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의 시작
이 시기에 일어난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불교방송,불교T.V개국, 성철스님의 입적, 서의현 스님체제의 총무행정의 붕괴와 개혁종단의 출범을 들 수 있다.그리고 또 다른 관건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 등이 대종을 이룬다. 1990년 5월 이땅의 불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불교방송이 개국을 하고 첫 방송을 하게 되니 동토에 전래된 이후 가장 큰 경사가 되었다.초기의 가청권은 서울과 그 인접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 부산,광주,대구,청주의 지방 방송국이 잇따라 설립되어 전국을 가청권으로 하는 전국방송망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불자들은 가정에서 방송을 통하여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고승대덕의 설법과 저명한 법사,교수의 불교학 강의를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교방송국의 대작불사를 이룩해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 땅의 모든 불자들이 원력이 하나로 결집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조계종을 비롯한 많은 종단과 불교진흥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즉 방송의 의결기구인 이사회의 이사장은 승려중에서 보하고 방송경영의 책임자인 사장의 추천권은 불교진흥원이 가진다는 원칙을 합의해 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승단과 재가가 조화롭게 의결기구의 수장과 경영의 책임을 양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불교방송이 개국을 한 지도 10여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불교방송은 그 동안 교리강좌,법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불자의 신앙심 고취는 물론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적 자립기반이 취약한 것이다. 사실 방송국은 개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진흥원으로부터 매년 5억원 내지 10억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음이 사실이다. 시설투자비까지 합하면 70억원 이상의 지원을 받은 셈이다. 불교방송국이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직원 전체가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정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불교방송이 음성만을 전달하는 라디오 매체인 데 비하여 1995년3월 개국한 불교T,V 방송국은 영상매체라는 점에서 크게 대조를 이룬다. 통도사와 각급 본사 그리고 많은 종단이 참여하여 자본금38억원의 주식회사로 출범한 불교T,V 는 수차에 걸친 주식공모를 통하여 170억원의 자본금을 확보한 것이다.개국특별프로그램으로 종정스님과 특별대담,한국사회와 불교의 역할에 대한 특별좌담회 등의 방영을 시작함으로써 하루10시간씩의 정규방송에 들어갔다. 불교텔레비젼은 가톨릭, 기독교와 동시에 케이블T,V로서 채널을 허가받았으나,현재 불교T,V는 타 종교보다 시청률면에서 앞설 뿐 아니라 30여개 일반 채널 중에서도 우수방송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불교T,V가 우수한 영상물을 방영하고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경영부문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초기 케이블T,V 각급 채널의 인,허가와 설립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케이블T,V는 유선방송이므로 각 가정에 케이블이 설치되어야 수신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치밀한 계획없이 허가 설립에 대한 일정을 앞당겨 놓은 것이다. 케이블T,V는 이러한 당국의 오판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을 떠맡게 되었고 불교T,V도 예외없이 자금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최저200만 가구 이상의 유료 시청자가 확보되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케이블T,V프로덕션의 입장에서는 97년말 현재 유료시청자 80여만 가구로서는 경제적 자립을 감당할 수 없음이 자명한 이치라 할 수 있다. 불교T,V는 케이블T,V프로덕션 연합회와 연대하여 정부를 상대로 계속 이러한 난제를 풀어가고 있지만 구조적인 적자요인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어쨌든 불교방송과 불교T,V가 각각 음성과 영상을 통하여 전국의 불자가정을 찾아 법음을 전하고 있음은 교계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불교방송과 불교T,V가 현재 제반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불교계의 전 사부대중이 지혜와 힘을 모아 위법망구의 자세로 임한다면 1600년 불교역사에 우뚝한 초공간의 법당이 더욱 큰 광명을 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성철스님의 열반
1993년 11월4일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추앙을 받아 온 조계종 종정 성철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스님의 열반은 불교계 뿐 아니라 전 국민의 비통을 몰고 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조계종 종정직을 수락하고 추대식장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신 채 사자후한 이 법어는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화두로 남아 있다. 스님은 1912년 경남산청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 1030년 진주중학을 졸업한 뒤 일제하 젊은 시절을 사상적 방황기로 보냈다. 이 시기 스님은 승찬대사의 신심명과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읽고 캄캄한 밤중에 태양을 만난 듯 환희하고 생가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 대원사를 찾아 평생수행의 외로운 길에 들어선다. 불가의 예법을 잘 모르던 스님이 속복을 입은 채 대원사 방 한칸을 차지하고 수행에 들어가자 본사인 해인사에서는 이인이 나타났다는 공론이 돌고 결국 스님은 해인사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게 된다. 당시 해인사에는 백용성, 송만공 스님등 선지식들이 계셔서 훌륭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성철 큰스님은 1935년 인연을 맺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말년을 보냈다. 