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혼자다 싶을 때
그 많은 잎들 다 어디 가고
혼자 떨고 있나 싶을 때
나무는 본다 비로소
공중으로 뻗어간 뼈를
하늘의 엽맥을
광대무변한
이 잎은 아무도
떼어갈 수 없다
2022년 10월
손택수
귀의 가난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엔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11월의 기린에게
옥탑방의 철제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리고 있는지, 여쭙니다
당신은 그 계단이 모딜리아니의 여인
목덜미를 닮았다고 하였지요
그 수척하고 해쓱한 목 끝의 옥탑방은
남하하는 철새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
날개를 쉬어갈 수 있도록 일찌감치 불을 끈다고 하였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산으로 간 고산족의 후예였을까요
어느 가을은 가지를 다 쳐버린 플라타너스에게
초원의 기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혹만 남은 가지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일어난 수피가 얼룩을 닮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어요
저는 기린이 울 줄 모른다고 하였지만
우리에겐 저마다 다른 울음의 형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사이 저는 위장이 늘어나서 갈수록 목도 점점 굵어져 갑니다
반성도 중독성이 되어 덕지덕지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포도의 낙엽들은 이미 마댓자루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치고,
거리마다 등뼈 으스러지는 소리로 탄식하던
몰락의 노래도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사이 지상은 낙엽의 소유권과 실용성을 발견했습니다
낙엽도 쓸모없이 배회할 틈을 잃고 말았습니다
기린이 사는 초원엔 벼락이 드물다고 했던 게 당신이었던가요
녹슨 철제 계단 밟는 소리가 낙엽 부서지는 소리 같던 거기
치켜올린 목이 사다리로 굳어진 옥탑방, 여쭙니다
철새와 함께 잠을 청하던 가을의 안부를
물방울 하나가 길디긴 물관부를 유성처럼 흘러가던 밤을
먼 집
당신이 가신 뒤의 일입니다
마당귀의 감나무가 그늘을 당겼다 푸는 게 보입니다
고무신 끄는 소리, 기침소리
쌀뜨물처럼 받아먹고 자란 나무겠지요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눈을 감게 해달라
처음으로 청이란 걸 하셨는데,
저는 외손에 지나지 않는군요
혼자서 해바라기를 하던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마당을 지나가는 구름이며 바람이며가
말년의 이웃들이었음을 알겠습니다
가까운 데는 흐릿해서 못 보고
먼 곳을 더 자주 드나드시던 분
그 이웃들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었던지요
키우던 개가 마지막 숨을 놓을 때 바라보던 그곳
감기는 눈동자에 어린 구름은 어디쯤을 흘러가고 있을지,
먼 데를 보는 눈으로 구석구석 소제를 하시던 당신처럼
외손인 제게도 유품이 생겼습니다
저를 업고 걸레질을 하시던 툇마루가 생겼습니다
가도 가도 바깥인 집
당신이 가신 뒤의 일입니다
감나무 잎그늘 수런거리는 소리도
누군가의 숨결만 같은 하루
이력서에 쓴 시
생년월일 사이엔 할머니의 태몽이 없고
첫 손주를 맞은 소식을 고하기 위해
소를 끌고 들판에 나가셨다는 할아버지의 봄날 아침이 없고
광주고속 거북이 등을 타고 와서 여기가 용궁인가
동천 옆 고속터미널에 앉아 있던 소년의 향수병이 없고
길바닥보단 지붕을 좋아해서
못을 징검돌처럼 밟고 슬레이트 지붕을 뛰어다니던
도둑괭이 문제아가 없고
맥주병 소주병 환타병을 깨서 송곳니를 드러낸 담벼락처럼
가난하고 겁 많은 눈망울을 숨기기 위해
아무데서나 이를 드러내던 청춘이 없고
남포동 통기타 음악실 무아에서 허구한 날
죽치고 앉아 있던 너를 그냥 보내고 시작된
서른 몇 해 동안의 기다림이 없고
신춘문예 응모하러 가던 겨울 아침
그게 무슨 입사지원서나 되는 줄 알고
향을 피우고 계시던 어머니가 없고
참 신기하지 재가 되었는데 무너지지도 않고
창을 비집고 든 바람 앞에서 우뚝하던 향냄새가 없고
늦깎이 근로 장학생으로 대학에서 수위를 보던 그때
일 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힘내라고
밥을 사준 이름도 모를 그 행정실 직원이 없고
이후로 나를 지켜준 그 밥심이 없고
이력서엔 영영 옮겨올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구겨진 이력서에 나는 시를 쓰고 있네
