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들은 자연의 이러한 특별한 행동 앞에서는 너 나없이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우리의 습관적인 생각대로 이 사건의 성격에 관해 착각하고는 이것이 어떻게 이어질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상적인 중간 사건 정도로 여긴다.
그러다 나중에 그것이 엄청난 시련이며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첫째가는 고난임을 알게 되면, 처음에 눈이 멀어서 그런 오해를 했던 것이 어이없게 느껴진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살아생전 이런 일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 하지 않았는가.
이집트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7년 간의 기근을 이해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기근 현상은 이때뿐 아니라 그전에도 있었던 듯, 이에 얽힌 무서운 우화도 남아 있다.
그러나 기근이 시작되었을 때 보인 이집트 자녀들의 이런 태도는, 우리가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보일 수 있는 근시안적인 행동과는 달리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 어렵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파라오가 꿈을 꾸고 요셉이 해석을 하여 이미 그렇게 되리라 예언된 일이 아니던가.
7년 간 풍년이었으면 그것은 앞으로 7년은 기근이 찾아온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집트 자녀들은 풍요로운 7년을 보내는 사이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악마의 계산 따위는 머리에서 지워버리듯이 말끔히 떨쳐낸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결산의 시간이 다가왔다.
먹여 살리는 자가 초라할 정도로 모습이 줄어들기를 두번, 세번 되풀이하자, 이들도 이제는 이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사태를 이해하게 되는 만큼 요셉의 명성은 더없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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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을 보게 되다니! 오. 내 형제! 그들은 언제나 내 형제였소.
서로의 잘못으로 안 좋은 일도 겪었지만, 그들은 항상 내 형제였소!
오, 난 그들과, 야곱의 아들들, 내 형제와 대화할 거요. 그리고 형들로부터 듣게 될 거요.
아버지가 살아 계신지, 내가 오랫동안 죽은 척하고 아무 연락도 안 드린 아버지께서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소식을, 신께서는 정말로 짐승을 아들 대신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는지!
또 벤야민이 살아 있는지, 형들이 같은 형제로 잘 해주는지, 이 이야기도 전부 듣게 될 거요.
아, 벤야민도 데려오고 아버지도 이곳으로 모셔와야 하오!
아, 왕년에는 감옥의 태수였던 집사! 이건 너무 흥분되는 일이오! 이런 축제가 또 어디 있소?
그러니 신나는 축제처럼 재미있게, 모든 것을 가장 경쾌하고 산뜻하게 만들어야 하오.
유쾌함은 말이오, 친구. 그리고 약삭빠른 농담은 주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며, 이것들이야말로 혼란스럽고 의문스러워 보이는 삶을 대하는 진정한 태도이기 때문이오.
신께서 우리들의 정신에 이것들을 선사하신 이유는 아무리 준엄한 삶이라도 미소를 짓게 만들라는 뜻에서라오.
형들은 날 잡 아찢고 구덩이에 던졌소. 그런데 이들이 이제 내 앞에 서게 되었소.
이것이 바로 인생이오.
또 인생은 행위를 결과에 비춰 평가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는 질문이기도 하오.
좋은 결과를 위해 꼭 필요한 악이었으니, 한마디로 필요악은 그러면 선이라 해야 하는가, 이것이 인생이 제기하는 질문이라오.
이런 질문들은 진지함으로는 대답할 수가 없소.
인간 정신은 오로지 유쾌한 가운데에서나 이 질문들 위로 올라갈 수 있다오.
이 경우 어쩌면 대답이 없는 신에 대해서도 장난기를 부려, 바로 대답이 없는 그 막강한 분까지도 미소 짓게 만들지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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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 이야기에서 1년이 대수이겠는가!
이 이야기 때문에 시간과 인내심이 아까울 자가 어디 있으랴!
요셉도 꾹 참고 인내하면서 이집트 땅에서 고위 관료로서 곡물을 파는 상인 노릇에 충실했다.
그리고 형제들 역시 인내심을 가지고 야곱의 고집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벤야민도 그러했다.
그는 여행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고, 호기심을 생기게 만드는 시장 주인에 대한 호기심도 눌렀다. 그래도 우리가 이중에서 제일 편안하다.
그것은 우리가 일의 귀추를 모두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자들은 몸으로 직접 이야기를 체험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서 호기심이 생길 수 없는데도 호기심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리한 점도 있다.
시간의 척도를 마 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이 7년 간 메소포타미아에서 해야 했던 것처럼 이 기다림의 세월을 하나하나 채워갈 필요는 없다. 그저 이야기 를 들려주는 입으로서 이렇게 간단하게 말해도 그만이다.
