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17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인도 나비 뭄바이 야외 시상식 행사 최소 13명이 폭염에 인한 사망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나비 뭄바이에서는 국가 후원의 한 야외 시상식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사회에 공헌한 복지사 등에게 상을 주기 위한 자리였으며, 아미트 샤 인도 내무장관을 비롯해 고위 정치인들이 다수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 약 200만 명이 몰렸다고 전했으며, 문제는 날씨였다.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행사가 진행될 때 기온은 최고 38도까지 치솟았고, 군중은 최대 5시간 이상 땡볕에 노출돼 있었다. 그 결과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탈수와 열사병에 걸린 인원은 약 600명, 이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50명,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은 13명에 달했다.
2022년 민주당의 국회 검찰수사완전박탈 추진에 반대하여 김오수 겸찰청장 사표
2019년 진주아파트 방화 흉기난동 살인 사건
2019년 4월 17일 새벽 4시 25분경,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의 가좌주공아파트 303동에서 4층 406호에 거주하던 범인 안인득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뒤 칼 2자루를 가지고 집 밖으로 나와 비상계단에서 화재로 대피하는 아파트 주민 10명과 관리사무소 직원 1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의 주민을 죽이고 6명에게 직접적으로 자상을 입혔다
2017년 검찰 박근혜 전 대통령 기소,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 피고인 박근혜의 18개 혐의 중 16개 혐의 유죄 판단(무죄 2 혐의는 삼성 관련) 징역 24년 벌금 180억원 선고(2018.4.6.)
2016년 에콰도르 진도7.8 강진 200여 차례 여진 희생 577명 실종 163명 이재만 2만3,500명
2015년 영화 ‘어벤져스2’ 제작진 방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출연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50·아이언맨), 마크 러팔로(48·헐크), 크리스 에반스(34·캡틴 아메리카), 수현(38·닥터 조)이 17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20분 분량의 특별 편집본을 공개한 뒤 조스 웨던(51) 감독은 “이번에는 각 영웅들 캐릭터를 좀 더 알리고 심화하는 데 집중했다”며 “마포대교 뒤로 보이는 여의도의 빌딩 능선은 최고였다. 촬영을 도와주고 환대한 한국의 관객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이언맨3’ 때문에 한국에 왔을 때 ‘강남 스타일’ 말춤을 추다 바지 지퍼가 내려가 당황했다”며 “오늘은 밀린 쇼핑을 해야 하니까 빨리 끝내자”고 농담도 던졌다. ‘설국열차’로도 기억되는 크리스 에반스는 “한국 팬들은 늘 따뜻하게 맞아줘서 고향에 온 기분”이라고 했다. 마크 러팔로는 수현을 향해 “나보다 키가 커서 늘 우러러보며 촬영했다. 훌륭한 배우”라고 했다.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울트론에 맞서 싸우는 영웅담을 그린 이 영화는 지난해 봄 서울 마포대교·세빛섬·상암동·강남대로·문래동 등에서 촬영해 화제를 모았다. 전체 촬영분의 30%가 한국인 이 영화는 북미(5월 1일)보다 빠른 23일 국내에서 개봉한다. 이날 공개된 영상에는 블랙 위도우(스칼릿 조핸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강남대로를 질주하는 장면,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주우며 뒤치다꺼리를 하는 장면 등이 있었다. 족발집·당구장 등 한국 간판들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대감을 반영하듯 예매 점유율은 75%(27만명)에 이른다. ‘1000만 관객은 따놓은 셈’이라는 게 영화계 관측이다.
2015년 ‘한은 독립’ 헌신한 김건 전 한은 총재 별세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988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17대 한은 총재를 역임했다.
김 전 총재가 취임 첫해 이끈 서명 운동 이후 한은 독립 여론이 조성됐으며, 이 여론은 1997년 말 한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이다.
김 전 총재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51년 한국은행에 입행해 조사제1부장과 이사, 부총재와 은행감독원장 등을 거쳤다. 44년간 한은에 근무한 정통 한은맨이다.
