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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갈곳이 없다
홍경삼
어린시절 장마철이면 비가 멈춘 후 작은 도랑을 막아 물이 고이게 한 다음
다른 패는 아래에 둑을 쌓아 내려 올 물을 모두 저장을 하면 이기고
무너지면 지는 보치기(?)란 시합이 있었다.
봇물이 터지듯이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 신이 난 아이들, 무너질까? 戰戰兢兢하는 아이들.
지나던 어른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결과에 아이들과 환호한다.
요즘 미국은 covid-19으로 집콕들 하다가 2차접종을 마친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못가는 대신
하와이 아니면 경치 좋은 국립공원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데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 바람에
이름 있는 관광지는 人山人海란다. 국립공원은 예약한 사람만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온 사람들은
입장불가라 되돌아갔다고 한다.
어제 뉴스에 오레곤주에서 코로라도의 국립공원에 예약없이 왔다가 한시간을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돌아갔고 몬타나주의 크레시아 국립공원은 따로 발표하기를 공원 110년 역사상 다음 주부터 가장 많은 사람이 올것이기에
예약이 있다하드라도 교통체중, 주차문제를 염두에 두고 인내심을 가지고 오란다.
Yellowstone Park내의 도로는 대도시의 도로 처럼 차가 많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원 안에 있는 유명한 호텔은 $2,000/one night인데도 잡기가 힘들다고. 입장이 자동적으로 허락되기에.
그동안 침체되여 손해본것을 挽回했으면 좋겠다.
우린 두달 전에 요세미티등 야생화가 많은 곳을 다녀왔기에 요즘은 집근처에서 산책과 등산을 즐긴다.
여행은 몸과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함인데 이런 상황에서 왜 여행을 떠날까?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다음주(6월7일)부터는 정말 심각하게 붐빌것이란다.
여행을 포기한 사람들은 정원일에 힘을 쏫아 화원이 호황을 누리고 전기기기등을 바꾸기에
나의 경우 오래된 미제 냉장고를 버리고 그렇게 갖고 싶던 LG냉장고를 주문했는데
이틀이면 족할 것이 12일만에 배달이 되었다. 역시 LG제품이 좋다! 좋아!
<화가/전 北加州 서울대총동창회장/샌프란시스코 거주/(兒名)'병길'/
서울사대부고~서울대 문리대 정치외교학부(외교) 졸>
1921년 털사, 2021년 미국
권정희
‘투자의 귀재’이자 ‘현인’으로 불리는 워렌 버핏(90)은 자신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운 좋게도 미국에서 태어난 덕분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제3세계 어느 빈국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인생여정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성공 가능성과 성취의 정도는 현격히 낮아졌을 것이다.
운 좋게도 미국에서 백인남성으로 태어난 덕분에 그의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겠다.
같은 나라에서 백인으로 태어나느냐 흑인으로 태어나느냐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같던 것이 미국의 역사이다.
운명의 신이 아기의 피부가 하야면 천국 바구니, 까마면 지옥 바구니에 담는다고 할 정도로
흑인의 삶의 조건은 가혹했다. 노예제도가 대표적이고, 노예해방 이후에도 근본적 변화는 없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00년 전 털사 인종대학살이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은 이후 40~50년 정치적, 경제적으로
사상유례가 없는 발전을 했다. 중산층이 늘고 경제력이 쑥쑥 커지면서 ‘블랙 월스트릿’이라 불리는
번창한 흑인커뮤니티가 전국 여럿 곳에 등장했다.
흑인차별이 당연시 되던 당시 백인들에게는 눈꼴 신 광경이었다.
여기에 팬데믹과 1차 대전 여파가 맞물리면서 1920년 전후 백인들의 심사는 불편했다.
스페인독감이 휩쓸면서 두려움과 불확실성으로 불안감이 팽배하던 차에 1차 대전 참전 후 돌아온 백인들은
일자리가 없었다. 과거 그들의 일자리를 흑인과 이민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재정적 불안에 인종적 편견이 겹쳐지면서 백인사회는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한편 유럽의 전쟁터에서 돌아온 근 40만 흑인 참전용사들은
인종테러와 구조적 인종차별이 여전한 것에 분노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우며 대등한 대우를 경험한 그들은 정치행동에 돌입했다.
