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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3일 오늘의 역사
2021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에 보관중인 방사성물질오염수 125만톤 바다 방류 결정
2019 임실 치즈산업 일으킨 지정환 신부(벨기에 출신) 선종 88세
2017 인터넷과 PC의 창안자인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테일러 세상 떠남(85세)
2015년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 별세
전후 독일의 대표적 지성인이자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귄터 그라스(Grass)가 13일(현지 시각) 독일 뤼벡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87세.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 숨졌다"고 애도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대표작 '양철북'으로 세계의 환호를 받은 게 32세인 1959년의 일이다. 노벨문학상은 그로부터 40년이나 뒤에 수여됐지만, 이미 그는 전후 독일의 행동하는 양심이자 유명 인사였다.
79세인 2006년 자전소설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출간하면서, 자신의 16세 시절 나치 친위대(Waffen-SS) 복무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폴란드 대통령을 지낸 바웬사가 그라스에게 주었던 명예 시민권을 박탈할 정도였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그는 '밤의 경기장'이라는 축시를 보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꽉 찬 관중석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2014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 철회-반발 전국 확산
2004년 서울 서소문로 입구 태평로에 첫 횡단보도 신설
서울 시청 앞 광장 남쪽 서소문로 입구 근처 태평로에 횡단보도가 새로 들어섰다. 광화문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세종로·태평로·남대문로 전 구역에서 동서를 가로질러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횡단보도이다. 이전에는 지하보도를 이리저리 꺾어 걸어야 반대편으로 갈 수 있었다.
왕복 10차로 넓은 도로에 과감하게 실선을 그은 이 횡단보도는 앞으로 서울도심의 교통환경이 보행자 중심으로 변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심으로 ‘국가상징가로’ 라고도 일컫는 광화문~숭례문~서울역 구간의 거리는 2.3㎞. 어른의 보통 걸음으로 30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그러나 이 길을 걸으려면 땅 밑으로 몇 번 오르내리는 짜증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넓은 도로는 차량이 차지하고, 보행자는 지하도로 피해 다니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민들이 쾌적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권리, 보행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1999년 시민단체 등의 노력으로 광화문 네거리 동서쪽 종로와 새문안로에 횡단보도가 설치된 것이 큰 전환점이었다. 작년 6월에는 신문로 새문안교회 앞과 흥국생명 빌딩 앞 육교가 철거되고 횡단보도가 들어섰다.
서울시가 도심에 시민광장을 조성하면서 주변의 보행 흐름이 하나 둘 연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횡단보도이다. 내년까지는 모두 20여개의 횡단보도가 새로 설치될 전망이다.
세종로와 태평로 곳곳에도 횡단보도가 만들어진다. 차도를 일부 축소하는 방법으로 보도를 넓히고 정비해 보행 네트워크도 구축한다. 서울시는 현재 기본설계를 진행하고 있으며, 8월쯤부터는 경찰과 협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2004년 주유소 `공짜 화장지`서 피부염 유발 유해물질 검출
한국소비자보호원은 “지난 2월 수도권 76개 주유소 판촉용 화장지를 검사한 결과, 이 중 절반인 38개 제품에서 형광증백제가 검출됐다.” 고 밝혔다.
형광증백제는 제품을 하얗게 하기 위해 처리하는 약품으로, 피부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며, 암을 일으킬 가능성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현행법은 미용 화장지나 종이컵 등에서 이 성분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판촉용 화장지에서는 또 피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포름알데히드 성분도 시판 중인 미용 화장지(4∼8)보다 많이(5∼31) 검출됐다.
2003년 인간 ‘게놈 지도’ 완성
2003년 4월 13일 인간 게놈 지도가 100% 완성됨됐다. 이로써 단백질로 이뤄진 기나긴 ‘소설’을 해독하는 생명의 ‘알파벳’을 인류가 완전히 손에 넣게 됐다.
