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 소란스럽다. 분명 나는 기침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입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마 또다시 피를 토하고 있는 것 같다. 용주, 아니 니콜한테 이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왜 조금만 더 참지 못했을까.
사람들이 나한테로 몰려드는 것이 공기의 흔들림과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로 느껴진다. 나는 그 사람들한테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사정한다. 저 착한 사람들에게 나의 더러운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 니콜도 그 사람들 속에 섞여있지 않기를 바란다. 피도 피이지만 다시 한 번 그녀석을 위한답시고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이 만남은 그 아이가 매정한 나를 이기고 그동안 힘들었던 모든 것들을 청산하기 위해 나와 규리가 만든 자리이다. 그렇기에 그 아이를 또다시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그 아이가 허탈해할 정도로 나의 초라하고 약한 면을 보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운은 끝까지 나를 따라주지 않는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다. 이미 빛을 잃어버린 눈이지만 나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까무룩 잠들기 직전 나는 나를 감싼 어둠 속에서 열 한 살의 똑부러졌던 소녀와 여덟 살의 다정했던 그녀의 동생이 서로 손을 잡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고가 났던 날이자 용주가 고아원을 떠나는 날을 이틀 남겨 놓고 있을 때 용주는 아침 일찍 양부모가 될 사람들을 따라 고아원 밖으로 나갔다. 그 사람들은 용주에게 친절하게 굴면서 자신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선물들을 그녀에게 주었고 용주도 새로운 부모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뻤는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용주를 보내야 한다는 것에 슬픔을 느끼면서도 이제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예쁨받고 자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나 스스로를 달랬다.
"스여나."
나는 이런 감상에 한참 몰두하고 있다가 규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나와 용주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머뭇거리다가 용주가 있는 힘껏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그 사람들의 차를 타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에야 다시 나한테 수화로 말을 걸었다.
'용주 엄마아빠 될 사람들, 이상해.'
'뭐가?'
'어 그게......'
나도 그녀에게 수화로 말했고 그녀 역시 나의 말에 대답하려고 손을 들려다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고 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성급했나봐.'
'뭐야.'
나는 규리의 팔을 한 대 찰지게 때리면서 그녀를 타박했고 그녀는 맞은 팔을 쓰다듬으면서 울상을 지었다. 나는 비록 나의 동생이 나의 품을 떠난다는 것이 가슴 아프기는 해도 동생의 부모가 될 사람들에 대해 쓸데없이 험담하려는 사람들을 봐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용주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선생님들의 일을 알아서 도와주기도 하고 대여섯살 먹은 아이들의 산수 교사 노릇을 하며 규리와 함께 독순술을 익히는 등 평소처럼 지냈다. 왜냐하면 용주의 기억 속에 내가 언제나 듬직하고 평온한 언니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냉면 다음으로 좋아하는 매운 라면을 남몰래 하나 꿍쳐놓기는 했지만.
늦은 저녁에는 용주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녀석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양부모에게서 받은 선물인, 한 눈에 보기에도 부티나고 정말 예쁜 인형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이 정말 사랑스러우니 어디가서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혹시나 내가 그리워서 울지나 않을까라고 불안해하기도 했으며 이렇게 일찍 헤어질 줄 알았다면 더 마음을 다해 그 녀석을 아껴줄 걸 후회하기도 했다. 솔직히 나의 그 모든 감정을 지금까지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아무튼 그 녀석의 자랑을 묵묵히 듣다가 너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용주는 자신의 입을 꾹 다문 채 인형만 만지작 거리다 울면서 나한테 안겼다. 나는 그 녀석을 달래주었다.
"괜찮아. 울지마. 그 분들은 너를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언니보다 더 널 사랑해주실 거야."
"하지만 친구들이랑, 언니 오빠랑, 선생님들을 못 만나게 되잖아. 그건 싫어."