유색인종 지위향상협의회(NAACP) 등 흑인단체들이 주도한 민권운동의 시작이었다.
불안해진 백인들과 당당해진 흑인들이 대립하면서 사회분위기는 날로 살얼음판이 되었다.
1919년 여름 전국 30여개 도시에서 인종 테러사건들이 발생, 흑인 사상자가 수천명에 달하고
린치(사적 교수형)로 희생된 흑인이 100여명에 달했다. 유사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1921년 5월 31일 밤부터 6월 1일까지 벌어진 인종대학살은 그중에서도 잔혹했다.
경찰, 셰리프 등이 버젓이 참가한 백인폭도들이 흑인 거주지역인 그린우드 35개 블록을 일일이 돌며
약탈하고 불 지르고 죽이기를 18시간 동안 계속했다. 그도 모자라 전투기 6대가 동원돼 폭격까지 했다.
흑인 300명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당하거나 불구가 되고, 건물 1,200채가 파괴되면서
‘블랙 월스트릿’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흔들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흑인청년이 백인 안내양을
건드렸다는 것이 이 엄청난 비극의 발단이었다.
털사 다운타운의 구두닦이였던 청년은 흑인용 공중화장실을 쓰려고 한 빌딩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안내양이 비명을 지르자 주위 사람들이 청년을 두들겨 팬 후 경찰에 넘겼고,
청년은 성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흑인들, 분노한 백인들이 총격전을 벌이면서
양측의 증오가 폭발, 결국 흑인동네 하나가 완전히 초토화했다.
미 역사상 최악의 인종테러사건은 1997년 주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 근 80년 묻혀있었다.
백인폭도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교과서에 한줄 기록도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1년, 미국은 얼마나 변했는가.
지난달 31일 바이든 대통령은 털사 인종대학살 희생자 추모연설에서
미국에 엄존하는 인종테러의 깊은 뿌리를 인정하며 “우리의 법과 정책과 마음속으로부터
조직적 인종주의의 뿌리를 뽑도록” 최선을 다할 뜻을 밝혔다.
조직적 인종차별이란 유색인종에 대한 주거 및 취업차별, 교육과 사법제도 속 불평등을 말한다.
유색인종 거주지역을 제한하고 특정지역에만 저소득층 주거시설을 건설하면,
자연스럽게 흑인/히스패닉 하층민 지역이 형성된다. LA의 사우스 센추럴 같은 곳이다.
빈곤지역으로 굳어지면서 부동산 투자나 개발은 거의 없고, 교육시설 및 교육의 질은 떨어지고,
저소득층 지역이니 고용기회도 줄어들면서 범죄율과 수감률이 높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아동들은 하층민이 되는 지름길 속에 성장하고 빈곤은 대물림 된다.
조직적 인종주의의 결과이다.
법이 평등을 보장한다고 모두가 평등하게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법이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누구나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소득층의 거주이전의 자유는 돈이 막고, 빈곤층 흑인/히스패닉 밀집지역은 주류문화로부터 단절돼있으니
사실상 인종분리이다. 제대로 교육받고 직장 잡아 번듯하게 살고 싶은 욕망,
하지만 도무지 기회가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클 때 절도강도 등 범법행위는 끼어든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말하는 아노미 현상이다. 범법이 다수에 의해 반복되면서
흑인은 범법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낙인과 인종차별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1년 전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경관의 무릎에 목을 짓눌려 질식사한 사건은
미국 인종주의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털사 대학살 100년 후 미국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높다.
<美洲한국일보 논설위원, 전 주필/서울본사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한국일보 견습31기) 역임/
숙명여고~서울대 사대 불어교육과 졸/LA거주>
2년전 오늘(2019.6.5)
글방에 실린 글 셋 쪽
#1 "모세는 120 아닌 92살에 죽었습니다"
신복룡 -내 Bucket List;『성경 새로 쓰기』
신우재 회장님, 김승웅 방장님,
글방의 여러 어른들 그리고 식구들께
오랫동안 인사리지 못했음을 송구하게 생각하며,
초하(初夏)의 인사를 여쭙니다..