1년이 지났노라고. 그리고 1년이 지나니 야곱도 지쳤다.
당시 물이 제때 등장하지 않아 우리 이야기의 무대인 나라들에 가뭄이 더 심해졌다는 건 모두 다 알 것이다.
이 세상에 악마의 장난이 시리즈로, 줄줄이 이어지는 게 어디 한 두번인가.
그래서 다른 때는 변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연 인지라,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넘어 간격을 유지하다가도, 한번 마음이 뒤틀리면 미친 듯이 악마처럼 낄낄거리며 계속 같은 것이 이어지게 만들지 않는가!
물론 그러다 결국에는 다시 풀쩍 뛰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계속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우연이라는 명분도 사라져 자멸할 테니까.
하지만 그 전까지는 미친 듯이 장난을 계속할 수 있다.
그리고 일곱번이나 이 짓을 했다 해도 크게 보면 이런 일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나일 강물이 흘러나오는, 무어 족이 사는 나라의 산맥과 바다 사이의 구름 문제와 관련하여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설명했을 뿐, 왜 그런지에 관해서는 이야기한 바 없다.
사물의 ‘왜'라는 질문 앞에서 대답에 이르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의 원인은 바닷가의 해곶처럼 일종의 무대 장치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무대 장치는 다른 무대 장치 앞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필요없는 궁극적인 ‘왜'는 저기 무한한 곳에 놓여 있다.
먹여 살리는 자, 곧 나일 강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고 넘치지 않았다.
그곳 무어 족의 땅에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가 오지 않은 이유는 가나안 땅에도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바다가 구름을 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7년 동안, 아니 최소한 5년 동안.
왜? 거기에는 위쪽에 해당하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들은 우주로 나아가 별들에 이른다.
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가 있는 아래쪽의 바람과 날씨를 지배한다.
이들이 태양의 흑점들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들이다.
그러나 태양이 최종적인 것이요, 가장 높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다 안다.
그리고 아브람도 태양을 궁극적인 원인으로서 숭배하기를 거부했는데, 우리가 태양에서 멈춘 데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우주에는 상위 질서가 있다.
행성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여 가만히 있는 듯한 태양도 이 질서보다는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이다.
그리고 태양의 방패에 있는 영향력이 강한 여러가지 흑점들이 각기 하나의 ‘왜'이지만, 더 이상은 다른 곳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는 최종적인 마지막 ‘왜’도 아니며, 그것이 앞에서 말한 이 상위 시스템에 있다거나 혹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궁극적인 왜는 그보다 더 먼 곳의 옥좌에 앉아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 먼 곳이라 했지만, 어쩌면 가까운 곳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거기서는 먼 곳과 가까운 곳, 원인과 결과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이미 가 있는 곳이 그곳이며, 우리가 어떤 계획, 혹은 섭리가 있다고 여기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 계획은 또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번쯤은 자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빵을 내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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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아침 햇살 아래 형제는 두번째 여행길에 오를 준비를 끝냈다.
지난번과 같은 숫자였다. 원래의 한 사람은 줄었지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메웠던 것이다.
열 명이 짐승 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늘어섰다. 한복판에 야곱이 있었다.
사랑했던 여인이 남긴 마지막 흔적, 막내아들을 얼싸안은 채였다.
사람들은 야곱이 늘 끼고 살던 아들과 작별하는 장면을 구경했다.
이처럼 인상적인 이별의 아픔이 또 있던가. 사람들은 모두 가슴이 뭉클해 졌다.
야곱은 오랫동안 막내아들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걸고 있던 부적 목걸이를 아들에게 걸어주고 볼을 비비며 하늘을 우러러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른 형제는 씁쓸한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머쓱해져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야곱의 입이 열렸다.
"유다. 넌 아이를 꼭 데려오겠다고 장담하면서 네가 보증 하겠다고 했지.
일이 잘못되면 네게 책임을 물으라고 했지.
하지만 네 책임을 면제해 주마. 난 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하시는 일에 어떤 인간이 보증을 설 수 있단 말이냐.
그분의 분노 앞에서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 난 오로지 그분만 의지할 것이다.
반석이시며 목자이신 그분이 아이를 내게 다시 돌려주시리라 믿고 너희에게 아이를 딸려 보내려
는 것이다.
모두들 듣거라. 그분은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비웃고 모래폭풍을 날리는 사막의 괴물이 아니시다.
