한 암벽이다. 김홍도가 그린 사임암에는 암석(巖石)들이 병풍(屛風)을 두른 듯 치솟아 있다. 우탁은 고려 사인이란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이곳 단양에 자주 들려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개성에서 단양까지 와서 휴식을 취했다고 하지만 그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살았을 것이다.
그의 삶과 문인들과 화가들이 이곳을 찾지 않았다면 저 사인암은 그저 바위 투성이 일 뿐이다. 누군가 이름을 지어주고 시와 그림의 주제가 되었으니 오늘날까지 사임암은 명소가 된 것이다.
정이가 주석한 ‘역경’ 고려에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누구도 이를 터득하는 이가 없었다. 우탁은 방문을 닫아걸고 탐구하여 통달하였다.
이에 “중국의 역이 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그를 역동(易東)선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묘는 안동 정정리에 있고, 유허비가 이곳 사인암리에 있다. 애곡리에는 있는 사당은 굳게 닫겨 있어 담 넘어로만 볼 수 있었다.
덕절산(750m) 줄기에서 흘러내려와 높이 솟아 있는 암벽이 사인암이다. 운계천이 흐르지 않았다면 이곳은 명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인암은 우탁이 고려 벼슬 정4품 사인 벼슬로 있을 때 이곳에서 후학양성을 하던 곳이다. 그가 공부하던 장소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찾을 수는 없고 유허비와 시비가 세워진 곳은 비가 많이 내리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사인암이란 이름을 붙인 사람은 임재광이다. 그는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이곳을 찾아 우탁의 벼슬이름으로 사인암이란 이름을 짖는다.
임재광 그는 사인암이란 이름을 지었기에 사람들에게 오르내린다.
이곳에 우탁의 시조비가 없다면 아마도 이곳을 찾은 이들이 감성을 자극하지는 못할 것이다. 100살 된 늙은 소나무 아래에는 자연석에 새긴 그의 시조 두 편이 새겨져 있어
이곳의 서정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탄로가 시비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저근덧 빌어다가 불리고자 머리 위에
귀 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우탁 선생의 탄로가 (청구영언)
우탁의 이 시조는 우의적(寓意的) 기법을 사용했다. 늙음에 저항하려는 뜻을 표현하였다. ‘눈’과 ‘서리’ 백발을 ‘춘산의 바람’은 청춘이다. 언어구사력이 사려 깊고 매끄럽다. 비유는 시의 생명인데 이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시를 함축미 있게 지었다. 초장은 백발을 녹여줄 청춘의 바람이 가버린 아쉬움이 담겨 있다. 중장과 종장에서는 잠시라도 자신의 머리 위와 귀밑의 백발을 녹여보고 싶은 열망을 표현하였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우탁 선생 탄로가 (해동가요)
우탁 선생 시 탄로가 시비
이 시조는 늙음을 탄식하는 이른바 그의 탄로가(嘆老歌)3편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우탁은 몰라도 이 시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작품이 늙음을 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발을 막기 위해 가시와 막대를 들고 저항하는 노인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역동적인 시심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종장에 보듯이 자연의 순리를 수용하려는 허탈한 탄식의 표현으로 시를 마감한다.
이번 기행에서는 시간이 없어 두향의 지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하선암을 찾아 가면서 충주방향으로 가면 이내 나타나는 그의 고향 마을을 생각하였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 할 때 관기 두향이 있었다. 그녀는 조실부모 하여 기생이 되었다. 거문고와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난(蘭)과 분매(盆梅-화분에 매화를 기름) 솜씨가 좋았다.
퇴계 이황과 두향의 사랑 이야기에는 옛 사람들의 지조 있는 성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퇴계와 두향의 인연은 10개월이지만 두향은 20년 후에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4일 동안 걸어 안동까지 가서 묘소에 참배한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남한강에 투신자살한다.
퇴계 또한 유언은 ‘매화에 물을 주어라’ 였다. 물론 두향이 주어 심은 매화나무일 것이다.
이런 사연들은 생명력이 길어서 지금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 사람들에게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두향의 출생지는 단양군 단성면 두항(斗抗) 마을이다, 강선대가 있는 두향의 묘소는 강 건너 국도변에 있다. 나는 예전에 이 마을에 들러 두향의 집이 어디쯤일까 더듬어 보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이 두향이 된 것은 이 마을 이름에 기인된 듯하다.
