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14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러시아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일대에서 무차별 학살 시신 900여구 발견
2020년 북한 강원도 문천에서 단거리 미사일 발사
2019년 방탄소년단 노래 ‘작은 것들을 위한 시’ 뮤직 비디오 공개 37시간 37분 만에 유튜브 1억 뷰, 아이튠스 ‘톱 송’ 차트 1위
2018년 미국 하와이 와이파 지역 폭우 24시간동안 1,262mm(24시간 강우 최고기록)
2016년 일본 구마모토 현 진도6.5 강진, 22일까지 783회 여진 이어짐 사망 48명 2차 피해 사망 10명 실종 2명 부상 1,159명 이재민 9만여 명
2014년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무장세력 ‘보코하람’ 여중생 200여명 납치, 1인당 2000나이라(1만4천원)에 다른 나라로 팔아넘김
2011년 외규장각 의궤, 대여 형식으로 145년 만의 귀환
2011년 미국 오클라호마주 토네이도 발생 7개 주 강타 사망 최소 45명
2010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2010년 4월 14일 오전 1시쯤 아이슬란드 남부에서 빙하로 둘러싸인 에이야프얄라요쿨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연기는 6~11km 상공까지 치솟았고 화산재가 기류를 타고 인근 유럽 국가들로 퍼지면서 15일 영국·아일랜드·노르웨이에서 모든 공항의 항공기 이착륙이 금지됐다. 또 파리 드골 국제공항 등 프랑스와 스웨덴·덴마크·핀란드·벨기에·네덜란드의 주요 공항들이 폐쇄됐다. 화산재는 항공기의 엔진 고장을 일으켜 추락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다. 이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수천 편의 항공기가 결항되고 승객 수십만명의 발이 묶였다.
또한 화산 폭발로 주변의 빙하가 녹으면서 2.5m 높이의 급류가 인근 지역을 덮쳤다. 화산 폭발 이후 두 차례의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했으며, 아이슬란드 주민 800명이 대피했다. 에이야프얄라요쿨 빙하에서는 2010년 3월에도 빙하 밑에 위치한 화산이 폭발하면서 주민 600여명이 대피한 바 있다.
2010년 중국 칭하이에 7.1 강진 발생
위수 강진(2010.4.14) 中 칭하이성 강진 1만여명 사상(死傷)한 도시<자치주정부 소재지 제구진> 건물 85% 붕괴… ‘제2 쓰촨성 악몽’ 2010년 4월 14일 오전 중국 북서부 칭하이(靑海)성 위수(玉樹)장족자치주 위수현에서 규모 7.1의 지진이 발생, 6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 여명이 부상했다.
지면과 비교적 가까운 지하 33㎞에서 발생한 규모 7.1 지진에 이어 규모 6.3 여진이 잇따르면서 주택과 사찰, 주유소, 전봇대 등이 구겨지듯 무너졌으며 산사태와 도로 유실, 전력공급 중단 및 통신두절 사태가 초래됐다. 특히 지진으로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현지 가옥들이 대부분 붕괴했고 일부 학교 건물도 무너져 인명 피해 규모가 더 커졌다.
진앙은 위수현 정부가 있는 제구(結古)진에서 서쪽으로 50㎞ 떨어진 샹라슈(上拉秀)향 르마(日麻)촌인 것으로 확인됐으며 제구진의 경우 주택 85%가량이 무너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홈페이지에서 이날 오전 7시49분 티베트 창두(昌都)에서 북북서로 94㎞ 떨어진 곳의 지하 33㎞ 지점에서 규모 6.9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밝혔는데 해당지점이 위수현인 것으로 관측됐다.
강진에 앞서 이날 오전 5시39분에도 규모 4.7의 지진이 났으며 강진 발생 이후 오전 9시25분에는 규모 6.3의 지진이 발생하는 등 여진도 잇따랐다.
