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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인도 뭄바이 45℃ 폭염으로 야외행사 중 13명 열사병으로 사망
2023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관광 지역 화재 발생 16명 사망 9명 부상
2022년 북한 동해안으로 미사일 2발 발사
2020년 칠레 소설가 루이스 세폴베다 코로나 19로 세상 떠남(71세)
2018년 영화배우 최은희 세상 떠남(92세)
2016년 WBA 슈퍼페더급 전 챔피언 최용수(44세) 은퇴 13년 만의 복귀전 승리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世越號 沈沒 事故)로 304명 사망 또는 실종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소속의 인천발 제주행 연안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었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다. 그날 8시~9시쯤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과 여러 승객들은 가만히 있는게 안전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안내방송을 듣고 대피하지 않았다. 몇 분뒤 세월호가 심하게 기울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승객들과 학생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질서를 지키며 아이들, 여자 순서로 대피하고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했다. 결국 세월호는 많은 사람들을 태운채로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2009년 북한 원자력기구(IAEA) 검증팀 추방
북한 로켓 발사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성명 채택에 반발, 6자회담 불참과 불능화한 핵시설 원상복구를 선언한 북한이 2009년 4월 16일 핵시설에 설치했던 봉인을 제거하고 감시카메라 작동을 중지하는 등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중단한 것은 물론 불능화작업을 감독해오던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팀을 추방했다.
북한에서 IAEA 검증팀으로 활동해온 3명의 전문가는 이날 항공편으로 북한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로써 2007년 7월 북한이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한 뒤 불능화 작업을 모니터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간 IAEA 검증팀은 1년 9개월만에 북한에서 나오게 됐다. 앞서 북한은 2008년 9월에도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지연하자 불능화한 핵시설 원상복구를 주장하며 미국을 압박했었다.
당시 북한은 검증팀을 추방하지 않은 채 이들이 핵시설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가운데 봉인 제거, 감시카메라 작동 중지 등 핵시설 원상회복 조치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도록 하는 ‘스피커’로 검증팀을 활용했다. 당시 북한의 행동이 대미(對美)협상용임을 드러냈던 것. 하지만 이번의 경우 북한은 곧바로 IAEA 검증팀을 내쫓았다. 뿐만아니라 IAEA 검증팀과 함께 영변 핵시설에서 활동해왔던 미국 정부 관계자 4명에 대해서도 북한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뿐만아니라 북한은 불능화 작업을 중단한 데 이어 앞으로 불능화된 시설을 원상복구하는 절차를 하나씩 밟아가며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겨냥한 압박수위를 점차 높여갈 것으로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불능화조치에 따라 수조에 넣어 보관해오던 6천500여개의 폐연료봉을 다시 꺼내 재처리 시설에 넣고 이를 가동,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에 들어갈 경우 추가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북한의 플루토늄 재생산은 그동안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해왔던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6자회담 참가국들로선 ‘소망스럽지 않은 상황’ 이 아닐 수 없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불능화한 영변핵시설을 완전복구하는 데까지는 1년 안팎이 걸리지만 폐연료봉 재처리 착수까지는 1~2개월이면 충분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009년 러시아 한국학 대부 미하일 박교수 별세
러시아 내 한국학의 대부이자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미하일 박(한국명 박준호) 모스크바 국립대 공훈교수가 2009년 4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1918년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현(縣)에서 고려인 2세로 태어난 미하일 박은 1930년대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시베리아의 여러 도시를 떠돌았다.
1938년 아버지(니콜라이 박)가 간첩 혐의로 소련 당국에 의해 처형되고, 형도 체포되어 복역하는 등 가슴 아픈 고려인의 이주사(史)를 한몸에 간직한 살아 있는 역사였다.
그는 전(全) 소련 고려인협회 초대 회장으로 고려인의 단합과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타계 직전까지도 명예회장으로서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의 우호협력을 위해 힘썼다.
1947년 모스크바 철학·문학·역사대학(MIFLI)에서 김옥균(金玉均) 등 급진개화파를 비판한 논문 〈19세기 후반 조선정치사 개요〉로 박사 학위를 받고 1949년 모스크바대 교수로 부임한 미하일 박은 학문 활동에도 커다란 족적(足跡)을 남겼다.
