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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문화재답사 스크랩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 골굴사(骨窟寺)와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청목/金永柱 추천 0 조회 133 13.07.26 21: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 골굴사(骨窟寺)와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보물 제581호

 경주시 양북면의 골굴암에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마애불좌상

골굴사는 불교무술 선무도(禪武道)의 총본산

 

 

 

골굴사 전경

  

 

우리나라 유일의 석굴사찰, 골굴사

신라문화의 뿌리는 불교문화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경주남산과 토함산, 골굴사와 기림사가 있는 함월산은 그 대표적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골굴사는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왼쪽 골짜기 안. 절벽을 이루며 솟아있는 응회암벽 아래에 있으며. 화강암에 비해 강도가 낮은 응회암에 인공으로 여러 개의 석굴을 파고 불상을 모셨으나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거나 파손되고 주존불만 남아있는 신라의 고찰이다

 

 

금강역사상                                                                 선무도상

 

 

 

불국사보다 약 200여년 먼저 조성된 골굴사는  신라의 불교가 성행하던 6세기경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임정사(林井寺-지금의 기림사)를 건립한 뒤 다시  이곳 암반전산에 마애여래불을 조성하고 인위적인 12개의 석굴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해온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이다.

함월산은 화강암 재질로 동굴 형성이 어려운 한국의 산들과 달리 석회암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 천생석굴(자연석굴)이 존재했고 거기다가 인공으로 석굴 조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골굴암은 단순한 동굴에 불상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인도 당시의 석굴사원 양식을 그대로 적용하였으며 당시 인도 사원의 생활 방식이 그대로 전해졌다는데서 그 의의를 가진다.   

 

또 하나 주목할 만 한 점은 12처 석굴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감실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신 곳이나 한 두 개의 동굴 속에 부처님을 모신 단순한 형태의 동굴법당들은 몇 개 있으나 골굴사처럼 12개의 석굴 그 자체가 가람인 곳은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12처 석굴의 유래도 인도 석굴사원의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12석굴중 하나

 

골굴사는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1740년, 승려 방사파(方詞婆)편찬)에 나타난 골굴사 기록을 보면,
“산 북쪽에 천생석굴이 있으니 옛적에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 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雪山)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檀特山)이라고도 한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한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속에 돌이 편편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그리고 굴벽에는 조각한 석불도 있는데 어느 때의 조성인지 알 수 없으나 연기에 끄슬려서 알아 볼 수가 없다. 또 굴 위에 조각한 석불에서는 자주 서광이 빛나며 산곡과 동천석굴에 비친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이 해마다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12처 석굴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당시의 골굴사가 석굴사원으로서 병을 치유하는 종교적 측면이 강조 되어 있으며, 현재의 관음굴 내부 마애불과 현재 보물 581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의 상서로운 이적 등이 묘사 되어 있다.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권2 중 <골굴석굴도>

 

조선 중기의 화가 겸재의 골굴석굴도에는 여러 개의 기와지붕으로 지어진 석굴의 전실이 가람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토함산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 선생의 기행문에도 “여러 채의 목조와가로 지어진 전실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고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마치 한촉의 병풍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적혀있어 당시에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의 골굴암(1740년경 영조때 제작)                       경주도회 좌통지도

                   목조 와가의 전실로 그려져 있다                 여러채의 기와지붕이 전실로 표시되어 있다

 

골굴(骨窟)

區分十二天生窟 (구분십이천생굴) - 열 두 개로 나뉘어진 천생(天生)의 굴은
逈絶塵緣恒淨潔 (형절진연항정결) - 속세(塵緣)와 길이 끊겨져 항상 정결하도다
??危巒戴月高 (표묘위만대월고) - 멀리 보이는 험준한 산이 아스라하고, 머리 위 달은 높디 높구나
崎嶇曲路彫崖出 (기구곡로조애불) - 험하디 험한 굽이굽이 구불한 길, 벼랑 위 바위에 여래가 새겨있고
岩房不熱石還懊 (암방불열석환오) - 바위 속 돌방은 훈훈하여 그 속에 드니 일만 근심이 사라지는구나
檀木無煙焄自鬱 (단목무연훈자울) - 불에 타 그을려 흔적 없는 곳에 박달나무만이 저 스스로 우거져있네
休道天西?嶺外 (휴도천서총령외) - 길조차 쉰 이곳이 달마대사 짚신 지고 넘던 총령 아닌가 하노라
海東亦有眞?堀 (해동역유진사굴) - 해동에서 참 부처님 모신 굴은 예뿐인가 하노라.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중 골굴사 부분 -    

 

 

골굴사는 예로부터 인근 주민들의 기도처였으며 불교정신문화의 산실로 이어져왔으나 조선 후기 화재로 전소되어 거의 폐사지로 남아있던 도량을 1933년 박석조 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현재의 대적광전 자리)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하였다. 1972년에 태고종 사찰로 등록하여 1989년 11월 까지 태고종단의 소속 사찰로 유지되어 왔다.  

