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0Bibakst1H0?si=5MuqLbYTfUOosdON
(직전 닷새)
오늘은 2016년 초복이고 660년 소정방이 13만 정예병으로 백제침공을 위해 산동성 등주 지금의 대련항을 출발했던 절기의 무렵이기도 하다
당나라 해군의 주임무는 양자강 중하류 저장성의 항저우에 주력을 두고 남만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김춘추와 나당연합군에 맹약한 당태종과 측천무후가 소정방을 대도독으로 13만 최정예병과 날랜 전함들을 극비리에 대련항에 소집하여 출항한 날이다
앞서 신라로 귀국한 김춘추는 전국에 전통을 내려 총병력의 출병일과 집결지를 각각 하달해 두고 있었다
백제의 서동 무왕의 아들이며 해동증자 의자왕은 신라 낙동강 중상류 서쪽지역 40개 성과 보루들을 함락시켜 신라군을 낙동강 너머로 밀어냈고 서라벌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의 합천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장군 윤충에게 함락당하고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자결하였다
백제는 한강유역 회복 여망을 담은 려제동맹이 깨어지고 당태종에서 측천무후로 권력 이양기에 있던 당과 친선우호를 동맹하여 남쪽에서 고구려를 견제하고 당은 요동에서 대치하였다
낙동강 서쪽 중상류 40개성과 딸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세번 당나라에 건너가 친선과 연합을 제의하여 두번 거절당하고 세번만에 성공했다
당시 동북아 국제정세의 주요상황은 고구려를 백제로 하여금 남쪽에서 견제하려는 당과 한강을 수복하려는 백제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 지금의 한미동맹과 같은 백제와 당의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역사의 굴곡을 거친 현제 그 흔적은 거의 지워져 있다
신라는 삼국중 최 약소국 이었고 당의 고구려 견제 의도에 백제만큼 적합하지 않아 김춘추의 나당 둥맹 제의가 번번히 거절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당연합의 결성은 고구려를 포위 정복하려는 당의 야욕에 동맹관계가 제당연합에서 신라로 바꼈던 숨겨진 환경에서 벌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당의 비겁한 배신은 가려졌다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을 피해 육로를 포기하고 일시를 정해 산동성에 모여든 소정방의 함대가 백마강을 향해 출항하였고 가장 날랜 척후선들이 한반도 해안의 먼바다를 돌아 어선이든 상선이든 눈앞의 목격자들을 깨끗이 제거하면서 기벌포 앞바다에 다다랐다
소리없는 침묵속의 전란이었다
당의 상선을 가장한 소수의 당함선이 군산과 서천 기벌포 양안에 상륙하여 양쪽의 봉수대로 잠입 파수병들을 제거했다
금강 하구 군산쪽 오성산에 올라 보면 정상 봉수대 아래 상인들로 가장했을 당군에게 불의의 기습을 받아 전몰했을 다섯위의 묘소가 있다
나도 오성산에 두 번 올라 각각 한잔술과 담배한대씩을 태워 조상했음에 봉화를 피우지 못하고 당군의 대함대를 맞았음을 알수 있었다
뿐일까 강변의 누군들 당함대가 군산앞바다에 나타난 것을 보았더라도 지금의 미군함대가 부산항에 나타난 것과 같아서 동맹국 함대가 왜 왔는 지 영문을 몰라 당황했을 것이다
백제 중앙정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러 가려는 것인가 왜 온거지 반격을 가 할수도 없었다
해안가의 바다는 파도가 거칠어 육지의 방어가 있었다면 당함대는 먼바다에 머물러. 포진해야 하지만 양안의 봉수대를 선제 타격해놓고 곧장 금강안쪽으로 밀려들었다
지금이야 하구둑과 양안의 하천정비로 인해 드넓은 수면이 펼쳐져 있지만 당시의 백마강은 무성한 갈대가 우거진 갯펄이 펼쳐져 있었고 어느정도 내륙으로 진입한 후로는 양안에서 날리는 화살의 유효사거리 안에 강폭이었을 것이다
백제군의 반격을 우려했다면 강 중심을 따라 일렬종대로 수백척의 함선들이 길게 열을 지어 내륙에 들어가야 하고 전투에 전혀 효과적인 대열이 아니며 양안의 반격을 받으면 뻘밭으로 기어나오지도 못하고 궤멸 될 수 밖에 없었다
당함대가 백마강을 거슬러 삼각뿔처럼 앞머리를 하여 우루로 전격적으로 들이 닥쳤음을 알수 있는 것이 최초의 전투인 부여의 금강 중하류에 있었던 웅진기습이다