그는 1959년 《삼국사기》〈신라본기〉의 러시아어 번역 발간을 시작으로 《삼국사기》 번역에 착수하여 2002년 84세 고령에 전체를 완역했다. 그는 또 이순신 장군 연구에도 남다른 관심을 두면서 2004년에는 ’임진왜란(1592~1598 일한전쟁)에 관한 러시아 역사가들의 서술’이란 제목의 연구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고대사회를 '노예 소유제'로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스탈린주의에 반대하고 한국 고대사회를 국가 관료제 중심의 귀족적 성격을 가진 '초기 봉건사회'로 규정했다. 또 "북한의 연구는 '지시'와 '교시'에 얼마나 맞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됐다"며 "북한 사학의 주요 특징은 교조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2003년에는 러시아 동료 교수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고구려가 한민족이 세운 국가라는 것은 세계사의 엄연한 정설"이라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미하일 박은 1991년 모스크바대에 한국학 국제학술센터를 설립하고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1997년 모스크바국립대 최고학술상(로모노소브상)을 비롯, 옛 소련 및 러시아 정부로부터 명예훈장 등 10여개 메달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1992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9년 KBS 해외 한민족상을 수상했다. 장례식은 18일 모스크바대 교정에서 열렸고, 묘소는 모스크바 고려인 전용묘지에 마련됐다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으로 32명이 사망.
미국 버지니아 블랙스버그의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교내 기숙사 웨스트 앰블러 존스턴홀과 공학관 노리스홀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이다. 범인은 한국 국적의 유학생 조승희로 조씨는 사건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첫 번째 총격은 4월16일 오전 7시15분이었다. 당시 조씨는 기숙사에 있던 에밀리 제인 힐셔의 방에 들어가 총으로 저격했다. 총소리를 듣고 나온 기숙사 사감 대학원생 라이언 클라크마저 총으로 쏴 살해한 조씨는 현장을 벗어났다.
약 2시간이 흐른 9시40분. 조씨는 노리스 홀에 도착해 밖으로 통하는 문 3개를 사슬로 감아 자물쇠로 잠갔다. 출구를 봉쇄한 뒤 2층으로 올라간 조씨는 빈 강의실에 들어가 주머니에 총탄을 채워 2층 복도를 돌며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곧 206호 강의실로 들어간 그는 총으로 학생 7명을 살해, 3명에 부상을 입혔고 자신을 막아선 교수도 살해했다. 이후 조씨는 복도를 다니며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는 207호에서 강의 중이던 강사 제임스 비숍을 살해한 뒤 그곳에 있던 학생 4명도 살해했다.
조씨는 총 4곳의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총격을 가했고 30명을 살해, 29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조씨는 오전 9시51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9분간 총 174발의 총탄을 난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사건은 기숙사에서 살해된 이들까지 합하면 총 32명이 숨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2003년 세계보건기구(WHO), 사스(SARS)유발원인이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발표
2003년 유엔, 국한 인권 규탄안 채택(찬성28, 반대10, 기권14, 한국은 불참)
2003년 중국, 고구려 장천 1호 고분 도굴한 조선족 3명 사형집행
2001년 이봉주선수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
한국 마라톤의 ‘대들보’ 이봉주 선수가 2001년 4월 16일 제105회 미국 보스턴마라톤을 2시간9분43초의 기록으로 제패, 영예의 월계관을 머리에 썼다. 한국인의 보스턴마라톤 제패는 서윤복(1947년), 함기용(1950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이날 보스턴 상공에는 51년 만에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처음부터 선두그룹을 이룬 이봉주는 40km 지점부터 독주하기 시작, 2위 실비오 구에라(에콰도르)를 24초 차이로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케냐의 대회 11연패를 저지한 이봉주는 2000년 12월 일본 후쿠오카마라톤 2위에 이어 세계 최고 권위의 보스턴대회를 제패, 시드니올림픽에서의 부진(24위)을 말끔히 씻었다
1999년 한국-카타르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8년 세계 최고령 할머니 마리 루이스 메이외르 별세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캐나다의 마리 루이즈 메이외르 할머니가 16일 117세로 별세했다고 딸 올리브 테리앵이 밝혔다.
지난해 9월 프랑스의 잔 칼망 할머니가 122세로 사망한 이후 최고령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메이외르 할머니는 1880년 8월 29일 퀘벡주 카무라스카에서 출생했다.
메이외르 할머니는 자녀 10명, 손자.손녀 85명, 증손 80명, 현손 57명, 5대손 4명을 두었으며 자녀중 딸 셋과 아들 하나가 생존해 있다. 이중 온타리오주 바리에 살고 있는 큰 딸은 89세다.