박석조 스님의 아들인 박굴보 스님은 골굴사에서 출생 선친으로부터 승려 교육을 받고 골굴사를 이어 받아 1984년 입적할 때 까지 골굴사를 지켰다. 박굴보 스님 입적이후 그의 장남인 박원수가 1985년에 태고종단으로부터 교임임명을 받았으나 1987년에 이 사찰을 개인에게 매매를 하였다, 이에 천년고찰이 사라질 위기를 느낀 신도들이 1989년 11월 25일에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스님(현 골굴사 주지)에 부탁하여 개인에게서 이를 매입하고, 태고종단소유의 사찰을 1990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등록 및 등기 이전하였다.

현재 골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로 등록 되어 있다.

 

 

선무도대학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는 세심당

 

사세가 기울어 퇴락한 골굴사를 현 주지 설적운 스님이 맡아 접근이 어려웠던 길에 도로를 개설하고 법당과 요사를 증개축하였으며, 2002년도에 인법당을 철거하고 국비를 보조 받아 대적광전을 신축하는 등으로  다시 불사가 활발해졌으며 근래에는 연인원 30,000명 이상이 템플스티이를 하는 등 대가람의 모습을 갖춘 사찰이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전통 무술인 선무도(禪武道) 총본산으로, 평소에도 상주를 하며 선무도를 수련하는 사람이 외국인을 포함하여 30-40여명이며 방학시기는 약 100여명이 수련을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통무예를 통한 대안교육으로 선무도화랑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름,겨울방학때에는 매회 60명씩 5회에 걸쳐 1주일동안 골굴사청소년 화랑수련회를 열어 체험활동과 심신단련, 선무도수련 등을 하고 ?다

 

 

골굴암마애좌상

 

12석굴과 마애불상좌상

 

 

통일신라 후기의 마애불이다. 기림사 골짜기에 있는 골굴사의 12개 자연석굴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화강암의 석질이 좋지 않아 무릎의 아랫부분과 가슴의 일부가 심하게 파손되어서 상의 자세나 손 모양, 비례 등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민머리 위에는 높은 육계(肉?)가 표현되었고 가늘게 뜬 눈에 콧날이 오똑하고 작은 입은 웃음을 띠고 있다. 이것은 이전에 조성된 불상들보다는 더욱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풍화작용으로 인해 많이 마멸되었다. 오른손은 손상되었으나 팔의 자세로 보아 아래로 내리고 있었던 듯하며 유난히 작게 표현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배 앞으로 올려 두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데  명확하지 않으나 항마촉지인으로 추정이 된다

 

 

 

 

 

 

 

몸체는 얕은 부조로 새겨져 평면적이며 법의는 가슴 위의 부분에 마멸이 심하여 확실하게는 알 수 없으나 어깨 위에 흔적으로 보아 통견으로 짐작된다. 두 어깨를 덮은 대의(大衣)와 가슴 위에 가로질러 입혀진 내의(內衣)의 옷주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개의 평행선 주름으로 표현되어 늘어졌다. 또한 양쪽 팔에 보이는 연속된 V자형 주름이나 무릎 위의 도식화된 물결식 옷주름 표현 등은 867년으로 추정하는 축서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을 비롯하여 9세기 후반에 유행한 불상양식과 유사하다.

광배는 머리 주변에 단판연화문을 돌려 두광으로 삼고 그 외곽에 역동적인 화염문이 연결되어 신광을 표현하였는데 비교적 깊게 선각이 되어 있다.

 

 

두광의 화염문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은 석굴암 본존불과 더불어 신라 천년의 화려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수작이다.

석굴암 본존불이 남성적이고도 장엄한 멋을 가진다면 골굴암 마애여래 좌상은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적이고도 수려한 아름다움을 가진다.
화강암이 아닌 석회암 재질의 수직 바위 절벽에 양각으로 새긴 마애여래좌상은 골굴사의 주불로 모셔지며 예나 지금이나 참배객의 주 신앙 대상이고 기도처가 된다

또한 불교 경전속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 부처님 같이 가장 높고 조망이 좋은 곳에서 한 눈에 세상을 굽어 보며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에 마애여래불이 조성되었다. 이는 불교관과 더불어 자연 지형을 지혜롭게 활용한 선조들의 심미안을 느낄 수 있는 좋은 보기이다

 

 

 

아랫부분 네모나게 암석을 판 부분(검은 부분)은 목조 전각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파낸 부분이다 

 

 

이 마애불상은 긴장된 얼굴표정과 세부표현에서 통일신라 초기 양식의 특징도 보여 조성시기를 8세기 전반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옷주름선의 형식화나 비교적 직선으로 내려오는 어깨의 윤곽선 등으로 볼 때 9세기 중엽 이후의 상이라는 학설이 일반적이다.