이 알파벳들이 어떤 조합으로 어떤 의미를 만드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인간의 신비를 규명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전체 인류의 5%가 윌슨병, 고셔병, 다운증후군 등 유전자 결함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고통 받았었다. 그러나 완성된 게놈 지도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유전자 치료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이번에 게놈지도를 완성한 연구진은 새로 해독된 20번째 염색체의 염기서열이 당뇨병, 백혈병, 어린이 습진 같은 질병과 연관된 유전자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동안의 연구로 찾아낸 인간의 유전자는 모두 2만5000~4만 여개로 이 유전자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그 단백질이 체내에서 서로 상호 작용하여 인체의 신비한 생체 작용을 이뤄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은 성인병·암과 같이 유전병 외의 다른 질병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2002년 원로가수 현인씨 별세
‘신라의 달밤’ 등 국민적 애창 가요들을 남긴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씨가 2002년 4월 13일 별세했다. 현씨는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를 나와 일본 우에노음악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음대 교수를 꿈꾸다가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려 대중가수로 나섰던 한국가요 1세대이다. 굵고 남성적인 목소리를 심하게 떠는 특유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훤칠한 키와 외모, 그리고 호방한 성품으로도 인기높던 그는 1·4 후퇴 실향의 애환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 9·28 수복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을 비롯, ‘고향만리’ ‘비내리는 고모령’ ‘인도의 향불’ ‘불국사의 밤’ 등 숱한 히트곡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99년부터 이듬해까지 극장쇼를 재현한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해 전국 순회공연을 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2001년부터 당뇨로 투병해왔다.
그가 대중음악에 뛰어든 것은 1942년. 일본 유학을 마친 뒤 ‘성보악극단’에서 노래지도를 하다가 징용을 피해 황해·진방일·박단마 등과 ‘신태양극단’을 만들어 중국으로 건너갔다. 국내 데뷔는 중국에서 돌아온 1946년,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취입을 준비하던 그는 명동 시공관의 영화 ‘자유부인’ 개봉 행사에서 ‘신라의 달밤’을 처음 불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객들이 발을 구르며 놔주지 않아 내리 아홉 번을 부르고서야 무대를 내려왔다.
2001년 남아공 축구장 대형 참사로 43명 사망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엘리스 파크 축구경기장에서 2001년 4월 13일 43명이 압사하고 155명이 부상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남아공 경찰은 “축구경기장 안에서 29명, 밖에서 14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프레미어리그 카이저 칩스 대 올랜도 파이어리츠 경기 도중 일어난 이날 사고는 입장권을 구입하고도 관중석이 이미 만원을 이뤄 입장이 금지된 팬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경기장 둘레의 철제 울타리 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자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발생했다.
경기는 전반 종료 1-1 상황에서 중단됐다. 치열한 경합 끝에 2006년 월드컵 개최권을 독일에 내주었던 남아공은 이번 참사로 2010년 월드컵 유치 노력에 차질을 빚었다.
2000년 16대 총선 출구조사 발표와 실제 개표결과와의 큰 차이로 방송사 망신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여론조사 기관들의 투표자 여론조사 실패가 이번 16대 총선에서도 되풀이 됐다. MBC와 KBS, SBS는 2000년 4월 13일 저녁 6시 시보와 함께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 민주당이 원내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MBC-갤럽은 민주당이 127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고 KBS-SBS와 소프레스 등 4개 조사기관은 민주당이 132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 개표결과는 한나라당이 133석, 민주당이 115석을 확보해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되었다. 실망한 유권자들의 항의-비난전화가 각 언론사에 빗발쳤다. 방송사와 여론조사 기관은 1996년에도 개표결과와 무려 39곳이나 틀린 출구조사를 발표해 물의를 빚은 바 있어 `전과 2범`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2000년 4월 13일 전국에서 실시돼 총선사상 최저인 57.2%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역대 최저 투표율이었던 15대 총선의 63.9%에 무려 6.7%나 떨어지는 수치였다. 개표결과 한나라당이 133석으로 제1당을 차지했다. 민주당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115석을 얻었고 자민련은 17석을 확보하는데 그쳐 원내교섭단체구성에도 실패했다.