웅진나루에는 강력한 백제해군 주력함대가 모두 있었던 곳으로 동북아 준 최강 수군 3만이 주둔했지만 크게 휘도는 강줄기로 인해 인지하는 적으로부터 방어에는 유리해도 느닷없이 나타난 동맹국 대함대에게 속수무책 이었다
백제수군이 전열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강가의 접안에 정박해두고 있는 군선들이 반격해서 싸워야 하는 지 동맹국 군대로서 환영해야 하는 지 싸워볼 준비조차 못해보고 모두 불타버렸기에 이 전투에 치열함을 기술한 기록이나 민담조차 없다
막강 백제해군이 대항조차 못해보고 전멸한 이때에야 피어오른 화염과 봉화가 처음 오르고 기습에 놀란 파발마가 달려 궁성에 변고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웅진을 불태운 당함대는 일부 병력을 상륙시켜 백마강 양안을 확보하며 진군하고 공주를 향해 항진을 계속했다
웅진이 불타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백제군은 공주 사비성과 공산성 아래 주둔하는 소수 해군을 정비하여 도성 연안 상류의 방어에 나섰다
그것만도 황당컨만 동시에 탄현 지금의 천애절벽 대둔산 자락인 영동군에 신라군 5만이 기습하고 있음이 전해졌다
사서에는 신라 정벌군이 당군출항에 맞춰 경주에서 5만 군대가 집결하고 출정했다고 적혀 있지만 턱도 없는 이야기다
서로에게 첩보전이 극심했을 준전시 긴장관계의 극비상황에서 평화롭게 경주에 모여 다 함께 출발한 것 일 수 없다
650년 나당연합군에 합의하였고 660년 백제가 패망하였으니 한 차례 오고가는 것에 6개월~ 1년 아마도 춘추가 3회 도당하여 측천무후의 결단으로 나당동맹 후에도 수시로 사신들이 왕래 백제 기습정벌을 사전조율 하였을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금강으로 둘러쳐진 방어선에 노출되며 도하작전을 하거나 문경세재 또는 덕유산이나 지리산 라인을 넘고 도는 시간을 낭비하며 백제내륙 탁 트인 만경 동진평야로 대군이 진군해 올 이유도 전혀 없었다
신라전국의 각급 부대에 일시를 정해 탄현동쪽 백제성들을 고립시키는 역할을 분담해놓고 아울러 백제인들의 감시를 피해 각각의 성급단위 부대별로 지름길을 달려 전략 최대 요충지인 영동군에 집결하였을 것이다
집결한 오만이 일시에 일당백으로도 막을수 있는 탄현을 넘었을 것이다
전해지길 패륜아 의자왕이 충신 성충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가 나당군의 공격을 받고서 계책을 물어 당군은 기벌포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으며 전국산성에 파발을 뛰어 지방군대가 호응하면 능히 막을수 있다고 말했다 한다
이는 승자가 사후에 비겁하리 만큼 불의의 기습을 가리려고 꾸민 허구이다
성충이 투옥되어 있었는지 알수는 없으나 99점 99퍼 그렇지 않았을 것이고 백제가 여하한 방어수단을 생각해볼 촌각의 여유도 없었던 동맹국 당의 배신과 기습이었다
계백이 처자를 배고 출전했다는 것도 웃기는 소리다
계백은 집에 들러 그리 할 시간조차 없었고 싸우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뒷 일을 도와야 할 인력을 스스로 제거 하다니 가족여부를 떠나 그럴 일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웅진의 해군전력이 모두 불타고 당군이 상륙하여 연안과 강을 따라 진격해오는 상황에서 탄현이 공격받고 있다는 거듭된 비보에 급히 오천결사대를 휘몰아 탄현과 공주의 딱 중간인 금산군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대치했다
계백의 일가는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에게 지독히 당한 신라군들이 멸족한 것이고 장군을 따라 담담히 맞았을 뿐이었다
백제군이 당함대의 기습을 알았고 적으로 인식했다면 군산과 서천 사이의 백마강 입구에서 강력한 수군으로 어린진과 학익진을 번갈아 펴고 당군의 진입을 막아 군선을 양안에 늘어 배치하고 여름철 푸르게 우거진 갈대밭에 육군 궁수들의 지원을 받으면 접근불가였다
설혹 늦게라도 기습을 알기만 했더라도 웅진의 수군이 당함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양안에 발빠른 기병대를 풀어 당함대의 행로를 쫒아 함께 움직이며 반격만 했어도 당의 함대는 강의 중심부로 쫒겨 대열이 길어지고 백제수군에 쌈싸먹히게 되었을 것이다
