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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비구니 중진 스님 20명은 경기도 용인시 정원사에서 ‘친절한 간화선회’를 열어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왼쪽)의 법문을 9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연속해 들었다. |
발심과 깨달음 둘이 아니야
둘 중 발심이 더 어려워
‘도’ 이루지 못했더라도
다른 이를 제도하라 했다
비구니 중진 스님 20명은 경기도 용인시 정원사(주지 록관스님)에서 ‘친절한 간화선회’를 열고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의 법문을 8일간 들었다. 월암스님의 간화선 법문은 지난 9월9일부터 16일까지 하루 두 차례 2시간씩 진행됐으며, 중간에 실참 문답도 진행됐다. 월암스님의 간화선 법문 중 서두인 ‘발심, 왜 중요한가’(9월9일)와 결론에 해당하는 ‘화두참구,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차례 지면에 싣는다.
발심, 왜 중요한가.
선사들은 왜 신심(信心)을 도의 근원이라고 했는가, 더구나 선사들은 신심을 공덕의 어머니라 말하고, 수행하여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신심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했다.
수행의 근본은 진여(眞如)를 깨닫는 것이며, 그 첫째 믿음의 근본으로 진여를 믿는 것이다. 연수선사는 “스스로의 마음 깨달음이 부처, 마음의 원리대로 유지함이 법, 마음 성품이 화합해 둘이 아니므로 승”이라 말했다. 이를 통해 신심을 정의하면,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 마음이 공적하되 항상 작용함을 믿고, 마음이 다툼이 없어 깨끗함을 믿는 것이 곧 신심이다.
선(禪)에서는 마음이 부처임을 믿는 것을 신심이라 한다. 그래서 조사들은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거나 “사람이 부처(卽人是佛)”라고 말하고,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心外無佛),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佛外無心)’고도 한다.
<관무량수경>에서 “이 마음이 부처이니(是心是佛),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지어라(是心作佛)”고 한 말은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아 끊임없이 마음으로 부처를 수행해(行佛)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화엄경>에서도 “부처와 마음과 중생, 셋은 차별이 없다”라면서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요, 마음이 미혹하면 중생”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이 부처, 사람이 부처라면 이를 깨닫기 위해 적극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 탐진치 삼독으로 오염된 마음이 부처일 수 없고, 번뇌 망념에 싸여 있는 어리석은 중생이 그대로 부처일 수 없기 때문에 수행정진으로 마음을 깨달아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不二)을 증득하는 것이다.
결국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실천행을, 생활 그대로에서 온전히 수행으로 깨어 있도록 하는 삶이 바로 선(禪)이다.
마음이 부처이며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며 수행을 통해 다시 부처를 이루겠다는 결정적 믿음을 갖춘 보살은 마땅히 먼저 발심(發心)을 해야 한다. “마음을 깨닫는 데는 발심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라는 말처럼 수행하여 깨닫기 위해서는 발심이 밑바탕이다.
발심이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줄임말로, 발무상보리심(發無上菩提心)에서의 ‘위없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금강경>에서 수행을 결심한 보살이 무상보리심을 일으켜야 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 깨달음의 마음(無上菩提心)을 수행하고자 처음 진리에 마음을 낸 보살을 ‘초발심보살’ 곧, 새로 진리에 뜻을 낸 보살을 ‘신발의(新發意)보살’이라 부른다.
<대지도론>에서는 ‘만일 처음 발심할 때/ 마땅히 성불하리라고 서원하면/ 이미 세간을 뛰어넘은 것이니/ 응당 세간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했고, <기신론>에서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 증발심(證發心) 등 세 발심(三種發心)을 설하고 있다.
신성취발심은 결정심을 발하는 것이며, 해행발심은 이해와 실천으로 앞으로 나아려는 발심이고, 증발심은 참마음(眞心)을 드러내는 발심이다. 신성취발심은 다시 직심(直心), 심심(深心), 일체 중생 고통을 건지려는 대비심(大悲心)으로 나뉘고, 해행발심에서는 육바라밀의 실천과 회향심을 발할 것, 증발심에서는 법신을 증득하여 진심(眞心, 불심)을 드러낼 것을 제시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상징처럼 통용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도 발심의 전부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승(二乘) 곧 성문승과 연각승인 소승은 보리심을 자신의 깨달음만으로 한정하지만, 대승의 보살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목적이 중생제도 원력이라서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정발심(正發心)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처럼 발보리심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지혜’이며, 동시에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를 말한다.
<무량수경종요>에서는 수사발심(隨事發心)과 순리발심(順理發心)의 두 가지를 말한다. 수사발심은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고, 선법(善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하는 것’이라 했으며, 실천행을 강조한 이는 중생 제도하기를 발원하는 사홍서원의 내용이기도 하다. 천태지자는 <차제법문>을 통해 “보살이 발심하는 상(相)이 바로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며 보리심에 대해 “중도정관(中道正觀)으로서 제법 실상을 보고 일체 중생을 가련히 여기는 대비심을 일으켜서 사홍서원을 세우는 것”이라 말했다.