고인은 재임 중 정부와 각을 세우면서도 격동의 1980년대에 부임한 한은 총재로는 유일하게 4년 임기를 채웠다. 총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국은행 고문으로 있다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2011년 '베르사유의 장미' 日 애니메이션 감독 데자키 오사무 별세
만화영화 '베르사유의 장미' 등을 만든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 데자키 오사무(出崎統·68)씨가 17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는 1970년 '내일의 죠'(한국명 '도전자 허리케인')로 데뷔한 후 '보물섬' '에이스를 노려라' 같은 히트작을 내놓았다. 빛을 생생하게 투사시키는 '투과광 기법', 화면을 급전환한 뒤 잠시 멈춰 주의를 환기시키는 '하모니 기법' 등 새로운 애니 기법들을 개발했다.
특히 '내일의 죠' '베르사유의 장미' '보물섬' 등은 한국 TV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얻었다
2011년 중국 광둥성 폭우 강풍 우박 동반한 돌풍 사망 17명 부상 153명 가옥 1만여 채 파괴
2010년 조계종 스님 1,000여명과 신도 1만여 명 ‘4대강 생명살림 수륙대재’ 봉행
2004년 제15대 국회의원 지낸 이신행 전(前) 기산 부회장 별세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신행(李信行·60) 전 기산 부회장이 17일 오전 1시15분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이 전 의원은 기아자동차 부사장을 지냈고 기산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사회복지법인 이웃사랑실천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2004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저항운동단체인 하마스 최고 지도자 란티시 암살
팔레스타인 저항운동단체인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 압델 아지즈 란티시가 2004년 4월 17일 저녁 이스라엘군 헬기의 미사일 공습으로 사망했다. 란티시는 이날 경호원들과 승용차를 타고 가자지구 셰이크 라드완 마을 인근을 달리다가 이스라엘 헬기의 공격을 받았다. 란티시는 피격 후 중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5분 만에 숨졌다.
란티시는 전달 22일 하마스의 창설자인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암살당한 뒤 최고 지도자로 선출됐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투쟁을 선언했었다.
야신에 이은 란티시 암살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만명의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외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란티시 표적 암살 공격이 성공한 뒤 “야신을 살해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003년 러시아 마피아 부산서 권총유혈사태
2003년 4월17일 밤 부산 영도구에서 발생한 러시아인 권총 저격 사건으로 숨진 나우모프 바실리(54)씨는 러시아 선박회사 콘코리아서비스 사장으로 선박 37척을 소유한 거부(巨富)로 드러났다.
경찰은 “바실리씨가 지난달 13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슬로베니아 국적 위조여권으로 한국으로 입국한 것으로 미뤄 범죄조직과의 갈등 가능성이 추정된다”며 “큰 이권이 걸린 선박사업과 수산물 수출입 사업은 러시아 마피아들의 중요한 자금줄”이라고 말했다.
또 경찰과 국정원은 바실리씨가 사업 과정에서 러시아 현지 마피아들과 깊이 연관되었고 이권문제로 마피아의 중간 보스를 살해한뒤 지난해까지 일본에 피신해 있었다는 첩보를 입수, 관련 내용 확인에 착수했다.
경찰은 범행현장에서 권총 2정과 탄창 2개, 실탄 14개를 발견했다.
바실리씨는 머리에 5발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한편 저격 당시 복부와 엉덩이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은 그보즈드 니콜라이(39)씨는 바실리씨의 경호수행원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범행 현장인 부산 영도구 B아파트 현관에서 범인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쥐색 쏘나타 렌터카를 발견했으며 이 차량은 지난 9일 위조여권을 제시한 20대 러시아인 남성이 빌려간 것으로 밝혀졌다.
2003년 경선자금 한도초과에 ‘양심고백’한 김근태의원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출두
실정법을 지킬 수 없었던 정치자금 현실을 고백한 ‘양심선언’이 법의 심판대에 섰다. 민주당 김근태(金槿泰) 의원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17일 서울지법 519호 법정에 출두했다. ‘2000년 한해 동안 6억원(선거 있는 해) 이상 쓸 수 없도록 돼있는 후원금을 8억4500만원 지출했으며, 한도액이 넘는 2억4500만원에 대해 중앙선관위 신고를 누락했다’ 는 혐의였다. 김 의원은 자신의 위법 사실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시작 직전인 작년 3월 3일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고, 그 때문에 법정에 섰다.
김 의원은 한 시간여 진술에서 “결과적으로 법을 어겼음을 인정하지만, 법을 지키기 힘든 현실을 누군가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는 말도 거듭했다.