그분은 위대한 신이시다.
그분은 깨어 있으며 정결해진 분으로 함께 동맹을 맺은 언약의 신이시며 신뢰할 만한 분이다.
그분을 위해 누군가 보증을 서야한다면, 유다, 그건 네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분의 신의라면 내가 보증하겠다.
그분은 내가 너희에게 잠시 빌려 준 내 아이에게 아무 탈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이다.
자, 가거라."
야곱은 벤야민을 떠밀었다.
"자비롭고 신실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하지만 너희도 아이를 잘 보살펴다오!"
간신히 그 말만 하고 야곱은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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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그녀의 무덤입니다. 하지만, 주인님. 나귀만 분명하게 보이십니까?
혹시 나귀를 탄 사람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자도 분명하게 볼 수야 있지. 하지만 볼 게 뭐 있나?
거기 무릎을 꿇고 제물을 올리는 건 열일곱 살짜리 젊은이야.
울긋불긋한 사치스러운 옷에는 자수를 놓았군. 이 젊은이는 어리석은 바보야.
자기가 즐거운 산책길에 오른 줄 알지만 실은 망하는 곳으로 가고 있어.
며칠만 더 여행하면 무덤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
"그는 소인의 형 요셉입니다." 벤야민의 회색 눈이 당장 눈물로 넘쳤다.
"오, 용서하라!" 옆자리 사람이 놀라면서 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잃어버린 형인 줄 알았더라면 그를 나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무덤 이야기는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무덤은 깊고 어두우니 심각한 구멍이긴 하지만 그를 보관 할 수 있는 힘은 그리 크지 않다.
그 무덤은 타고날 때부터 비어 있는 무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지옥은 포획감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비어 있지.
그러나 네가 거기 가보면 포획물도 없어지고 그 지옥은 다시 비어 있어. 누가 돌을 치웠으니까. 나는 이 지옥 때문에 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덩이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어쩌면 더 구슬프게 한탄해야겠지.
이는 세상의 이야기 축제에서 자신의 때를 가지고 있는 장치로 심각하고 깊은 슬픔을 만들어내니까.
그렇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구덩이의 명예를 존중해서라도, 이것이 타고날 때부터 비어 있는 구덩이이며 어떤 것이 들어와도 영원히 붙들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모른 척해야 한다고.
아니 오히려 가슴이 찢어지도록 구슬피 울면서 한탄해야 마땅해.
하지만 속으로는 영원히 아래로만 내려가는 몰락은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해.
그 다음에는 당연히 부활이 있으니까.
그렇지 않고 구덩이까지만 이르고 그 뒤에 뭐가 오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야기 축제가 될 수 있겠나?
그렇게 되면 이야기 축제가 끊어져 반쪽으로 전락하지 않겠나?
하지만 아니지. 세상은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것이야.
따라서 축제는 온전한 것이고 전체의 온전함이야말로 위로가 되지.
그러니 네 형 무덤에 관해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라. 오히려 안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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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를 지키겠다고 보증을 섰습니다.
지금 소인이 여기 주인님 앞에서 말씀을 올리려고 주인님의 의자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소인은 아버지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제게 막내를 주십시오. 제가 그 아이를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아이를 아버지께 다시 데려오지 않으면 전 이 죄를 영원히 짊어지겠습니다. ‘
그러니 주인님, 참으로 독특한 분이시여, 이제 판단 해 주십시오.
이런데도 제가 막내 없이 아버지 앞에 되돌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와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볼 수 있겠습니까!
제 제안을 받아주십시오! 막내 대신에 저를 주인님의 종으로 삼으십시오.
이것이 가능한 보상입니다. 주인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불가능한 보상입니다.
이렇게 모두를 대신해서, 제가 속죄하겠습니다!
이제 참으로 독특하신 주인님 앞에서 제 형제들과 맺은 맹세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저희 형제를 하나로 묶어 주었던 이 끔찍한 맹세를 무릎에 대고 두 조각으로 부러뜨리겠습니다.
우리들의 열한번째 형제는, 아버지의 어린양이자 정부인의 첫째 아들인 그는 짐승한테 찢긴 게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형제들이 세상에 팔아 치웠습니다.”
정말이다. 유다는 자신의 유명한 연설을 이렇게 매듭지었다.
그의 몸이 흔들렸다. 형제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편 속이 후련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왔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맏이와 막내의 비명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벤야민은 집사의 추적을 알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양팔을 올리고 뭐라고 묘사할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면 요셉은?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반짝이는 눈물방울이 볼 위로 흘러내렸다.