할머니는 지난 88년 107세의 나이에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지팡이하나에 의지, 걸어서 니피싱 매너 양로원에 들어왔다.
1996년 한미정상회담서 한반도 3원칙 선언
김영삼 대통령과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1996년 4월 16일 제주도서 정상회담을 갖고 그동안 북한이 집요하게 요구해오던 미-북 평화협정 체결 주장과 관련 한반도 평화문제에 관해서 미국은 북한과의 직접 협의를 일절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날 양국 정상은 ▲한반도 평화 문제와 미-북 양자간 대화 문제는 분리하여 처리한다 ▲한반도 평화문제는 미국이 앞장서지 않고 한국이 주도한다 ▲미국은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해서는 일절 북한과 직접 협의하지 않는다는 3원칙에 합의했다.
한-미 정상이 합의한 원칙은 내용상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나 앞으로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 유지 및 통일 등 한민족의 장래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의 뜻에 어긋나게 북한과 직접 협의를 진행하지 않을 것임을 다시 분명히 한 것이다
1992년 조선일보 광주공장 준공식
1989년 전자통신연구소 초고속 갈륨비소 반도체 개발
1989년 김봉준 WBA 미니멈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7년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창설
미사일기술통제체제 (MTCR : 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가 1987년 4월16일 미국의 제안에 의해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영국 미국 등 7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비공식 협정형식으로 창설됐다.
MTCR은 1970년대 개발도상국들의 미사일 개발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1985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국가안보 결심명령서 제70호`를 통해 탄도 미사일 확산방지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면서 처음 구상됐다.
MTCR은 일종의 미사일 확산방지를 위한 규범적 차원의 약속체계다. 공식적인 국제조약이나 협약은 아니며 법적인 효력도 각국의 국내법에 따른다. 처음엔 `핵무기 운반 미사일`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1993년 1월 이후 `모든 대량파괴무기 운반용 미사일`까지 확대됐다. 2001년 현재 회원국은 33개국이며 회원가입은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1년 3월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특별회의에서 회원으로 정식 가입됐다.
1982년 한국, 아티과(과테말라) 마부다 외상 공동성명발표
1982년 중국, 소련 국경무역 20년 만에 재개
1981년 국방부 북한 이녹재 하가 귀순 발표
1980년 국내 최초의 양수발전인 청평양수발전소 1,2호기 준공
1973년 한국미술 2000년전 개막
1972년 설국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살
그는 2세·3세 때 각각 부모를 잃었고, 곧 하나뿐인 누나도 그의 곁을 떠났다. 16세 때엔 할아버지마저 백내장으로 눈이 멀어, 그의 소설에선 자주 우수에 젖은 서정성과 미화된 죽음이 묻어나왔다.
1972년 4월 16일 오후6시, 일본적 미학을 추구했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 제자이기도 한 미시마 유키오가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자살한 지 1년 5개월 뒤였다.
1926년에 반(半) 자전적인 소설 ‘이즈의 무희(伊豆의 踊子)’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가와바타는 1948년 ‘설국(雪國)’을 발표, 작가로서의 존재를 뚜렷히 했다. 1968년에는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아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세계에 알려졌었다.
특히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제펜클럽대회를 유치(1957년)하고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노력했다. 데뷔 시절의 무용가 최승희를 일본에 알리는데 도움을 준 그는 1951년 최승희를 모델로 한 소설 '무희'를 발표하기도 했다.
1971년 호남 통혁당 재건 간첩단 검거
1970년 미,소 간 제1차 SALT(전략무기제한협상) 회담 개최
1966년 한국-미국 정상회담서 ‘한반도 3원칙’ 선언
1965년 한일협정 반대데모로 서울시 대학 휴고
1964년 로디지아 독립운동
1963년 라오스 3파 휴전 합의
1963년 조흥은행 본점 건물화재 전소
1959년 한국-이탈리아 공관 대사급으로 승격
1953년 문화인 등록령 공포
1948년 서구 16개국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조약 조임
1934년 일본 나가사키 화재
1930년 동아일보 제3차 무기정간
1917년 레닌 봉인열차타고 귀국(4월 테제 발표)
1917년 4월 16일 깊은 밤,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러시아 혁명지도자 레닌이 포로교환의 조건으로 러시아와 교전 중이던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 10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같은 해 일어난 2월 혁명으로 지주-부르조아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간의 대립이 첨예하게 맞서던 러시아였다.
다음날 4월 17일 오후 개최된 볼셰비키 회의에서 레닌은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그 내용인 즉,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전쟁을 계속하고자 하는 ‘임시정부 타도’,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 등이었다.
