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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포대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고 있는 주민들. 3월 중순으로 들어섰지만 바닷바람이 아직 매서운 편인지 보온용 귀마개를 썼다.
태안은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반도다. 지형도를 보면 태안읍의 백화산(284m)을 중심으로 해서 바다를 향해 발을 뻗은 낙지처럼 생겼다. 안내책자에는 ‘태안반도 해안선의 길이는 530.8km’라고 설명하고 있다. 반올림을 한다 해도 531km. 하루에 100km씩 다닌다고 치면 대엿새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다. 차를 이용하니까 기간을 절반까지 확 줄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선 태안이었다.
▲ 안면도 남쪽 끝에 자리한 영목항은 조용하고 호젓한 항구다.
결국 여행의 끝에서 프랙탈(Fractal)이라는 용어를 만든 프랑스의 브누아 만델브로 박사의 학설을 인정해야만 했다. 1975년 당시 영국 서부의 리아시스식 해안선의 길이를 고민하던 그가 프랙탈 구조를 이용해 계산한 해안선의 길이는 ‘무한대’. 결국 만만치 않은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이루어진 태안반도의 길이도 ‘무한대’였던 것이다.
‘포구의 단순 반복’을 생각하며 태안서 77번 국도를 따라 남진하다 청포대 해안으로 들어선다. 실치로 유명한 마검포를 가는 길인데, 청포대 해안을 구경하면서 갈 요량이다. 모래언덕을 덮은 방풍림 소나무 풍경이 좋아 눈길을 끌지만, 이 역시 태안 땅에서 내내 만나게 될 경치 중 하나다. 그런데 비포장길은 해변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물 빠진 갯벌에는 바지락을 캐고 있는 청포대 주민들이 보인다.
“마금포유? 절루 가면 되유.”
바지락을 캐던 사내의 호미 끝으로 청포대 남쪽 해안이 걸려들지만 길은 뵈지 않는다.
“……”
“저 해안 끝으루 죽 따라가면 되유.”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접경. 그곳에 길이 있다. 주민들이 바지락을 나르는 데 쓰는 경운기 바퀴 자국을 얼마쯤 달리니 바다를 향해 검처럼 튀어나온 마검포가 눈앞에 나타난다.
마검포는 실치로 유명한 마을이다. 실치는 잡힌 지 1, 2분이면 죽기 때문에 태안반도에서는 이곳 마검포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다. 마검포 맨 끝에 자리잡은 식당으로 들어간다.
“사흘 전부터 실치가 잽히기 시작했어유.”
그렇다면 이곳 태안 땅에도 봄은 오고 있는 거다. 실치는 3월 중순쯤부터 태안 앞바다에서 잡히기 시작하는 물고기로, 봄을 대표하는 태안의 별미가 아닌가.
입안에 도는 쌉싸롬한 봄맛을 음미하며 77번 국도로 나오면 남쪽에서 안면도가 손짓한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편안히 누워 쉴 수 있는 섬’이란 뜻을 지닌 안면도(安眠島)는 원래는 섬이 아닌 육지였다. 1638년(인조 16년) 안면도 북쪽의 개미목(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에 운하를 만들면서 호적이 바뀌어 섬이 된 것이다.
백사장항은 안면도에서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는 첫 항구. 도다리, 주꾸미, 간자미, 개불 같은 어물을 한 짐 부려놓고 “일루 들어오슈” 하며 행인을 부르는 구수한 사투리도 좋고, 관광버스로 들이닥친 손님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란도 괜찮다. 이어 해안도로를 따라 삼봉에서 기지포 넘고, 안면·두여·밧개·방포 같은 호젓한 해안을 지나면 곧 지난 해 국제꽃박람회가 열렸던 꽃지 해안이다. 일몰을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울창한 솔숲을 등지고 10리 가까이 길게 이어진 꽃지 해안은 거센 파도가 하얀 백사장을 거칠게 애무하는 광경만으로도 바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 꽃지 해안의 낙조. 할미·할아비바위가 있는 이 해안은 아름다운 풍경이 많은 안면도에서도 첫손에 꼽힐 만큼 인기 있다.
할미·할아비바위 주변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셔터소리가 들린다. 바쁠 것 없는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노부부 곁으로 들어간다. 찰박거리는 파돗소리는 한없이 정겨운데, 노부부 사이가 생각보다는 멀다. 이렇게 애틋하게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냈을까. 해가 넘어가자 노부부 사이로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진다.
노부부 있는 꽃지 해안이 정겹기는 하지만 유명세 탓에 조금 번잡하다. 잠자리 찾아 캄캄한 해안을 이리저리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면서 들어간 곳은 꽃지 해안 바로 북쪽의 방포.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해상 전진기지를 두어 바다를 지켰으며, 고려 때도 삼별초가 주둔했다는 이 항구는 꽃지보다 인적도 드물고 호젓하다.
그런데 방값이 생각보다 5,000원이 비싸다. 30대 중반의 여주인은 짧은 흥정 끝에 “여기서 자면 파돗소리가 얼마나 좋은데….” 하며 깎아준다. 방에 들어가니 어두운 저쪽 해안에서 파돗소리가 정답게 들려온다. 그렇다면 이 파돗소리의 가격이 5,000원? 그런데, 그것을 깎았으니 오늘밤에 듣는 저 파돗소리는 공짜인 셈이다.
▲ 청포대 주민이 캔 바지락을 운반하기 위해 경운기를 타고 갯벌로 들어서고 있다.
부드럽게 굽도는 길을 따르다보면 키 큰 소나무들의 열병식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불그스레한 몸에 늘씬하게 솟은 소나무들에선 귀족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휴양림 솔향에 파묻혀 산책하는 연인들 표정이 사랑스럽다. 안면도는 일제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섬 전체가 소나무숲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울울창창했다. ‘도끼 하나만 있어도 잘 살 수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지만, 해방 후 무자비한 남벌로 많이 훼손되었다가 이후 꾸준한 산림정책 덕에 다시 예전처럼 안면송의 그윽한 솔향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휴양림을 벗어나면 이번엔 멀리 남쪽 끝의 영목항이 부른다. 도중에 샛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이내 샛별·장삼·바람아래 같은 정겨운 해안들이 있다. 그렇게 보아온 해안인데도 조금도 질리지 않는다. 고남면 소재지의 패총박물관에서 안면도에서 구조개 캐먹고 살았던 선사시대인들의 흔적을 살펴보고, 매년 여름마다 바다 좋아하는 시인들 모여들어 시상에 잠기는 시인학교를 지나면, 안면도 최남단의 영목항.