김 의원이 말한 ‘법을 지키기 힘든 현실’ 이란 현 선거법에 당내 경선에 관한 정치자금 규정이 없어 평소 의정활동을 염두에 둔 후원금만으로 경선을 치러야 하는 현실을 말한다. 김 의원은 후원금 한도를 초과한 2000년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양심선언을 한 작년엔 대선후보 경선에 각각 출마했다.
김 의원은 작년 기자회견에서 양심선언을 한 배경과 관련, “선관위에선 경선 끝나는 5월까지 3억원 이상 쓰면 안 된다 하고, 당에선 후보 기탁금을 2억5000만원 내라니 법을 지키자면 5000만원으로 경선을 치러야 하는데 내 가슴 속의 냉소와 다른 사람들의 야유를 견딜 수 없었다” 고 했다. 이런 경선자금 현실에 대해 당시 노무현 후보는 “성냥곽 안에서 잤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을 것이고, 밖에서 잤다고 하면 검찰이 잡으러 올 것” 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재판에 앞서 “(양심선언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다. 그러나 의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겠다” 고 했다.
재판에는 2000년 8월 김 의원에게 경선자금으로 2000만원을 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도 출석했는데, 검찰은 권 전 고문이, 후원금을 내고 영수증을 안 받아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고 징역 6월을 구형했다.
2003년 영국 최고 자선사업가, 존 폴 게티 사망
미국 태생의 영국인 억만장자 존 폴 게티 2세(70)가 17일 런던의 한 개인병원에서 흉부 감염으로 사망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폴 게티 경(卿)은 지난 14일 지병인 흉부 감염이 재발, 이 병원에 입원했었다.
게티는 월스트리저널(WSJ)이 지난 1999년 최근 1000년간 최고의 갑부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던 인물. 당시 ‘밀레니엄 갑부 50인’에는 원나라 쿠빌라이 칸과 록펠러·빌 게이츠 등이 함께 포함됐었다. 미국의 포브스지는 그의 총 재산을 10억 달러 규모로 추산했다.
그는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에 5000만 파운드, 영국 영화제작소에 2000만 파운드를 각각 기부하는 등 영국 문화·예술계의 큰 후원자 역할을 했다. 각종 자선 단체 등에도 2억 달러 이상을 기부, 영국의 ‘기부왕’으로 꼽혔다.
미국 석유업체 스탠더드 오일의 창립자 존 폴 게티의 아들인 그는 1972년 영국으로 건너가 생활했고, 98년 국적을 영국으로 바꾼 지 1년만에 정식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그는 더 많은 조세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영국 국적을 얻고 작위를 받은 이유에 대해 “영국식 생활방식과 영국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이 된 그도 끝내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2003년 ‘황제 다이어트‘ 주창자 애트킨스 박사 별세
애트킨스 박사는 지난 1972년 ‘애트킨스 박사의 다이어트 혁명’ 이란 저서를 통해, 육류와 달걀·치즈 섭취를 강조하고 빵·쌀·과일 등은 무시한 비정통적인 체중감량법을 주창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의학계는 저(低)지방·고(高)탄수화물 다이어트를 권장했으며, 이듬해에 미국 의학협회(AMA)는 애트킨스 박사의 다이어트를 영양학적으로 ‘어리석은 짓’ 으로 비난했다. 미국 의회는 그를 소환해 이 식이요법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과 1990년대에 나온 그의 또 다른 책은 각각 1500만부와 1000만부가 팔리면서,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애트킨스식 다이어트에 대한 비판은 이 식이요법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고, 주요 영양분 결핍을 초래한다는 것. 그러나 지난 2월에 나온 6건의 연구 결과는 ‘황제 다이어트’ 를 한 사람들이 심장혈관이나 콜레스테롤 수치를 악화시키지 않고 실제로 살을 뺐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3년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 언론자유 상황을 우려하는 보고서 제출
국제언론인협회(IPI·International Press Institute)는 최근 한국의 언론자유 상황을 우려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17일 국제 인권·표현자유 단체들에 제출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본부를 둔 IFEX는 IPI, 국경없는기자회(RSF), 세계신문협회(WAN), 인권감시(HRW) 등 전세계 57개의 표현자유 및 인권 옹호단체가 1992년 설립한 공동체로, 언론 및 표현자유 침해에 대한 전세계적 공동 대응을 목표로 하고 있다.