본디 게으른데다가 요즘 제 생애의 고비를 결정하는 일이 생겨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 고민하느라고
일이 손에 잡혀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혹시 믿음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종교를 가리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요즘에 글을 쓰지 않는다고
방장님의 구박이 장화/홍련의 어미보다 심합니다.
그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아무것도 못하는 시간에 마음을 달래려고
틈틈이 성경의 우리말 다듬기를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저는 우리말 성경이 우리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하느님이 나에게 시간을 주신다면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싶었다는
야고보의 고백(『신약성경 야고보서』 4 : 15)처럼,
저도 하느님이 저에게 시간을 허락하신다면 하고 싶었던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말 성경을 다시 쓰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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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경을 다시 쓰면서 신학상의 논쟁이나 신/구교 사이의
해석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고, 또 그럴 게제도 아닙니다.
저는 다만 사어(死語)와 조어(造語), 틀린 문법, 일본식 표기, 영어식 표기,
중국 용어 등을 바로잡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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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수모(受侮)를 받다”(수모를 겪다)(『구약성경 느헤미야』 21: 17)와
같은 경우입니다. “수모(受侮)를 받다”라고 하면 “수모를 받는 일을 받았다”가
되는 셈이지요. 이태백(李太白)의 시[將進酒]에,
“하늘이 나에게 이런 재주를 주셨을 적에는 반드시 쓸 곳이 있었을 것이니”
(天生我材必有用)라고 했는데,
저는 『전봉준평전』(全琫準評傳), 엔닌(圓仁) 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한말외국인기록』(전23권),
『한국분단사연구 : 1943-1953』, 『한국정치사상사』,
『삼국지』(三國志), 『플루타크영웅전』 그리고 이 『우리말 성경』을 쓰라고
하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소명을 느끼며 글을 썼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대한 유감
오늘은 구약의 『느헤미야』를 다시 쓰는 날이었는데,
마침 글방의 글이 와서 읽다가 호주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하신다는
김봉주 선생님의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의 나이가 969세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평소에 구약시대의 달력과 수명에 대하여 글을 쓰고 싶던 차에
이때다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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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신학 논쟁에 연루되지 않는다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본이 책으로 출판될 가능성은 1마이크로그램도 안 되지만,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어떤 형태로든 독자들에게 다가갈 경우에
내가 이단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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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예수 믿는 신학자나 국어학자도 없는지,
말이 안 되는 성서를 저렇게 방치한다면, 천학(淺學)한 저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에서 임 머시기 주필이 해야 할 일을 제가 시작했으니
강호의 고수들께서는 저의 미충을 무안하게 나무라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구약시대의 달력에 관하여
그동안 다듬어온 성경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면 그 분량이 한이 없을 것이고,
오늘은 다만 김봉주 선생님께서 궁금히 여기신
달력과 고대인의 장수한 나이에 관해서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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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세라가 969년을 살았다는 기록[『구약성서 창세기』
5 : 21-27 ]은 신화시대의 일이라 치고 더 이상 따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단군(檀君)이 곰과 결혼하여 아이를 난 것을 따져보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엇비슷하게 나오는 모세부터 얘기를 해보면
그는 12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구약성경 신명기』 34 : 10 ]
원시시대에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지금과 달력 체계 곧 연력(年歷)의 계산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태초의 달력은 월력(月曆)이었습니다.
달력을 시작한 곳인 중동은 상하(常夏)의 계절이었기 때문에 태양력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주기와 시각 효과가 뚜렷한 월력을 사용했습니다..
(이때는 아프리카와 아세아가 연륙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도 중동 또는 아세아라 부르고 문명권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크레오파트라의 별장은 시리아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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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는 십진법을 쓰던 시절이었으니
당초에는 20일이 한 달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진법을 쓴 것은 열 개로 이뤄진 손가락으로 계산을 하던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다가 정기적인 상징을 따르다 보니 월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달의 모습이 바뀌는 28일이 한 달이라고 정했고,
그렇게 날짜를 정한 것은 인류역사상 계산과 상술(商術)이 가장 발달한
아랍 사람들이 월수(月收) 곧 빌려준 이자를 받고자 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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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endar의 어원은 “셈하다”(cal--)/ “빚”(kal--)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동 문화가 사계절을 알고 있는 라틴에로 옮겨 오면서 태양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1년은 12개월이 아니라 들쑥날쑥 했습니다.