스님은 10여년간의 장좌불와, 묵언 등의 수행에 추호의 빈틈이 없었으며 기존 불서의 해석은 물론 영,독,일,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여 현대물리학,심리학,심령학 등 외전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스님은 수행하는 일 외에는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는 특징 있는 삶을 사셨다. 성철스님을 친견하려면 3천배를 해야 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급 인사도 예외는 없었다. 이렇게 스님은 승속간에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스님은 이따금 산은 산,물은 물 등의 법어를 내림으로써 국민정서를 깨우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저서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를 강조함으로써 후학들에게 자신의 수행관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수행법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불교계에 공부하는 분위기를 일신시키기도 했다. 스님이 조계종 제6대 종정으로 추대된 것은 1981년1월 바로 전해 불교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10/27법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다. 5공을 출범시킨 신군부가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불교를 탄압한 10/27법란은 불교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님은 이런 와중에 종정으로 추대되어 실추된 불교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회 일각에서는 스님이 깨달음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으냐는 지적이 있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님은 종정에 취임하던 해에 종단의 간부들에게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의 본분이 있다. 치열한 구도정신을 가지고 견성성불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실현하라. 그리고 올해부터는 싸움을 하지 마라. 싸움으로 인하여 타율적인 정화를 당하게 된 것 자체가 잘못이다. 출가자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일대사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라고 밝힌 견해는 그러한 세간의 오해를 씻어 주고 있다고 본다. 영결식에서 당시 원로회의 의장 서암 스님은 추도사를 통하여 스님은 병든 세상에 조각으로 기운 누더기 한벌로 몸을 가리고 장좌불와와 묵언정진으로 뼈를 저미는 수행자의 생활로 일관했다. 고 추모했다. 또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정부를 대표해 스님은 한국불교계의 큰 별이었으며, 이땅과 겨레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스님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선승으로서 국민의 정신적 귀의처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추도했다. 이날 영결식장에서는 전국 3천여명의 스님과 10만 여명의 신도들이 운집했고, 정계,재계,주한외교사절,종교계 등의 대표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법구는 영결식장에서 3Km 떨어진 다비장으로 운구되었고 곧 바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스님은 110과의 오색 투명한 사리를 남겼다. 성철스님의 열반은 각종 매스컴의 유래없는 취재경쟁을 촉발하였고,이런 여파는 비디오계와 서점가를 강타하기도 했다. 비디오계에는 스님의 생애,입적,다비 등의 장면을 영상다큐로 제작하여 다투어 출시했고,서점가의 대형 매장들은 성철스님 코너를 신설,발빠른 상업성을 보이기도 했다. 스님은 가셨으나 스님의 치열했던 구도난행과 일의일발의 승가상은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귀감이 된 것이다.
종단의 분규
큰 스님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93년3월 종권을 둘러싼 종단의 분규가 일기 시작했다. 총무원장 3선을 둘러싼 서의현 총무원장과 이를 결사반대하는 실천승가회,선우도량,중앙승가대,전승련 등 8개 단체가 결성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이 사건의 발단은 표면적으로는 종헌에 명시된 총무원장이 임기는 4년이며 중임할 수 있다.는 자구의 해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원장측은 중임을 단2번이 아니라 거듭할 수 있다는 뜻으로 결론짓고 3월30일 경찰 병력의 보호속에서 임시중앙종회를 개최,서원장의 3선을 의결했다. 이에 앞서 범종추등 재야불교에서는 조계사에서 단식과 비폭력 구종농성에 들어갔고,집행부측은 이를 해산하기 위하여 폭력배를 동원 농성중인 스님들을 무차별 공격했다.이를 빌미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범종추 소속 승려,신도 등 476명이 연행되었고 연행과정에서 도각 스님등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폭력배 동원과 경찰병력 투입등의 초강수를 쓴 서원장측의 악수로 말미암아 모든 불교도는 범종추의 대열에 합류케 되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서원장의 사퇴로 일단락되었고 4월15일 제113회 임시중앙종회는 10대 종회를 해산하고 전권을 종단개혁회의에 일임한다. 존단개혁회의(월하스님)는 서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기 사흘전인 4월10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성되었는데 이 대회는 서원장 공직박탈과 동대회의 개최를 반대한 서암 종정 스님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다. 서원장측과 범종추측의 대결은 결국 종단개혁회의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나 이 사건은 2가지의 문제를 남기게 된다. 하나는 부당한 공권력이 또 한번 불교계를 탄압한 사례를 더했고 또 하나는 전국승려대회가 현직 종정 스님을 불신임한 선례를 만든 점이라 하겠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종단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불교자주화의 실현,종단운영의 민주화,청정교단의 구현,불교의 사회역할 확대라는 5대 지표를 설정하고 8개월 동안 차기 종단구성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1994년 11월21일 조계종은 316명의 선거인단에 의하여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송월주 스님을 선출하고 이보다 앞선 11월16일에는 제11대 중앙종회가 개원되어 설정 스님이 의장에 선임된다. 