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밥을 먹고있자니 수저를 들고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굉장히 드문 일........
아마도 큰아버지와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나보다. 기분이 좋을때면 유독 더 다정해지고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니까.......
"너는....... 나를 닮은 구석이 없구나..... 쿡쿡....... 하긴 애초에 조금이라도 날 닮았었다면 데리고 오지도
않았겠지만. 아니지...... 데리고 오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죽여버렸을지도... 그래..... 죽였겠지. 정말 다행이지?
날 닮지 않았으니. 쿡..........."
저 아름다운 입술이나 다정한 말투에서 어떻게 이런 잔인한 말이 나오는 걸까?
때때로 들어서 이젠 무감각해져버렸지만 그래도 조금은 가슴이 아프다.
철저하게 잔인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
대답없이 밥만 먹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거 아니? 아들아..... 니 어미가........ 죽었다던데..........."
........... 그랬던가?
처음 듣는 이야기.......
조금 놀랍지만..... 겉으로 내보이지는 않았다.
며칠만에 듣는 그의 긴 이야기가...... 목소리가..... 끊어지는 건 원치 않는다.
"어떻게 죽었더라? 아.....그래....... 교통사고였다지....... 한 사나흘 됐던가? 내가 깜빡하고 너한테 말하는 걸
잊어버렸어........ 장례식에도 못가다니...... 안타깝네.........."
말과는 달리 느긋한 목소리........ 새빨간 거짓말..........
조용히 국을 떠먹으려니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겨준다.
이것은 상.......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해준 것에 대한....
그가 요구했던 수많은 사항들 중, 어머니를 마음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라고 했던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상이다.
천천히 국을 삼키며 아버지의 다정한 손길을 즐겼다.
"쿡쿡..... 정말....... 잘됐지? 너는 내 것이니까....... 니 어미가 살아있으면 웬지 불쾌했거든. 어쨌든 넌 내곁을
떠나지 않겠지만. 아아.... 그리고보니...... 그 여자 예전에 내 현우랑 잔 적이 있었구나.
하긴 그게 아니었다면 그 따위 여자 안지도 않았겠지만. 아들아....... 넌 내곁을 떠나지 않을꺼지?"
"......네."
그가 원하는 대답.
정작 사랑해주지는 않으면서 이상하게도 나에게 집착하는 사람.
조금의 애정도 없으면서 자신의 아들. 아니 자신의 것인 나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사람.
하지만 섭섭해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다.
사랑받지는 못해도 그는 나를 원하고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나도 조금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니까....
그것으로도 만족한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가식으로 대하는 아버지지만 나에게는 자신의 진실을 숨기지 않는다.
마치 자신을 미워하라는 듯이 가증스러운 속내를 털어놓는다.
즐거운 듯이..... 내가 자신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식사를 마치고 수저를 내려놓자 다시 싱긋 웃으며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늘 해주는 말을 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훗....... 그래...... 착한 아이구나......."
< 31 >
가끔 날 아는 누군가는 나에게 '넌 미쳤다'라고 말한다.
그럼 난 방긋이 웃어주며 대답하곤 한다.
그래 난 그에게 미쳐있어.
그와 나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에게 미쳐있는 나의 심장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나는 그에게 미쳐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야.
그것이 나의 유일한 존재이유.
너에게 미치다.
나른한 몸을 현우에게 기댄 채 졸린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굉장히 평안한 느낌이랄까?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가진 듯한 포만감과 만족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다.
그다지 넓지못한 쇼파에 앉아있는 현우의 무릎사이에 눕다시피 기댄 자세로 손을 뒤로 뻗어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작 거렸다.
그러자 내 손가락을 잡아 살짝 입을 맞추는 내 연인...
그 살짝닿는 입맞춤이 기분좋아 단단한 현우의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괜찮아?"
쿡....... 벌써 3번째 괜찮냐고 물어오는 현우의 팔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상관없지만 쇼파 위에서 불편한 자세로 안긴 내가 걱정스러운 모양.......
솔직히 허리가 꽤나 삐거덕거리긴 하지만...... 그저 행복할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첫 섹스를 마친 느낌은......
뭐랄까........ 하아...... 말로 설명하기가 모호하다.
단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더할나위없이 행복하다는 것.
"현우?"
"...........미안하다........."
내 오른쪽 등에 나있는 선명한 흉터를 살짝 매만지다 죄책감 깃든 목소리로 사과하는 현우를 몸을 돌려 꼭 껴안았다.
미안하긴....... 미안하긴........ 이 정도 상처쯤 널 얻기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아닌데.......
"괜찮아... 사랑해 현우......."
"미안하다........."
후...... 사랑한다 말해주는 것이 훨씬 행복할텐데..... 끝까지 사과만 하는 착한 현우......
현우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한치의 틈도없이 몸을 맞댔다.
아아....... 그래도 나 명색이 학생회장인데.........
이렇게 학생회장실 쇼파에서 벌거벗은 차림으로 동생과 살을 맞대고 있다......라니....
뭐...... 상관없지만.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안아오는 현우의 단단한 팔을 느끼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내 것.
완벽한 내 것.
안타깝게도 이리저리 괴롭혀버렸지만........
내 품에 완전히 들어온 이상 행복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내 사람.
옛날 옛적에....... 어둠속에 사는 교활한 악마가 있었데......
하지만 빛과 어둠은 동시에 공존해야 하는 법.......
그래서 신은 악마를 만들 때 빛의 축복을 받은 천사도 함께 만드신거야.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어.
교활하고 가증스러운 악마는 자신과 함께 창조된 천사를 너무나 깊이 사랑해버린거야....
하지만....... 사랑에 빠졌다고해도 악마는 악마.......
사랑에 빠진 그는 천사곁을 떠돌며 자신이 빛의 축복을 받은 존재인마냥 유혹했지.
천사는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을 까마득히 모른체 악마를 사랑하게 되버렸어.
하지만 가증스러운 악마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어.
자신이 천사의 모든 것이길 바라고, 그가 자신만의 것이길 바랬던거야.
그래서 악마는 오랜시간을 들여 교묘하게 함정을 파고 천사를 끌어들였어.
자신이 빠졌다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교묘한 함정속으로......
결국 악마는 성공했지.... 오랜 기다림과 노력의 결실을 맺었어.
천사는 더 이상 빛속에 존재하지 못하게 타락해버렸고 그 눈에는 악마만을 담고 사랑하게 되버렸어......
천사는...... 악마에게 사랑받아 검은색으로 물들어버린거야.....
다정한 천사의 품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악마는 신에게 이렇게 말했어.
신이여..... 이것을 보십시오........
당신이 만든 찬란한 빛의 축복을 받은 천사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을 보지 않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눈은 나만을 응시하고, 그의 귀는 나의 목소리를 듣기위해만 열려있습니다.
비록 내가 천사를 사랑하고 사랑했지만 결국 나는 악마지요.......
악마에게 유혹당해 타락하고 검은색에 물들어버린 천사는........
그래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나의 유혹때문일지언정 말입니다.......
제가 가장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줄테니까요..... 이제..... 내 것입니다.......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