한동안은 10개월을 주로 썼습니다.
첫달(1월)은 군신(軍神) 마르스(Mars)를 기념하여 March라 불렀고
마지막 10월은 10의 어근인 Deci--를 써서 December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 해 월마다 철[기후]이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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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민정치를 표방하고 라틴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군주인 솔론(Solon)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군신의 이름 Mars를 첫 달로 삼는 것이 좀 떫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Janus를 뜻하는 January를 1월이라 하고
정화(淨化)의 뜻인 februa를 따서 2월을 February라 하여 1년을 12개월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2개월씩 밀려 1월인 March는 3월이 되고
8의 어근인 Oct--를 따서 지은 8월(October)이 10월이 되고,
10월을 의미하던 December가 12월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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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1년이 10개월(280일)이던 구력(舊曆)이 12개월(336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달의 이름도 권력 있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July(Julius), August(Augustus), October(Octavianus)로 바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년 12개월의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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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아기스왕 시절의 탐관이었던 아게실라오스는
한 달 치 세금을 더 걷으려고 1년을 13개월로 쪼개어
무려 9년 동안이나 그런 짓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한 달이 더 짧았겠지요.
이와 같은 달력의 모순을 가장 과학적으로 이해한 인물은 줄리어스 시저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47년에 지금의 서양력을 창시했는데,
그때 그를 도왔던 천문학자들은 태양력의 주기가 365일 6시간이라고 계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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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 시대의 천문학자들은
1년이 365일 6시간이 아니라 365일 5시간 49분 46초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하루의 시차가 10분 14초가 틀린 것입니다.
그렇게 시저로부터 10분 14초가 틀린 1,535년 치를 합산해 보니 11일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황제는 1582년 10월 4일자를 기하여
그 다음 날을 10월 15일로 정함으로써 시저로부터 자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벌어졌던
시차를 메꾸었습니다. 그러니까 1582년 5월 11일부터 5월 14일까지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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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향후에는 그 시차 10분 14초를 합하여 4년이 지나면 하루를 보태어
2월을 29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윤년입니다.
그래서 서기 연도 가운데 4로 나누어지는 해를 윤년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잘 계산해 보면 4년의 오차의 합이 하루인데
어떻게 1,535년의 오차의 합이 11일 밖에 안 되나 하는 점을 깨달으려면
아직도 미적분을 푸시는 방장이나 전주 북중 출신의 머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왜 그렇게 11일로 되었는지는
저도 알아볼 만큼 알아보았지만 그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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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교하게 계산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오차가 다시 생겼는데
그 하루의 오차를 400년 동안 합산해보니 하루가 더 지난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서기 연도 가운데 400으로 나뉘어지는 해에는 하루를 빼서
2월에 29일이 아니라 28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곧 400년으로 나뉘는 해에는 윤달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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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실제 나이는 얼마나 될까?