당군들이 상륙전을 치르고자 해도 수심이 앝은 뻘밭과 갈대숲을 해치고 상륙하는 것은 불가능 하였으며 양쪽에서 매복한 백제육군의 쏟아지는 화살비에 궤멸되거나 도륙이 나서 백마강 잉어와 메기들을 살찌웠을 것이다
당군이 백제의 대항으로 금강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먼바다에 대치하고 있었다 가정한다면 백제는 수군이 강력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 해상전의 전면승부를 단정할수 없어도 육지의 지원을 받으며 백마강 입구를 방어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패할수 없었다
동맹을 배신한 당군이 애초부터 백제의 초기반격을 배제하고 신속한 항해에 필요한 군량만 실어 최대한 날렵하게 달려왔으므로 당함대가 금강진입에 실패했다면 서해안을 따라 망루와 산성들이 도처에 잘 자리잡고 있어 뻘밭을 통한 해변 상륙도 불가능하였고 영산강이나 섬진강까지 돌 군량이나 여력이 없었던 데다가 백제 내륙의 군대에 방비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서해의 밀물은 수심이 얕은 연안에 가까워지면서 풍랑과 파도가 거세게 일고 물이 뒤집혀 흙탕이 일어나는 정도여서 밀물에 해안가에 접근한다면 함선을 제어 할수없어 해안절벽과 수많은 암초들에 모조리 박살 날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썰물에 수십리 펄밭과 수렁창 급류들을 말과 갑옷입은 병사들이 기어나올수도 없으며 상륙해본다 한 들 진흙범벅 당군들은 산성들에서 달려나와 해안선을 장악하고 있는 날랜 백제의 기병과 군사들에게 헛된 재물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당연합군의 백제공격은 공산성 앞에 당군이 나타나고 영동군에서 오른 봉화와 탄현을 넘어버린 신라군을 황산벌에서 맞닥뜨리고서야 알게 된 철두철미한 기습전 이었다
백제의 중앙군은 강력한 수군이 삼만이었으나 웅진에서 싸워보지도 못한채 초토화 되버렸음으로 낙화암 슬픈 꽃비를 나리게 했고 사비성을 보호하는 소규모 수군만이 당함대를 대적하고 있었다
육군은 2만에서 계백의 결사대가 전멸하여 1만 오천이 남았다가 지방의 산성군이 응전해 올 시간을 벌고자 평지성인 사비 부소성에서 나당군 상대하기를 포기하고 남은 수군과 육군을 수습하여 태자 융과 함께 삼면을 높은 산성으로 둘러 쌓은 공산성으로 옮겨 격렬히 항전하였다
이때 주요 육방중 하나였던 성주 예식진의 공산성 병력과 의자왕이 수습해 온 백제군은 합 삼만오천 가량이었다
비로서 백제의 지방 산성들도 대란에 맞서고자 긴급히 구원부대 출정을 준비하였지만 산성간 소통과 체계적 작전수립. 및 이행에는 어려움이 컷다
당시 백제의 지방 산성부대는 약 칠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긴급한 청장년 동원시 수만 이상의 신병을 추가로 조달하여 산성의 자체방어에 기여할수 있는 정도였다
공산성에서 삼만여 백제군이 18만 나당군에 응전하며 지방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나흘간 치열한 접전이 있었고 성공적으로 방어해내고 있었다
남부지역 지방군까지 모두 도착하여 전열을 정비하기에는 적어도 보름 이상 한달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겠지만 공산성에서 멀지 않은 지방군들은 각성에 연통을 띄우며 출정을 시작하였고 나당군의 배후를 치고 교란하는 백제군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불의의 기습을 성공하여 물고기밥을 면한 소정방이 백제의 지방군에게 배후를 공격당하고 장기전이 될 경우 승전을 장담할수 없을 것을 우려하여 공산성 성주 예식진에게 웅진도독의 영화를 약속하고 투항을 권유하였다
당에서 건너와 무왕을 도와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출세한 자라는 설이 있는 예식진은 지방군의 당도를 기다리기 보다는 의자왕을 대신하는 웅진도독을 선택하여 태자융을 구금하고 왕에게 항복을 회유 강압하였다
의자왕은 저항하고 발악하여 손목을 그었으나 예식진 무리들에게 포박당하여 자살에 이르지 못했고 소정방 앞으로 끌려가 당으로 압송되었다
변절자 예식전의 비문과 기록은 근래에야 중국 시안에서 발견 되어 알려진 바 이다
내가 기벌포와 오성산 서천 봉수대 소정방 루트를 따라 다니며 깨우칠수 있었던 것은 동맹국 백제를 배반한 당나라의 저열하고 철저한 기습공격에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백제는 당나라의 13만 병력과 신라군 5오만의 공격을 받았더라도 쉽사리 망 할 나라가 아니었다