나는 무력함을 느꼈다. 헤어지기 싫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내가 이 순간 이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은 쓸데없이 결정된 일을 초치지 않고 용주에게 모든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라고 그 때는 생각했다.
"원래 사람 사는 게 그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거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거야."
"그래도 싫어. 언닌 너무 어려운 말만 해. 그냥 같이 가자. 언니만이라도. 아저씨 아줌마네 집은 무지 잘 산댔어. 미국도 부자 나라라고 그랬어. 내가 조르면 아저씨는 언니도 데려갈 거야."
하...... 그렇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너무 슬프고 나의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용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뻘개지는 눈시울을 억지로 무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거기 가서도 언니가 보고 싶으면 정말 남 부럽지 않게 커서 찾아와. 그럼 내가 너한테 냉면 한 그릇 사줄게."
"진짜?"
나는 더 이상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꼭 안기만 했다. 그 때 규리가 방으로 들어와 우리한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이 날 아침보다도 훨씬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스여나. 요주 대리고 강은 사라암......"
"규리 언니?"
그녀는 용주의 말을 채 듣지 못한 것인지 계속 이리저리 제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아주 빠르게 말을 했고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기 위해 그녀를 진정시킨 뒤에 천천히 수화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규리는 용주를 흘끗 쳐다보고 나서 역시 수화로 대답했다.
'용주가 지금 알면 안될 것 같아.'
'그니까 뭔데?'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그 말을 끝으로 규리 먼저 방 문 밖으로 나섰고 나도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던 그 때 용주가 나의 양손을 꼭 붙잡고 더이상 떨어지기 싫다고 애원했다. 나는 잠깐동안 갈등을 했지만 곧 뿌리치고 방문을 닫았다. 만약 규리가 하려던 말이 그 녀석과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규리가 아닌 용주의 말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규리는 나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나를 고아원 뒷뜰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주 빠르게 수화를 했고 나는 그 내용에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규리는 이 날 아침에 용주의 양부모가 될 부부가 서로 귓속말을 할 때 그들의 입술 움직임을 읽었고 두 사람이 용주 이전에도 최소 열 명 이상 되는 자녀를 각 나라에서 입양했으며 아이를 입양할 때마다 부부가 일정한 금액의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그런 사실들에 대해 꺼림직했지만 자신의 노파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용주와 같이 있던 시각에 규리는 아무래도 의심을 지울 수 없어 부부를 따라가 두 사람이 내뱉는 말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녀는 무서운 진실을 꺠달았다. 그것은 저 부부가 아이들을 일부러 입양하여 입양 관련 모든 지원비를 착복하고 아이들을 방임하다 못해 학대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규리의 수화가 멈춘 직후에 그만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나의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규리도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한참을 가만히 서있다가 여전히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나를 일으켜세웠다. 그녀의 손은 축축했다.
'이제 어떻게 해, 승연아?'
'일단, 일단 확실히 사실인지 알아보자.'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수화로 대답한 뒤 규리로 내버려둔 채 각종 서류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달려가 부부와 관련된 문서들을 모조리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문서 상으로는 두 사람의 간악한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어느정도의 성과를 올렸다. 가령 나는 고아원 원장님을 포함한 어른들이 이 두사람의 정체를 아직 모른다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었다. 또한 규리의 말대로 아무리 그들이 부자라지만 지난 5년동안 한꺼번에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을 입양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영 수상쩍음을 느꼈고 원장님 외 몇몇 선생님들은 입양비 착복 및 아동학대 사실을 모르기는 해도 너무 많은 아이들을 입양했다는 것에 나처럼 조금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 의심을 굳힐 증거를 찾지 못해 용주의 입양을 막지 않았다는 것도 발견했다.
"빌어먹을......"
내가 잘 쓰지도 않던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 방에서 나왔다. 규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근처 복도를 어슬렁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괜찮냐고 수화로 물어보았다. 나는 그 따뜻함을 더 마주하다가는 정말 무너질 것만 같아서 그녀의 눈을 피한 채 수화를 했다.