홀 끝의 창문에서 들어온 햇살은 그동안 형제의 옆구리 쪽으로 떨어졌는데, 서서히 자리를 옮겨 지금은 건너편에 있는 요셉을 비추고 있었고, 그 빛을 받은 눈물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이집트인은 모두 물러가거라. 다들 밖으로 나가거라.
나는 이 자리에 신과 세상을 손님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로지 신께서만 이 놀이의 관객으로 남으실 수 있다."
명령이긴 했으나 다들 마지못해 따랐다.
의자 주위에 둘 러서 있던 서기들도 마이-사흐메의 눈짓과 그의 손에 등을 떠밀려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시종들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이들이 모두 아주 멀리 갔으리라고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밖에 서서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숙인 상태로 무대에 귀를 바짝 갖다대고 거기에 손까지 받치고 있었다.
무대에서 요셉은 볼 위로 흐르는 보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벌려 자신이 누구인지 알렸다.
자신을 알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예전에도 자신의 정체를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다.
그럴 때면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더 높은 존재와 자신의 인격체가 꿈처럼 하나로 뒤섞여 묘한 매력을 발산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자신을 밝혔다.
그리고 양팔을 벌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형제들이여, 접니다. 여러분의 형제 요셉입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벤야민의 환호성이었다. 기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는 소리를 지른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다시 찾은 형의 무릎을 와락 끌어안았다.
"오, 야수프, 요셉-엘, 여호시프!"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형을 바라보며 흐느꼈다.
"형님이군요! 형님이세요. 당연히 형님이시죠! 형님은 죽지 않았어요.
형님은 그늘진 죽음의 큰 집을 뒤엎고 부활 하셨어요.
‘일곱번째 테라스'로 올라가셔서 유성 자리에 앉아 집안일을 감독하는 영주가 되셨어요.
전 알았어요. 전 알고 있었어요. 형님은 높이 올려졌어요.
주님께서 형님이 앉을 의자를 마련하셨어요. 그분 것과 비슷한 의자죠!
하지만 형님, 형님도 어머니가 같은 형제인 저를 아시죠? 그래 서 내 손을 부채처럼 흔드셨지요!”
"꼬마야, 꼬마야."
요셉은 벤야민을 일으켜 세워 머리를 맞댔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이것은 그다지 크지도 않고, 또 그다지 넓지도 않은 의자다.
그리고 내 명성도 그 정도는 아니야. 중요한 건 그저 우리가 다시 열둘이 되었다는 거야!”
==
"놀라워하세요. 이 드문 경우를!
아, 얼마나 행복한가요.
두 가지가 하나라니.
아름다움이 순수한 진실이며, 삶이 다름 아닌 신이 지은 시라니!
그래요. 여기서는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되었답니다.
영혼이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거죠.
그래서 이렇게 들려드려요.
하나가 된 아름다움과 진실을.
할아버지의 소년은 살아 있어요!"
야곱의 고개가 떨렸다.
"애야, 귀여운 아이…”
그러나 그녀는 즐거워하며 노래의 속도를 높였다. 음성이 날아오를 듯했다.
"보세요, 노인, 이제 아시겠어요?
주님께서는 치실 수도 있고 위로하실 수도 있어요.
아, 인간들의 눈에는 그분의 행동이 얼마나 기이해 보였던가요!
당신은 그분이 데려간 소중한 자를 이제 되돌려 받으실 거예요.
아, 노인이여, 그대는 그동안 괴로워 몸부림치며 고통에 자신을 내던졌지만
이제 그분께서는 아이를 돌려주실 거예요.
그 아이는 조금 무거워졌지만 여전히 아름답지요.
그래요, 이렇게 주님께서는 제 할아버지를 멋지게 놀려먹었답니다!"
야곱은 얼굴은 외면한 채 노래를 멈추게 하려는 듯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친 갈색 눈에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애야."
간신히 그 말만 했다.
"아, 애야."
그리고 주변이 술렁이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고 자신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소리도 못 들었다.
호기심에서 세라흐를 따라와 그녀의 찬송가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 외에, 자식들의 귀향 소식을 야곱에게 전하러 온 사람들까지 가세해서 마당이 법석거렸다.
무슨 일인가 하여 부탁 사람들도 모두 이곳으로 몰려드는 동안 두 명의 남자가 야곱 앞으로 나왔다.
"이스라엘, 열한 명이 이집트에서 돌아왔습니다. 아드님들이 오고 있습니다.