▲ 순박한 미소로 나그네를 반겨준 어운돌 할머니들이 봄 굴을 캐고 있다.
다시 북진이다. 안면도를 빠져나가기 전에 꼭 들러보고 싶은 섬이 있다. 매년 정월 초이틀과 초사흘 사이에 열리는 붕기풍어제로 유명한 황도(黃島). 창기리 갈림길에서 우회전해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4km쯤 달리면 황도. 귀가하는 가장들 손에 들린 살림망에는 간자미, 우럭, 놀래미 같은 바닷고기들이 들어있다. 그냥 집에서 반찬이나 해먹으려고 잡은 것이라는 데 그 양이 솔찮다.
황도는 태안에서도 제법 부자 섬으로 손꼽힌다. 주민들은 섬이 풍수지리 상 게를 닮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라 한다. 게의 머리 앞에 있는 동쪽의 자그마한 옥섬은 맛있는 먹잇감이다. 참조기나 민어 같은 고급 어종을 잡는 안강망 어선이 한창 호황을 누리던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섬은 600여 명이 거주할 정도로 번창했다. 당시 섬마을 주민들은 안강망으로 이런 고급 어종을 잡아들이고 풍어가를 부르곤 했는데, 100t급 중선배만 30여 척에 이를 정도로 떵떵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널널하게 살던 이 마을에 잠깐 위기가 닥쳤다. 70년대에 서산 A·B지구 방조제를 건설하자 점차 바다 환경이 바뀌는 바람에 더 이상 안강망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된 것. 하지만 황도가 항상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게 형국을 닮았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섬 둘레 갯벌에 바지락 어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바지락 채취로 업종을 재빠르게 변경해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섬 주민들은 풍수 덕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섬 한쪽에 솟은 당산도 주민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제를 안 지내면 아마 황도는 먹구 살기 힘들거유. 우리 부락 사람들은 다 이걸 믿지유.”
당제에 대한 황도 주민들의 믿음은 상상 이상이다. 제법 번듯한 교회가 들어서 있긴 하지만, 주민들은 아직도 마을의 안녕을 보장하고 부를 지켜주는 근원인 당나무를 잘 모시고 있다.
황도교와 안면교 두 다리를 빠져나가면 이젠 육지다. 육지라 해도 결국 바다다. 태안은 어디에 있건 한 달음만 달리면 금방 파도와 만날 수 있는 반도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풍요로운 황도를 벗어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하나. ‘바닷가에 살던 인류의 가장 손쉬운 생존법은 무엇일까.’ 인류가 물고기를 잡아 먹거리로 삼기 시작한 것은 채집수렵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구석기 중기부터 물고기를 잡기 시작한 인류는 처음에는 강이나 바다에서 주로 손과 발, 그리고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다 구석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도구를 이용한 방법을 통해 물고기를 잡아 생존해나갔다.
물고기잡이는 크게 막이류, 낚시류, 그물류 등으로 분류된다. 낚시와 그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막이류에 속하는 ‘어살’이었다. 그중 돌로 만든 독살은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에 퍼져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어살이다. 이 굴혈 독살이 지금도 실제 고기를 잡고 있는 유일한 독살이다.
몽산포 지나 찾아간 굴혈포. 물이 나가는 중이긴 한데 독살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독살을 볼 수 있을까. 백사장에 발자국을 만들며 빨리 간조가 되기만 고대한다. 그 때, 저 멀리 갯바위 사이에 한 남자가 보인다. 괭이갈매기처럼 그에게 달려간다. 이 곳 굴혈 부근서 몇 대째 살고있다는 40대 후반의 남자. 얼마나 기다려야 독살을 볼 수 있을까 물었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때를 계산하던 남자는 “어제가 조금이었으니 어쩌면 꽃만 나고 말겠네유” 한다. 꽃? 남자는 물이 빠져나가면서 수면 위로 조금 드러난 독살을 가리킨다. “저걸 여기선 ‘독살꽃’이라구 불러유.” 아하, 물 위로 뾰족 솟은 돌을 꽃이라 한다. 참 절묘한 이름이다.
어릴 적 직접 독살서 고기도 건졌다는 그는 옛 추억을 더듬는다. 굴혈 독살 위 아래로 서너 개가 더 있지만 지금은 거의 허물어졌고, 현재 이 굴혈 독살에서만 고기를 건진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숭어, 전어, 멸치, 꼴뚜기, 갑오징어, 가오리 등이 부게(대나무로 만든 들통)에 가득 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걸려들었다. 물고기가 많이 든 날이면 독살 주인은 동네방네 사람들 불러모아 퍼가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어족에 대한 무차별적인 포획이 남발하면서 연근해 물고기들이 사라지고, 독살이 있는 갯벌과 모래밭도 개발론자들의 경제논리에 밀려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 이곳 굴혈 독살도 이젠 동네 사람들과 조금 나눠먹을 정도밖에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고집스럽게 기다려보건만 물은 더 이상 빠지질 않는다. 부근에 산다는 독살의 주인장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오늘은 틀린 모양이다. 독살꽃만 보고 나서는 길. 뒤돌아보니 어느새 밀물이다.
굴혈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했다. 벌써 해는 중천에 솟았다. 태안으로 나가 나지막하게 바다로 잦아드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을 끼고 모래 깨끗한 채석포와 연포를 지나고, 낙지 잡는 정산포를 스쳐, 오염 안 된 해변이 일품인 갈음이 모래를 만지면 안흥진(安興鎭). 바로 경기도 안성 칠장산(492m)에서 서해로 내달리던 금북정맥이 내포 지방 지나 바다로 빠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빚어놓은 땅이다. 안흥항은 지금은 서해 끝의 작은 어촌이지만, 백제 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크게 번창했던 항구였다.
안흥항 앞바다는 물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해역이다. 그래서 이곳은 지나기 어렵다 하여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는데, 다니던 배들이 자꾸 조난을 당하자 평안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이름을 안흥량(安興梁)이라 바꾸면서 이곳 지명도 안흥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안흥항을 지키던 곳이 바로 안흥성이다. 성곽에서 보는 안흥 앞바다 풍광도 아주 좋다.
