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사도 20,28-38
복 음 : 요한 17,11ㄷ-19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리체 수녀
예수님의 ‘고별담화’는 이제 남겨진 이들을 위한 ‘고별 기도’로 이어집니다.
늘 함께였지만,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게 될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드리신 ‘마지막 기도’가 오늘 복음의 내용이고,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한 ‘마지막 담화’가 독서의 내용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 만큼의 비장함과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와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이 주제들은 그리스 말 본문에 모두 명령형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보호).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성화)
‘보호’를 청하는 기도에는,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 분열에서 보호하는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지켜 주십시오.’라는 표현과 함께 “이들도 ... ... 하나되게 해 주십시오.”
곧 ‘일치’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하고 권고한 뒤,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임을
경고합니다. 내부의 분열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성화’는 하느님께만 속한 존재로 축성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곧 어떤 존재를 거룩하신 하느님과 같은 속성으로 만들어,
그분께 온전히 속하고 장애 없이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복음은 이 성화가 ‘진리이신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곧 우리를 성화시키는 진정한 도구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지막 당부를 우리 삶 안에 구현할 때,
비록 그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존재는 우리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내부의 분열에서 공동체를 보호할 때, 말씀을 통하여 거룩함에 가까이 갈 때,
이를 당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실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0년 연속 ** 브랜드 대상 수상. 피부 장벽과 뼈 기능, 면역력 강화를 한 번에….
특허 출원, FDA(미국 식품 의약국) 등록 완료.”
이런 건강식품 광고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과대광고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브랜드 대상은 주관사에 돈만 주면 받을 수 있습니다.
특허 출원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특허받기 위해 심사를 요청했다는 것뿐입니다.
FDA 등록 역시 수출을 위해 업체 정보를 FDA에 제출한 것이지,
FDA가 효능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과대광고에 주의해야 한다고 언론에서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광고는 정말로 많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 역시 그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한 과대광고를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자기에 대해 과대광고를 하는 사람 곁에는
필요에 의해 아첨하는 사람만이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이런 사람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곤하고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더 높이려는 사람, 남의 좋은 점을 바라보면서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곁에 많은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십니다.
누군가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가능합니다.
내가 더 윗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내 뜻만을 주장하는 가운데에서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마치 종 부리듯이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계속해서 청원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진리로 거룩해져야만 가능합니다.
거룩해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기쁨을 내적으로 충만함을 누리면서
그들을 미워할 세상에서도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거룩함은 교만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겸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양보할 수는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천국을 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말하는 것같이 쉬운지 아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신부님은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시는데 하늘을 보니 제가 땅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땅에 있으니, 땅의 처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먹고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래도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면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한1,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지금 당장 힘에 겹더라도 반드시 빛의 진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3,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진리인(요한14,6)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2,15).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2,3-4).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진리를 거슬러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믿는 이들이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내가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을 살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탓합니다.
믿는 이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요, 교만입니다.
못마땅한 것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지 못했음을 탓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혹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거룩함에 온전히 맡겨드려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악에서 지켜 주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로 요약됩니다.
그 기도가 내 안에서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한 이들임을 재확인하면서,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켜주시고 그들이 하나 되고 거룩해지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6절)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26절)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느님보다 그분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실체에 관한 모든 것,
곧 그분의 존재와 본성, 그분의 거룩함과 정의와 사랑, 그분의 능력과 보호와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한 가장 처음 언급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에서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곧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창세 4,26)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바칠 때도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하신 분께 기도를 바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요한 17,11.12), 곧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공적 소명을 끝내시면서,
그 소명을 이어가게 될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일치에 ‘하나’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보호받고, 아버지와 당신의 하나 됨을 체험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하나 됨’은 그리스도란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사도 4,32)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말씀’,
곧 ‘진리’를 주셨고, 성령으로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지만(아우구스티누스),
세상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말씀’을 행 함으로서 우리 안에 ‘거룩함’이 더욱 자라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
주님!
깨끗하기보다 진실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기보다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단지 함께 있기보다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사랑하되 행동하게 하소서.
또한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제 안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요즘 ‘시간에 묻힌 한 사제의 삶’을 읽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혼자서 미국 횡단을 3번이나 하셨습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유람선 사목을 하셨습니다. 1937년에 태어났으니 87세의 고령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수녀원이나, 양로원에서 청하면 기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신부님께서 1959년에 세례를 받을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 4가지를 질문하였고,
본인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세례를 받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노력했는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세례를 받기 전에 거의 3년이나 성당에 다니면서
배우고 체험하여 마음 깊은 데까지 나름대로 신앙에 젖었기에
앞으로 때에 따라 가톨릭 신앙을 저버리거나 냉담하지 않을 것 같다.
설령 이 신앙에 회의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 질문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보람을 변함없이 느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난생처음 가톨릭 신앙을 접한 순간에 받은 첫인상이 워낙 강했다.
마치 순간적으로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그간의 내 삶을 통해서는 도저히 체험하지 못하였던 기쁨에 휩싸였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늦게나마 가톨릭 신앙을 알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세 번째 질문은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세례성사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예”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네 번째 질문은 ‘세례받을 사람에게 본당 신부님이 요구하는 교리문답 325개를 완전히 암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교리문답 325개 항의 문제와 답을 한 자도 어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고, 많은 분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사람과 이유가 있어서 세례를 받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후에도 신앙의 깊이와 맛에 젖어 들었습니다.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세례를 받은 후에 신앙이 점차 퇴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갈망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기도로 자라납니다.