민국당은 2석, 한국신당은 1석, 무소속은 5석을 차지했다. 한나라당은 영남권 지역구 65석 중 64석을 석권했으며 민주당은 호남권 29석중 공천자 25명을 당선시켰고 무소속 4명도 모두 친여 무소속이어서 이번 선거에도 양당 대결속에 극심한 지역 몰표현상이 나타났다.
이번 선거는 선거법 위반건수가 15대의 4배인 2834건에 이르는 등 혼탁했고 후보자간 고소-고발도 빈발했다. 지역구에 출마한 현역의원 207명 가운데 86명(41.5%)이 낙선해 거센 세대교체 바람을 확인시켰으며, 특히 수도권에선 현역 86명 중 41명이 떨어져 47.6%의 낙선율을 기록했다. 16대 총선은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것도 특징이었다.
1999년 안락사를 도와준 의사 잭 케보키언, 2급 살인죄로 10~25년 징역형 선고
루게릭병 말기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준 잭 케보키언 박사(70)에게 2급 살인죄가 적용돼 10∼25년 징역형이 선고됐다. 미국 미시간주 오클랜드 순회법원 제시카 쿠퍼 판사는 1999년 4월 13일 “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글을 쓰거나 강의하고, 언론을 통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지만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며 검찰 구형대로 이같이 판결했다.
쿠퍼 판사는 환자에게 통제된 약물을 투여한 혐의도 인정, 3∼7년의 징역형을 추가 선고했다. 판결문이 낭독되는 순간 케보키언 박사는 전혀 동요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곧 수갑이 채워진 채 법정을 나섰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케보키언 박사는 최근 9년간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불치병 환자 130여명의 안락사를 도와주었다고 시인해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인물. 1998년 9월 17일 미시간주에서 루게릭병 환자 토머스 유크(52)에게 치사량의 약물을 투여,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또 이 장면을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 며칠후 CBS방송의 ‘60분’ 프로를 통해 방영토록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같은 혐의로 네 차례 법정에 섰으나 시한부 환자가 고통에 울부짖는 비디오 상영과 “안락사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라는 환자 유족들의 증언을 통해 매번 무죄 또는 미결정 심리 판결로 풀려났다. 그러나 결국 지난달 26일 배심원들은 케보키언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다.
1998년 복제양 돌리, 새끼양 보니 출산
1998년 미국 대형은행 네이션스뱅크와 뱅크아메리카 합병
1997년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세계 메이저골프대회에서 첫 승)
미국의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가 1997년 4월 14일 마스터스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세계 메이저 골프대회에서의 첫 승이었다.
우즈는 18언더파로 12타차의 압도적 우승을 확정지은 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얼과 뜨겁게 부둥켜 안았다. 콧대높은 마스터스는 이날 역사를 새로 써야했다. 사상최초의 흑인챔피언, 사상 최고스코어(18언더파 270타), 사상 최연소 챔피언(21세), 사상 최다점수차 우승(12타), 후반 54홀 사상 최고스코어, 중간 36홀 사상 최고스코어, 사상 최장타....
흑인인 아버지와 동양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우즈는 아버지의 엄격한 조력덕에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골프 신동` `골프 천재`라 불렸다. 우즈는 3살때 미국 TV의 깜짝쇼에 출연, 정규코스 9홀에서 48타를 쳐 시청자들을 기절초풍하게 했다. 우즈는 12세때 US주니어선수권 3연패, 18세때 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흑인으로 US아마오픈 우승, 최단기간 상금 1백만달러 돌파 등 일찌기 그 누구도 걷지 못한 길을 걸었다.
1995년 한국-이집트 국교 수립
1995년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발족
1993년 행정쇄신위원회 발족
1991년 지중해 최악의 원유 유출사고 발생
1991년 4월 13일 키프로스 선적 유조선 헤이븐호(10만9천톤)가 제노바시 근해에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켜 지중해 사상최악의 원유 유출사고가 발생했다.
헤이븐호는 전날 이탈리아 앞바다에서의 화재로 견인 중이었다. 전날의 사고로 이미 3만톤의 원유가 유출된 가운데 이날 폭발사고로 또 다시 10만톤의 원유가 바다로 흘러 극심한 환경오염 사태를 빚었다.