이날 레닌이 발표한 연설의 혁신성을 이해하지 못한 청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오히려 오랫동안 계속된 망명생활로 천재 레닌이 바보가 됐다고까지 비아냥댔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일 후 4월 27일. 볼셰비키와 임시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천재적 혁명지도자 레닌은 제 지위를 찾아갔고, 이에 ‘4월 테제’에 찬성하는 지지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4월 테제로 촉발된 10월 혁명은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으나, 그들이 타도한 황제보다도 훨씬 무자비한 공산당의 독재가 향후 70여 년 동안 계속됐다.
1898년 조,청 국경분쟁에 ‘백두산 정계비 조사’ 지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간도(間島·지금의 중국 지린성 옌볜자치주)에서 조선인과 청나라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자 1712년(숙종38년) 청(淸)의 요청으로 천지(天池) 동남쪽 4km 지점에 양국 간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백두산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진다. 양국이 함께 백두산을 답사한 뒤 결정했다고는 하지만 청이 일방적으로 그은 경계였다.
청계비에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으로 정계를 삼는다”고 씌어졌다고 해서 간도 들판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생활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인들에게 토문강은 쑹화(松花) 강 상류였기 때문이다. 간도는 두만강과 쑹화강 사이에 위치한 평원. 하지만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해 ‘정계비’는 훗날 양국 간 영토분쟁의 불씨가 된다. 1881년 청이 간도개척에 본격 나서고 두만강 북쪽에 있는 조선인들을 소환하라고 조선에 요구하면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다. 정계비 주변을 답사하고 토문강이 쑹화강 상류임을 재차 확인한 조선은 청과 이른바 ‘감계담판(勘界談判)’을 시도했으나 서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1897년 함경북도 관찰사가 간도문제를 시급히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간도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정부는 1898년 4월 16일 함경북도 경원(慶源)군수 박일헌 등을 보내 정계비와 토문강 문제를 조사하도록 재차 지시한다. 답사대가 보내온 보고도 마찬가지였다.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것이다. 청조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1902년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간도 주민들을 우리 국적에 올리는 초강수를 두면서 간도를 사실상 우리 영토로 편입했으나 1909년 일본이 청으로부터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의 소유권을 청에 넘기면서 간도는 다시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됐다.
1877년 러시아-루마니아 동맹조약 체결
1867년 미국 비행기 제작자 라이트 출생
1844년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 출생
1828년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사망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1828년 4월 16일 프랑스 보르도에서 82세로 사망했다. 생전에 빛과 어둠이 수시로 교차되는 삶을 살았던 고야는 스페인의 벽촌에서 태어나 1798년 궁정 수석화가로 화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차지했다.
일생동안 초상화나 인물화를 그린 그의 작품경향은 크게 두가지로 대별된다. 전기 작품은 주로 후기 로코코 풍의 정통성에 충실한 작품이 주조를 이뤄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그렸으나 후기 작품은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점차 악마적 분위기가 주조를 이뤘다. 청각을 잃을 정도로 크게 앓은 개인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스페인 침입 이후 나타난 민족의식 때문이었다.
특히 연작판화 `전쟁의 참화`(1810-1814)에는 82장의 흑백 에칭에 살육, 광기, 폭력, 허무같은 원초적 주제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그림을 포함한 후기 고야의 그림에는 스페인 특유의 니힐리즘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786년 영국 항해가 탐험가 존 프랭클린 출생
1446년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사망
958년 과거제 실시
69년 로마제국 황제 오토 자살
제7대 로마제국 황제 오토가 69년 4월 15일 자살했다. 오토는 전임 황제 갈바를 살해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그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게르마니아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칼로 가슴을 찌르고 자살했다.
게르마니아군 7개 군단 10만여명이 남하하자 오토는 2만명이 채 안되는 근위대와 검투사들로 이에 맞서게 했다. 게르마니아군의 라인군단은 오토를 부정했으나 발칸반도에 있는 도나우군단과 에스파니아의 제7군단은 오토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들 군대가 로마로 돌아오기전 라인군단이 이탈리아 북쪽 포강에 다다르자 오토는 할 수없이 근위대와 검투사들을 전선에 내보내게 된 것이다. 1차 베드리아쿰 전투였다. 오토는 전투에서 패하자 도나우군단이 곧 당도한다는 신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택했다. 즉위 3개월만이었다.
69년 제8대 로마제국 황제 비텔리우스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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