갈 때보다 짐이 엄청 많습니다. 다른 남자들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마차도 있고 나귀도 더 늘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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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서 직접 봐야겠다, 죽기 전에.
그가 예전에 살아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살아 있을 리가 없으니, 정녕 살아 있었다는 뜻이구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찬양할지어다!"
온 백성이 따라 외쳤다.
그리고 우르르 몰려와 형제들과 함께 야곱의 옷자락에 입을 맞추고 축하해 주었다.
야곱은 사람들의 머리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도 여전히 흔들렸다.
그러나 세라흐, 그 노래하는 입은 돗자리에 앉은 채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장난기 많은 눈빛을 읽어보세요.
그건 단지 신의 농담이었답니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나마 아버지의 가슴을 황홀하게 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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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야곱이 수많은 민족들을 고통의 소용돌이에 몰아 넣고 경제파탄을 가져온 일종의 천재지변인 가뭄을 자기 부족의 역사에만 연관시켜 이집트로 인도하기 위한 조처로만 파악한 것을 일종의 교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세상 만사가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이 세상에 사는 다른 민족들은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자아 중심적인 사고는 교만이라는 부정적인 이름 외에, 긍정적인 이름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경건함이다.
아무런 질책도 받지 않을 수 있는 덕목이 과연 있는가?
어떤 덕목이든 이를 나무라는 부정적인 이름을 얻기 마련이 아니던가?
서로 모순되는 겸손과 교만이 한데 어우러지지 않는 덕목이 어디에 있는가?
경건한 자는 세상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구원사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 정도의 확신. 곧 신께서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시며, 오로지 자신만 염려해 주신다는 그런 확신 없이는, 또 만물의 중심에 자신과 자신의 구원을 놓지 않고서는 경건함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오히려 이처럼 강력한 덕목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그 반대는 자신을 보살피지 않고 자신을 있으나마나 한 주변적인 존재로 몰고 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세상을 위해서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게 없다.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곧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 예컨대 자신을 중히 여겨 오로지 지고한 분만 섬기리라 결심한 아브라함처럼 대단한 야망을 가진 자는,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해준다.
여기에 바로 자아의 존엄성과 인류의 존엄성의 관계가 드러난다.
인간은 스스로 가장 비중 있는 존재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이 신을 발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인류가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게 되어 멸망하면, 이와 함께 두 가지의 발견, 즉 인간이 발견한 신과 신이 발견한 인간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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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하던 말을 계속해 보자.
내면화는 좁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높이 평가한다 해서 보편으로부터의 단절과 경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편이란 개인의 밖과 위에 있는 것으로서 자아를 벗어나는 것인 동시에 그 안에서 다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경건함이 자아의 중요성으로 채워진 것이라면, 자아가 항상 존재하는 것 속으로 흘러들어가 확대되는 것이 바로 축제다.
늘 존재하는 것은 자아 안에서 반복되며, 자아는 늘 존재하는 것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축제는 폐쇄성과 개성의 상실을 뜻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아의 존엄성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으며 오히려 보다 거룩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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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문이 이집트 땅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든, 그건 상관없었다.
야곱은 자신만큼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래서 신과 인간에게 부담이 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다하면 견고한 고향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 참이었다.
보통 때는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 이곳 저곳 옮길 수 있는 장막에 살았지만, 죽어서는 땅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재산, 아버지들과 자신의 아들들의 어머니들이 누워 있는 바로 그곳에 누울 결심이었다.
물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그곳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서 길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아들, 사랑받는 자, 야곱의 품에서 누군가 먼 곳으로 떼어놓은 그 아들이 지금 야곱을 부르고 있었다.
이러니 야곱이 떠나기 앞서 길에서 빼앗긴 아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일을 되새겨보고 걱정할 시간을 가진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또 자신으로부터 격리시킨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여된 독특한 역할에 대해, 신을 이해하려는 야 곱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있었겠는가!
야곱이 이 문제에서 어떤 결론을 끌어내었는지는 그에게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제 요셉 이야기를 할 때면 나의 주인님, 내 아들이라 불렀다.
"나는 나의 주인님, 내 아들이 있는 이집트로 내려갈 생각이다. 그는 그곳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듣고 노인의 등 뒤에서 피식 웃으면서 참 거만하게 군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으리 라.
그러나 이들은 이런 표현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거기엔 거리감과 포기, 그리고 단호한 결단이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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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벤야민과 다른 아들들이 말리는데도 막무가내로 아들들의 도움도 사양하고 스스로 힘들게 가마에서 내려와서 걷는데, 다른 때보다도 더 심하게 절뚝거렸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과장한 것이다.