2004년 한국항공우주산업, 수출용 아파치헬기 동체1호기 출하
2004년 애국지사 강동석 선생 별세
애국지사 강동석(姜東錫·76) 선생이 14일 오전 5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경북 상주 출신인 선생은 1943년 경북 안동의 대한독립회복연구단 단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3월 일본 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려다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1999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4년 동해를 ‘동쪽 바다’로 적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공개
‘동방견문록’의 저자로 원(元)나라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1254~1324)가 활동했던 13세기에 서양인들이 동해를 ‘동쪽 바다(Eastern Sea)’로 불렀음을 시사하는 18세기 영국 지도가 발견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사료조사실장은 고(古)지도 수집가인 모경국씨가 최근 프랑스에서 입수한 이 지도를 2004년 4월 14일 공개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여행 지도’라는 제목의 이 지도는 가로 30cm, 세로 19cm의 크기이며, 1744년 영국의 지도 제작자인 해리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에서부터 아라비아·인도·중국·보르네오와 한국·일본까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고려 왕국(K. of Corea)’,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동해(Eastern Sea)’라고 표기했다.
이 실장은 “이 지도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의거했다는 점으로 보아 지금 전해지지 않는 ‘동방견문록’의 판본이나 그 당시의 다른 자료에서 ‘동해’라고 적힌 부분을 근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2004년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도가 철새 이동의 핵심경로라고 규명
2004년 국내 최초로 경인교회 직원들, `노동조합(노조)` 설립 신고서 제출
2004년 통일신라 7세 어린이 유골 발견, ‘인신 공양’ 제사 가능성 제기
2004년 4월 14일 1300년 전 통일신라에 어린이를 산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의 제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날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이 박물관 미술관 신축 예정지의 왕궁터 우물에서 7~8세 가량의 인골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고대의 어린이 유골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인골은 깊이 10.27m의 우물 안 뻘층에서 머리를 바닥 쪽으로 향한 채 거꾸로 박혀 있었다.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재현 교수는 “유골의 손이 머리보다 아래 쪽에 있었던 것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다면 떨어질 때 아직 의식이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 어린이가 추락사했을 가능성과 어떤 제사의식의 희생양이었을 가능성 두 가지 경우를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골 옆에서 머리가 위쪽으로 향한 소의 상반신 유골 등 동물뼈가 함께 출토됐고, 강돌로 이 우물을 인위적으로 메운 흔적이 드러났다”며 제사의 희생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2002년 하누치, 마라톤 세계기록 수립
남자마라톤 세계기록이 2년6개월 만에 깨졌다. 모로코 출신의 할리드 하누치가 2002년 4월 14일 벌어진 영국 런던마라톤에서 우승하며 2시간5분38초를 기록, 지난 99년 미국 시카고마라톤에서 자신이 세웠던 종전 기록을 4초 단축했다.
크로스컨트리, 1만m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모로코 육상연맹이 다른 선수와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1993년 조국과 결별했다. 미국 식당에서 접시를 닦아 생활하며 달리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만난 도미니카 출신의 이혼녀 산드라와 1996년 결혼하면서 그의 마라톤 인생은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하누치는 마라톤 선수였던 산드라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훈련을 한 지 1년 만인 1997년에 미국 시카고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기록은 2시간7분10초로 그해 세계 최고기록이었다. 1999년 같은 대회에서 2시간5분42초로 호나우두 다 코스타의 종전기록(2시간6분5초)을 23초나 단축하며 세계 최고기록을 작성했다. 마라토너로 성공한 것은 아내와 미국의 팬, 후원자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1998년 귀화 신청을 했지만 이민 절차 지연으로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00년 5월 시민권을 받았다.
2001년 일본 적군파 해산 공식 선언
일본의 극좌 게릴라 조직 `적군`의 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55·살인미수로 기소 중)가 2001년 4월 14일 지지자들에 보낸 옥중 성명을 통해 적군파의 해산을 선언했다.
중동을 무대로 테러활동을 벌이다 2000년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된 시게노부는 이날 도쿄의 지지자 집회에서 공개된 성명을 통해 “국제주의와 군사를 특성으로 했던 일본 적군의 해산을 통해 새로운 투쟁방법에 도전하겠다”며 합법적 활동으로 전환할 방침을 밝혔다.
그는 “세계는 변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투쟁은 불충분했고 잘못됐다”고 말했다. 이로써 1971년 공산 적군파 간부였던 시게노부 등이 해외 혁명거점 확보를 위해 조직했던 적군파는 완전히 활동을 중단했다.