금강 입구에서 막거나 금강양안을 따라서 병력을 배치하고 방어할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중앙군 5만으로 당군 13만을 막아낼수 있었고 소정방은 물고기밥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컷다
계백의 결사대가 대둔산 능선에 신라군이 넘기 전 도착할수만 있었다면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혔을 것이고 방방곡곡의 산성군들이 전투에 참여 할수 있어 신라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을수 있었다
백제의 군사력이 신라보다 훬씬 강했던 시기이다
만사에 때가 늦어 예식진이 변절하지 않았고 지방의 산성군이 공산성 전투에 도착하였더라면 소정방이 정림사 석탑에 자신이 정벌하고 불태웠다 낙서를 해놓지 못했을 것이다
가정을 제쳐두면 결국 백제는 동맹을 배반한 나당군의 철저한 속임과 기습공격에 멸망했고 철통같은 요동방어선을 회피한 진군루트가 짧은 남쪽으로도 북쪽에서도 동시의 포위공격을 당하게 된 평양성이 무너지며 고구려도 멸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대둔산 몇 번을 오르고도 사진이 한장도 남아 있지 않다
승자가 써주는 사서로는 후세인이 당대의 실제를 알기 어렵지만 천년의 풍상을 맞으며 산이 거기에 있고 강은 묵묵히 흐르고 있기에 세월의 그림자를 엿볼수 있다
산줄기 물줄기 소정방루트를 따라 고적을 밟으며 그때로 시간적 배경을 바꾸면 당시의 하나하나를 알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젊은시절 해동증자 라는 칭송을 들었던 의자왕이 음란폭군이 되어 삼천궁녀를 거느렸고 최후의 날 낙화암에 하얀 꽃비처럼 흩날렸다
전해지는 이 한귀절의 말을 풀어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국제관계와 백제왕실 및 사회상 그리고 나라의 존폐를 건 전투에 대한 숨겨진 비밀들이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말로하면 간단할 것인데 글로 쓰자면 한권책의 장광설이 되어버리니 다시 축약하여 삼천궁녀는 터무니 없고 어불성설이다
부소산성의 엄호아래 펼쳐진 지형지물에 비추어 사비궁성의 규모를 발굴 또는 추정할수 있고 용도를 분할하여 상상하면 대략 450인 정도의 궁녀가 있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당시의 전쟁에 군졸의 강제동원도 있었지만 대게는 때 되고 기회되면 전리품을 얻기 위해 자발적 참전으로써 선봉에 서기를 바랐고 철저히 능력과 성과주의여서 성벽을 먼저 넘어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였다
다른 병사들보다 먼저 성벽을 넘고 궁실과 고관대작들의 사택을 털어야 좋은 재화를 얻을수 있었으므로 목숨을 초개처럼 나아갔고 그 무엇보다 일생에 꿈조차 꾸기 어려운 하얗고 분냄새 좋은 귀부인들을 품을수 있다는 그것이
날카로운 화살비와 쏟아지는 돌덩이 끓는 기름불을 뚤고 성벽을 기어 오르게 하는 용맹의 원천이었다
3천 궁녀란 눈앞에 닥친 아비지옥을 피해 너나없이 얼굴에 치마를 둘러쓰고 궁녀와 귀부인과 처자들 3천이 꽃비되어 나린 그날의 시리디 시린 전경이다
잘 정비된 국가의식과 절개가 아니면 있을수 없는 일이었고 그 정기를 누르고 비꼬는 전언임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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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이 새긴 글귀를 찾는중
첫댓글 이렇게 웅장한 음악으로 듣기만 하는게 아니라 산토리니에 가보고 싶은 설레임을 갖게하네요
장쾌하조 우리 음악에는 수수하지만 여운이 있는 바위섬 어부의 노래 이어도 사나 사량도(위변조 됨) 있는데 세계 도처의 해안도서에 비슷한 노래와 전설이 전해지는 이유가 있답니다
라는 주세로 길고 긴 글을 써본적이 있었답니다 꼭 가보시게 되길 바라구요 정림사탑 동영상에도 저가 즐겨 부르는 배경음악 있고... 유쾌주말 되시게요~
이건 뭐 잉크값도 안나오넼
잉크값도 안나온다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