신앙은 말씀으로 꽃이 핍니다. 신앙은 나눔으로 열매 맺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갈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지금 죽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제자들에게 닥쳐올 박해와 시련을 예견하셨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도 예견하셨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조직화 되면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예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두 가지 청원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셨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청하셨습니다. 그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과 아픔을 만나게 됩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듯이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기쁨도 찾아오고, 슬픔도 찾아오고, 즐거움과 분노도 찾아옵니다.
모든 갈등과 아픔을 벗어나서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과 아픔을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갈망’입니다.
마지막 바라는 것이 있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가 정한 오늘의 주제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유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유언이고,
복음은 주님의 유언이자 기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를 떠나며 원로들에게
유언으로 몇 가지를 신신당부하는데 명심하고 명심하라고 합니다.
“내가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있으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심하라는 두 말씀을 놓고 볼 때
앞의 명심하라는 말보다 뒤의 명심하라는 말이 더 낫지요.
앞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한 말을 명심하라고 하고,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보면 겸손을 떨지 않고 자기 말을 듣고 자기처럼 하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함이 당연히 더 낫겠지요.
그리고 주님 말씀을 명심하라고 직접 신신당부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내가 할 바와 할 말을 다 하고 난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곧 하느님께 나머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맡김, 의탁.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고 가난이고 사랑입니다.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고 그래서 잘 되기를 아무리 바라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당부까지입니다.
그다음은 내 역할을 내려놓고 퇴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의탁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내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이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사랑해주실 거라는 믿음의 의탁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녀를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는 표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까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처럼 청원과 의탁의 기도는 하는 겁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하지만 떠나야 할 때가 오는데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당부, 의탁, 기도임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박재천 안셀모 신부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로 떠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당신 떠나신 것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이제는 성령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너머,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셨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하나 되기 위해 때로는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시련을 함께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자아의 버림과 떠남을 통해
더 큰 기쁨과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말 나는 믿을 수 없어.
사랑한다면 왜 헤어져야 해.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 ”♩♬♫♫
오늘 제가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떠난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같이 있어야지, 왜 떠난다고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먼저
“집착과 사랑의 차이”라는 글을 소개하며 강론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집착은 “왜”라는 말이 필요하고. 사랑은 “왜”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
집착은 아낄 줄 아는 것이지만, 사랑은 아까움을 모르는 것이다.
집착은 희생할 줄 모르고, 사랑은 희생할 줄 알며,
집착은 계산된 행동이지만, 사랑은 끝없는 자기 희생이다.
집착은 기다림이 곧 고통이지만, 사랑은 기다림이 곧 행복이다.
집착은 그 사람의 화려함에서 오지만, 사랑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온다.
(출처: 인터넷에서 떠도는 자료인데, 아무리 찾아도 그 근원지를 알 수 없네요. ㅠㅠ)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리고 참된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이것이 참,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점점 더 소유하고 싶고, 다른 이들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워지기도 하고,
더 많이 사랑해서 사로잡고 싶어지는 마음이 커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자우롭게 하고 그의 고독을 존중해 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인데,
사랑이 집착이 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구속이 되고,
결국은 서로를 익사시킬 정도로 숨 막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기에 “왜”보다는 “예”하고,
모든 것을 내어주며 자신을 희생하고 기쁘게 기다려 주며,
그 마음을 헤아려 주는 그런 분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반면, 집착은 늘 곁에 두고 자기만을 바라보기를 강요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하기를 요구하며,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교묘한 방식으로 상대를 구속하기에 둘이 하나가 될 수 없게 만듭니다.
좋은 척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집착을 너머 더 큰 사랑과 진리를 깨달으라.“고
가르쳐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아버지께로 떠나가십니다.
그런데 당신이 떠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기쁨일텐데,
제자들과 싸우기라도 한 듯이 당신이 떠나는 것이 기쁨이라고 하시니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고,
아버지 계신 곳으로 제자들을 데려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이 가득한 세상으로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의 미움을 받고 죽었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파견되어 세상의 미움을 받고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요,
이것이 바로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지어 이 지상에 예수님을 붙들어 놓고 싶은 집착을 버리고 더 큰 사랑을 위해 떠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제자들인 우리 역시 자유로워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협조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더큰 사랑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더 큰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잘못에, 심지어 우리의 배반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것을 통해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너가 나를 아프게 한 말이나 행동에 집착하기보다는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나만을 사랑하기를 강요하던 나의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 그분의 더 큰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너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제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하나도 잃지 않을 것(요한 6,39 참조)이라고 하셨다.
잊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분이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12절) 하신다.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이 기쁨은 바로 일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그들이 참으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기쁨은 충만해지고 이것이 장차 올 세상의 평화와 행복이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현세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충실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를 미워한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15절)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18절)
예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은 기쁜 소식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바로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드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제물로 바치셨듯이 제자들도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19절) 라는 기도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도록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질 것이다.
진리는 한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육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거룩해지는 동시에
당신의 신성으로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