그걸 본 상대방은 아버지가 많이 걷지 않게 하려고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남자의 미소 띤 입술은 ‘아버지'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싸안으려고 양팔을 벌렸다.
그러나 야곱은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마치 손으로 더듬거리는 장님 같았다.
그리고 뭔가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가오라고 손짓 하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멀리 쫓으려는 듯 거
부하는 동작을 보였다.
그리고 서로의 팔이 만났을 때 야곱은 요셉이 자신의 목을 얼싸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요셉은 그러려고 했지만, 야곱은 어깨를 잡고 두 사 람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약간 비스듬 하게 젖히고 지친 두 눈으로 상대방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이집트인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고통과 사랑으로 얼룩진 절박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의 눈이 유심히 살피는 동안 그 이집트인의 눈이 서서히 촉촉하게 젖어들어 어느새 눈물이 넘쳐나면서 검은 눈동자가 눈물 바다에 밀려 헤엄치는 것을 보자, 그제야 아들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라헬의 눈이었다.
야곱이 꿈처럼 아득한 먼 옛날 눈물을 닦아주던 그 눈이었다.
아들을 알아본 그는 이렇게 낯설어진 아들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서럽게 울었다.
이들은 한참 동안이나 이렇게 서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감히 나설 생각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리고 요셉의 수행 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종과 마차 감독관, 달려가는 자, 부채를 드는 자, 그리고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구경 나온 사람들까지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서 두 사람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아버지, 절 용서해 주시겠어요?" 아들이 물었다.
아, 이 얼마나 많은 뜻을 담은 질문인가.
아버지를 놀리고 성가시게 했던 자신이었다.
사랑을 독차지한 총아라고 교만하게 군데다, 구원받을 길 없는 잔꾀도 부렸었다.
또 맹목적인 신뢰로 말미암아 다른 형제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등, 자신이 저지른 벌 받아 마땅한 어리석은 행동은 백 가지가 넘었으리라.
그 잘못을 회개하느라 역시 회개하고 지낸 노인의 등 뒤에서 죽은 자처럼 침묵하며 살아온 자신이 아닌가.
"아버지. 절 용서해 주시겠어요?" 야곱은 마음을 가다듬고 아들의 어깨에서 얼굴을 들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다.
보다시피 그분은 이렇게 내게 너를 다시 돌려주시어 이스라엘이 이제 편안히 죽을 수 있게 해주시지 않으셨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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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분이 사랑하는 자들이 그분께 이제 그만 분노를 누그러뜨려 달라고 부탁드리는 건 해가 될 게 없지요.
이제는 그분의 은혜를 칭송하고 그분과의 화해를 기리기로 하죠.
그러기 위해서 너무 오래 기다린 셈이지요!
그분의 위대함은 곧 그분의 지혜로움입니다.
이 말은 그분의 생각이 더할 수 없이 풍요롭고 그분의 하시는 일에도 풍요로운 의미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분의 결정에는 여러 가지 조처가 따르지요. 이건 참으로 놀랄 만하죠.
그분이 주시는 벌은 벌을 의미하긴 하지만, 다시 말해서 그 자체가 진지한 목적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큰 일을 장려하는 수단이기도 하지요.
그분은 강한 손으로 아버지와 저를 서로 떼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께 죽은 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게 그분의 뜻이었지요.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분은 저를 여러분보다 먼저 이곳으로 내려오게 하여 여러분을, 아버지와 형제들과 아버지의 가솔 전체를 기근에서 구하게 하신 겁니다.
이 기근에는 그분이 품고 계신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뜻이 숨어 있겠지만, 부분적으로 이 기근은 여러 가지 수단 중에서 한 가지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모두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었지요.
이렇게 보면 모든 것은 너무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지혜는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하게 꼬여 있지요.
우리는 뜨겁거나 차지만, 그분의 열정은 예견이며 섭리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분노는 멀리 내다보는 자비로움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아버지들이 섬기던 신을 얼추 비슷하게 묘사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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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게 그분의 생각이 참으로 풍요로우며, 그분의 결정에는 숭고한 이중의 의미가 담겨 있다 고 말해 주었다. 그건 무척 영리한 말이었다.
지혜는 그분의 것이며, 그분의 지혜를 가늠해 보는 영리함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니까.
그분께서는 너를 높이신 동시에 내던지셨다.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내 아이, 넌 충분히 영리해서 내가 지금 하는 귓속말을 잘 알아들을 것이다.