▲ 물이 빠져나가면서 안흥항과 신진도 사이에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갯벌이 드러났다. 이런 건강한 갯벌은 태안 주민들의 '문전옥답'이다.
안흥을 빠져나와 32번 국도로 붙으면 길은 파도리~모항리~의항리로 이어지는 해안으로 연결된다. 드문드문 자리한 염전 너머로 논두렁 밭두렁도 보이는데, 여기저기서 들불이 한창이다. 진드기 같은 병충해도 없애고, 재가 된 잡풀이 땅을 기름지게도 해주는 들불. 예전엔 농사철을 앞두고 농촌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이젠 산불 위험 때문에 들불 놓는 걸 막고 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계도차량이 확성기로 “논두렁에 불을 놓지 맙시다” 하고 다니지만 바닷가이기 때문인지 내륙의 마을들처럼 통제가 심하진 않다.
염전과 들불의 안내를 받으며 소원면 해안으로 간다. 하고많은 해안 중에 발길이 먼저 파도리로 옮겨지는 건 이름 때문이다. 태안엔 아름다운 지명을 가진 해안이 많지만 파도리 해안만큼 바다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곳도 없다. 파도리 해안으로 내려가면 저녁 햇살에 반사된 젖은 조약돌들이 영롱한 색깔로 빛난다. 파도가 해안을 더듬을 때마다 차르륵 차르륵 들려오는 해조음(海潮音)도, 중년 부부의 나란한 발자국에서 피어나는 조약돌 소리도 예쁘다.
▲ 금북정맥이 잦아드는 곳에 자리잡은 안흥항(안흥 내항).
붉은 햇덩이가 서해로 떨어지고 있다. 저녁노을이 적색 카펫처럼 깔리는 길을 따라 파도 마을 북쪽의 어운돌 해안으로 간다. 머리맡까지 파도가 밀려올 듯한 민박집에 짐을 부린다. 이 민박집 노부부는 파돗값을 따로 달라고 하지 않았다.
해뜨기도 전인데, 괭이갈매기들은 부산하게 날아다니며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다. 해안 백사장도 젖어 있고 물 속에 잠겨있던 여도 드러난 걸 보니 썰물인가 보다. 그때 문득 동녘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 어리석게도 잠시 잊고 있었다. 서해에서도 일출이 있다는 사실을…. 굴껍질 다닥다닥 붙은 갯바위 위에 앉아 고즈넉한 아침 항구를 물들이는 일출을 감상하는 행복감이란!
▲ 1.봄 농사를 위해 밭둑에 들불을 놓고 있는 주민.2.갯바위에서 자연산 굴을 채취하고 있는 어은돌 할머니들. 태안의 아담한 포구처럼 굽은 허리에서 할머니들이 겪어온 바닷가 삶의 일부를 읽는다. 3.파도리 해안의 오래된 전설을 들려줄 것만 같은 해옥. 파도리 해안의 조약돌로 만든 것이다. 4.꽃게 집산지로 유명한 신진도의 신진항(안흥 외항). 이전엔 호젓한 항구였지만, 안흥과 연결하는 신진교가 놓이면서 규모가 많이 커졌다.
“오늘이 두매라 굴 따러 나왔슈. 괭일날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팔라구유.”
역시 태안 곳곳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익히 들었던 넉넉한 대꾸. 할머니들이 채취한 이 자연산굴은 1kg에 5,000원이라 했다. 봄이 가까워지는 탓에 굴도 많지 않고 성수기가 아니기 때문에 굴이 싼 편이라 한다. 자연산 굴에 소주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술잔 들긴 좀 그렇다. 젊은이들은 벌써 해 뜨기 전에 주낙 던지러 나갔는데, 저녁 무렵이면 놀래미 우럭 간자미 같은 물고기를 잡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 일찍 일어나 일출까지 본 터라 바지런한 괭이갈매기처럼 내심 뿌듯해져서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이 항구가 어부들의 사투리로 소란스러워지겠지’ 하고 기대하고 있었건만…. 정말 파도처럼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다음에 또 와유~” 길게 늘어지는 할머니들의 사투리를 뒤로하고 어은돌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기수를 돌리면 언제나 흥겨운 노랫소리로 나그네를 반겨주는 해안이 있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사랑’. 여름날의 흥겹던 추억이 아롱진 이 곳은 만리포. 푸른 솔밭과 쪽빛 바닷물과 조개껍질 섞인 은빛 백사장 풍광이 좋아 여름 휴가철이면 무려 100만 명이 넘는 피서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지금은 3월 중순 비수기인데도 관광버스 몇 대 관광객들을 부려놓았고, 물 빠진 백사장 한쪽에선 신입생 환영 MT라도 온 듯한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춘 남녀들이 왁자지껄 신나게 떠들고 있다. 옛 생각에 젖어 ‘만리포사랑 노래비’에서 기념사진을 찍던 중년의 남자들은 ‘참, 좋을 때지’ 하는 표정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만리포의 원래 지명은 ‘만리장벌’. 조선 세종 때 뱃길로 조선을 찾은 명나라 칙사가 풍랑 때문에 안흥항으로 상륙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는 해녀들이 잡아온 꽃게와 해삼, 전복 맛에 반해 귀국할 때도 다시 들렀다. 맹사성이 주관하여 역시 해삼, 전복 등을 대접하면서 명나라 칙사의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전별식을 가졌고, 그가 떠난 백사장을 수중만리 무사항해를 기원한 곳이라 해서 ‘만리장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일몰의 아름다움에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어은돌의 일출. 잊기 쉽지만 서해라고 해서 일출이 없는 건 아니다.
만리포를 벗어나 봄맞이 준비에 한창인 천리포수목원을 지나면 미국에서 귀화해 황무지였던 천리포 일원을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수목원으로 일군 민병갈(閔丙渴·Carl Ferris Miller·1921-2002)씨가 그리워지는데, 길은 천리포 항구를 지나 푸른 바다가 발아래 까마득히 펼쳐진 비포장 언덕길로 이어진다. 소나무 숲에 폭 안긴 아늑한 백리포(방주골)에 들렀다가, 십리포(의항)와 일리포(구름포)에서 독살 흔적을 살피면 길은 의항리 동쪽 해안에서 끊긴다. 저 바다 건너가 소근진(所斤鎭)이다.