1999년 나토 전투기 오폭으로 코소보내 알바니아계 난민 75명이 사망했다고 유고 정부 발표
1995년 배우 겸 가수 벌 아이브즈 85세의 나이로 사망
1992년 독일 적군파 테러 포기 선언
1986년 프랑스 작가 보부아르 사망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프랑스 작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1986년 4월 14일 사망했다. 소르본대에서 수학했으며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실존주의를 주도한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시작했으며, 1945년부터는 그와 함께 월간지 ‘탕 모테른’을 편집했다.
그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라 불리우는 ‘제2의 성’(1949)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조한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었을 때부터였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또 다른 역작 ‘레 망다랭’(1954)은 콩쿠르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 다양한 철학서적과 평론을 썼으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낸 여러 편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83년 대도 조세형 탈옥
대도 조세형이 1983년 4월 14일 서울형사지법에서 결심공판을 마치고 구치소로 넘겨지기 직전 다른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구치감벽의 환풍기통을 뜯고 탈주했다. 조씨는 당시 공범 4명을 포함한 다른 사건 피고인 15명과 함께 재판을 받은 뒤 법정에서 20km 가량 떨어진 서울구치소 피고인 대기 구치감으로 가 3층에 다른 피고인 3명과 함께 입감됐다.
조씨는 교도관이 잠시 2층으로 내려간 사이 문을 차고 밖으로 나와 한쪽 수갑과 포승줄을 푼 뒤 복도벽에 붙은 환풍기를 뜯고 붙어있던 2층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려 달아났다. 탈주 당시 조씨는 형사법정 대기실에서 교도관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 수갑을 느슨하게 해준 것을 이용해 구치감에서 왼손을 빼냈고, 포승줄도 풀 수 있었다.
조씨는 탈주 5일 만인 4월 19일 서울 장충동 민가에서 시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의 총을 맞고 검거됐다. 검거된 조세형은 청송교도소 1평짜리 감옥에서 15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98년 11월 16년 만에 석방됐다.
1982년 중국,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 반발. 미국에 항의 각서
1980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임명
1979년 정효주양 두번째 유괴
1979년 강원도 함백탄광서 화약폭발사고로 26명 사망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세종문화회관이 1978년 4월 14일 개관됐다. 불타버린 시민회관 자리에 1974년 착공해 4년 만이었다. 2백21억원의 공사비에 대지 5천6백평 지하3층 지상6층의 건물이었다. 4천2백석의 초대형 대강당은 1백만달러짜리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고 무대는 5백평이 넘는 회전식이었다. 건축양식은 한국의 옛 건축양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하여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서울특별시의 운영으로 ‘‘관료주의적인 운영이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1999년 7월1일 재정은 서울시가 지원하고 운영은 시가 아닌 민간이 책임지는 체제인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이는 세종문화회관 관장직이 `구청장 대기소`라고 불릴 정도로 예술과는 무관한 공무원으로 자주 교체되어 전문적인 기획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관주도 행사 위주로 운영되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1977년 부산-제주 카페리호 취항
1977년 4월 14일 우리나라 최초의 부산-제주간 카페리 취항식이 교통부장관, 국회교육위원장, 항만청장 및 제주지사와 제주도민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 연안 여객터미널 광장에서 거행됐다.
카페리는 정부의 제주도 종합관광개발과 여객선의 현대화촉진계획에 따라 동양고속 페리주식회사가 일본에서 12억원에 도입한 3천8백75t급 호화여객선으로 여객 5백78명, 승용차 1백대, 트럭 45대, 콘테이너 25개를 동시에 적재하고 부산-제주간을 일반여객선보다 4시간 단축된 10시간에 운항하는 전천후 쾌속여객선이다.
1977년 미국 정부, 재미영주권 외국인에 북괴지역 여행제한 철폐
1970년 남예멘 내전 종결
1967년 한국-스위스 무역협정 체결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국내에서 발효
우리나라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이 1967년 4월 14일부터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 우리나라는 72번째의 GATT 가입국이 됐다. 이에 따라 11일 재무부는 체코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 공산국가를 제외한 68개 가트 가입국과 우리나라와 별도의 무역협정을 맺은 자유중국 태국 비올빈 월남 캄보디아 5개국 등 총73개국에 대해 이날부터 최혜국 대우를 하고 가트 가입때 양허한 수입품목에 양허세율을 적용하도록 지시했다.