유출원유는 이탈리아 최대 휴양지인 제노바만 일대 10여㎢에 이르는 지역에 넓게 퍼졌다. 이와 관련, 기오르기오 루폴로 이탈리아 환경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불행한 일이지만 이번 위기는 지중해 최악의 생태계 재난`이라고 말했다. 한편 유럽 위원회를 비롯한 이탈리아 정부는 긴급방재 활동을 펼쳤으나 폭발과 함께 불이 붙은 원유가 수백㎡ 해상에 넓게 펴져 사고배에 접근을 못해 진화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 KBS노조, 서기원사장 퇴진-방송민주화요구 파업
1988년 전두환 전대통령 정계은퇴
1987년 4ㆍ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전국 방송망을 통해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5공화국 마지막 해인 1987년,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대학가 역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위의 열기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그러나 5공 정권은 민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 시민항쟁에 맞섰다. 당시 경찰은 전두환 정권의 4ㆍ13 호헌조치에 맞서 전국 20개 도시에서 개최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원천봉쇄했고 전국에서 3천8백31명을 연행했다.
그러던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 6월 시민항쟁의 불을 댕겼다. 6월 10일 마침내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은폐 규탄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것이 바로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근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에 참여하지 않던 일반 시민들까지 대거 길거리로 몰려나온 이 시위로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독재정권 연장을 꾀하던 5공 정권으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ㆍ29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983년 미국 시카고시장 선거에서 최초로 흑인 당선
1983년 을숙도 철새보호구역 60만평 해제
1982년 노인헌장 제정
1980년 박찬희, 한국프로복싱 사상 첫 5차방어 성공
1977년 한국-수단, 국교수립
1974년 북한 인민문화궁전 준공
1973년 개정약사법 발효
1968년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
1968년 4월 13일 서울고법 형사부가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을 열고 정규명, 정하룡 , 임석훈 등 3명에게는 사형, 조영수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 15명에 대해서는 1심판결을 모두 깨고, 형량을 줄이는 판결을 내렸다.
구 동독의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으로 알려진 `동백림사건`은 관련자인 임석진(명지대 조교수.철학박사)씨가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1967년 7월 8일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대학교수를 비롯,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의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공작단에 포섭되어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에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건국사상 최대의 정보사범사건이었다.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여 구속 107명, 학계-문화계의 저명인사 등 관련자가 194명에 이르렀다.
1966년 민주사회당, 주비대책위원회 구성
1966년 사이공 공항 베트콩에 피습
1961년 영화 오발탄 개봉
1959년 한 편의 소설이 유현목의 가슴을 쳤다. 전쟁 후 궁핍하던 한국 사회의 비극적 모습을 가장 리얼하고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 이었다.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절망감에 공감한 유현목은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제작자를 찾아나섰다. 하지만 “주제가 무거워 흥행이 안 될 것”이라며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 최초의 조명기사 김성춘이 사재를 털어 제작비를 대겠다고 나선 덕에 영화는 1959년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태프와 출연진도 최고 개런티로 출연하겠다며 영화 완성에 십시일반 도왔다.
그래도 제작비는 늘 부족해 필름이 생기면 찍고 떨어지면 쉬기를 반복했다.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당시의 사회 현실에 맞게 시나리오를 다시 손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촬영된 영화 ‘오발탄’은 1961년 4월 13일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무대는 북에서 피란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의 해방촌이었다. 영화는 심한 치통에 시달리면서도 박봉 때문에 병원조차 갈 수 없는 월급쟁이 철호와 그 가족을 하나하나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노모는 전쟁이 터지던 날 폭격의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가자, 가자!”를 외쳐댔고, 아내는 영양실조에 만삭이었다. 상이군인 출신의 동생 영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깡패였고 여동생 명숙은 미군들에게 몸을 팔았다.