소근진으로 넘어가는 3km쯤의 의항리 동쪽 해변길은 어떤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아 도중에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하지만, 태안반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소박한 맛이 참 좋다. 바닷물은 맑고 깨끗해 속까지 훤히 보인다. 찰랑거리는 파도에 넘칠 듯한 해안 콘크리트 도로를 끼고 모룽이를 몇 번 돌면 봄 햇살에 새하얗게 반짝이는 언덕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길이 끊긴 것일까. 아니다. 길은 그 하얀 언덕 사이로 나있다. 언덕은 다름 아닌 굴껍질인데, 의항리 주민들이 20여 년간 작업하면서 생긴 일종의 패총인 셈이다. 굴껍질로 이루어진 길은 주민들이 잘 다져놓아 웬만한 콘크리트길보다 안정감이 있다.
비닐하우스 작업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주민들이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에 관심을 보이며 ‘소근진 가는 더 좋은 길’을 일러준다. 하지만 이보다 좋은 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굴껍질 길이 끝나면 이번엔 한쪽 바퀴를 찰랑거리는 바닷물에 적신 채 지나간다.
그렇게 파도에 바퀴를 적시며 해안을 지나고 방파제 여러 개 건너 물어물어 찾아간 소근진 마을. 나그네는 성터를 찾건만 눈에 띄지 않는다. 소근리 주민들 역시 의항리 주민들처럼 비닐하우스 안에서 굴까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 일루 와봐유. 여기가 성밖이구, 저긴 성안이유. 저짝은 동문이구.”
마침 점심상을 내가던 아주머니가 옛 성터를 일러준다. 아주머니가 알려준 대로 언덕을 50m쯤 오르자 대숲에 가려져 있던 허물어진 동문이 나타난다. 높이 4m 남짓한 성곽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지만 대부분 허물어졌다. 성벽에 오른다. 역시 전망이 좋다.
▲ 1.굴 작업장에서 나온 굴 껍데기가 언덕을 이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20여 년간 작업하면서 쌓인 것이라 한다. 2.원불면 삼거리의 '밀국낙지' 상징물이 눈길을 끈다. 3.푸른 마늘밭 너머로 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다. 태안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텃밭과 갯벌 그리고 바다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4.태안과 서산 사이의 굴포. 만약 이곳에 운하를 내는 데 성공했다면 태안반도는 섬이 되어 태안도(泰安島)로 불렸을 것이다.
소근진에서 북쪽의 방조제 하나 건너면 신두리.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너른 모래언덕인 ‘신두 사구(砂丘)’가 있는 곳이다. 태안 해안가는 옛날부터 모래바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바닷바람이 거센 초봄이면 눈뜨기 어려울 정도로 거센 모래바람이 불어댔는데, 그중 신두리 모래바람은 태안에서도 거세기로 유명하다. 심할 때는 마치 몽골 사막에서 황사가 일어날 때와 같은 분위기의 모래바람이 불어댄다. 그래서 바람 심한 날이면 밤새 산 하나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한반도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조화가 이곳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모래바람이 부는 날이면 눈을 뜰 수도 없는 지경이 된다.
지레 겁부터 먹고 해변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짙은 해무(海霧)가 밀려든다. 자욱한 바다안개에 휩싸인 모래언덕은 제주의 오름 같기도 하고, 대관령 목장처럼도 보인다. 먼 빛의 나무 몇 그루도 신기루처럼 솟아있다. 안개가 조금만 더 짙었어도 반드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었을 사막지대다.
보호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곳곳에 천연기념물 지정을 반대하는 표어가 적힌 표지판이 있다. 이곳 사구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재산권 제약을 받게 된 지역주민들이 반발한 흔적이다. 며칠 전에 들은 뉴스에선 주민들이 신두사구에 집을 짓기 위해 제출했던 ‘산림형질변경 허가 신청서’를 반려한 태안군이 행정소송에서 승소했다고 하던데…. 하지만 이곳엔 이미 또 다른 위험이 닥쳐왔다. 인근 해안에 방파제를 쌓은 후부터 파도와 바람이 약해져 모래층이 점차 엷어지고 잡초들이 모래언덕을 점점 뒤덮으면서 특유의 사막지형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해당화 가시에 찔려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신두사구를 뒤로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태안이 배출한 구한말 독립운동가인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1858-1925) 생가에 들러 매서운 정신을 살펴보고 원북면 소재지에서 박속낙지탕으로 늦은 점심을 한다. 여주인은 “낙지 다리는 맛으로, 머리는 영양으로 먹는다”고 했지만, 머리도 다리도 다 맛있고 박속과 어우러진 수제비 맛도 제법 깔끔하다.
배 두드리며 나서면 길은 태안반도의 북쪽으로 이어진다. 이원면 소재지에서 4km쯤만 북으로 달리면 이후 반도의 폭이 1km 내외인 이원곶이 8km쯤 이어진다. 해안선을 따라 아담하게 자리한 염전과 굴과 바지락 등 온갖 갯것이 나는 갯벌과 작은 돌섬들, 그리고 말 붙이면 순박한 미소로 대답해주는 주민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새 만대 마을. 이제 육지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태안반도의 북쪽 끝이다. 바다로 잠겨드는 부두 끝에 서니 철썩거리는 파도가 발을 핥는다.