얘기가 장황했습니다만,
구약 시대의 노인들은 백세를 장수했는가? 라는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면,
그렇게 장수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곧 한 달 28일의 10개월짜리 1년을 살았으면, 모세의 120세는,
그때 달력으로 계산하여 28×10×120=33,600일인데
이를 현대력으로 환산하여 33,600÷365=92세가 되니, 이는 가능한 수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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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식의 계산은 과학을 내세워 종교나 신학을 공격하려는 불신자나
무신론자를 입막음하려다 보니 마지못해 내세운 것이며,
사실은 과학으로 따질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불가에서 겁(劫)이라 할 때 그것이 몇 년이냐고 물으면,
천년마다 선녀가 목욕을 하러 선녀탕에 내려와 비단옷을 벗어 바위 위에 놓는데
그때 그 비단옷에 스쳐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 바위는 사방 여덟 자의 화강암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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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를 과학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무모하고
어리석을 짓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을 과학으로 해석하려는 분들은
이 점을 잠시 신의 영역으로 접어두시고 따지지 않는 것이
신성(神聖)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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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원불교든 미혹(迷惑)을 버리고
믿으시는 것이 저처럼 이 험한 세상 다치고 부딪치고 보대끼고 사는 사람에게
안식을 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미천한 생각이니
이 부족한 글을 소납하시기 바랍니다. -2019. 6. 4.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한국근현대사, 한국정치사상사), 건국대 중앙
(상허)도서관장, 대학원장 역임/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수상(2001, 2011)>
#2 공초문학상 시상식에서 뵌 국혜숙 회장님
손우현(右)
김승웅 선배님,
어제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던 제 27회 공초문학상 시상식에 갔다가
글방 식구이신 재능 시낭송협회 전 회장 국혜숙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시상식장에 들어선 저에게 국 회장님이 다가와 바로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처음 만남이지만
오랜 지인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글방의 위력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수상자는 선배님과 駐佛특파원과 외무부출입기자를 함께 하셨던
前 KBS 유럽총국장 유자효 시인(한불협회 이사/사진)입니다.
현재 월간 '대한언론'의 편집위원장으로,
평생 언론인과 시인의 두 가지 길을 가고 있는 유 시인은
우리 글방의 애독자이기도 합니다.
어제 찍은 사진 2장 첨부합니다. 유자효 시인
늘 감사드리며,
손우현 올림
<韓佛협회 회장,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객원교수/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사무총장,
대통령해외홍보비서관, 駐佛공사 겸 파리문화원장 역임/저서:"프랑스를 생각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馬山추억여행
구대열 - Á la recherche du temps perdu
三十年來返故鄕 삼십년래반고향
人亡宅廢又村荒 인망댁폐우촌황
삼십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아는 사람은 다 죽고 마을은 황폐하네
..........
乳號方通相泣下 유호방통상읍하
碧天如海月三庚 벽천여해월삼경
(노인이 된 옛 친구들이) 어릴 때 이름 알아보고 눈물짓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하늘은 바다같이 푸르고
달은 한 밤중 하늘에 걸려 있구나
서산대사의 환향(還鄕, 고향에 돌아와서)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60년, 정확히는 59년 만에 마산을 찾아 옛 친구들을 보았습니다.
6월 4일 저녁 한 식당에서 20명 가까이 되는 마산중학 친구들을 만났지요.
솔직히 말해 기억이 나는 친구는 한 사람 뿐이었지요.
가장 가깝게 지냈는데 정말로 나를 보기 위해 진주에서 넘어 왔다가 저녁 먹고
돌아갔습니다. 나머지도 대부분이 나를 알아보는데.... 내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에서 한참 뒤처집니다.
그러나… 마르셀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Á la recherche
du temps perdu)>와 같이 사소한 일이나 이야기 거리가 실마리가 되어
나의 의식이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면 뭔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시칠리아 기행문을 잠깐 미루고 이틀간 마산으로의 추억여행을 떠납니다.
3년 간 중학교를 다닌 곳이라 애틋한 정을 가진 곳이지만
연고가 없는 탓이라 찾을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마산에서 부산가는 길에 있던 조그만 마을 창원이 공업도시로 발전하면서
마산은 창원에 흡수되고 구마산, 신마산, 북마산 등으로 나뉘어 있던 도시가
북마산 쪽으로 팽창한 것이 부산과 비슷하지요.
고등학교를 어머니의 연고지인 부산으로 나가면서 마산과는 자연히 멀어졌지요.
한 때는 부산에서 고향 고성으로 가던 길에 무학산을 보고
그 밑에 있는 마산중학교를 회상하기도 했지만 지름길들이 생기면서
마산을 그대로 벗어나 버렸습니다.
마산으로의 추억여행이라...
여행을 하게 된 계가가 우습습니다. 부산고에 같이 다닌 마산 출신 바둑 친구가
몇 달 전에 마산중 출신인 A라는 친구를 아니냐고 물으면서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더군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마산중에서 졸업할 때 5명이 우등상을 받았는데
모두 만났으나 나만 못 보았다는 겁니다.