'맞는 것 같아. 근데 이거 아는 사람...... 너랑 내가 전부야.'
'선생님들께 알리자. 그럼 돼.'
나는 그저 손을 허공에 둔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분명 우리가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알아차렸던 사실에 귀를 기울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어주는 것과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입양을 막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막말로 열 한 살짜리 고아 둘의 말을 믿겠는가, 약간 수상쩍기는 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는 각종 문서들을 믿겠는가. 특히 한 명은 입양갈 아이의 친언니이고 다른 아이는 독순술을 간신히 배운 청각장애인이라면 아무리 선생님들이라고 해도 우리들의 편을 들어 용주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고민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규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여니. 이다 요주랑 가치 이써.'
'어? 어?'
"아지근 시가니써. 찬차니 생가카자."
나는 일단 규리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녀의 말은 전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답답한 순간에 나의 생각을 정리해주도록 돕고는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대안을 생각해보았자 용주 옆에 있는 것만은 못했다.
나는 미리 숨겨놓은 라면을 양은냄비에 끓인 뒤에 다른 사람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으며 용주를 찾아다녔다. 계속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중에는 양은냄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아마 내가 너무 큰 충격을 받고 그것을 채 추스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리라. 그런데 나의 머릿 속에서 조금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라면을 그 아이한테 쏟으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당연히 아파할 것이다. 그리고 국물이 닿은 자리는 빨갛게 부어오르겠지. 심하면 병원에 입원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용주가 떠날 시기도 늦춰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들이라지만 화상으로 입원한 아이를 강제로 퇴원시켜 데려갈 명분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용주를 입양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아이를 입양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하루 빨리 아이들에게서 뽕을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면 용주 대신 입양간 다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용주는 평생 흉터를 않고 모진 시간을 견뎌야만 하는데 내가 그것을 지켜볼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아무리 용주를 위한다해도 그녀에게 상처를 전혀 입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손이 점점 더 심하게 떨리는 바람에 이제는 뜨거운 라면 국물이 옷에 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용주는 아직도 그 방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의 예상대로 니콜은 여전히 방 안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한 마디 했다.
"그냥 자지 그랬어."
용주는 그저 방긋방긋 웃다가 라면 냄새를 맡았는지 입맛을 다시며 나한테 달려왔다. 나는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용주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자 나는 당황했고 그만 양은 냄비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아이의 비명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용주가 입원한 뒤 고아원이 소란스러워졌다. 부부는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야하기 때문에 용주 대신 다른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수선을 떨었고 고아원 측은 지금 와서 아이를 바꾸면 안그래도 아픈 용주가 또다시 버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부의 태도가 단호해서 선생님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아이의 서류를 훑어보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것을 엿들으면서 나 자신을 자책했다. 내가 일부러 용주를 다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모든 짐을 떠맡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용주를 위해서, 용주 대신 지옥에 갈 뻔한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일하게 나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규리였다. 그녀는 나를 제외하고 모든 사건의 내막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용주 대신 고아원을 떠나는 것을 가장 반대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일을 무를 수도 없고 내가 선택한 것이 용주에게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나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차근차근 설득했고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며 울먹였다.