오던 길 되짚지 않고는 태안읍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태안 시가지 뒤로는 봄 햇살에 빛나는 백화산(白華山·284m)이 우뚝 서있다. 표고가 비록 300m도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바다와 함께 살아온 태안 사람들을 지켜본 태안의 진산이다. 정상께 자리한 태을암(太乙庵)에는 태안에 들렀다면 꼭 봐야할 유물인 태안마애삼존불(보물 제432호)이 있다. 90년대 중반에 보수공사를 하고 보호각에 안치했지만, 당시 이미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된 데다가 부처의 눈과 귀가 아들을 낳거나 병을 낫게 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들이 돌로 갈아간 탓에 얼굴 표정을 알아보기 어렵다. 물론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보다 세련미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 마애불이 보물로 지정된 까닭은 바로 우리나라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마애불의 초기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마애불의 예술성과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일은 전문가들의 몫이라 쳐도 마애불의 얼굴 표정을 상상해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태안 여행 중에 만난 토박이들의 미소를 하나하나 떠올린 다음, 공통부분을 취해 석상 얼굴에 대치하면 된다. 아마 순박한 미소를 지닌 서산마애삼존불과 그리 다르지 않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프랙탈 구조를 지닌 리아시스식 해안을 실컷 돌면서 주민들과 대화도 나누고 태안마애삼존불까지 만났으니 태안은 대부분 돌아본 것이다. 하지만 태안을 제대로 읽으려면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다. 바로 ‘굴포(掘浦)’. 이곳은 해안과는 달리 볼 것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평범한 논밭이지만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태어난 태안반도의 운명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며 무려 500여 년간이나 진행되었던 끈질긴 대 운하공사가 태안반도에서도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하 암반과 뻘흙 때문에 모두 실패했고, 1638년에 지금의 안면도 북쪽의 개미목을 뚫어 아쉬우나마 거리를 줄이고 안전을 꾀하는 데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굴포운하가 성공했다면, 태안반도는 섬이 되어 지금쯤 ‘태안도(泰安島)’로 불렸을 것이다. ‘넉넉하고 편안한 섬’이라. 그럴 듯한 이름이다. 저녁 노을이 태안반도를 뒤덮을 무렵, 태안을 벗어난다. 자동차 옆거울엔 붉은 굴포가 한가로운 섬처럼 떠있다.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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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태안,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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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라 부를 수 있는 큰 물줄기는 없고, 대부분 금북정맥 부근서 발원해 바다로 흘러드는 10km 미만의 짧은 개천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530.8km며 12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중 유인도는 안면도(安眠島)를 비롯해 11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이기 때문에 대체로 바다의 영향을 받지만,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직접 받아 같은 위도의 동해안 지방보다 오히려 춥다. 연평균기온 11.8℃, 1월 평균기온 -2.7℃, 8월 평균기온 25.6℃. 연평균강수량은 1,115mm로 50% 가량이 7월~9월에 집중된다. 면적 503.57㎢, 인구 66,0626명(2002년 12월31일 통계).
태안은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는 소태현(蘇泰縣)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운주(運州)에 속하였다. 이후 고려 충렬왕 때까지 소태현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1298년 태안으로 바뀌었다. 1895년에 군으로 승격해 태안군으로 불리다가 1914년 해미군(海美郡)과 함께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면으로 격하되었다. 1973년 태안면이 태안읍으로 승격했고, 이북면 청산리·마산리가 원북면에, 안면면 간월도리가 부석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1980년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안면읍 고남출장소가 고남면으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이북면의 명칭이 이원면으로 변경되었다.
1989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산군 관할 중 태안읍·안면읍·고남면·남면(南面)·근흥면(近興面)·소원면(所遠面)·이원면 일원을 분할하여 태안군을 설치하는 동시에, 안면읍 죽도리(竹島里)를 홍성군 서부면(西部面)에 편입시켰다. 2003년 현재 태안읍·안면읍과 고남면·남면·근흥면·소원면·이원면·원북면의 2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 접하고 있는 서산시는 내륙으로 연결되는 육상교통의 유일한 관문이며, 서쪽은 서해로 315km 나가면 중국의 산동반도에 이르게 되는데, 일찍 대륙문화가 이 서해를 통해 태안반도에 들어왔다. 특히 백제불교 문화의 선진 지역이 바로 태안이며, 또한 안흥항(安興港)은 일찍이 여송무역선(麗宋貿易船)의 기항지(寄港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고, 북쪽의 원북 청산리는 일찍 해상 교통이 발달하여 인천항(仁川港)을 내왕하는 정기 여객선이 1960년대까지 성업을 이루었으나 육상 교통의 발달로 인해 이미 해상교통이 두절되고 말았다.
동서로 연결되는 32번 국도가 서산시 인지면에서 태안읍 근흥면을 지나서 소원면의 만리포 해수욕장에 이르고, 남북을 잇는 77번 국도는 태안읍에서 안면도 영목항까지 이어진다. 이 외에 태안반도 서편을 남북으로 잇는 603번 지방도가 근흥면 신진도서부터 태안읍~원북면을 거쳐 이원면 만대 마을까지 이어지고, 634번 지방도는 원북면 소재지에서 학암포 해수욕장까지 원북면 북서쪽으로 이어진다. 해안선과는 달리 간단한 육상 교통망을 지니고 있다. 또 2001년 12월 서해안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됨에 따라 수도권에서 2~3시간이면 진입이 가능하게 되면서 당일 관광의 요지로 떠올랐다.
530.8km에 달하는 해안 중 대부분이 태안 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리아시스식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만리포·연포·몽산포·방포·영목·꽃지·삼봉 등 30여 개의 해수욕장과 안면도·안흥항·안흥성·신진도·백화산 등이 주요한 관광자원을 형성한다.
하지만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애매한 부분이 많은 금북정맥에서는 독도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지형도에 마루가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는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는 것보다 <산경표>의 원칙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물길을 찾아보는 게 좋은 방법이다.
종주에 필요한 1:50,000 지형도는 근흥·만리포·서산·당진·홍성·대천·청양·예산·전의·평택·진천·안성·장호원·음성·미원·관기·속리.
1:25,000 지형도는 근흥·소원·태안·서산·운산·해미·덕산·홍성·나원·청양·대흥·유구·대술·광덕·의당·전의·천안·병천·서운·만승·죽산·생극·쌍정·음성·청안·미원·내수·은행·속리천·관기·상판·화북.
주요 소장품은 빗살무늬토기 모형, 원삼국과 고려 토기 22점 등 유물 470여 점. 이 가운데 108㎡ 규모로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석기 등 고남리 패총에서 출토한 1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 상설전시실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오라마와 터치스크린도 갖추고 있다. 또 33㎡ 규모의 역사실은 원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신시대의 토기·자기 등 22점을 갖추고 있다. 115㎡ 규모의 영상기획전시실은 태안에 분포한 문화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과 영상 자료가 있다. 고남리패총과 관련된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고, 무문토기편과 기와·산수문전 등을 탁본하는 체험학습실도 갖추고 있다.