철호는 이런 현실에서도 아등바등 살아보려 했으나 동생 영호가 은행강도를 하다 경찰에 붙잡혀가고 아내는 아기를 낳다 죽는 등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철호가 어느 날 온갖 고통을 암시하는 충치들을 한꺼번에 뽑아버리고 택시를 잡아탔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횡설수설하자 택시운전사가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군. 자기 갈 곳도 모르는…”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내용상으로만 보면 ‘오발탄’도 다른 궁핍한 시대의 문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에는 작가 이범선이 깔아놓은 복합적인 주제의 복선이 있었고, 영화에는 이를 리얼하게 살린 유현목의 뛰어난 연출이 있었기에 영화는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한 달 후에 일어난 5·16쿠데타는 ‘오발탄’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내용이 너무 어둡고 극중 노모(엄앵란)가 내뱉었던 “가자, 가자!”가 북한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이 상영을 전면 중단시킨 것이다. 상영금지는 27개월이나 계속되다가 미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가 ‘오발탄’의 출품을 요청한 덕에 1963년 8월 23일, 상영금지 딱지를 뗄 수 있었다
1959년 일본-북한 제네바서 재일동포 북송회담 개최
1949년 로마교황청 한국 승인
1948년 루마니아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1943년 카틴 숲 학살 사건 현장 발견
1940년 4월 13일 독일이 러시아 남부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들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것을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은 소련에 의한 폴란드인 학살의 증거라고 발표했지만, 소련은 나치에 의한 폴란드인 포로 학살이라고 반박했다.
1990년 당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Gorbachev)는 카틴 사건에 대한 소련의 잘못을 인정했고, 이후 공개된 당시 문서를 통해 1939년 폴란드로 쳐들어간 소련이 카틴 숲 근처의 수용소에서 학살한 2만1768명의 명단이 알려졌다. 당시 스탈린은 폴란드가 독립국을 만들지 못하도록 폴란드의 엘리트들의 처형을 지시하였다.
2010년 4월 10일 키틴 사건 70주년 기념식 방문차 러시아로 가던 중 레흐 카친스키(Kaczynski) 폴란드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이후 러시아와 폴란드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 사건의 책임이 구소련에 있음을 증명하는 비밀 서신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1941년 소련-일본 중립조약 조인
1941년 베오그라드, 독일군에게 함락
193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사망
1936년 소설가 최인훈 출생 -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친 `광장`
최인훈은 1936년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6·25 때 피란민으로 아수라장을 이룬 원산항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월남했다. 전쟁 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법과 문학의 갈림길에서 4학년 때 중퇴하고 문학을 평생을 업으로 받아들였다.
1958년 장교로 입대해 군 복무 중이던 1959년 ‘GREY 구락부 전말기’로 ‘자유문학’을 통해 데뷔했다. ‘광장’이 발표될 때도 그는 군인 신분이었다. 이후 ‘회색인’(1963),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 등을 발표하고 1970년대 들어서는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 ‘봄이 오면 산에 들에’(1977) 등을 발표하며 연극을 새 장르로 선택했다.
‘광장’이 원고지 600장 분량의 중편소설로 발표된 것은 ‘새벽’지 1960년 10월호에서였다. 6·25 전쟁 후 반공소설류가 이데올로기 문학의 정형처럼 굳어 있던 시절에 발표된 ‘광장’은 문단으로부터 “한국문학 사상 최초로 문단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로 다룬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광장’ 이후 최인훈에게 ‘전후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가 쏟아질 만큼 ‘광장’이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1934년 미국 전쟁채무 불이행국에 융자정지 결정
1919년 임시정부수립
1919년 4월 13일,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 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제정한 국가 기념일이다.
민주공화정부로서 국민주권을 만천하에 천명한 최초의 정부인 임시정부의 숭고한 법통을 기리고, 선열들의 순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날이다
1919년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 발생
1919년 4월13일 식민지 인도를 통치하는 영국의 야만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인도 시크교 성지인 암리차르시 황금사원 인근의 잘리안왈라 공원 바그 광장에서였다.
광장에는 1919년 3월에 제정된 영국의 인도 탄압법인 롤래트 법(Rowlatt Act)의 철폐를 요구하는 정치집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1만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으나 참석자 대부분은 호기심으로 참석한 인근 사원의 순례객들이었다.