양허세율이 적용될 대상품목은 모두 60개품목인데 그중 17개 품목은 14일부터 세율을 인하하고, 41개품목은 현행세율 그대로 두기로했으며 2개품목은 세율의 인상한계를 미리 정해놓도록 했다.
1966년 `한국의 쿠베르탱` 이상백 박사 별세
우리나라 체육계의 선구자이자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였던 이상백 선생이 1966년 4월 14일 별세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창설해 초대 위원장을 지낸 그는 1946년 조선체육회이사장, 195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제2대 IOC위원을 역임하며 한국체육의 발전을 주도해 `한국의 쿠베르탱`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제15∼18회 올림픽대회에 한국대표단의 단장 또는 임원으로 잇달아 참석하며 특유의 `인물외교`를 통해 한국체육의 국제화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24년 와세다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일본농구협회를 결성(1930년)하면서 일본에 농구를 처음으로 보급해 `일본 농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교수·사회학과 주임·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사회학의 기틀을 세웠으며 조선왕조사 연구에 남다른 발자취를 남겼다.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1964년 대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평생을 체육인이며 학자로 보내다 이날 별세했다. 문화체육부는 이상백 박사를 1994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1966년 아프레 이라크 대통령 탑승기 사고로 사망
1966년 파키스탄 눈사태로 469명 사망
1964년 동파키스탄에 돌풍. 1천여명 사망
1963년 한국 독립운동가 민필호 사망
1962년 드브레 프랑스 내각 총사퇴. 후임에 퐁피두 수상
1961년 재일교포 북송 재개
1955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의전 병합
1948년 일본 오사카의 교포학교 등 19개교에 폐교령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
1930년 러시아 시인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 사망
러시아 시인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가 현실에서의 혁명과 예술에서의 혁명을 동시에 밀고 나가다 1930년 4월 14일 권총자살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의 시가 가슴이 불타는 매춘굴과 같고, 자신의 시어는 불길이 이는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창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런가하면 `내 심장은 꽃피는 5월까지 살아본 적이 없소. 내 삶에는 오로지 백번의 4월만 있을 뿐`이라는 시행들을 통해 여린 가슴을 내보이기도 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10대 시절부터 러시아의 차르 체제에 항거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의 형식파괴를 통해 새로운 시를 현실에 세우려고 했다. 그는 현실의 지배계급인 부르조아의 미학을 파괴하는 실험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인간의 내면을 토해냈다. 그는 레닌이 성취한 혁명을 찬양했지만, 혁명가들이 현실의 지배자가 된 상황에서 항상 더 많은 혁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정작 레닌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 미래파의 전통 거부와 기술 중시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동시에 독특한 시형과 격렬한 비유, 그리고 풍자와 내성이 나타나 있으며, 서정과 서사의 기적적인 결합이 엿보인다. 그는 그 후의 소련의 시인뿐 아니라 금세기 세계 각국의 시인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시에 신선한 영역을 개척해 놓은 시인이다.
1929년 제1회 모나코 그랑프리 대회 개막
1924년 미국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설리번 사망
1917년 폴란드의 안과의사이자 국제 공용어 에스페란토어 창시자 자멘호프 사망
1912년 타이타닉호 첫 출항서 침몰
1912년 4월 14일, 세계최대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2노트의 빠른 속도로 북대서양 유빙 사이를 헤치며 미국 뉴욕을 향해 항진하고 있었다. 영국 사우샘프턴을 출항한지 4일째, 배가 건조된 후 첫 출항이었다.
타이타닉호는 봄에는 빙산과 충돌할 위험이 있어 주로 여름에 이용되는 거리가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타이타닉호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코스를 고집한 것은 함께 대서양을 운행하는 경쟁사 큐나드 라인사(社)가 세계 최고속 신형 여객선 루지타니아호를 건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단시간으로 대서양을 횡단한 배에 주어지는 ‘블루 리본상’ 도 선주와 선장을 자극했다.