우등상이면 한 반에서 4-5명씩 받는 것인데 뭐 대단한 거냐고 했더니,
그때는 전교에서 5명이 받았으며 A도 그 중에 한명이라는 겁니다.
이상한 친구도 다 있네 하면서 보자고 했습지요.
A 라는 친구는 공부는 잘 했으나 집에 찢어질 대로 가난했다고 하군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가족들을 부양했고 지금은 견실한 중견기업을 경영한다는군요.
나는 3명이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더니 7명이 모였습니다.
A는 고생하던 이야기를 싫건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곤 자기는 글을 쓰지 못하는데 유일하게 남긴 글 한편이
중학교 교지에 실렸다는 겁니다.
그는 이 책을 찾기 위해 마산중학교를 수차례 방문하고 도서관들을 찾아 헤매고
주변의 여러 친구들에게 부탁했다는군요. 교지 이름이 ‘등불’이라 하네요.
집에서 본 것 같은데?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저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있더군요.
난 초등학교 6학년 때 고성군 내 여러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습자’(요즘 식으로
붓글씨) 대회에서 1등상 받은 것과 졸업 앨범 등 몇 개만 남겨두고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혹시나 해서 집에 와서 남은 물건들을 챙겨보니
‘등불’ 8호와 내가 졸업하던 해에 나온 10호가 있고
여기에 A라는 친구의 ‘3.15 투쟁 회상기’가 실려 있네요.
이 친구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당장 보자더군요.
어디 도망갈 것도 아니고 며칠 뒤 시칠리아 여행 다니 와서 보자고 했더니
보고 바로 돌려주겠다는 겁니다. 물건은 필요하고 소중이 여길 사람이 가져야한다면서
그 다음날 주었지요.
그는 책 증정식을 겸해 친구들이 다시 초청했습니다.
‘등불’ 10호를 제습제를 깐 진공 유리함에 넣어 가져왔더군요.
자신의 글은 근사하게 복사판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문제는 여기서 부터입니다.
책을 자기에게 넘겨주신 분이 저의 어머니라면서 꼭 어머니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겁니다. ‘그건 너와 나만 가면 되는 데 왜 다른 친구들을
데려가려 하느냐. 자기 부모 묘소에 참배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그럴 것 없다.’고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네요.
그리곤 마산으로 내려가는 KTX표를 7장 끊었다면서 카톡에 올리더군요.
‘그럼 좋다. 마산-고성은 요즘 40분이면 갈 수 있고 묘소가 새로 지은 고성경찰서 앞에
있으니 너와 나만 가기로 하고... 마산으로 추억여행 삼아 떠나자.’
4일 4명이 마산으로 내려가 마중 나온 친구의 차로 고성으로 갔습니다.
바둑 친구는 향까지 준비해 왔네요. 우리는 묘소에 절하고 다시 마산으로 왔지요.
그리고 마산중학교를 찾았습니다. 원래 공동묘지에 세운 학교라
짓궂은 친구들이 해골을 주워와 점심시간에 교탁위에 올려놓기도 했던 곳입니다.
아침조회시간이나 체육시간에 돌멩이 줍는 게 우리들 일이었지요.
돝섬에서 본 마산항 입구와 마창대교
한 친구는 ‘이 교정은 우리가 다 만든 거다.’ 하네요.
학교 바로 위에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1학년 때 이 부근에 살던 나는
한밤중에 담력을 키운다고 동네친구들과 가위바위보하면서 공동묘지를
들락거리기도 했습니다. 묘지 중간 쯤 큰 바위가 있는데 주변을 돌고 오는 코스였습니다.
봄에는 진달래가 온 산을 덮었지요.
지금은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군요. 그 많은 해골들들 어떻게 하고..... 아파트 위로
춤출 舞, 두루미 鶴, 학이 춤추는 모습이라는 무학산은 명산인데
비가 오면 몇 줄기 폭포가 길게 내려와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아파트에 가려 산 윗부분만 보이네요.
‘교정의 일목일초 눈에 어리네.’ 무심코 노래 가락이 나오네요.
중학교 졸업식에서 부른 졸업가입니다.
친구들에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게 있었냐면서 아무도 모르네요.