그분은 너를 네 형제들 위로 들어 올리셨다. 이건 네가 꾸었던 꿈과 같다.
아, 사랑하는 아이야, 난 네 꿈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왔다.
그러나 그분은 너를 그들 위로 올리면서 세상의 방식을 사용하셨다.
구원과 축복의 의미에서 올려주신 게 아니다. 따라서 넌 구원을 간직하게 된 것은 아니다.
상속 유산은 못 받는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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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 운명을 놀랄 만큼 평온한 마음으로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건 훌륭한 태도다.
자신의 운명도 또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주님은 너를 거부하시면서도 너를 무척 사랑하신다.
나도 그분처럼 하겠다. 너는 격리된 자로 우리 부족의 본 줄기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러니 본 줄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네 아들들, 즉 첫 소산들을 내 아들로 만들어 너를 조상의 지위에 올려주겠다.
네가 앞으로 얻게 될 아들들은 네 아들들이지만, 이 첫 소산들은 내 아들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뜻이다.
아들아, 그렇지만 네 자신이 조상의 대열에 낄 수는 없다.
그건 네가 정신적인 영주가 아니라 세상의 영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넌 부족장인 내 옆에 앉게 될 것이다.
가문의 한 아버지로서 말이다. 자, 어떠냐? 만족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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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열두 아들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에게 저주는 축복과 같으며 축복은 저주와 같습니다.
여러 명은 저주받았으나 선택받은 존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선택받았으나 사랑 때문에 저주받았습니다.
제가 그를 잃어버렸을 때 저는 그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이제 찾게 되자 난 그 아이를 다시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내가 생산한 자들의 무리에서 물러나 높은 자리로 올라갔고, 대신 이 아이가 내게 낳아준 아이들이 들어왔습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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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잘못된 야곱의 예견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야곱의 축복은 여호수아의 시대 이후에 집필된 것이므로 이미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예언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영리한 자들이 있지 않은가?
이런 말에 대해서는 그저 어깨나 한번 들썩거려 주면 그만이다.
우리가 임종을 맞는 아버지의 침상을 지켜보면서 그의 말을 직접 듣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이미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을 보고 역으로 진실의 선언으로 건네줄 경우, 다 알고 한 예언이므로 여기에는 오류가 없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바로 그런 까닭에, 한 예언이 실제로 있었음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바로 그 예언에 들어 있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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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7년을 내 곁에서 살았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또 다른 17년 동안 내 곁에서 살았다.
그 중간은 내가 굳어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격리된 특별한 자 또한 자신의 운명을 따라야 한 때였다.
그의 우아함 때문에 쫓아다니는 자들이 있었다.
어리석다. 그의 우아함은 영리함과 한 몸을 이루고 있어서 그녀의 정욕은 좌절하고 말았다.
여 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혹적이다.
그를 쳐다보려고 담과 탑으로 오르고 창문 밖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괘씸히 여겨 험담과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요셉의 활이 오히려 강하며, 그의 팔에 힘이 있었다.
영원한 분께서 그를 붙들어 주신 덕분이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면 너나없이 황홀해질 것이다.
그는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을 얻은 자가 아닌가.
그건 바로 주님과 인간의 호감을 동시에 얻는 것이다.
이는 아주 드문 축복이다.
대부분은 주님의 마음에 들거나, 아니면 세상의 마음에 들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정신은 그에게 우아한 중개의 특성을 선사했다.
그래서 주님과 세상 모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아들아, 이렇게 경고할 필요가 있느냐? 아니다.
네 영리함이 교만을 막아준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이것은 귀여운 축복이지만 가장 지고하며 엄숙한 축복은 아니니까.
보아라, 너의 귀한 삶은 이렇게 죽어가는 자의 눈앞에 그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였고 연주의 시작이었다.
이는 특별히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구원을 연상시키지만, 진정한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유쾌함과 슬픔이 하나로 뒤엉켜 내 가슴을 사랑으로 사로잡는다.
아이야. 너를 이렇게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오로지 너의 삶의 광채만 볼 뿐, 나처럼 그 슬픔까지 보지는 못한다.
이제 네게 축복을 내린다, 축복을 받은 아이야.
너를 내게 주셨다가 빼앗아가셨고 다시 돌려주신 후, 이제 나를 너로 부터 빼앗아가시는 영원한 분의 이름으로 나의 마음을 다해 네게 축복을 내리련다.
내 머리에 내려졌던 내 아버지들의 축복보다 네게 내리는 나의 축복은 한층 더 너를 높여 줄 것 이다.