타이타닉은 4만6329t에 배 길이만 272m, 곧추 세우면 지상의 어느 빌딩보다도 높았고 시설도 초일류 호텔급으로 꾸며 ‘떠있는 궁전’ 으로 불렸다. 건조비도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4억 달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입됐다.
여느 때처럼 안개가 심했던 이날 밤 11시 45분쯤, 배가 뉴펀들랜드 동남쪽 640km 해상에 이르렀을 즈음, 북대서양을 떠다니는 거대한 빙산이 오른쪽 뱃전을 들이박았다. 충돌 당시의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승객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배는 오른쪽 앞부분 흘수선 아래로부터 찢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90m 크기의 구멍이 뚫려 3시간 만에 3,950m의 해저 속으로 가라앉았다. 구명보트도 승객수의 절반 밖에 없었다. SOS를 수신한 인근의 여객선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 부랴부랴 771명을 구조했지만 1,513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907년 14년간 장기 집권한 아이티 대통령 장 클로드 뒤발리에 출생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막
1900년 4월 14일 20세기의 개벽을 알리는 '파리만국박람회'가 개막됐다. 200일 동안 파리 샹 드 마르 공원에서 열린 박람회에는 세계 25개국의 국가관이 세워졌고, 무려 4,000만 명의 관객이 신 문명과 교유했다.
박람회에서는 '움직이는 보도'가 처음 선보였고 토키영화가 상여됐으며 1만 개의 전등이 밤거리를 밝혀 20세기가 전기의 시대임을 예고했다. 무엇보다 이미 19세기 말에 만개하고 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아르누보' 예술이 곳곳에 선보여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건물구조는 최신의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져 견고함을 자랑헸고 미술기획전에는 출품작만 5,000여 점이 전시됐다. 드가, 마네,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도 기획전에 이름을 등재했고 19세의 피카소도 스페인관에 그림 한 점을 내걸었다.
박람회장에는 조선정부가 마련한 '대한제국관'도 설치돼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알렸다. 사각형 건물에 기와를 얹은 모양의 대한제국관은 프랑스 건축가 페레가 설계하고 조선 정부가 법부고문으로 파견한 프랑스인 크리마지가 건물을 지었다. 도자기, 칠보공예, 장롱, 악기 등이 전시 판매됐고 폐막 뒤에는 박물관에 기증됐다. 이외에도 서양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고종황제 어진과 중추원 의관 민상호의 초상화도 출품됐다.
1889년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출생
1875년 일본 입헌정체 수립 공포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극장에서 피격(다음날 사망)
1702년 “백두산 화산 폭발” 조선시대 네 차례 기록
“정오께 천지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붉고 노란 불길이 먹구름과 더불어 솟아나는데 유황내가 코를 찌르고 그 열기가 난로같았다. 이튿날 일어나보니 회우(灰雨·잿비)가 산야를 덮어 별천지 같았다. ” 1702년(숙종 28년) 4월 14일, 백두산에서 폭발한 화산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문헌상에는 백두산 화산폭발이 1413년·1597년·1668년·1702년 네 차례 기록돼 있지만 지질학자들은 277만년 전 이후 모두 358회나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때 ‘해동성국’으로까지 불렸던 발해가 거란 침공 불과 1개월 만에 쉽게 무너진 원인을 백두산 화산폭발과 이에 따른 기후의 한랭화로 해석한 일본 학자의 주장이 몇년 전 국내에 소개돼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에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었고, 화산재가 약 1000km나 떨어진 일본 혼슈 북부 및 홋카이도 일원에까지 날아가 약 1∼5cm 쌓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1592년 (선조 25년) 일본도요토시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는길을 내어 달라는 구실로 양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세길로 나누어 북쪽으로 쳐들어 왔고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한양을 점령하였다
당시 선조는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육전에서와 달리 해전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이 계속하여 승리하고 전국에서 의병과 관군, 명나라 연합군이 일본군과 전투에서 크고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일본근운 경상도 해안까지 밀려나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벌이게된다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지만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철수하여 7년간에 걸친 전쟁이 끝이 났다
1458년 해인사 대장경 50 필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