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제1독서 : 사도 1,15-17.20-26
복 음 : 요한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뇌세포가 줄어들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최근의 뇌과학에 의하면 이 통설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경세포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언제 어디서든 신경세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고,
기억을 조절하는 부위인 해마(새로운 기억을 잠시 저장할 뿐)의 신경세포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신경세포 증식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꾸준한 학습으로 뇌를 자극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피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대인 관계에 우위를 가질수록 신경세포 증식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대인 관계에서 우위를 가지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세포 증식력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 전혀 없는 삶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해마의 신경세포가 활발해집니다.
자기 뇌 건강을 위해서도 누군가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는 신경 쓰고 굽실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상대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는 ‘나’가 아닌, 고유한 ‘나’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고유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 역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존재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건강한 나를, 계속 성장하는 나를, 지금을 기쁘게 사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나 역시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절대로 흔들리지도 또 과대한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런 사랑을 받기 위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또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나,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줄여나가고, 대신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하면 헛 고생
반영억 라파엘 신부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 서로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제자임을 자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4-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였듯이, 친교의 ‘깊은 관계’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으로 맺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의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는 동시에, 우리를 깊은 친교를 이끕니다.
곧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는 우리들의 서로의 관계를 ‘거룩한 관계’로 이끌어 갑니다.
곧 영의 열매를 ‘우리들 안에서’ 맺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사랑’은 친교의 영이 맺는 열매입니다.
(갈라 5,22-23,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라는 열매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1코린 13,8.13.). 그러니 사랑하면서 죽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곧 ‘스스로 접어버리지 않는 한’,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이 영원한 까닭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우리가 사랑할 때 신비롭게 당신과의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친구라는 은총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이토록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은 경쟁자이이거나 적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헐뜯고 비난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서라도 위해 주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모습을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것은 바로,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날 성가대 회식이 있어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오면서 놓고 온 것 같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제님의 차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성당 집무실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집에 없으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탁자 위에 안경을 놓았는데 없었습니다.
냉장고도 열어보고, 싱크대에도 가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분의 안경을 쓰고 산보를 다녀온 후에 다시 찾아보니 안경이 소파 위에 얌전히 있었습니다.
소파 위에 있는 안경을 차에서 찾으면, 회식 장소에서 찾으면, 집무실에 찾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깜빡깜빡하는 것은 신호등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전을 되찾으면 여인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양을 되찾으면 목자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잃어버린 안경을 찾으니 예수님 말씀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예전에 읽었던 ‘어느 환자의 기도’를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예전에 박도식 신부님께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 주는 이정표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를 하였고, 마티아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 할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면
마티아 사도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공석이 된 사도 한 명을 선발하는 과정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필기시험이나 심층 면접, 자기소개서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생뚱맞게도 제비 뽑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제비뽑기’, 요즘 들어 잘 사용하지 않기에 약간 생소한 단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추첨’입니다.
미리 정해 놓은 글자나 기호를 종이에 적어 놓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잡게 하여
승부, 차례 또는 경품 탈 사람 등을 가리는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스릴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사도를 뽑는 중요한 일을 두고 제비뽑기란 방법을 택한 것이 꽤 의아해 보입니다.
사도의 발탁이란 이 중대한 일을 위해 저 같았으면
먼저 후보자들에 대한 엄밀한 사전 조사를 할 것입니다. 철저한 후보 검증 작업을 거칠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조용히 물밑 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제비뽑기를 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추천을 통한 인선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의치않다면 투표를 통한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를 뽑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란 중요한 인물을 뽑는데 제비뽑기는 너무나 안 어울리는 방법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더군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후 사도들의 생각은 이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물’이 한층 빠졌습니다.
사도란 직책이 세속의 직책과는 철저하게 다른 봉사직이요 희생하는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요,
철저하게도 하느님의 사람, 참 신앙인이 수행해야할 역할이
사도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 베드로의 배반 사건, 총무였던 유다의 배신과 죽음 앞에
사도들은 기가 완전히 한풀 꺾였습니다.
자신들의 나약함,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함을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주 겸손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해서 예수님 중심적 삶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힘과 능력, 판단력을 과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우기보다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사도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층 겸손해지고, 한층 주님께 대한 신뢰심이 커진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변화가 유다 자리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저희는 사도단 결원의 보충이라는 이 중대한 결정을 저희가 내리지 않겠습니다
. 저희가 뽑지 않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뽑아주십시오.”
그런 기도 끝에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실시한 것입니다.
사도단 결원 보충을 위한 사도들의 제비뽑기,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매사에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의도대로가 아니라 주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절)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 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며 모두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선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 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린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