다음으로 순리발심은 연기공성(緣起空性) 및 무자성(無自性)과 연결된다. 즉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어서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경계’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법을 믿고 이해하여 광대한 마음을 일으킨 바 없이 일으키는 것이 곧 순리발심인 것이다.
결국 순리발심과 수사발심은 이사원융(理事圓融)의 대승보살 실천행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밝힌 것이다. 중도실상의 법을 깨닫기를 강조한 순리발심은 상구보리의 영역에 속하며, 삼신(三身)의 지혜를 깨닫기 위한 보살 실천행인 수사발심은 하화중생의 영역이다.
보살은 응당히 세간의 법이 공함을 깨달아 늘 그 깨달음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중생과 세간을 요익되게 하려는 서원과 자비의 실천 주체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정발심(正發心)을 성취해야 한다. <팔천송반야경> ‘대여품’에는 “내가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나는 세간을 위해 구제자가 되고, 세간을 위해 돌아갈 곳이 되고, 세간을 위해 쉴 집이 되고, 세간을 위해 구경의 길이 되고, 세간을 위해 머무를 섬이 되고, 세간을 위해 길잡이가 되고, 세간을 위해 나아갈 곳이 되리라”고 표현했다.
불퇴전의 발심을 말한 영가선사는 <선종영가집>에서 “삼보의 힘을 입어 지심으로 발원하여 위없는 보리도를 닦되 금생으로부터 정각을 이룰 때까지 중간에 결정코 부지런히 구하고 물러나지 않겠습니다”고 발원했다.
보리의 마음 내기가 어려움을 토로한 <사십이장경>에서는 “부처님 계신 때를 만났더라도 수도하여 깨친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고, 수도하여 깨친 사람들을 만났더라도 믿는 마음을 내기 어렵고, 믿는 마음을 냈다 하더라도 보리의 마음(菩提心)을 내기 어렵고, 보리의 마음을 냈다 하더라도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곳에 나아가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화엄경> ‘초발심공덕품’에서는 “초발심 공덕은 설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 증득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우니라”면서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중도(中道)실천행으로 승화된 진발심(眞發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보살의 중도실천행을 강조한 남종의 신회선사는 “유위를 다함도 없고(不盡有爲), 무위에도 머물지 않는다(無住無爲)”라고 표현하면서 <열반경>을 인용해 “발심과 깨달음은 둘이 아니다. 이 둘 중 발심하기가 더욱 어렵다. 내가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먼저 다른 이를 제도하라. 그러므로 초발심에 경례하는 것이다. 초발심은 이미 인천(人天)의 스승이라 성문과 연각을 뛰어 넘는다”고 했다.
조사어록에서 반복 언급되듯이 “내가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먼저 다른 이를 제도”하는 것이 진정한 보살의 보리심이다. 더구나 처음 발심한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임을 확신하는 발심이기에 <화엄경>에서는 ‘초발심이 바로 바른 깨달음이다(初發心是便正覺)’이라 했다.
연명연수선사는 <화엄경>을 읽다가 “만일 보살이 큰 원력을 내지 않으면 그것은 보살의 마장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감동하여 <대승비지원문(大乘悲智願文)>을 지어 중생들을 대신해 두루 발원했다.
<화엄경>은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가 보리심을 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노래한다. “보리심은 곧 큰 길이니 능히 모든 지혜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곧 맑은 눈이니, 삿되고 바른 이치를 모두 보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곧 밝은 달이니, 모든 거룩하고 청정한 법을 원만케 하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안과 밖이 없기에 중도의 ‘큰 길’이다. 일체 중생이 함께 발심하는 순간 이미 구경각의 문 안에 들어간다. 그런 보리심은 중도의 정안(正眼)이기에 ‘맑은 눈’이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본다. 또 보리심은 실상 반야를 사무쳤기에 ‘밝은 달’이고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법을 두루 비추어 원만케 한다. 또한 보리심은 명경지수(明鏡之水)의 샘물이기에 ‘맑은 물’이라서 번뇌가 본래 없음(本來無一物)을 통달해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다. 마지막으로 보리심은 중생의 복전이기에 ‘좋은 밭’이다. 가지가지 보리수가 자라나 보리의 열매가 가득한 중생의 어머니이기에 ‘부처의 씨앗’이다. 이로부터 제불이 출세해 정토를 장엄한다.
그런 보리심이란 중도정관(中道正觀)으로서 제법의 실상을 깨달아 일체 중생에 대한 대비심을 일으켜 사홍서원을 세우고, 사홍서원으로 선정을 닦아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리심을 낸 발심수행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다. 이렇게 선을 수행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서 일체 중생을 법으로 섬길 때 보리심은 완성되는 것이다.
월암스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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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대 철학과에서 <돈오선연구>로 박사학위. 동국대 선학과에서 강의했다.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하고 부산 미타선원 행복선수행학교 교장, 문경 한산사 창건 후 용성선원장으로 있다. 저서로 <간화정로> <돈오선> <친절한 간화선> 등이 있다.
[불교신문2949호/2013년10월2일자]
첫댓글 동조님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조님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의 귀한법문 감사합니다
좋은날 되세요
동조님 감사합니다 ()
동조님 감사합니다 ()
동조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