의자 위에 두고 온 오후
호수공원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자니 누가 옆에 와서 앉는다
나의 영토를 침범 당했다는 느낌, 의자를 전세 낸 처지도 아닌데
그럼 쓰나, 불쾌함이 전달되지 않도록
휴대폰을 보는 척 슬그머니 일어선다
내가 모이를 쪼는 비둘기에게 가까이 갔을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이었겠다
오수를 즐기는 길고양이를 쓰다듬으러 다가갔을 때
당혹스러워하던 눈동자도 이해할 만하다
그런 장소들이 있다
그의 몸과 분리할 수 없어서
거기에 있는 볕과 바람과 나무들과
흔들리는 그림자마저
그의 몸만 같아서
부러 이만치 거리를 두고
호젓하게 있게 하고 싶은 곳들
떠나온 자리가 두고 온 몸 같아 멀찌감치서 돌아다본다
의자 위에 두고 온 볕이
나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모슬포
반듯하게 각을 지어 다듬은 돌담이 태풍에 무너졌다
큰돈을 들였는데, 보란듯이
대충 쌓아올린 돌담들은 멀쩡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건 육지에서의 일,
섬에선 모난 돌도 대접을 받는다
세상의 모든 돌은 만나면 끼워맞출 수 있는
모가 있으니까, 모난 구석끼리 암수 끼워맞춰
돌담이 되고 산담도 된다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모와 모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 축담의 전부
그 사이로 숨비소리 같은 숨길이 트인다
바람을 죄었다 푸는 푸른 입술이 생겨난다
하나가 움찔하면 전체가 따라 꿈틀하는 새떼와도 같이
끝에서 끝으로 구불거리는 돌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깨지고 부딪치다 쓸모없어진
나도 여기선 제법 태평하다
우둘투둘한 이 돌들과 함께라면
못난 것도 마냥 흉만은 아닐 것 같아서
영 못 살 것도, 몹쓸 것도 없는 모슬포
눈물 봉분
ㅡ동탄 5
신춘 등과 스무 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관직을 제수받고 사은숙배한 뒤 화성도 동탄 돌모루 왕릉으로 왔다 왕릉은 왕릉인데 눈물의 왕*을 모신 누릉(淚陵)인지라 낯선 타지에서 눈물깨나 쏟을 것이라고 다들 고개를 흔들었으나 죽음을 마주하는 청직을 어찌 사양할 수 있을까 미관말직이긴 해도 함께 온 능졸이 불쌍놈 같은 허우대와는 달리 그 심성이 딴은 심산유곡처럼 깊은 데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적잖이 의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실 우리는 싯줄이나 읊으며 떠돌면서 경화사족들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질시하며 미천한 신세타령을 함께한 도반으로서 눈물만큼은 그 누구보다 곡진하게 흘려본 내력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능역에 들어선 문학관 맞은편엔 사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러브호텔과 룸살롱과 주점이 즐비하고, 문학관 뒤편엔 나지막하지만 새소리 깊게 울리는 오솔길을 품은 산이 어깨를 내어주고 있다 문학관을 제실로 하여 밤이면 도로를 건너다 골절상을 당하는 풀벌레 소리를 받아 적고, 주점을 헤치고 검은 도로를 건너오는 사람들의 참배를 기다린다 더러는 폐차 직전의 나귀를 타고 덜덜덜 남향도호부 매향까지 가서 신도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능졸이나 나나 허술한 데가 많아 근방의 호족들 서리배들로부터 수차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나 눈물을 봉분으로 섬기는 일에 어찌 소홀함이 있을까 오호라 종구품 움직인들 어떠랴 눈물을 고배율 렌즈처럼 닦아 하늘을 보자꾸나 경술년 중추절 앞 벌초를 하고 내려오는 잠시 몸에 밴 풀내를 따라오는 나비 날개를 능참봉 견장처럼 슬쩍 달아도 보았던가
* 노작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귀룽나무의 말
구름이라고도 하고 구릉이라고도 하고
귀룽이라고도 하지
꽃이 피면
어느 이름으로 불러도
그럴 법하다 싶은
나무
구름도 구릉도 귀룽도 뜻은 다르지만
소리로는 통하지 못할 것도 없는 말들,
자음과 모음을 돌멩이처럼 쥐고 공기놀이를 하다보면
어느새 저녁이 올 것 같은 말들
나무에게 배웠다네
생면부지에도 친근한 것들,
친근한 가운데도 틀림없는
생면부지의 이름들을
구름과 구릉과 귀룽 같은 말 하나 갖고 싶어서
춘양 한수정에 달 뜨면 만나자던 약속
숲속에서 한밤에 선녀를 만났어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지
이걸 어떻게 표현해?