IPI는 이날 ‘국제표현자유교류(IFEX·International Freedom of Expression Exchange)’ 산하의 ‘행동경고네트워크(AAN·Action Alert Network)’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는 지난 3월 27일 ‘기자실 운영 방안’이라는 새 언론정책을 채택했다”면서, “이 지침에 대해 비판자들은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다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IPI는 “불행하게도 (한국의) 언론 상황은 ‘불유쾌한(unpleasant)’ 측면들을 추가로 가지고 있다”면서 KBS사장 임명 논란, 노사모·조아세 등 ‘시민운동으로 가장한 정치운동’ 등을 거론했다.
이어 보고서는 “이들 단체가 숭배하는 인물(cult figure)인 배우 명계남과 문성근은 지금 ‘국민의 힘’이라는 새로운 인터넷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 운동은 ‘순수 회원으로 이뤄진 전사들(warriors)의 단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국민의 힘·조아세·노사모의 핵심 그룹이 자칭 ‘조폭언론진압단’을 구성, 독립 일간지인 조선·동아·중앙일보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진압단이 이들 신문을 넘어뜨리려는 것이 “표면상으로는 이들(신문들)이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진짜 이유는 이들 신문의 영향력이 너무 크고 친(親)정부적 논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조폭언론진압단이 이들 신문과의 인터뷰 거부 운동을 조직하고, 구독 중지운동을 벌이며, 이들 신문에 대한 광고 게재 거부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03년 이라크 파병 선발대 첫 출국
정부의 파병 결정과 이에 대한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이라크 파병 국군 선발대가 2003년 4월17일 첫 출국했다.
이라크전쟁은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대량살상무기(WMD) 제조를 이유로 2003년 3월 17일 이라크를 공격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이날 오후 5시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을 통해 미국 지상구성군 사령부가 있는 쿠웨이트로 먼저 떠난 한국군 파병 선발대는 의료지원단 10명, 건설공병 10명 등 총 20명으로 구성됐다. 한국군 파병은 전쟁이 예상보다 일찍 종결됨에 따라 전후복구와 의료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병력 위주로 이루어졌다.
이날 선발대가 이라크로 첫 출국한데 이어 같은 달 30일에는 의료지원단 90명과 공병대 200여 명 등 300명으로 구성된 제1진이 현지로 파견됐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673명(서희부대 573명, 제마부대 100명)이 추가로 파병됐고 2003년 10월에는 임무를 마친 1진과 교대하기 위한 2진 466명이 출국했다.
이후 우리나라는 2004년 8월 3일부터 비전투병 위주로 구성된 자이툰부대(약 3,000명 규모)를 도시 기반시설 재건과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이라크에 파병함에 따라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최대 파병국이 됐다.
한편 이라크 파병 선발대가 출국하던 이날에는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 '미군장갑차 고 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소속 회원들과 학생·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용산 국방부 앞에서 한국군 파병 선발대 출국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후 인천국제공항으로 이동, 파병 선발대가 출국하는 공항 입구에서 '학살전쟁 파병반대', '대한민국 전범국가'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000년 종합주가지수 93.17포인트(11.63%) 하락으로 하락폭-하락률 사상 최고기록
2000년 4월 17일 미국 증시 폭락 여파로 서울 주식시장이 사상 최악의 폭락세를 보였다. 이날 거래소시장에서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93.17포인트(11.63%) 하락한 707.72로 마감, 하락폭과 하락률이 모두 사상 최고기록을 경신했다. 종합주가지수는 이날 폭락으로 1999년 5월 수준으로 곤두박칠쳤다. 코스닥시장에서도 코스닥 지수가 22.33포인트(11.40%) 하락한 173.54로 마감, 하락폭과 하락률 역시 사상 최고기록을 깨뜨렸다.
종합주가지수는 개장초부터 낙폭이 커지면서 주가가 전날보다 10% 이상 내릴 경우 발동되는 `서킷브레이커`가 오전 9시4분 발동돼 20분간 거래가 중단되기도 했다.
1997년 대법원, 전두환씨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씨에게 징역 17년형을 확정
1996년 국내최초 전자도서관 LG상남도서관 개관
1996년 4월 17일 국내 최초의 전자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이 개관했다. 이 도서관은 들어오는 모든 자료를 즉시 전자화일로 바꾸어 컴퓨터에 저장하기 때문에 책을 찾아보기 힘든 도서관이다. 도서관의 심장인 서고는 대형컴퓨터가 대신해준다. 이곳은 또 자료를 찾기 위해 직접 찾아 올 필요가 없다. 도서관 메인서버에 저장돼 있는 자료는 통신망이 연결된 곳이면 어디서든 자유롭게 열람, 검색할 수 있다.