이날 저녁 식사 때 20여명의 친구들에게 불러주면서 다시 물었는데
헤어질 때 한 친구가 알려 줍니다.
들어도 띄엄띄엄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춘풍추우 흘러간 ...../ 교정의 일목일초 눈에
어리네/ 배우는(?) 우리들이 교정을 떠날 때/
형설의 월계관 높이 빛나오.’
물론 60년이 지나 교정의 일목일초는 그 때 그 나무들은 아니겠지요.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우리는 마산고등학교를 둘러보았습니다.
A라는 친구가 1999년 체육관 건립에 2천만 원을 기부했다는 현판을 발견하고는
좋아하네요. 그리곤 천천히 걸어서 3.15 의거탑, 몽고정, 3.15 당시 시민들이 몰려든
남성동 파출소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의거탑에 가기 전에 있는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는 3.15 당시 총탄 자국들이
보존되어 있네요. 당시는 매일 이곳을 다니면서도 보지 못하고 지났는데....
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 남은 3.15당시 총탄자국들
다음날 아침 해장을 하고 해변도로를 걸었습니다.
옛날 진주에서 온 친구와 이곳 해변에 앉아 꼬시락 낚시를 하고
개펄에서 갯지렁이를 잡으며 놀았는데.... 갯지렁이는 30cm정도 되는 지네 같은 발이 달린
시뻘건 놈인데 개펄에 손을 쑥 넣어 잡아 올리곤 했지요.
이놈들을 잡아서 꼬시락 낚시 미끼로 썼는지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좋던 개펄이 엄청난 규모로 매립되어 없어졌고
지금도 매립공사가 한창이군요.
정치하는 인간들이란 정말 한심하군요.
마산 앞바다는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이 눈에 보이네’와 같은
푸른 바다가 아닙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바다가 황토색으로 변합니다.
부산항은 홍수가 져도 푸르럼을 유지하지요.
부산항은 앞으로 망망대해로 틔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마산항은 지도를 거꾸로 보면 거제도가 요강 뚜껑같이 덮어
앞을 막아섰고 바로 그 뒤에 진해항이 있고 더 들어가서 마산항이 있습니다.
마산-진해항은 영국외교문서가 평한 대로 ‘동양 최고의 군항’입니다.
태풍이 심하면 진해에 있던 군함들이 마산항으로 피신 옵니다.
마산항 입구에는 돼지섬이라는 돝섬이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마산항은 이같이 깊숙이 들어있어 물의 순환이 느려
그대로 보존해도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려운데 이걸 매립하면 곧 죽어버릴 겁니다.
해안길을 걸으니 돝섬으로 가는 관광선이 보이네요.
10분 걸리는 돝섬으로 갔습니다. 마산에 있을 때는 항구 반대쪽에 있는 구실에는
놀러간 적이 있지만 돝섬은 처음입니다.
입구에 황금 돼지가 있는데 귀를 만지만 돈을 잘 번다고 하는군요.
귀를 잡고 사진 한 장 남겼습니다.
돝섬의 황금돼지 귀를 잡고
옛날 낚시하던 해변 물은 맑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마산 앞바다는 통영 같이 물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
런데 돝섬의 모래사장 부근 물은 너무 깨끗하군요.둘
레길을 걸으니 최치원의 월영대 전설에 관한 이야기도 있군요
.
물론 돝섬이 아니라 부근 합포구 월영동입니다.
내가 처음 마산에서 정착한 곳입니다. 당시는 화력발전소가 있어 하루 만에 시꺼먼
먼지가 창틀에 쌓여 문을 열어 놓을 수 없었던 지역이죠.
마산역 입구에는 노산 이은상의 ‘가고파’ 시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래 4절까지 적혀 있군요.
‘가고파’는 10연입니다. 저는 이중 5연을 좋아합니다.
물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노산 이은상 가고파 시비 앞에서
특히 마지막 행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가 바로 60년 전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요? - 2019.6.6.
<梨大정외과 명예교수, 前'이대학보' 편집인/ 국제정치학 박사(런던 LSE)/한국일보
사회, 외신부기자(한국일보 견습 22기)역임/近著:“삼국통일의 정치학"/
마산중~부산고~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고성 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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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문의 글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