관람시간은 09:00~18:00(동절기 17:00)이며, 관람료는 중학생 이상 700원, 어린이 500원. 매주 월요일과 1월1일·설날·추석 연휴에는 휴관한다. 전화 041-670-2337
휴양림에는 통나무 숙박시설인 숲속의 집을 비롯해 산림전시관, 숲속교실 등의 자연학습장과 잔디광장, 어린이놀이터, 캠프파이어장, 물놀이장, 체력단련시설 등이 있다. 산림전시관에는 소나무를 이용해 배 만드는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구역면적 175만㎡으로 1992년에 개장했으며 하루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전화 041-674-5018~9
황도 붕기풍어제 안면도 동북쪽 끝에 자리한 황도는 면적 2.5㎢, 해안선 길이는 16km인 아담한 섬이다. 섬 전체가 해발 50m 미만의 구릉지. 1982년 황도교가 완공됨으로써 안면읍과 연결되었다. 황도 붕기풍어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틀과 초사흘에 걸쳐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 축제. 아주 오랜 옛날 황도 어민들이 자욱한 안개 때문에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섬 어디선가 비치는 빛의 인도를 받아 무사히 귀향하게 되자, 빛이 시작된 곳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풍어제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뱀신을 모시다가 17세기 말엽부터 임경업 장군을 모시게 되었고, 이후 어업의 형태가 커지면서 더 많은 신을 추가로 봉안하였다. 8·15광복 후 각지에서 일어난 미신타파 운동의 일환으로 주민들에 의해 뱀신의 화상이 소각되고, 현재는 군왕을 중심으로 성주·사해(四海) 용왕장군·삼불·사해 오방장 등을 봉안하였다. 현재도 당집 등이 잘 보존되어 있고, 매월 정월 초이틀과 초사흘에 이곳에서 열린다. 붕기풍어제는 1977년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충남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살은 서해안과 남해안에 많이 남아있는 형식으로, 독은 돌(石)의 충청도 사투리고 살은 그물을 뜻한다. 몽산포에서 2km쯤 북쪽으로 떨어진 인하대 수산연구소 뒤편의 굴혈포에 있는 굴혈 독살은 1812년 무렵에 만들어졌는데, 태안을 비롯한 서해안이나 남해안에 산재한 전국의 200여 개 독살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고 현재도 활용되고 있어 2002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태안반도에는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일리포 등에 10여 개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만리포와 천리포의 독살은 이미 사라졌고, 백리포와 십리포, 일리포 등의 의항리 독살은 아직도 그 윤곽이 뚜렷하다.
모래사장의 오른쪽과 왼쪽 끝을 보면 둥그렇게 쌓은 돌담 흔적을 볼 수 있다. 그중 의항 독살은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주요 소득원이 되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굴을 채취하거나 배 타고 나가 고기를 낚기 때문에 효용성이 없어졌다고 한다.
군사적 요새지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어 군사상 중요한 임무를 맡아보게 하였고, 뱃길로 조선을 찾은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기도 하다. 안흥성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안의 건물은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동문은 수성루, 서문은 수홍루, 남문은 복파루, 북문은 삼성루라 불린다.
소근진성 소원면 소근리에 있는 소근진성(所斤鎭城)은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514년(중종 9년)에 성 둘레 2,165척으로 축성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에는 영조 당시의 수군 실태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서해 방비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면적 6,347㎡, 성의 둘레 630m, 높이 3m.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성이 폐쇄되어 성벽의 일부와 동문지 부근 110m 정도가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성벽은 바닥 너비 8m, 외벽 높이 4.4m, 내벽 높이 2m, 윗면 너비 1.7m.
성벽 안쪽은 군사들이 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흙을 성벽 안쪽에 쌓았으므로 바깥쪽에 비해 얕으며, 동쪽 밖으로는 성벽에서 4.5m 떨어진 곳에 해자가 가설되었는데, 깊이 2.1m, 폭 6m다. 서벽은 성 내부가 바다에 접하면서 비교적 평평하며 서문지가 확인되는데, 문의 폭은 3.3m며, 이를 지나면 너비 7.6m의 도로가 보인다. 동쪽·남쪽·북쪽 벽은 해발 40~50m의 능선 위에 축조하였는데, 성외벽으로 가파른 비탈에 접해 있어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요새다. 동문·서문·북문의 흔적이 보이나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며, 동문지는 폭이 4.2m며, 북쪽 벽은 석축 5단이 남아 있다. 성에서 백자조각과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이 출토되었으며, 성안에는 우물 1곳이 있다. 1993년 충남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인쇄소 보성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3·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다 출옥, 3년간 ‘한국독립비사’를 집필했다. 또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도 이바지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86년 원래의 생가터인 원북면 반계리에 집을 복원하였고 사당은 1990년 완공하였다. 1994년부터 본격적인 생가지 복원 사업을 실시하여 주변을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았고, 옥파의 생전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 등도 갖추었다. 충남기념물 제85호. 관람시간은 09:00~18:00(동절기 17:00). 관람료는 무료. 전화 041-670-2245
파도리 해옥전시장 파도리 해안을 유명하게 만든 해옥 장신구는 태안의 특산품.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의 멋이 물씬 풍기는 데다 특히 돌 속까지 색을 배게 하는 착색기법으로 사랑받고 있다. 전국 토산품 경진대회와 산업박람회 등에서 여러 차례 상을 타는 등 그 아름다움도 인정받았다. 가까운 일본과 대만, 그리고 서독, 미국, 캐나다 등지에도 수출한다.
해옥 전시장엔 반지, 목걸이, 팔지, 귀걸이, 열쇠고리, 염주 등 앙증맞은 액세서리서부터 꽃나무, 등잔, 거실탁자 등 덩치가 큰 것까지 수십 종에 이른다. 지난 84년에는 자연석 가공에 의한 특허를 얻어내기도 했고, 99년에는 월드컵 관련 생산 유망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0~3,000원 정도면 앙증맞은 해옥을 구입할 수 있다. 전화 041-672-9898
천리포수목원 천리포 해안에 위치한 천리포수목원은 1979년에 귀화한 민병갈(閔丙渴· Carl Ferris Miller·1921-2002)씨가 1962년 구입한 사질 토양의 6,000평의 임야를 기반으로 이룩한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 수목원이다. 현재 국내의 자생 수종을 비롯해 미국 등 60여 개국으로부터 수집된 식물들은 목련을 비롯하여 약 6,686종에 이른다. 그동안 국내 모든 관련 분야와 학과의 전문인들에게 연구와 실험자료로서 활용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식물자원의 가치와 그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약 60ha(18만평)으로 이루어진 천리포수목원은 크게 7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의 토질·기후, 기존 식물상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 따라 종류별로 적절히 배치관리하고 있다. 주요 수종은 목련속 약 400종, 감탕나무속 370종을 비롯해 침엽수 종류와 매자나무속, 진달래속, 참나무속, 단풍나무속, 분꽃나무속, 녹나무과 등이다.