디지털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과 일반도서관의 차이를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곳은 데이터베이스 제작실인데 이곳에 입수되는 모든 자료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되는 코스다. 이곳에서는 4대의 스캐너가 입수된 자료를 모두 컴퓨터에 영상화일로 기록한다. 인쇄매체를 전자매체로 전환시키고, 논문요약과 주제어 분류를 마치면 작업이 끝나는 것이다. 자료입수에서부터 사용자들이 이용하는데까지 들어가는 시간은 3∼4일에 불과하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일반도서관이 자료입수에서 이용까지 최소한 한달이상이 소요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LG상남도서관은 첨단시스템못지 않게 자료도 수준급이어서 연간 자료구입 예산만 8억원이나 된다. 전자도서관은 도서관내에서만 전자화일 형태로 된 각종정보를 볼 수 있는 전자도서관(Electronic Library)에서 시작해 외부접속이 가능한 디지털도서관(Digital Library),전국의 도서관을 모두 전산망으로 연결해 필요한 자료를 인터넷상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가상도서관(Virtual Library)으로 발전한다. LG상남도서관은 중간단계인 디지털도서관에 해당한다.
1995년 4.19 묘역 국립묘지로 승격
1995년 판소리 거목 김소희 여사 별세
1917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만정은 12세 때 명창 이화중선의 노래를 듣고 감명 받아 소리에 입문했다. 송만갑, 정정렬 선생에게 `심청가` `흥보가`를 배워 동편제 판소리 계보를 이어받았다. 일찍이 만정의 재능을 알아본 송만갑은 "요런 애물은 천에 하나 나오기 힘들제"하며 수업료를 일절 받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판소리 외에도 김종기, 강태홍에게 가야금을, 정성린에게 살풀이 춤을 사사했으며 서예로도 국전에 3회 입선한 경력이 있다.
1964년 판소리 `춘향가`로 인간문화재가 됐으며 민속예술원 원장,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향사 박귀희씨와 함께 국악예술학교를 설립,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만정은 타고난 음악성은 물론 무대에서 관중을 압도하는 자태와 예인으로서의 재질을 두루 갖춘 국악계의 거목이었다
1993년 터키 투르구트 외잘 대통령 급서
투르구트 외잘 터키 대통령이 1993년 4월 17일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향년 66세였다. 외잘 터키 대통령은 지난 1983년 총리로 당선된 후 지금까지 통치기간 중 침체에 빠진 국가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외잘 대통령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미국 주도의 서방동맹국을 지지하는 등 말년의 지나친 월권행위로 인해 국민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27년 말라티아주 동부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987년 미국 휴스턴에서 심장병 수술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극우분자의 권총 공격을 받는 등 두차례나 생명의 위험을 모면한 바 있다. 외잘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한 것은 이스탄불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다 1970년대에 당시 술레이만 데미렐 총리에 의해 국가계획기구 책임자로 발탁되면서였다. 개혁성향의 경제학자 출신인 외잘은 1983년 수상에 선출된 뒤 터키에 전면적인 시장개혁 정책을 도입했다.
1989년 그의 정당인 조국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외잘은 1991년 이 당이 총선에 패배함으로써 급속히 권력이 약화됐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권의 맹주를 노리며 소연방 붕괴 뒤 독립한 중앙아시아 이슬람국들과의 관계강화에 노력해왔다.
1985년 북한.소련 국경조약 조인
1982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캐나다 신헌법 서명
1981년 진도-돌산 두 연육교 기공
1981년 폴란드 정부, 자유농민노조 결성 허용
1981년 한미문화교류위원회 발족
1981년 일본.북한 직통전화 개통
1980년 국제통화기금(IMF) 중국가입 승인
1976년 한국-바레인, 국교수립
1975년 캄보디아의 해방세력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 수도 프놈펜을 점령
1975년 4월 14일부터 수도 프놈펜을 총공격해 온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이 4월 17일 오전 7시 시내로 진입하자 론놀의 정부군은 아무런 저항없이 항복했다. 이로써 5년1개월에 걸친 내전이 종식됐다.