1차 대전 때는 식민지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화정책을 펼쳤던 영국이 전쟁 종료와 함께 태도를 돌변, 인도 독립운동에 탄압을 강화하고 나서자 실낱같은 독립의 희망을 품었던 인도인들은 배신감에 분노했다. 전쟁중에는 영국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간디도 영국정부의 태도가 여기까지 이르자 영국 지배에 반기를 들고 비협력운동을 전개하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다.
영국군이 이날 비무장 인도인들에게 가한 무차별 사격은 379명을 숨지게 했고 1137명을 다치게 했다. 더구나 광장에는 출구가 하나 뿐이어서 피해가 컸다. 학살 사건 이후에도 영국은 인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만적인 형벌을 도입해 인도인들을 더욱 모욕했다.
1914년 영화감독 하길종 출생 -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1909년 하싯트 터키황제, 청년당원 학살
1906년 아일랜드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 출생
1901년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출생
1885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미학자 게오르크 루카치 출생
1838년 일본 정치가 고토 쇼지로 출생 -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1743년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출생
1742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초연
1695년 프랑스 우화작가 라 퐁텐 사망
라 퐁텐은 상파뉴 지방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26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결혼을 시켰으나 그는 35세 때 홀연히 가정을 버리고 단신으로 파리로 올라와버렸다. 라 퐁텐에게 명예나 지위, 이해 타산, 남의 평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어린애같은 청순한 마음과 자유로운 정신은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 품 파는 일 없이 일생 동안 당시의 유명한 고관과 귀부인들의 보호와 총애 밑에 살았다.
우화 제1집을 토해낸 것도 불혹(不惑)을 훨씬 지난 47세에 이르러서였다. 그 후 다시 10년에 걸쳐 제2집이, 그리고 그가 죽기 전 1년 전에 마지막 편인 제3집이 나왔다.
1609년 임해군 피살
1572년(선조 5년) 8월 14일,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임해군이 여섯살 되던 무렵,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1585년(선조 18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임해군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임해군의 성격이 방탕하고 포악했기 때문이다. 임해군은 왕명을 받고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으기 위해 함경도로 떠났다.
7월 23일,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회령에서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 끝에 풀려났다.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김희철 또한 왜란 중에 전사하였다.
임해군은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만하고 난폭하게 행동하였으며, 심지어 임해군이 부리는 시정잡배와 가노들 또한 오만방자하게 행동하여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거나 사소한 원한이 있는 자를 살해하는 등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대간과 삼사 사헌부가 임해군의 죄를 묻고 강하게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후에도 임해군과 정원군, 순화군은 끊임없는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의 처벌과 추국을 요청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진도에 안치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되었다.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 또한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교동으로 유배된 이듬해에 그를 지키던 수장 이정표가 강제로 독약을 마시게 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임해군의 노비가 증언함으로써 임해군이 목이 졸려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594년 낭트칙령 공포
1594년 4월 13일 앙리4세가 낭트에서 프랑스의 신교도에게 조건부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 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15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이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했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때부터 신교도도 비로소 공직을 가질 권리가 생기고, 예배와 관혼 상제의 집행, 유언의 등기 등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파리를 제외하고 어떤 지역에서든 공동예배가 가능해졌고 신교도의 최고회의·목사회·서임권 등도 공인됐다. 또한 칙령은 비밀조항으로 백 수십 곳의 도시에 신교도의 자치특권을 인정했다. 그로 인해 그 도시들이 신교도의 무장지역이 되어 반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신교 측은 지역을 제한받은 것이 불만이었고 가톨릭은 신교를 인정한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앙리 4세가 일생동안 네 번의 개종과 30여 차례의 암살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힘을 쏟은 결과 종교전쟁은 서서히 끝이 나고 프랑스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1685년 10월 18일,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는 결국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의 권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서 프랑스에 많이 살던 약100만 명의 신교도 중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근면한 상인·기사·공예인·군인이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보아야 했다.
1397년 흥인지문(興仁之門-현 동대문)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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