고아원을 떠나는 날 나는 규리에게 내가 쓴 편지를 용주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편지는 내가 일부러 부잣집에 대신 입양가기 위해 그녀를 다치게 했으며 내가 단 한 번도 용주를 친동생으로 여긴 적이 없다는 점, 복수하고 싶으면 나를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서 찾아오라는 내용 등을 담고 있었다. 쓰는 내내 나의 마음이 쓰라렸지만 사실상 혼자 남겨질 그 아이한테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규리한테 비밀을 보장해달라고도 부탁했다. 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가정에서의 삶은 끔찍했다. 스무 명 이상의 아이들이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 모여 살면서 밤마다 매질을 견뎌야 했다. 우리가 그래도 부잣집에 입양되기는 했구나라고 느꼈을 때에는 집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때나 아주 가끔 밖으로 외출할 때가 전부였다. 굶는 일도 다반사였고 열 세 명의 여자아이들 중에서 나이를 많이 먹은 아이들은 밤마다 남자의 방으로 끌려왔다. 남자아이들은 집안의 잡일들을 담당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몇몇 아이들은 지하실에서 탈출하려고 했지만 매번 끌려와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했고 그 중 상태가 안 좋은 아이들은 한 밤 중에 남자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언급은 금지되었고 그 아이들이 잊혀진다 싶을 때 새로운 아이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나는 정말 무서웠다. 매일매일 고아원 선생님들과 친구들, 내 동생 용주를 그리워했다. 솔직히 후회하기도 했다. 다만 그 후회가 용주 대신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향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리 고아원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결국 가족 없이 혼자 남겨진 아이가 현실의 냉정함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자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걱정이 섞인 후회에 가까웠다. 즉 용주 대신 입양온 것 자체는 후회하지는 않지만 나의 선택이 정말 용주를 위해 최선이였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나의 시궁창 같은 생활은 열 다섯 살이 되던 무렵에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서너명의 아이들은 이 지긋지긋한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어김없이 붙잡혀 고문 수준의 폭력을 당했다. 나는 그 때 묘안을 떠올리고 기절한 척 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숨도 내가 정말 죽기 직전까지 참았다. 그러자 우당탕탕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잠시 멈췄고 그들은 나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나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나를 들쳐업은 뒤 차 트렁크에 실었다. 열흘 간 거의 밥도 못 먹어 앙상해진 몸 상태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얼마쯤 갔을까. 나는 예전에 한국에서 읽었던 책에 쓰여진 방법 대로 차 트렁크를 열고 무작정 길로 뛰어내렸다. 얼마 안가 차가 멈추고 그들이 차에서 내려 나를 쫓아왔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죽을 둥 살 둥 달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도착한 뒤 지나가던 할머니를 붙잡고 사람들이 나를 납치하려 하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할머니는 지팡이를 흔들어 그들이 나를 끌고 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나는 그 와중에도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철옹성 같던 그들은 너무 허무하게 경찰에 잡혀갔다.
그 뒤로 나는 혼자 살았다. 구출된 이후 다른 양부모네 집으로 가기로 되어있었지만 4년동안 학대받으면서 생긴 불신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몰래 시설에서 나와 노숙하면서 한동안 죽지 못해 살다가 싸구려 향수 냄새를 풍기는, 진한 화장을 한 뚱뚱한 백인계 아줌마를 따라갔다. 나는 이 아줌마를 따라가면 무슨 일을 하게 될 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이 처음 양부모와 같은 수준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나 노숙하면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 여겼다.
술집에서는 꽤 오래 있었다. 내가 용주를 만나기 한 삼 년 전까지 계속 사람들을 접대했다. 그 동안 돈도 꽤 많이 모았다. 그러면서 꿈도 생겼다. 어느정도 공부도 마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가게를 차려서 나를 이기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을 용주가 허무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 그리고 병의 진행이 이미 많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모든 꿈이 허망하게 부서졌다.
당연히 술집에서는 쫓겨났다. 많이 모아둔 돈도 미국의 비싼 병원비 앞에서는 택도 없었다. 나는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술과 담배에 쩐 채로 지냈다. 용주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은 여전히 변함없었지만 이 모습으로 그 아이에게 나타나기는 싫었다.
가게에서 나온지 삼년은 족히 지났던 그 날도 나는 어김없이 어제 먹다 남긴 술을 마저 마시고 있었다. 저녁먹을 시간이 되었을까. 나는 현관문 밖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와 고운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세금을 내라고 독촉하러 온 사람인 줄 알고 그냥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지저분한 잠옷 차림 그대로 문을 열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규리였다. 그녀의 얼굴은 어렸을 떄와 전혀 변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만 어딘지 어수룩하고 움츠러들었던 과거와 달리 어른이 된 그녀는 아주 아름답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우리 둘은 현관을 사이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아주...... 아름다운 숙녀가 됐네."