달이 아닐까?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다시 생각해봐
달 중에도 어떤 달?
기울어서 가녀린 초승달?
초승달도 그냥 초승달이 아니라
사월 초파일쯤에 돋는 초승달이어야지
그래도 미진
미진한 걸 아는 게
시의 일이 아냐?
기울어서 가녀린 것들이
반달도 되고 쪽달도 되고
보름달도 되고 손톱달도 되고
무궁무진이네 하하
아직 뜨지 않은 달까지
달 달 무슨 달
불편은 해도, 그래서
손가락을 꼽아보는
봉화 춘양 한수정
못에 달 뜨면 만나자던
약속이 있었다네
숨은 꽃
꽃이 없을 때 나무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면
나무를 보지 못한 거다
늘 꽃일 수는 없으니까,
열매도 보고 수피도 찬찬히 뜯어보는 거지
같은 초록도 색조가 바뀌어가는 걸
따라가보는 거지
꽃말을 지워보렴 차라리
라일락의 우정과 코스모스의 순정과
영산홍의 첫사랑을 놓아주니
뜻밖에, 홀가분해진 건 나
이름에 가려져 있던 이목구비가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찾지 못한 꽃이 잎과 잎 사이의 하늘처럼 하늘거린다
저 무수한 틈새가 마지막 잎새가 아니겠는지,
저 의미심장을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로
머리카락을 내민 채 숨는 숨바꼭질이 있다
돌멩이의 말
새는 새밖에 없어 꽃은 꽃뿐이지 돌이 돌 아닌 걸 봤니 물론 돌은 부처도 될 수 있고 벽도 될 수 있어 투석도 될 수 있지 하지만 돌은 그 어느 때도 돌로부터 멀어진 적이 없지 나무는 나무가 아닐 때조차, 심지어 그루터기만 남았을 때조차 물을 뿜어올려 새들의 목을 적셔주지 지도에 없는 땅을 풀잎은 알아 풀잎은 늘 새로 긋는 지도 위에 있으니까, 스스로가 경계선이니까 흔들리는 경계선을 따라 흐르는 구름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는 계절들이 있지 그건 얼마나 다행한 일이니 그건 나의 노래에도 여지가 있다는 말이니까 자기 자신밖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그들은 자신 너머에 있어 나만이 내가 아닌 것 같아 나뿐이면 정말 외톨이가 될 것 같아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떠돌지 어디를 뒹굴든 무엇으로 있든 늘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돌, 모래가 되든 흙이 되든 떨어져나가면 그 자신으로 있게 하는 것이 돌, 돌(乭)이라는 이름 속엔 돌을 밀고 가는 새의 빛나는 이마가 있지 새의 부리를 정으로 친 돌멩이가 되어라 돌멩이만 있어도 놀이를 발명할 줄 안다면 그에겐 아직 아이가 있는 것,
나무 그늘 아래 야물딱지게 박힌 돌멩이 옆에 앉는다
이 얼마만의 휴식인가
- 손택수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문학동네, 2022
손택수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빛이 여전합니까』가 있다.
이용 - 잊혀진 계절 (1981)
첫댓글 나이들수록 함께 할 수 없는 슬픔이 더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찰나에 불과한
우리의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밤마다 곱씹어 보아도 속시원한 해답을 얻기는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