1970년 3월 무혈쿠데타로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집권한 론 놀은 미국과 남베트남에 지원을 구했고 시아누크와파와 삼판의 좌익 민족주의 그룹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지원하에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을 결성, 내전에 돌입했다. 통일전선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1975년 4월 론놀은 망명했고 미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4월 10일에는 포드 미국 대통령이 "캄보디아 정세는 이미 때를 놓쳤다"고 연설해 사실상 미국의 지원중단을 확인했다. 결국 론놀정권은 5년1개월 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1975년 장쩌스 총통 장례식
1974년 내외통신 창간
1971년 방글라데시공화국 수립
파키스탄 중앙정부와 대립, 내전을 해 온 동파키스탄 해방세력이 1971년 4월 17일 방글라데시(벵골어로 ‘벵골인의 나라’를 뜻함)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했다. 파키스탄은 1947년 영국에 의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ㆍ독립됐지만 그 내부 또한 종교를 달리한 동ㆍ서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 동파키스탄이 1971년 오늘 방글라데시로 독립한 것이다. 서파키스탄으로부터 1600km 떨어진 동파키스탄은 주민이 벵골인임에도 벵골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지 않는 등 서파키스탄으로부터 차별을 받아왔다. 이 차별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동파키스탄인(벵골인)에게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서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동파키스탄인(벵골인)들은 아와미연맹을 결성했다.
1970년 12월 파키스탄 제헌의회 선거에서 아와미연맹이 ‘동(東)’파키스탄의 자치를 쟁취하기 위한 6개 항목의 제안을 공약으로 내걸어 압승함으로써 비로소 동파키스탄 독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후 1971년 3월 26일 서파키스탄군의 유혈 진압에 맞서 벵골 애국주의자들은 독립된 방글라데시 공화국을 선포, 4월 17일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69년 체코 공산당 제1서기 알렉산더 두브체크 실각, 후임에 후사크
1968년 일본, 조총련계 조선대학 인가
1967년 격렬비열도 근해 간첩선 사건
1966년 폴란드 교회(기독교) 천년 기념 행사
1965년 한일협정반대 데모대, 효창공원서 시위, 파출소 점거
1962년 미터제 택시 등장
1962년 4월 17일을 기해 미터기(자동요금계산기)를 단 3백대의 서울시내 택시가 서울시가를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내 택시 수가 2천 7백대에 달했지만 이날 우선적으로 3백대의 택시만이 미터제 택시로 시험 운행됐다. 정직하고 정확한 계산기에 나타나는 요금만 받으면 되고 또 내면되니 이전의 주먹구구식 요금 계산 때와는 달리 운전수와 손님간의 시비가 없어졌다.
미터제 택시의 기본요금은 300환 (1953년 2월 15일 제1차 통화개혁으로 원:환의 비율이 100:1 비율이었으나, 1962년 6월 10을 기해 원:환의 비율이 10:1로 다시 통화개혁됐다). 2km 이내에는 멀거나 가깝거나 3백환을 받고 500m를 넘을 때마다 미터기는 350환-400환-450환으로 50환씩 불어 표시됐다. 그리고 20분의 대기료 50환이 가산되며 달린거리, 시간, 영업횟수 등도 일일이 표시됐다.
미터제 택시에 대해 어떤 운전수는 ‘시비가 없어져 좋기는 하지만, 미터제 탓에 하루 수입으로 보면 2,3천환씩의 수입이 줄어든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로 시가 10만5천환이나 하는 미터기 구입을 꺼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1961년 미국, 쿠바 피그만 침공…사흘 만에 대패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1959.1) 이 들어서고 일주일 뒤 미국이 쿠바의 신정권을 승인할 때만해도 양국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쿠바 내 미국 재산을 몰수(1960.8)하고 미국이 쿠바와의 단교를 선언(1961.1)하면서 쿠바는 미국의 눈엣가시가 됐다.
1961년 4월 17일, 미 CIA로부터 훈련받은 1400여명의 쿠바 망명객들을 태운 7척의 미 함대가 쿠바 피그만(灣)에 조용히 닻을 내렸다. 쿠바 내 반혁명 세력과 연합,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할 계획이었지만, 반혁명 세력도 미미한데다 망명객 안에 첩자까지 숨어 있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 쿠바군의 폭격으로 사흘 만에 200여명이 숨지고 1200여명이 체포됐다.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확정한 계획을 그해 초 갓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이 장고 끝에 승인한 침공 계획이엇지만 실패에 따른 비난의 화살은 케네디가 뒤집어 썼다. 케네디는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한 것은 물론이고, 대(對)국민 사과성명까지 발표하게 돼 지도력에도 상처를 입었다. 이에 반해 카스트로는 영광스러운 승리자가 됐고 포로 몸값으로 6000만달러 상당의 식품과 의약품까지 챙겼다.