마애불상 주변에는 크고 작은 12개의 자연석굴이 있어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보호각

 

 

마애불좌상의 위의 보호각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비바람을 막기위해 철근과 아크릴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나 주변 전경과 어울리지 않고 미관상 보기에 흉하다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바위의 아래쪽에는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고여 작은 샘을 이루는 금강약수가 있다. 옛날 어느 산모가 아기를 낳는 도중에 기운이 다해서 정신을 잃었는데 골굴암의 금강약수를 떠다 산모의 입에 한 숟가락을 넣으니 정신이 돌아오고 순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현재 골굴사에서 사용하는 물은 지하암반의 물을 펌프로 퍼올린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관음당

 

 

 

 

 

골굴사의 12개 석굴중에서 가장 넓은 석굴법당으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으며 동굴의 벽면에는 108관음보살상을 모셨다.

옛날에는 벽면에 마애불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흔적이 없으며 정동쪽을 향해있는 입구에는 겸재 정선의 골굴석굴도에 있는 것처럼 목조전실을 조성해 놓았다

예전에는 온돌을 놓아 난방을 했으나 지금은 그냥 마루방으로 개조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석굴볍당에서 잠을 자고나면 병들고 허약한 이가 생기를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법당 안에서는 청량한 기감을 느낄 수 있다. 이곳 함월산지역은 석회암지층으로서 제오라이트 등의 광산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암반의 성분이 맥반석처럼 인체에 유효한 발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큰 법당인 대적광전과 삼존불(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남근바위와 여궁바위

 

 남근바위

 

 

여궁바위

 

함월산은 예부터 바위를 대상으로 하는 토테미즘이 성행하였는데 골굴사의 산신신앙도 그중의 하나이다

자식을 얻지 못하는 여인이 여궁을 깨끗이 청소한 뒤 밤새워 기도하면 다음날 새벽 여궁에 물이 가득 고이는 신비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소원성취의 징표였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소원을 이루었다고 전해온다

 

 

동아보살이야기

 

 

 동아보살

 

동아보살(진돗개)은 주지인 적운스님이 골굴사로 부임하던 1990년 겨울에 태어났다고 하여 “동아”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강아지 때부터 대중들과 함께 새벽예불을 함께 했으며 모든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참선을 하고 탑돌이도 따라하여 신도들은 동아를 ‘동아보살’이라고 불렀다. 참배객들이 절을 찾으면 입구에서 절까지 안내했으며 20년동안 살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개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긴 20살 즈음에 치매와 중풍으로 고생하였음에도 마지막 날까지 새벽예불에 동참하였고 사찰 대중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절을 떠나 양지바른 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골굴사에서는 동아의 천도재를 지극으로 지내고, 후세에 동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동상과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대적광전의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오륜탑

 

 

선무도(禪武道)

 

 

(동아일보사 보도사진입니다)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배출한 불교의 호국사상은 근본 불교의 실천수행법인 선무도의 수련이 그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사상과 수행법이 결합하여 호국불교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정신은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로 부터 그 뿌리를 내린다. 신라는 진평왕대에 이르러 화랑도 운동이 크게 일어났으며 화랑집단은 3년 동안의 수련기간을 통해 명산을 찾아 자연과 접하며 국토에 대한 애착심과 호영지기를 익히고 교양과 무예를 수련하였으니 사찰이 곧 그 역할을 한 수도장이며 승려들이 오늘날의 교관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함월산 기림사는 화랑들의 주된 수련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승병들이 주석했던 호국도량이었다. 이러한 불교 호국 사상의 수호를 위해 승려들 개개인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련이나 선무도에서 말하는 무술적인 동공을 평소에 연마해왔기 때문에 유사시에 승군으로 조직되어 참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계승은 유학을 신봉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과 조정에 의해 불교가 탄압받는 상황속에서도 조선말기 갑오경장(1894년) 때 승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역사적인 불교탄압과  일제의 한국전통문화 말살이라는 정책 아래 불가에서 이어져오던 선무도는 그 명맥을 감추고 일부 승가의 선승들에 의해 비전(秘傳)되어왔다

 

1970년대에 이르러 양산 통도사의 양익 큰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법을 전수받으신 설적운 대금강문 문주스님께서 일반 대중 포교에 큰 서원을 세우시고, 불교금강영관 수련법을 현대적 의미인 선무도로 개칭하고 대중들에게 널리 가르침을 베풀어 많은 수련생과 지도자를 배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골굴사에서 선무도를 수련하면서 참선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

 

선무도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흔히 불무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던 무술로 그 근간은 중국 무술이 아니고 인도 무술이 근간이라 한다.

선무도는 처음 입문하면 호흡 명상과 기초적인 아사나 요가를 병행하여 배우게 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무술 체계를 만들어 간다.
선무도는 불가의 무술임에도 상당히 강맹하고 공격적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인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무기술을 빼고 가르치고 있지만, 원래의 선무도에는 봉술이나 계도를 다루는 도술도 있었다고 한다.
선무도도 태극권이나 소림의 무술처럼 강맹한 전투용 무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선, 명상, 요가등을 통하여 정신 건강과 심신의 수양을 위한 건강 무술을 겸하고 있다.

 

골굴사 들어가는 통로에는 선무도의 여러 동작을 동상으로 제작하여 세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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