지금 네 모습 그대로 축복을 받을지어다.
네게는 위로부터의 축복과 아래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축복이, 하늘의 가슴과 땅의 모태에서 솟아나는 축복이 함께 하노라!
축복을 내리노라, 요셉 네 머리 위에.
너로부터 나온 자들은 길이길이 요셉 네 이름을 자랑하리라.
그 노래가 온 사방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가리라.
그리고 네 삶의 유희를 들려주는 노래들은 매번 새롭게 흘러갈 것이다.
네 인생은 거룩한 놀이였고, 너는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나도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용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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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마지막 생각은 또다시 굴로 미끄러졌다.
그는 이중 굴, 조하르의 아들 에프론한테서 사들인 밭에 있는 그 무덤에 조상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했다.
"이건 내 명령이니”
그는 헐떡거렸다.
"그곳은 이미 값을 치렀다. 아브람이 히타이트 자녀들에게 그곳 무게에 따라 은 400세겔을 주고."
이 순간 죽음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발을 쭉 뻗고 침대에 쓰러졌다.
생명이 멈췄다.
이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명도 잠시 멈췄다.
잠깐 동안 숨을 안 쉰 것이다.
그러자 의사이기도 한 요셉의 집사 마이사흐메가 평온한 표정으로 침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멎어 있는 심장 위에 손을 얹어보고 벙어리가 되어 버린 입술 위에 작은 깃털을 올려놓고 유심히 살폈다. 작고 진지하게 생긴 입이었다.
깃털이 전혀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조그만 불꽃을 동공 앞에 흔들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자신의 주인인 요셉을 바라 보았다.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개로 유다를 가리켰다. 자신이 아니라 유다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량한 남자가 유다 앞으로 가서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되풀이하는 동안, 요셉은 얼른 고인의 침대로 다가가 죽은 자의 눈을 감겨 드렸다.
마이를 유다에게 보낸 건 그래서였다.
그런 다음 아버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대고 야곱을 생각하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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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네 아버지가 섬기신 신의 종들이다. 그리고 너의 종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가 저지른 못된 짓을 용서해다오.
네 동생이 말한 것처럼, 네가 지닌 권세로 우리에게 보복하지 말아다오!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 우리를 용서 했듯이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용서해다오!"
"아, 형제들, 형님들!"
요셉은 양팔을 벌리고 형들에게 몸을 숙였다.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마치 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기를 바란다니! 제가 어디 신과 같은 존재입니까?
물론 아래에서는 제가 파라오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라오는 신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그는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제게 용서해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여러분은 우리가 들어 있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요. 저는 여러분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한 이야기 안에 들어 있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실은 그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어떤 놀이가 벌어지는지 너무 많이 알았던 탓에 벌을 받았으니까요.
아버지의 입에서도 듣지 않았던가요? 아버지께서 절 축복하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든 건 그저 유희였을 뿐이며 제게 일어났던 일은 연주의 시작이었을 뿐이라고 하시지 않았습 니까.
그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분을 생각했을까요?
여러분과 저 사이에 일어났던 몹쓸 일을 기억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도 그 놀이 안에, 신께서 연출하신 그 연극 속에 계셨으니까요.
저는 철이 없어서 아버지를 방패 삼아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쁜 일을 하도록 부추길 수밖에 없었
습니다.
물론 신께서는 이 일로 좋은 결과를 만드셨지요.
제가 많은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조금은 철이 들어 성숙해지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용서가 거론되어야 한다면, 용서는 오히려 제가 여러분께 청해야겠지요.
이런 결과가 있기까지 여러분은 악역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제가 파라오의 권세를 빌어, 그것이 제것이라 하여, 저를 훈계하려고 사흘간 우물에 빠뜨린 여러분에게 복수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하여 주님께서 선으로 만드신 것을 다시 악으로 바꾸라는 겁니까?
천만예요! 웃지 않는 게 다행이죠!
단지 권세를 가졌다고 해서, 정의와 이성을 거역하여 그 권세를 이용하는 남자는 웃음거리가 되니까요.
그리고 이 남자가 아직은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다 해도. 미래에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미래를 기약하고 참는 겁니다.
자, 다들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신의 충고에 따라 우스꽝스러운 이집트로 돌아갑시다."
요셉은 형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들은 웃으면서 동시에 울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 손을 뻗어 그의 몸에 갖다댔다.
그 역시 이들을 어루만졌다.
이로써 신께서 창작하신 아름다운 이야기 요셉과 그 형제들 막이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