두향의 묘가 430년이나 지났는데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보통일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꾸준히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인암
이산해(李山海)는 자신의 가문에 두향의 묘에 관한 언급을 하였을 것이다. 이산해의 부친 이지번(李之蕃)이 청풍군수로 근무할 때, 퇴계 이황은 단양군수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서로 교류했다. 이후 이지번은 벼슬을 버리고 단양의 구담(龜潭)근처로 내려와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한다. 이산해는 영의정을 지낸 퇴계의 제자이다. 스승의 애인인 두향의 제사를 지내고 무덤을 돌보는 그들 집안이 대신하였던 것은 이 고장의 미담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견해가 다른 이들이 있어 확인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퇴계의 10대 자손인 이휘영(古溪 李彙寧)은 밀양부사, 동래부사를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한양에서 단양으로 두향의 무덤을 찾아 왔던 사람이다.
이휘영의 고손인 한문학자 이가원 교수도 두향의 묘소를 참배한다. 그때 두향의 묘소 봉근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베어낸다.
조선일보에 <명기열전>을 연재한 사람은 소설가 정비석이다. 그해가 1974년 이었는데, 60년대부터 정비석은 묘소를 찾고 있었다.
이가원 교수는 정비석에게 두향의 무덤 위치를 알려준다. 소나무 그루터기가 봉분이 있으면 그것이 두향의 묘라고 일러준다.
정비석은 두향의 묘소임을 확인하고 감격했음은 물론이다.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비석을 세운다.
두향의 묘소는 구담봉과 옥순봉이 보이는 장회나루 건너에 있다.
퇴계 이황은 1549년 48세 되던 무신년 음력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한다.
하선암
관기였던 두향은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을 가까이 모시는 관계가 된다. 두향은 자신이 기르던 분매를 퇴계의 처소에 선물한다. 그들은 짧았지만 매화 향기 같은 정분을 나누었다.
그러나 만남은 이별을 동반하는 일이다.
10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떠나게 되었다. 두향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떠나는 퇴계에게 두향은 매 한그루를 선물한다. 이 분매를 퇴계는 도산에 심었다.
옛 사람들의 사랑은 이토록 넓고 깊은 인연을 심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애곡리로 가기 위해 구단양에서 단양대교를 넘는다. 신동문 시인의 마지막 삶의 현장을 연상하기 위해서였다. 산 아래 남한강 위로는 물안개들이 넘실거린다. 그의 죽은 영혼들이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듯하다.
1993년 추석이 가까울 무렵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병명은 담도암이었다. 이 병은 아직도 무서워 모두들 떨고 있는 병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남한강을 내려다보았을까. 나는 저 아래 강물을 내려다본다. 남한강은 유유히 신단에서 구단양을 향해 흘러간다. 저 강물은 결국 서울의 한강으로 흘러간다.
문득 나는 고은의 시가 떠올랐다. 그의 죽음이 꼭 그 시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신동문의 어머니를 위해 쓴 시가 이곳 애곡리에서 신동문 시인의 영혼을 달래는 시가 될 줄은 몰랐다. 물론 계절만 겨울과 초봄이 다를 뿐이다.
74년 신동문 시인의 어머니 장례식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있었다. 그때의 시심을 고은 시인은 ‘문의마을에 가서’ 라는 제목으로 써서 발표한다.
애곡리 가는 길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짤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고은 시인의 시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전문
고은의 이 시는 문학평론가 김현이 수작으로 꼽은 작품이다. 고은의 대표작이 되었다.
죽음에 관한 놀라운 성찰을 하고 있는 고은 시인은 이후 큰 작가로 거듭난다.
신동문 시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이렇듯 고은 시인에게 시작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시는 겨울 어느 날 그가 묻힌 지명을 애곡리와 남한강을 바라보며 읽으면,
가장 어울리는 시가 될 것이다.
문의는 그의 고향이다. 이곳 애곡리는 그가 18년을 살고 묻힌 땅이다.
애곡리에서의 시간은 가슴이 아렸다. 그의 삶과 문학의 현장은 몹시 슬프고 황망했다.
물안개들이 계속해서 신동문 시인의 삶을 위로하듯 넘실거린다.
나는 슬픈 신선이 되어 애곡리를 떠난다
첫댓글 좋은글과 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