종단개혁회의가 8개월간의 작업끝에 마련한 새로운 종단 출범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종단의 권력구조라 할 수 있다. 서 전원장 체제으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총무원장의 종권 독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총무원, 포교원, 교육원의 3원이 각각 독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집행부서로서 업무를 분장하게 된다. 또한 총무원장과 종회의원 등 주요 직책은 겸직이 금지되었다. 어쨌든 1994년11월 조계종단은 과거의 권위주의와 독선적 운영형태를 지양하고 제도개혁등의 새로운 과제를 안고 출범하게 된다.개혁종단은 출범과 동시에 중앙신도회의 구성과 중앙승가대학 정규대 승격 및 학사이전,그리고 선학원,대각회 등 문제해결과 태고종과의 분규사찰문제 해결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현재 뚜렸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앙신도회 결성에 대한 문제는 2~3차례나 그 결성시기를 늦추어 왔다.재가 신행단체에서는 신종헌 종법에서 규정한 중앙신도회법이 신도들의 자율성을 배제하였을 뿐 아니라 승단과 재가의 관계를 종속적으로 만든 악법임을 문제점으로 제기하였다. 또한 지난 40년간 종단의 실질적 외호세력으로 관계를 종단이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것도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면에서 부정적으로 비쳐지고 있다.
중앙승가대학은 종단과 대학의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정규대학으로 승격하였으나 학사 이전문제는 몇차례의 번의와 진통 끝에 김포 금정사 부지로 이전할 것을 결론 지은 외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승가대학의 이전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예산확보가 급선무인데 종단은 94년에 20억원, 96년에 50억원을 예산 책정하였으나 실제 확보된 금액은 미달이라는게 주위의 시각이다.
또한 선학원 등의 문제도 별 진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조계종단이 형님된 입장에서 크게 포용하는 입장을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학원 이사에 대한 징계를 결의하는 등 초 강경책을 고수한 데 따른 반작용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태고종과의 분규사찰 해결에 대한 노력도 원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잇다. 개혁종단은 과거의 개인적 독선적인 경영방법을 탈피, 대화와 인내로 제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본래의 의지와는 달리 앞서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또한 청정한 계율을 생명으로 삼는 종단의 승풍이 벼랑 끝에 와있음을 인식한 안목있는 스님들이 중앙종회를 통하여 승풍쇄신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이마저 한계에 부딪혀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종단 협의회
28개 종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이제까지 전 불교계를 대표하는 연합기구였는데 1996년7월 드디어 분열이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즉 조계종단과 이에 동조하는 소수의 종단에 대항하여 다수의 종단이 종단진흥회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 종단진흥회가 창립을 선언하고 기자회견에서 조계종단의 독선을 비판하고 나선 것으로 보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분열은 조계종의 포용력이 너무 적지 않았느냐는 풀이가 가능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조계종 개혁종단은 출범 이후 개혁의 의지를 달성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여진다.
문민정부의 탄압
한편 문민정부를 자칭하고 나선 김영삼 정부(1993~1996)는 출범 이후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억지논리를 전개,일신교적 흑백사상으로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누를 범했다. 단군성조이래 5천년 역사를 싸잡아서 비난 매도하는가 하면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곳곳에서 죄없는 연꽃이 뽑혀 나가는 수난을 당하고,이 시대에 편승하여 일부 몰지각한 종교단체들이, 각급 학교교정에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으로 세워진 우리민족의 뿌리이자 근원인 단군상을 파괴하고,훼손하는 등의 민족성이 의문되는 어이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1993년1월4일 육군 제17사단 전차부대장이 불교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부대 내 법당을 폐쇄하고 불상을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경남지사가 부임 직후 관사에 모셔져 있던 미륵반가상을 창고에 폐기처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달에 공보처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5개소의 불교방송 지방국 설립 약속을 깨고 2개소의 지방국 신설만을 허가했다.
1995년 12월에는 김영삼 씨가 국방부 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보며 인접해 있는 중앙법당의 불자들에 대하여는 경호상 문제라 하여 출입통제를 하는 등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졌다.
1996년 4월에는 수유동 소재 삼성암과 본원정사가 이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방화로 인하여 대웅전,나한전,범종각이 전소된 데 이어 이웃에 위치한 화계사 대웅전이 전소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계속하여 불교를 말살하려는 의도적인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정부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들은 위정자의 일신교적인 뱉타사상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며 여기에 반사작욕이 가세함으로써 기독교 광신자들의 사찰방화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에는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른 일반 상식을 뛰어넘어 정권의 수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타종교를 박해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 냈으며 또 한번 불교계는 관권으로부터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