"고마워. 넌...... 어떻게 지내?"
"죽지 못해 살지."
나는 민망함에 약간 삐딱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그녀가 이제 비장애인들과 말로 대화를 능숙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기특함을 느꼈다.
나와 규리는 그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특수 학교의 교사였고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시점부터 나의 행방을 줄곧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나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용주 소식 들었어?"
"그 녀석 잘 지내?"
"응, 정말 멋있게 컸지. 나랑 계속 연락도 하고."
그 말과 함께 규리가 용주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모든 의심이 싹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다행이다. 내가 바라는 대로 이제 당당한 한 사람이 되었구나. 이제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아. 지금까지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이제 후회 없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눌렀다. 만약 용주 걱정에 잠 못들었던 열 한 살의 나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그 소녀를 꼭 안으면서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너의 동생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말하면서 토닥여주고 싶었다.
"용주가 널 만나고 싶어해."
"어?"
"니 동생이, 널, 만나고 싶어한다고."
그래, 맞다. 나는 편지에 나를 이길 정도로 잘 커서 찾아오라고 썼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지금 나에게 복수하려고 안달나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줄 마음의 준비를 진작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형적인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내가 이런 꼴로 나타났다가는 용주는 자기 인생에 대한 허탈함을 넘어 비참함마저 느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고 전해. 대신 부모님 유산 받아 떵떵거리며 잘 사니 너 같은 거 만날 필요 없다고 전해줘."
"승연아!"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냥 너도 한국으로 돌아가. 나 정말 행복해. 다음 날 못일어나도 괜찮아.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 용주가 잔인하고 이기적인 나란 환상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정말 강하고 떳떳하게 사는 거야."
"너가 없으면, 널 못 만나면! 니 바람이 안 이뤄질 거란 거 몰라?"
규리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아주 잠깐 우리 둘 사이에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눈은 붉어진 채 촉촉해졌고 나는 그녀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내가 도와줄게."
이번에는 규리의 말이 집 안의 적막을 깨뜨렸다.
"어떻게?"
"내가 모아둔 돈이 있어. 널 위해서라면, 이 까짓 것 아깝지 않아."
"니 돈 받기......"
"잠자코 받아!"
규리는 지니고 있던 핸드백에서 돈봉투를 꺼내 나의 눈 앞에 던져 놓았다. 나는 바로 집어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얼 빠진 상태로 거실에 서 있다가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목 놓아 울었다. 아마 서너시간은 족히 울었던 것 같다.
어느정도 울음을 그치고 나는 내팽개쳤던 돈 봉투 안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그 안에는 비행기 왕복 티켓과 많은 액수의 달러화가 들어있었다. 나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훔치면서 결심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한국 가자고. 그 다음에 한국 가서 용주의 모든 섭섭한 감정을 받아내고 규리의 돈도 갚은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고.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 날 밤 내내 울다가 다시 웃다가를 반복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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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에필로그입니다.
첫댓글 아끼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악역을 자처하는 일은 쉽지않은 일이죠
불쌍한 승요니
저 때 승연은 아무리 똑부러졌다지만 열 한 살 어린애였다는 거......
슬퍼...... ㅜ ㅜ
제목 냉면은 명카드라이브의 냉면인데 왜 팬픽이 슬프게 쓰여졌는제 ㅋㅋㅋ
@가오니 네.......? 그런.......... 그냥 제목만 따오신.......?ㅋㅋㅋ
@허니스펨 계절 팬픽에서 각각의 제목은 계절노래 제목이지영 ㅋㅋㅋ
봄-벚꽃 엔딩/여름-냉면/가을-가을 편지/겨울-겨울 마법(윈터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