쿠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에 급속도로 가까워져 이듬해 소련의 핵미사일을 끌어들임으로써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시킨다. 뒷날 케네디는 “내가 그토록 어리석었단 말인가”라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1961년 북괴, 유엔(UN)의 조건부 초청 거절
1956년 코민포름 해산
1947년 9월 소련을 비롯한 9개국 공산당 대표가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모여 결성한 코민포름이 1956년 4월 17일 해산됐다. 코민포름의 시작은 소련공산단중앙위 서기 말렌코프, 폴란드 부수상 고물카와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 대표가 참석해 비밀회의 끝에 미국에 대항하는 공산당 단체를 결성키로 결정하면서부터였다. 결성회의에서는 소련대표가 국제정세에 관한 보고 후 트루먼 독트린, 마샬플랜 등의 미국 정책에 반대하며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립을 강조했다. 코민포름은 1948년 유고슬라비아가 탈퇴하고 동독이 대신 가입하는 등 국가간에 동요를 일으켜 이날 해산에 이르게 됐다.
1953년 초대 부통령 이시영 사망
1952년 국회 야당의원,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
1946년 중외신보 발간
1946년 단일클론항체 생성기술로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면역학자 쾰러 출생
1946년 시리아, 프랑스로부터 독립
1941년 유고슬라비아, 독일에 항복
1937년 작가 이상 동경서 요절
알쏭달쏭한 숫자와 기호, 일상의 어법을 넘어선 난해한 시로 우리 문학사의 이단아로 기억되는 시인 이상이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도쿄제국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교지 ‘난파선’을 만들면서 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그의 작품이 처음 활자화된 것은 1930년 ‘조선’지에 발표한 소설 ‘12월12일’. 이듬해에는 조선건축회지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을 걸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된 시 ‘오감도(烏瞰圖)’는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 빗발치는 혹평으로 예정된 30회 연재를 넘기지 못하고 15회에서 중단됐지만 오히려 작품을 둘러싼 열띤 논란으로 그의 존재가 뚜렷하게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식민지 문인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다방을 출입하며 세상을 향해 냉소와 독설을 뿜어냈고 ‘제비’ ‘쓰루’ ‘식스나인’ 등 다방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특히 ‘제비’는 기생 금홍을 마담에 앉히고 뒷골방에 살림까지 차린 곳으로 훗날 그의 대표작 ‘날개’의 무대가 된다.
본명인 김해경이 이상으로 알려지게 된 과정도 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공사장 인부들이 김해경을 이씨로 알고 ‘리(이)상’으로 불렀다는 설, 아침에 깨끗이 면도한 수염이 오후가 되면 새카맣게 자라 여직원도 자신도 “이상하다”고 말한 데서 연유한다는 설 등 해석이 구구하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1923년 한국 갑각류학의 기반을 조성. 발전시킨 동물분류학자 김훈수 출생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916년 스리랑카의 정치가 반다라나이케 출생 - 세계최초의 여성총리(1960년)
1911년 조선 토지수용법령 공포
1897년 그리스-터키전 발발
1895년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조인
1880년 서울에 일본 공사관 설치
1790년 피뢰침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사망
1790년 4월 17일 미국의 정치가 겸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이 향년84세로 사망했다. 전기 실험으로 유명한 프랭클린은 1706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10살 때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일을 도왔으며 형의 인쇄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인쇄 일을 좋아하게 된 그는 1724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2년여에 걸쳐 인쇄술을 익혔고 결국 1728년 `펜실베니아 거제트`라는 미국 최대의 주간지를 발행, 출판업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과학자로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1752년 6월 연을 이용해 우뢰가 전기라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면서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 피뢰침을 발명했다. 우뢰의 전기를 끌어들여 무사히 지면으로 보내 벼락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프랭클린은 1748년에 필라델피아의 시의회 의원, 1751년에는 펜실베니아 식민지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1776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다섯 사람의 정치가 중 한 사람이 됐다.
1586년 영국 극작가 존 포드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