천리포수목원은 식물 관련학과나 관련 기관의 교육과 연구목적을 위한 경우와 후원회 회원에 가입한 사람에게만 개방한다. 전화 041-672-9310, 672-9983 홈페이지 www.chollipo.org
신두리 해안의 만입부에 있는 사빈(砂濱)의 배후를 따라 분포하는데, 겨울철에는 강한 북서풍의 영향을 받는다. 인접 해역이 대체로 모래로 구성되어 있어 간조 때가 되면 넓은 모래 갯벌과 해빈이 노출된다. 모래가 바람에 의해 갯벌과 해빈에서 육지로 이동되어 사구가 형성되기에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데다 멸종 위기종인 금개구리를 비롯해 표범장지뱀, 무자치, 갯방풍, 갯메꽃 등 다양한 식생 분포로 자연환경적 보존가치가 높다. 2002년 해양수산부는 신두사구 주변 해역 0.64㎢를 해양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태안마애삼존불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에 자리한 태을암 동쪽 50m 지점에 있는 자연 암벽에 조각된 불상. 남북으로 보살입상을 새겼으며, 중앙에 낮은 보살입상을 끼워 조각하였는데, 보살은 양손으로 보주를 받들고 머리에 삼산보관을 썼다. 양쪽 불상의 바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약합을 들었고, 어깨는 넓고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장방형의 얼굴에 귀가 길어 어깨에 닿았고,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표현되었다. 2여래 1보살 형식으로 높이는 왼쪽 불상이 2.07m, 오른쪽 불상이 2.09m, 중앙 보살이 1.3m이다. 1966년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었다.
마애불의 기원은 서기전 3~2세기 경의 인도 아잔타나 엘로라 등의 석굴사원에서 볼 수 있고, 중국의 윈깡룽먼 등의 석굴사원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태안의 백화산 중턱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이 초기의 것이라 한다. 백제는 태안마애삼존불을 통해 마애석상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인접한 서산마애삼존불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굴포조거 고려시대 지방에서 걷은 조세를 선박을 이용하여 운송하는 조운(漕運)제도가 정비되면서 태안반도는 위정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삼남(三南)의 세곡은 모두 서해를 통하여 보령 앞바다~태안 안흥량~당진 난지도를 경유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태안반도 앞바다인 안흥량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유속이 빠른 데다 암초도 많아 사고가 빈번하였다. 이는 재정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운하(運河)였다. 태안과 서산 사이의 금북정맥 산줄기를 파내고 운하를 만들면 안흥량을 전혀 거치지 않고도 바로 당진의 난지도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
운하공사는 고려 때인 1134년(인종 12년) 처음 시도했다. 하지만 이때는 10여 리를 파냈지만, 7리 정도만 남겨놓고 중단하였다가 1391년(공양왕 3년)에 다시 굴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지하에 암반이 깔려 있고 뻘흙을 개착하는 과정에서 조수에 밀려 계속 막히자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고려시대에 두 차례 실패하였던 운하 공사는 조선 태조 4년에 있었던 경상도 조운선 16척의 난파를 계기로 다시 논의되었지만, 지하에 암반층이 있어 굴착이 어렵다는 이유로 중지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안흥량에서의 사고가 이어지게 되자 태종 12년 이전과는 달리 갑문식(閘門式)과 유사한 형태의 운하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2월에 공사를 완공하였다. 이 방법은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물길을 연결시키는 방법이었는데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소규모의 배 1척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조수간만의 차로 실제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일수가 며칠 되지 않았다. 또한 조운선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조곡을 몇 차례 옮겨 실어야하기 때문에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다. 때문에 태종은 태안에 두 차례나 순행하는 등 운하의 개축문제에 고심하였으나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 후 이 문제는 적극적으로 논의되지 않다가 중종 때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 고형산의 건의에 의해 1522년(중종 17년)에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는 차선책으로 소원면 의항리 일대에서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공사도 착공 4개월만에 중단되었고, 1537년(중종 32년)에 다시 시작해 6개월만에 준공했으나 조수가 제대로 넘나들지 못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 대안으로 1638년(인조 16년)에 현재 안면도 북쪽의 개미목(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을 뚫는 데 성공했다.
마검포 실치회 실치회(뱅어회)는 봄철 모내기를 전후해 맛을 볼 수 있다. 보통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달포 동안 맛볼 수 있고, 5월에 잡히는 것들은 뼈가 생겨 회로 먹기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뱅어포로 만들어 반찬으로 활용된다. 주로 2톤짜리 소형 어선으로 잡는 실치는 말 그대로 2~5cm 사이의 실처럼 가늘고 조그만 생선으로 살아있을 때는 뱃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성질도 급하고 연약해 그물에 잡힌 지 채 1분도 안돼 바로 죽는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나면 투명하던 살색도 하얗게 변하고 한나절이 지나면 맛이 가기 시작한다. 실치회를 마검포 현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치가 가장 많이 잡히고 맛있는 시기는 4월이다. 이때가 되면 마검포 앞바다는 실치잡이배들로 새벽부터 불야성을 이룬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3시쯤, 적막을 깨고 활기차게 출어한 선박들은 서너 시간 동안 그물질을 한 후 오전 7~8시경 실치를 가득 싣고 마검포항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마검포항은 각지에서 가장 싱싱한 실치회를 맛보려 몰려드는 사람들로 다시 활기가 넘친다.
설치회는 각종 양념과 야채에다 초고추장을 듬뿍 뿌리고 배를 잘게 썰어 넣어 새콤달콤한 맛을 낸다. 입에 넣으면 술술 넘어가는데, 다른 생선회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맛이 난다. 3~4인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1kg에 20,000원선이다. 마검포 항구에 선창횟집(041-674-6270)과 바다횟집(041-674-6563) 두 집이 있다.
보통 5~7월에 잡히는 7~10cm 정도의 어린 세발낙지를 박속과 양념을 넣고 끓인 물에 살짝 익힌 후 낙지는 건져서 먹고, 낙지의 맛이 우러난 국물에 칼국수나 수제비 등을 넣어 익히면 담백한 박속과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낸다.
낙지 낚시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제일 많이 하는 것은 능젱이(칠게)를 미끼로 만들어 배를 타고 나가는 ‘주낚’이다. 낚싯줄에 능젱이를 묶어 바닷물에 던지면 갯벌에 숨어있던 낙지가 미끼를 문다. 이 때 줄을 거두면서 낙지를 잡는 것이다. 또 간조 때 삽이나 호미로 갯벌을 파서 잡는 ‘삽낚’, 밤에 횃불을 켜고 잡는 ‘횃불낚’이 있다.
박속낙지탕은 원북면 소재지의 원이식당(041-672-5052), 삼거리한우식당(041-672-4540) 등이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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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일정별 길라잡이,교통·숙박
- 일정별 길라잡이
중부 서해안에 자리하고 있는 태안은 서해안 고속도로로의 접근이 쉬워 수도권 등 웬만한 지역에서는 당일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서해 일몰을 구경하고 해안이나 섬 풍경을 둘러보려면 최소 1박2일 정도는 잡는 게 좋다. 또 평소 가보기 힘든 독살이나 굴포 등을 둘러보고 해안선을 따라 일주하고 싶다면 2박3일은 잡아야 한다.
●당일 점심 무렵에 태안에 들어설 수 있도록 계획을 짜면 된다. 이 경우에는 안면도에서 가장 끌리는 해안에 들른 다음 남쪽 끝의 영목항까지 다녀올 수 있다. 만약 꽃지 해안에서 낙조를 볼 요량이라면 해 지기 전에 안면도를 둘러보고 늦어도 일몰 시간 30분쯤 전에 도착해야 한다.
●1박2일 태안의 해안선과 안면도를 둘러보고 두 군데에서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첫날은 안면도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유명한 꽃지 해안엔 숙박객들이 많지만 여름 성수기가 아닐 때는 예약하지 않아도 괜찮다. 해안을 돌아다니다가 바닷가에서 전망이 좋거나 파돗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호젓한 숙박지를 선택하는 것도 좋다. 방포 등이 조용하다. 그리고 이튿날 태안으로 이동해 안흥항 등의 근흥면, 소원면의 파도리~의항 해안선을 돌아본 다음, 신두리 모래언덕을 보고 귀가하면 된다.
●2박3일 태안과 친해질 수 있는 일정이다. 첫날엔 안면도에서 묵고, 이튿날은 황도와 굴혈 독살을 구경하고 태안읍을 거쳐 안흥항과 신진도 등을 둘러본 뒤 어은돌 해안으로 넘어가서 일박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소근진과 신두사구와 학암포를 둘러본 뒤 원북면 소재지에서 박속낙지를 맛보고, 오후에 이원면 해안관광도로를 달리면서 태안의 북쪽 끄트머리인 만대까지 다녀온 다음 태안으로 나간다. 그리고 백화산 태안마애삼존불과 굴포 등을 둘러보고 귀가한다.
●필자 답사코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 나들목~32번 국도~서산~태안~77번 국도~마검포~안면도~방포(1박), 안면도 자연휴양림~패총박물관~영목항~77번 국도~황도~몽산포~굴혈 독살~77번 국도~태안~603번 지방도~연포~안흥항~신진도~603번 지방도~32번 국도~파도리~어은돌(2박), 만리포~천리포~백리포~의항~소근진~신두사구~옥파 이종일 생가~634번 지방도~학암포~원북면~603번 지방도~이원면 만대~603번 지방도~태안~백화산~태안마애삼존불~굴포~서해안 고속도로 서산 나들목.
교통·숙박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로 접근하는 게 가장 편리하다. 태안 읍내로 접근하려면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으로 나오고, 안면도를 먼저 들르려면 홍성 나들목으로 나와 접근하면 된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으로 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서산을 거치면 태안 읍내. 계속 32번 국도를 타고 2km쯤 달리면 만리포와 안흥항으로 갈리는 삼거리다. 여기서 우회전해 32번 국도를 따라 14km쯤 가면 32번 국도의 끝인 만리포. 삼거리서 620번 지방도를 따라 9km 가면 왼쪽이 연포, 계속 직진해 6km 더 가면 안흥항이다. 태안 읍내서 안면도로 가려면 77번 국도를 타고 남진해 안면교를 건넌다. 꽃지 해안은 안면교에서 계속 77번 국도를 따라 11km쯤 가면 된다.
●시외버스
서울 남부버스터미널과 대전 서부터미널에서 고속직행버스가 다닌다. 여름에는 만리포·안면도행 등의 버스가 증편된다. 태안 시외버스터미널(041-674-2009).
서울→태안=1일 36회(06:30~19:10) 운행. 2시간30분 소요. 서울 남부터미널 전화 02-521-8550.
대전→태안=1일 30회(07:26~18:47) 운행. 3시간 소요. 대전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전화 042-584-1615~6.
●열차
장항선을 이용해 홍성역에서 하차한 다음, 홍성~태안간 직행버스를 이용한다. 홍성 시외버스터미널 전화 041-632-2425. 또 경부선이나 호남선을 타고 천안·대전 등에서 하차해 태안행 시외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고속버스 안내센터 : 1544-5551
*철도고객 안내센터 : 1544-7788
*승차권 예약 : 철도회원전용(1544-8545 www.barota.com)
*철도청 홈페이지 : www.korail.go.kr
●숙박
읍내보다 해안의 항·포구나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곳에 깨끗한 숙박업소가 많다. 안면도의 백사장 해수욕장, 꽃지 해안의 해안도로 양쪽, 꽃지 해안 부근, 몽산포~청포대 구간, 안흥항 부근, 그리고 근흥면의 연포, 소원면의 파도리~의항분교 사이 해안, 원북면의 학암포 등에 여관과 민박집 등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
*태안군청 문화관광과 041-670-2544
*태안군 홈페이지 www.taean-gun.chungnam.kr
*태안 해안국립공원 041-672-9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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